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심판받아 마땅한 유다 백성


"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예레미아 6:1-21)

 

[활천 2001년 6월]

 

1. 유다를 공격하라고 명하시는 야웨: “너희는 그[유다]를 칠 준비를 하라”(렘 6:4)

예레미야는 4장 5-6절에서 북방에서 재앙과 큰 멸망이 임할 것이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의 견고한 성안으로 피하라고 권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도 침략당하기 직전이다(렘 4:29-31). 따라서 그는 6장 1절에서 예루살렘 성안에 피난 와 있던 자기 지파 사람인 베냐민 자손들에게 이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외친다. 그는 드고아(Tekoa)와 벧학게렘(벧게렘: Bet-Kerem)으로 도피하라고 한다. 드고아는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고, 벧학게렘의 위치는 아직도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라맛 라헬(Ramat Rahel)로 추정된다. 이곳은 베들레헴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다. 아무튼 두 지역은 예루살렘의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달아나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북쪽으로부터 오는 적이 예루살렘에 임박해 있음을 알 수 있다.

3절의 목자들은 저마다 자기 군대(양떼)를 거느리고 진군해오는 적의 왕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자기 양떼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각자의 분할지를 선택하여 그들의 장막을 친다. 이곳에서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는 소리가 들린다(4절). 이 말은 문자적으로 “그를 칠 전쟁을 거룩히 하라(카데쉬)”는 말이다. 우리 번역 “준비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카데쉬)는 성전(聖戰)에 앞선 고대의 종교의식을 암시한다. 고대 근동에서 전쟁을 개시하는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종교제사를 드리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여기서는 공격시각을 제의적으로 결정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는 거룩한 전쟁 즉 야웨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전쟁은 어떠한 차단도 용납하지 않는 무자비하고 엄격한 것이다. 정오의 작열과 한밤중의 위험(시 91:5-6; 아 3:8)도 예루살렘 도시의 집들을 황폐시키는 전쟁을 중지시킬 수 없다(4-5절). 북쪽에서 오는 적들에게 이러한 명령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야웨 하나님이시다(6절).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심판하신다. 진군해오는 적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셈이다.

야웨 전쟁은 본디 야웨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그들 대신 앞서서 싸워주시는 전쟁이다. 척박한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의 진입도 사실은 야웨 전쟁의 선물이었다. 당신의 백성들 앞에서 수많은 적들을 물리쳐 주신 하나님이 이제는 그 방향을 돌려 그 백성을 치려고 하신다. 어찌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나님의 성인 예루살렘에는 오직 포악한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6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우리를 치시는 심판의 하나님이신가는 그 분을 향한 우리의 자세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2. 할례 받지 못한 귀: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렘 6:10)

예레미야 6장 9-15절은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포도 따는 자가 남은 포도가 있는지를 철저히 살펴보는 것같이, 야웨의 포도원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찾아보도록 명령하신다(9절). 그러나 포도나무의 덩굴에는 아무런 열매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예레미야의 결론은 한마디로 절망이었다. 그의 말과 경고는 할례 받지 못한 귀에 들린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10절).

다른 곳에서 입술의 할례(출 6:12, 30)와 마음의 할례(레 26:41; 신 10:16; 30:6)라는 말이 쓰이고 있지만 귀의 할례라는 표현은 드문 경우이다(참조. 행 7:51). 위의 경우들에서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말은 신체의 그 기관이 닫혀 있는 상태, 즉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닫혀 있는 귀에는 어떤 말과 경고도 쇠귀에 경을 읽는 격이다.

할례 받지 못한 귀의 의미를 할례의식과 연관하여 달리 해석을 해볼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할례란 야웨 하나님이 그들과 체결한 언약의 표징이다.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다(창 17:1-14). 즉 할례란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서 순종하는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이다: “보라 야웨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10절).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귀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귀가 하늘을 향햐여 늘 열려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의 탈진 속에서 죽기를 소원하였던 로뎀나무의 엘리야가 새로운 사명을 받은 호렙산의 엘리야로 탈바꿈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포착할 수 있었던 할례 받은 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3. 돌팔이 의사인 정신적 지도자들: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렘 6:14)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분노와 같은 분노가 자기 안에 가득 채워져 있음을 느낀다(11절). 우리는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자신의 직무의 무익성에 대하여 탄식하는 최초의 본문을 만난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탄식은 예레미야의 특징을 이룰 정도로 나중에 좀더 집중적으로 전개된다(렘 11:18-23; 12:1-6 등등).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는 나이와 성에 있어서 차별이 없이 모두에게, 심지어 거리에서 뛰노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과 한참 꿈에 부풀어 있을 젊은이들에게도 임한다. 이들 모두가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12절).

예레미야 6장 13-15절은 유다 백성이 모든 것을 상실하고 포로로 유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 마음에 자신의 이익만을 탐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물질적인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선지자와 제사장 같은 정신적인 지도자들의 사기 행각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13절).

그들은 백성의 상처를 건성으로 다루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14절). 여기에서 “상처”(세베르)는 한 공동체가 심각하게 붕괴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골절/뼈 따위가 부러뜨려짐”(fracture)으로 번역될 수 있다. 또한 “다루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치료하다”(라파)라는 단어이다. 당시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은 마치 돌팔이 외과의사 같이, 환자들의 심각한 골절상태를 정밀검사도 하지 않고 의례적이고 건성으로 곧 회복될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만 심어주었다. 그러나 이 백성의 상처는 심각할 정도로 위독하였다. 이들에게는 긴급하고 근본적인 대 수술이 요구된다. 정신적인 지도자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의도적으로 덮어버리고 거짓 평강만을 약속한다. 이들은 이러한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운지도 모른다. 이런 자들에게 어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지 않겠는가?: “...그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야웨의 말씀이니라”(15절).

정신적인 지도자들은 그가 속한 사회의 건강을 책임진 의사들이다. 이 민족과 국가의 아픔과 상처를 진지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 중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통증도 못 느끼는 무감각한 환자들에게도 그 근원적인 질병을 찾아내어 일러주어야 한다. 환자의 죽음은 의사의 파멸이기도 하다. 환자가 살아야 의사도 산다. 환자와 의사는 생명공동체이다. 알고 보면 가정, 교회, 사회, 국가는 모두 생명공동체이다. 따라서 생명 지키기와 생명 살리기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기도 하다.

 

4. 두 가지 안내표지: “옛적 길로 가라,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들으라”(렘 6: 16-17)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갈 길을 못 찾아 방황할 때 바른 방향을 향하도록 두 개의 안내표지(Wegweiser)를 선물로 주셨다. 첫 번째 안내표지는 토라(율법)이다. 하나님은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16절)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옛적 길 곧 선한 길”이란 전통적인 가르침, 즉 토라를 가리킨다(19절). 두 번째 안내표지는 예언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된다: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17절). 하나님은 본래 당신 백성이 멸망당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그들에게 파수꾼을 세워주셨다. 파수꾼의 직무는 그들에게 미칠 재앙을 미리 보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도 예언자의 임무에 속한다(겔 3:17-21; 33:1-9). 예언자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증인이다. 예언자는 인간의 삶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이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토라가 제시하는 선한 길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예언자의 목소리도 무시한다. 드디어 유다 백성들에게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된다: “그러므로 너희 나라들아 들으라 무리들아 그들이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토라)을 거절하였음이니라”(18-19절). 여기서 “내 말”이란 예언자의 경고를 말하고, “내 율법”은 하나님의 가르침인 토라를 가리킨다. 유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물인 토라와 예언자가 철저히 거부되고 있다. 감히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다니 유다의 패역이 너무 심한 것은 아닌가?

토라의 가르침과 예언자의 외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길을 알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여부가 생명과 사망 그리고 복과 화를 결정한다(신 30:15).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오직 야웨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바로 그가 복된 자이다(시 1:1-2).


5. 최상급의 예물이냐 토라 순종이냐?: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렘 6:20)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토라와 예언자의 목소리를 거절하고 그대신 호화로운 제사를 드린다.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한다: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20절). 유향은 제사 때에 피우는 향으로서 제의 의식에서 기쁨의 분위기를 자아낸다(참조. 출 30:34-38). 또한 향품은 인도에서 들여왔던 것 같다. 이들이 준비한 제물들은 먼 외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희귀한 것들이었다.

토라가 부인된 공동체의 제의를 과연 하나님이 받으실까? 최상급의 예물이라고 토라의 순종을 대신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가 강조하는 것은 토라의 순종과 분리된 의례적인 행사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토라의 순종이 없는 예배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언자가 거부하는 것은 의식(예배) 자체가 아니라 의식(예배)에 합당한 삶이 결여된 의식이었다. 모든 예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예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값비싼 제물로 치장된 예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토라에 순종하는 것을 원하신다: “야웨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의 예물”보다 “삶의 예물”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합당한/참되고 사리에 맞는] 예배니라”(롬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