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예레미야의 좌절

“곡하는 부녀들 불러오라”
(렘 9:2-26)

 

[활천 2001년 8월]

 

1. 공동체의 기초인 신뢰가 무너진 사회: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렘 9:4)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을 떠나 광야에서 홀로 거하였으면 하고 탄식한다(2절). 이는 과거에 예언자 엘리야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죽기를 고하였던 일을 생각나게 한다(왕상 19:4). 그러나 엘리야는 스스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고, 예레미야는 동족들의 간음과 반역을 더 이상은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눈에 비친 이 백성은 벌써 하나님을 떠난 지 오래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아자브)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이 백성이 하나님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예레미야도 지금까지는 이들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예레미야의 인내와 동정심도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아자브) 것같이 예레미야도 드디어 그들에게서 떠나기(아자브)를 원한다.

예레미야를 이 공동체에서 떠나게 한 것은 백성의 간음과 반역이었다. 여기서 간음이란 이 백성이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것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타락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타락상이 계속해서 열거된다. 그들의 혀는 거짓을 말하며 진실치 못하며 쉬지 않고 악을 행한다(3절). 4절의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에서 “온전히 속이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콥 야콥”이다. 여기에서 “야콥”의 발음이 족장 야곱(히브리어: 야콥)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 말은 형제마다 야곱처럼 서로 속인다라는 것을 뜻한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속여서 빼앗은 장본인이었다(창 25:27-34; 27:1-40). 예레미야는 이러한 언어유희를 통하여 이 백성이 그들의 조상인 사기꾼 야곱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이 나라는 이웃은 물론이고 형제간에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형제들끼리도 서로 속이며 이웃마다 돌아다니며 서로 비방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하는 말과 속의 생각이 다르다(8절). 모든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 그 시대의 풍조가 되어버렸다. 이웃간의 신뢰가 깨진 곳에서는 당연히 공동생활의 기반은 무너진다. 예레미야가 2절에서 간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이 단어는 본디 부부간의 정절을 깨뜨리는 것을 뜻한다. 예레미야는 부부관계를 사회의 신뢰도를 가늠하는 측정기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관계란 생활공동체 가운데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형태로써 이는 백성 공동체의 현 상태를 보여주는 영상(映像)이다. 이러한 관계가 깨뜨려졌다는 것(간음)은 곧 유다 공동체의 붕괴를 예시하는 것이다.

부부간의 은밀한 관계에 제3자가 개입되고, 형제간에도 서로 속이는 사회에서는 모든 관계가 깨어질 수밖에 없다. 몸을 섞은 부부간에도 믿을 수 없고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믿을 수 없는 곳에서 과연 누구를 믿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신뢰의 기초가 무너진 것이다.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은 의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 사회도 이에 못지 않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공동체의 붕괴라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먼저 무너진 신뢰의 기초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에스겔이 그토록 목메어 찾아 나섰던,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겔 22:30)은 바로 부부간의 신뢰, 그리고 형제간의 신뢰부터 회복시키는 자이다. 그리하여 신뢰의 폭을 점점 더 확대해 나가야 한다.

 

2. 인간의 죄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렘 9:13)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는 이 패역한 백성에게 재앙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드디어 이 고통의 신음소리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10절). 그런데 뜻밖에도 예언자는 여기에서 자연의 재앙을 슬퍼하고 있다. 가축과 새와 짐승들이 모두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생태계(ecosystem)가 파괴된 것이다.

누가 이렇게 하였는가?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11절).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예레미야도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없게 되었느냐?”(12절) 질문한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직접 답을 주신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그 목소리를 순종하지 않고 우상인 바알을 따랐기 때문이다(12-13절). 한마디로 말하면 유다 백성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죄는 사람이 저지르고 심판은 자연이 받는다는, 즉 사람의 죄와 자연의 재앙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예언자들의 공통된 통찰이다(호 4:1-3; 학 1:9-11 등).

어쩌면 예언자들이 이러한 말씀을 선포하였을 때 당시의 청중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에 대한 관심이 어느 시대보다 고조된 오늘날은 이러한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세상은 하나님 스스로 보시기에도 감탄할 만큼 좋았다(창 1:31).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다(롬 8:22). 인간의 오만과 죄악이 이 세상을 참혹한 쓰레기장으로 만든 것이다. “지구의 역사를 12시간으로 칠 때 11시 59분이 훨씬 지나서 태어난 인간이 무지와 교만으로 환경을 파괴해 ‘짧고 굵게 살다간 종(種)’으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는 한 생물학자의 외침에 신앙인이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환경보전은 하나님의 창조 그리고 구원과 관련된 심각한 신학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3. 시온에서 들려오는 곡소리: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렘 9:19)

하나님은 유다의 멸망을 내다보고 장송곡을 불러줄 여인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신다(17절). 고대 근동의 모든 나라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에서도 초상이나 재앙을 당하면, 소리내어 우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남자(암 5:16)와 여자가 있었다(대하 35:25). 본문이 말하는 “곡하는 부녀”란 이렇게 직업적으로 호곡(號哭)하는 자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이들을 “지혜로운 부녀”로 부르고 있다. 이 때 지혜롭다는 말은 슬기로움이라는 인성적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잘한다는 뜻이다. 예레미야가 대언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18절). “그들을 빨리 부르라”는 말은 사태의 긴박성을 나타낸다. 곡하는 부녀들은 빨리 와서 마땅히 울어야 할 사람들이 울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이어지는 19절에서는 애곡의 이유가 제시된다: “이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거처를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시온의 파괴로 말미암은 통곡소리가 시온에서부터 들려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곡소리는 앞으로 닥칠 재난 상황에서 백성이 보일 반응을 말한다. 이 소리는 예언자만 듣는다. 남들은 아직 들을 수 없는 탄식소리가 예언자의 귀에는 아주 생생하게 들려온다. 곡하는 부녀들에게 “자신의 딸들에게도 애곡을 가르치고 각기 이웃들에게 조가(弔歌)를 가르치라”는 것은 다음 세대에도 애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재앙이 한 세대로 끝나지 않음을 암시한다. 또한 주변의 이웃들도 급조하여 곡하는 일을 맡겨야 할 정도로 재앙이 엄청났다. 즉 가능한 모든 부인들이 총동원되어야 할 정도로 그 참상은 실로 비극적이었다. 이 단락의 마지막 절인 22절은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시체를 거두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어쩌면 아무도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먼저 듣고 그리고 들으려고 한다. 예언자는 모름지기 늘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백성들의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의 소리를 먼저 듣고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백성들의 탄식소리를 몸으로 듣고 이를 하나님께 아뢰는 일이 예언자가 하는 일이다. 예언자는 “말하는 자”이기 전에 먼저 “듣는 자”이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우리는 말하는 데만 너무 익숙해 있다. 우리의 기도가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때로는 “듣는 기도”가 되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가 열리는 체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동시에 이웃의 내면에 묻혀 있는 마음의 말도 진심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4. 야웨 신앙의 최고 가치: “사랑(헤세드)과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렘 9:24)

백성들은 예언자의 재난 선포에 맞서 자신들의 능력을 앞세우며 자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23절)고 경고하신다. “용맹”과 “부”(富)는 지혜문학에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잠언 16:32에 따르면 용맹은 노를 참는 것보다 열등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재물은 의리보다 못하며(잠 11:4), 재물은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잠 11:28).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지혜, 용맹 그리고 부는 전통적으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면 잠언 4:7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권하고 있다. 인격화된 지혜의 속성으로 잠언 8:14에서는 용맹이 언급되고(참조. 욥 12:13), 18절에서는 부귀가 제시된다(참조. 잠 3:16; 14:24). 따라서 예레미야는 지혜, 용맹 그리고 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가? 예레미야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사랑(헤세드)과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앎”이란 곧 “삶”을 말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구는 외적으로는 두 가지이지만 내적으로는 한 가지이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에 대한 언급에서 이 점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킨다: “네[여호야김]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요시야]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느냐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다아트: ‘야다’의 명사형)이 아니냐”(렘 22:15-16).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 용맹 그리고 부를 자랑하는 자를 물리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 즉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웨 신앙의 최고 가치를 만나게 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찾고 계신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예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참조. 삼상 15:22; 암 5:21-24; 호 6:6; 미 6:6-8). 물론 기독교 신앙이 윤리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기독교는 윤리보다 더 높은 가치체계이다. 그러나 윤리가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세상이 기대하는 상식수준의 윤리에도 함량이 미달될 때가 자주 노출된다. 오늘의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도덕적인 영성”(ethical spirituality)이 아닐까?

 

5. 마음의 할례: “이스라엘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렘 9:26)

예레미야 9:25-26의 본문은 아주 모호하다. 우리말 개역성서와 마찬가지로 개역개정성서도 25절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로 번역하고 있다. 표준새번역은 “몸에만 할례를 받은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현재 히브리어 본문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 그러나 다음에 나열된 애굽, 유다, 에돔, 암몬 그리고 모압 사람들은 모두 할례를 받은 민족들이다. 따라서 문맥의 흐름에 맞추어 “할례 받은 자”라는 번역이 더 적절해 보인다. 26절의 뒷부분도 “이 모든 민족들과 이스라엘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라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무할례자들이다. 진정한 할례란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이기 때문이다.

할례란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헌신을 가시적으로 몸에다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연대감(Gottesgemeinschaft)이 없다면 이 표시란 무익한 것이 된다. 마음의 할례란 그 마음이 하나님과의 연대감을 의식하며 그 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말한다(신 30:6). 신앙 연륜의 외투(몸의 할례)보다 하나님을 향한 나뉨이 없는 마음과 묵묵한 실천(마음의 할례)이 더 값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