1. 예레미아의 소명

-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
(렘 1:4~10)

[활천 2001년 1월]

 

 

예레미야 1:4-10은 예레미야(주전 627-585년경)의 소명에 관한 본문이다. 예언자의 소명본문은 2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대화형식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부름 받은 자와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하여 소명이 이루어진다. 대화형식은 다음의 4가지 구성요소로 형성되어 있다: ①하나님의 부름, ②부름 받은 자의 거절, ③하나님의 설득, ④하나님의 약속. 모세(출 3-4장), 기드온(삿 6장), 사울(삼상 9-10장) 그리고 예레미야의 소명이 이러한 형식에 속한다. 둘째는 천상회의 환상형식이다. 이것은 부름 받은 자가 환상 중에 목격한 천상의 회의를 통하여 소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이사야(사 6장)와 에스겔(겔 1-3장)의 소명이다. 전자인 대화형식이 강압적인 소명이라면 후자인 천상회의 환상형식은 자발적인 소명이다. 다시 말해 전자를 차출병(差出兵)이라 한다면 후자는 지원병(志願兵)이라 할 수도 있다.

말씀사건양식: “야웨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4절)

예레미야의 소명보도는 “야웨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는 말씀사건양식(Wortereignisformel)으로 시작된다. 한 인간의 전 생애를 결정짓는 사건의 도입이 눈에 띌 정도로 너무나 간단하다. 선배 예언자인 이사야(주전 740-701년)는 그의 소명체험에서 스랍들에게 둘러싸여 높이 들린 야웨의 보좌를 본다(사 6:1-2). 후배 예언자인 에스겔(주전 593-571년)은 불이 번쩍번쩍하고 광채를 발하는 신기한 사건을 목도하고 결국 “야웨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본다(겔 1장). 반면에 예레미야의 소명체험은 “야웨께서 그 손을 내밀어 그의 입에 대신 사건”(9절) 이외에는 별다른 신비한 것이 없다. 그의 소명에는 이사야와 에스겔 예언자와 같은 특별한 체험이 없다. 단지 야웨의 말씀이 임한 것뿐이다. 계시의 종류와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예레미야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형식”이 아니라 “만남 사건 자체와 그에게 주어진 말씀의 내용”이었다. 야웨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이다. 예언자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하나님의 부름: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절)

1) “안다”와 “구별하다”

하나님은 그를 복중에 짓기도 전에 그를 알았고 그가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그를 구별하였다. 여기서 “안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히 지적인 앎을 넘어서 상대의 생각, 의도 그리고 감정적 차원 즉 총체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앎을 뜻한다. 또한 여기에서 “내가 너를 알았다”는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암 3:2)라는 뜻을 가진다. 다음에 나오는 “구별하다”(카다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인데, 이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품성 또는 자질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상적인 쓰임새에서 벗어나서 특별히 취급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 따로 떼어놓았음을 의미하는 종교적인 개념이다.

예레미야는 특별한 존재로 선택된 것이다. 이러한 일이 “태어나기 전”에 결정되었다는 것은 “직무의 불가피성”을 표현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출생부터 세상의 관계에 얽혀 있는 자연인이 아니고 그곳에서 벗어나 일평생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삶의 의미를 갖는 신앙인이요 하나님이 주신 삶의 과제로 항상 씨름하는 사명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열방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는다. “열방”(고임)이란 “민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어는 주로 이방 민족들을 뜻하지만 때로는 유다 백성을 가리키기도 한다(출 19:6). 따라서 열방이란 유다를 포함한 이방 민족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예레미야의 특별한 사명은 유다를 포함한 이방 나라 전체를 위한 것이며 오직 유다만을 위한 사명은 아니었다. 그는 맹목적인 국수주의자들이나 편협한 민족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했다. 야웨 하나님의 주권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사역 범위도 한계가 있을 수 없다. 야웨 하나님이 전세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은 당연히 전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고 전해야 한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사명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명은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임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름받은 자의 거절: “슬프도소이다”(6절)

예레미야의 탄성(“슬프도소이다”: 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로는 “아!”라는 외침)은 그가 공포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잘 드러낸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거절의 근거로 그가 처한 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러한 이의는 “절대로 못합니다”(Absolutes Nein)가 아니라 “아직은 아닙니다”(Noch Nicht)라는 뜻이다. 또한 “아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나아르)의 의미를 정확하게 한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보통 “소년”이나 “청년”을 가리키는 말이다(참조. 삿 8:14). 청소년기는 경험이 부족하고 성숙하지 못한 상태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백성들을 설득할 만한 언변이 부족하다(참조. 왕상 3:7; 출 4:10; 6:12, 30). 사실 백성 전체를 향하여 발언할 만한 능력도 없을 뿐더러 기회도 주어질 수 없으며 그만한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의 부재로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즉 “자격미달”과 “임무의 불가능성”이 그가 제시한 거절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이러한 이의에 대하여 즉시로 반박한다(7절). 첫째, 여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부르신 자의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인간의 부적격성과 무경험은 하나님의 가능성이 발휘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부름 받은 자가 스스로 부족하고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할 때가 바로 하나님이 쓰시기에 적기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삿 6:15[기드온]; 삼상 9:21[사울]). 자신의 능력과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일은 맡기신 이의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인간적인 자격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설득: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7절)

하나님의 설득은 예레미야의 이의를 물리치면서 시작된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일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에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청중을 설득시키라고 요구하지 않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언자란 말씀의 심부름꾼으로서 “보냄을 받은 장소”에서 “주어진 말씀만 전달”하면 된다. 전달자의 책임은 그가 전한 메시지에 대한 청중의 수용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겔 2:7). 다만 그가 받은 메시지를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전달하였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설교자가 정녕 의식해야 하는 것은 회중의 숫자나 그들의 반응보다는 오히려 매순간 메시지의 오차를 계산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어야 하지 아닐까.

하나님의 약속: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8절)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들로 인하여 두려워 말라”고 권면하신다. 여기에 그가 감당해야 할 임무가 심각한 적대감을 유발시킬 것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들”이란 아마도 18절에서 언급된 “온 땅과 유다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백성[지방 유지들]”일 것이다. 예레미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의 적이 된다. 이는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다. 이는 예레미야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기 전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따라서 고난과 위협 그리고 박해가 배제되지 않는다. 이는 십자가를 피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구원하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자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고난과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회피할 수 없는 신앙인의 현실이라면 맥아더 원수의 다음과 같은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에게/평탄한 길을 주지 마소서/쉬운 길을 걷지 못하게 하소서/역경과 환난을 주소서/그리고 그 속에서 내 아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소서/그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소서.”

성직 수여식: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절)

하나님은 그 손을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고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행위는 구약성서에서 더 이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으로 일종의 “상징행위”에 해당된다. 신적인 영역과 인간의 영역 간에 접촉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써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입이 된다: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렘 15:19). 메신저로서의 전권을 위임받는 예레미야의 성직수여식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메신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대변하는 사람이다(참조. 마 10:19-20).

선포내용: “뽑으며 건설하며”(10절)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운다. 여기서 “세우다”(파카드)라는 동사는 “대리인/감독자로서 일을 맡기다”라는 뜻이다(참조. 창 39:4). 예레미야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이제 그의 말은 인간의 말같이 효과 없이 허공을 울리는 소리나 덧없이 사라지는 연기가 아니라 강력하게 효력을 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전하는 선포내용은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심판에 해당되는 말씀이 네 가지이고 구원에 관한 것은 두 가지이다. 이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앞으로 선포해야 할 선포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그는 주로 심판을 선포하여야 한다. 둘째, 그러나 심판선포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그는 구원도 전해야 한다. 셋째, 그런데 그 구원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난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먼저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영점상황(Nullpunktsituation)에서 시작된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절대적인 무로부터(ex nihilo)의 하나님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예언자적 선포란 모름지기 현실에 대하여 먼저는 비판적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미완성이다. 청중의 기대를 뛰어넘는 희망도 포함한다. 예언자는 맹목적인 낙관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절망적인 비관론에 포로 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한다. 예언자는 그 시대가 보지 못하는 앞선 시대를 먼저 깨닫고 내일의 눈으로 오늘을 해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