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회개와 새로운 삶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렘 3:1∼13)

 
[활천 2001년 4월]

 

 

1. 재결합(회개)의 불가능: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렘 3:1)

예레미야는 3:1-5에서 유다 백성들을 자기 남편에 대해 배도한 아내로 묘사한다. 예레미야는 신명기 24:1-4의 율법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 혼인법 조항에 따르면 불미스러운 일로 이혼 당한 여자가 이혼 후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 경우 전 남편은 그 여자와 다시 재혼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예레미야는 1절에서 논쟁조로 3가지를 연속 질문한다. 첫째,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둘째,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셋째,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겠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이다. 재결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유다 백성의 현 상황은 이러한 율법적 상황보다 더 심각하다. 그들은 야웨 하나님과 합법적으로 이혼한 상태가 아니라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부정을 행한 것이다. 그것도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했다: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렘 3:2; 참조. 2:23-24 등). 게다가 다른 “한” 남자만 상대한 것도 아니고 “여러 명”의 정부(情婦)(“많은 무리”)에게 마치 고멜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창녀 짓을 했던 것이다.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이혼 상태에서 한 번이라도 재혼을 했으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법적으로 불가능한데, 하물며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유다 백성이 본 남편 되시는 야웨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통찰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본래 회개할 능력이 없다: “주 야웨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렘 2:22; 참조. 호 5:4, 6; 11:5). 흑인인 에디오피아 사람이 그들의 피부를 그리고 표범이 그 가죽의 반점을 변화시킬 수 없듯이 사람은 악한 행실에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렘 13:23). 예레미야는 죄란 이미 지울 수 없는 인간의 “두 번째 본성”이 되었다고 본다. 죄인인 인간은 원래 절망적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회개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회개가 가능한가? 여기에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인간은 회개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는 인간의 능력이나 공적의 결과가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은혜의 결과이다. 회개는 은혜의 표시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2. 입에 발린 회개와 계속되는 악행: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렘 3:5)

가나안의 신들(바알)에 대한 끊임없는 구애(행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땅의 풍요를 얻지 못했다.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말하는 “행음”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하나님과 더불어 우상을 함께 섬기는 종교 혼합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이해한다(렘 2:2; 참조. 호 2:16). 이미 하나님과 결혼한 백성이 또 다른 정부인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긴다면 이는 곧 간음이요 행음이라는 것이다. 둘째, 바알 신 숭배의식에서 수반되는 실제적인 행음행위를 가리킨다. 바알 숭배의식에 따라서 남성 숭배자들은 바알 신전에 있는 여사제로 보이는 성전창기와 몸을 섞고(호 4:13-14), 여성 숭배자들은 신전의 미동(美童) 혹은 남창(男娼)과 행음을 한다(신 22:17; 왕상 14:24; 왕하 23:7).

그런데 이러한 행음의식은 뜻밖에도 단비(10월과 11월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3월과 4월에 내리는 비)가 그치는 결과를 낳았다. 농사의 풍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같이 바알의 관장 사항이 아니었다. 사실 이것조차도 야웨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렘 5:24; 14:1-22; 왕상 17:3; 사 5:6). 그러나 비를 그치게 한 하나님의 조처에도 유다 백성은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창녀의 낯을 가져서 수치를 모른다”(렘 3:3). 유다의 뻔뻔스러움은 도에 지나쳤다.

유다 백성들은 가뭄이 이 땅을 휩쓸자 그 동안 무시했던 야웨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청년 시절의 보호자(애호자)”로 부른다. “보호자”란 “길들인 동물”, “황소”, “친구”, “동료”, “남편”, “가정이나 부족의 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친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것 같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요 “젊은 시절의 친구”라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예레미야 2:2에 나오는 “청년의 때의 인애와 신혼의 때의 사랑”, 즉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던 옛 시절의 관계를 들먹이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호칭으로 “하나님과의 신뢰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한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렘 3:4-5). 그러나 이것은 어찌보면 진정한 고백으로 보이나 사실은 입에 발린 거짓 회개였다. 이는 행위가 없는 입술만의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백(말)과 행동사이의 중대한 불일치가 어찌 하나님의 눈에 숨겨질 수가 있겠는가!: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렘 3:5).

회개는 입술의 말장난이 아니다. 입만 아니라 몸도 돌이켜야 한다(욜 2:12-13). 진정한 회개는 죄의 고백인 동시에 바른 삶의 실천이다.

 

3. 언니 이스라엘의 파경을 옆에서 보고도 계속되는 동생 유다의 위험한 장난: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렘 3:8)

예레미야 3:6-10의 내용은 요시야왕(주전 639-609년) 때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들이다. 예레미야는 여기에서 이미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의 운명을 거론하면서 남유다의 그칠 줄 모르는 악행에 대하여 질타를 가한다. 북이스라엘 백성들도 바알 숭배에 심취해 있었다(렘 3:6).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늘 기다려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일을 다 행한 후에, 그들에게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호소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호소를 무시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간음으로 인하여 그들을 내어쫓았고 이혼서까지 주었다고 말한다. 이는 주전 722년에 있었던 북 왕국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다(왕하 17:7-18).

놀라운 사실은 자매인 남유다 백성들이 이 모든 사건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워 아니하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음을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매국가의 파국이 웅변하는 교훈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뿐이니라”(렘 3:10). 이 점에 있어서 유다의 죄는 이스라엘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렘 3:11). 북이스라엘은 배도하여 그 결과 국가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전에 선례가 없었다는 점을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유다는 자매나라인 북이스라엘이 당한 사건을 통한 경고를 받고서도 자기의 길을 바꾸지 않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참조. 겔 16:51-52).

자매 이스라엘의 운명은 유다의 운명을 예시하는 전조(前兆)요 경고였다. 유다 백성들은 그 경고를 간과하거나 무시한 나머지 망국의 철퇴를 맞은 것이다. 역사적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다(참조. 롬 1:19-20). 일상적인 삶도 역사를 이루고있는 한 구성요소이기에 오늘의 삶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간파하는 능력이 곧 영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성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영성의 부재가 이스라엘은 물론 유다의 멸망도 초래한 것이다. 따라서 영성은 한 공동체의 흥망성쇠를 결정할 수도 있다

 

4. 이혼녀 언니 이스라엘의 재결합(회개):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렘 3:12)

예레미야는 3:11-13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1-5에서는 회개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회개가 가능한 것으로 나온다. 본문의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차이점을 통하여 오히려 회개의 본질을 알게된다.

첫째, 먼저 회개는 심판을 경험한 자들에게만 가능하다. 두 본문에서 예레미야의 선포대상이 다른 점을 주목해보아야 한다. 3:1-5 그리고 6-10에서는 그의 선포대상이 멸망을 앞둔 남유다 백성이고, 3:11-13에서는 이미 심판을 경험한 북이스라엘 백성이다. 참고로 예레미야의 활동 시기는 북 왕국의 멸망(주전 722년)과 남유다의 멸망(주전 587년) 사이에 해당된다. 요시야의 영토확장 정책으로 옛 북 왕국의 땅의 일부를 회복한 사건이 이 선포의 전제된 상황으로 작용한 듯하다(왕하 23:15-20). 아무튼 예언자는 멸망을 앞둔 유다 백성에게서는 회개의 불가능성을 보았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아직은 정식으로 이혼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식으로 이혼서를 내주고 내쫓은, 즉 이미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회개의 가능성을 본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회개촉구는 심판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판 이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둘째, 따라서 회개는 어느 정도 죄의 값을 치르고 난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3:12에서 하나님은 긍휼이 있으시고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한 얼굴을 이스라엘에게 향하지 아니하겠으니 이제는 돌아오라고 외친다. 즉 하나님의 진노가 끝이 났으니 이제는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이 죄의 값을 치르고 난 다음에 가서야 그친다. 이스라엘 백성은 정식 이혼에 의한, 유배를 통하여 그들의 죄의 값을 지불한 것이다(참조. 사 40:2). 그러나 유다 백성은 아직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유배라는 정식이혼절차(왕국의 멸망)를 거치고 그리고 나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회개 이전에 반드시 치러야 할, 죄의 값인 심판이라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

셋째, 회개의 내용은 철저한 죄의 자복이다. 예레미야는 3:13에서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죄를 자복하도록 촉구한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야웨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회개란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이 정당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3:1-5에서는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과 유다의 재결합이 차단된다. 그러나 3:11-13에서는 율법이 하나님에 의해서 극복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제정하신 율법을 스스로 어기시면서 까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신 것이다(호 11:8-9).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도 초월하신다. 율법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은 하시기 때문이다(롬 8:3). 그런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차별적으로 임한 것은 아니다. 심판의 경험유무가 회개의 가능과 불가능, 즉 은혜의 유무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에 속하지만(출 33:19), 때로는 인간의 상태와 태도에 따라서 은혜가 임하기도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은혜도 은혜 받을 만한 자에게 임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