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있을 수 없는 배신

-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렘 2:1-14)


[활천 2001년 2월]

 

 

1. 광야 시절의 허니문: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기억하노라”(렘 2:2)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을 회고한다. 그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좋았다: “네 소년의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해 기억하노라”(2절).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출애굽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또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음으로 이스라엘은 야웨의 백성이 되고 야웨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이 확증되었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시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어린 시절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이스라엘은 청순한 새색시처럼 순수한 사랑으로 오직 야웨만을 따랐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그 무엇이 끼여들 틈이 없을 정도로 오직 하나님만 아는 밀착된 사랑의 관계였다(참조. 호 2:15). 즉 광야 시절은 첫사랑을 나누던 허니문의 시기였다.

그러나 광야가 허니문의 장소라고 해서 모든 조건이 완비된 이상적인 곳은 아니었다. 그곳은 씨 뿌리지 못하는 땅이었고,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이어서 사람이 다니지 않고 거주하지 않는 땅이었다(6절). 그런 척박한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완벽한 조화의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2절 본문은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점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역사하였다는 점도 드러낸다. 먹고 마실 것이 제대로 없고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그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하나님은 크신 은혜로 그들을 돌보아주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최악의 형편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향하는 통로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참 신앙인이라면 고난 이후가 아니라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2. “헛것”을 쫓다 “헛것”이 되다: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렘 2:4)

예레미야는 2절에서 예루살렘 사람에게 외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을 향하여 말하고 있다. 야곱은 12지파들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야곱과 이스라엘”의 언급은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당시대의 유다와 예루살렘(2절)뿐 아니라 이미 망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다. 예언자의 메시지는 과거와 현재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하나님은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하며 책망조로 질문하신다. 여기서 조상은 이 전 세대들을 대표하는 말이다. “헛된 것”이란 히브리어는 전도서에서 많이 쓰인 “헤벨”이라는 단어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이 단어는 “허무, 바람, 무의미”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이 단어가 여기서는 전치사 “하”를 동반하고 있다. 즉 히브리어로는 “하헤벨”이다. “헤벨”이라는 명사는 가나안 종교의 주신(主神)인 “바알”과 비슷한 발음을 갖고 있다. 사실 이는 바알을 가리키는 말로 바알을 얕보는 표현이다. 즉 바알은 허무하고, 바람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알(헛된 것)을 쫓다가 결국 스스로가 헛된 것이 돼버리고 말았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이를 증명해준다. 북왕국은 “야웨의 율례와 야웨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헤벨)을 뒤따라 허망하며(헤벨) 또 야웨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그들의 하나님 야웨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다가”(왕하 17:15-16)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거품(헤벨: nothing)을 쫓다가 거품(헤벨: no thing)이 된 것이다(참조. 호 9:10; 시 115:8).

인간은 자신이 섬기는 신에 의해서 그의 삶이 결정된다.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랑의 대상이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바알은 물질과 풍요의 신이다. 현대 물질문명의 사람들에게 거의 신으로 간주되는 현대판 바알인 물질과 풍요는 사실 허상이요, 그 허상을 쫓는 삶의 끝도 허무할 수밖에 없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3. 대를 이어 계속되는 배신: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렘 2:7)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은 그들을 애굽의 억압에서 구원하시고 척박한 광야에서 인도해주신 야웨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6절). 그런데 그 조상의 후예들도 하나님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7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여기서 “너희”는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에게 기름진 땅을 주었고 그 땅의 열매와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다(참조. 신 8:7-9). 그로 인해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정도는 풍요로움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기업(상속지)”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5절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바알 숭배로 인한 결과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의 삶의 터전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땅으로 하나님이 선물로 허락하신 땅이다. 따라서 그 땅에서의 삶은 야웨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한다: “네 조상의 하나님 야웨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신 12:1).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조차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먼저 은혜로 약속의 땅을 주셨다. 그리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사한 출애굽의 은혜와 광야 인도의 은혜를 저버린 조상들과 같이 그 후예들도 약속의 땅을 주신 은혜를 저버린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대를 이어 끊어질 줄 모른다. 인간의 죄성은 이토록 뿌리가 깊은 것이다. 은혜에 제대로 보답은 못할지언정 최소한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피해야 하지 않은가!

 

4. 지도자라는 것들이: “제사장들은 야웨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렘 2:8)

예레미야는 당시 지도자들의 잘못을 질책한다. 8절의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란 바로 앞의 제사장들을 달리 부른 것으로 보인다. “관리들”이란 문자적으로는 “목자들”이라는 낱말이다. 목자란 구약성서와 고대 근동의 나라에서 왕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 율법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할 책임을 맡은 제사장들이 야웨를 찾지도 않을 뿐더러 아예 야웨 자체를 모른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을 돌볼 책임을 맡은 정치 지도자들은 오히려 야웨의 뜻을 거역한다.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선지자들은 바알에게 의지하여 예언하고 그 이방 신을 추종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선지자), 그 말씀을 보존하고 가르치며(제사장), 그 말씀대로 백성을 돌볼 책임을 맡은(정치 지도자) 지도자들이 자기 자리를 벗어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비극이다.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지도자들의 본연의 임무이다. 하나님은 각각의 분야에 지도자들을 세워서 당신의 뜻이 전달되고 실현되기를 원하신다. 지도자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위기에 처하고 붕괴된다(겔 22:30-31). 따라서 오늘의 한국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이 바로서야 한다. 어떤 지도력인가? 물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받드는 지도력이어야 한다. 그곳이 교회이건 국가이건 간에.

 


5.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신(神)-갈아치우기”: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 2:11)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배역은 드디어 하나님의 소송 사건으로 이어진다: “내가 다시 싸우고(히브리어로 “리브”: “소송을 걸다”)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리브)”(9절). 세계사적으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깃딤 섬들과 게달에 사람을 보내어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을 다른 신과 바꾼 일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령한다. “깃딤”은 본래 키프로스 섬 주민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지중해 동쪽 지역의 주민들 전부를 가리키기도 한다(민 24:24; 사 21:16). 따라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보면 서쪽 끝을 가리킨다. 게달은 아랍 부족 시리아-아라비아 광야에 거하는 아랍 부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동쪽 끝을 말한다. 깃딤 섬들과 게달로 가보라는 말은 동서로, 곧 온데 다 알아보라는 뜻이다. 또한 깃딤과 게달 사람들은 상인이다(겔 27:21). 물건을 교환하여 먹고사는 그들도 그들의 신만큼은 교환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그들의 신과 다른 신을 바꾼 사례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그 영광”)을 신도 아닌 것(“무익한 것”)과 바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치가 더 떨어지는 것”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이를 위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을 취한 것이다. 이 같은 행실은 세계사적으로 유일회적인 사건이다. 창조 이후 전세계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하늘도 믿을 수 없는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12절). 이스라엘은 하늘도 놀랄 “신(神)-갈아치우기”라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물질과 풍요의 화신인 바알이 무익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의 대상이 되고 있음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에 끌려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갈아치우기”라는 무서운 죄악에 빠져 있는 것이다.


6. 버림받으신 하나님: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렘 2:13)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탄식이 이어진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13절).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렸다. 그리고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인 바알을 택한 것이다. 바알은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에 터진 웅덩이로 비유된다. 그들은 출애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야웨 하나님을 배반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요 “도움이 못되는 것” 곧 바알을 추종한다.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은 철저히 버림받았다.

이스라엘이 버린 하나님은 “생명을 주는 물의 근원”이시다. 이 글귀에 대한 필로(Philo)의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생명보다 귀한 분으로서, 그는 생명의 지속적인 원천이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