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중보기도의 금지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렘 11:1-23)

[활천 2001년 9월]

 

 

1. 언약공식: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

예레미야 11장은 언약을 깨뜨린 하나님의 백성과 그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 1-17절과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를 보여주는 18-23절로 구성된다. 첫 번째 단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언약”이다. 또한 야웨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첫 번째 말씀도 “언약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다.

히브리어 “베리트”는 보통 “언약”으로 번역되지만,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지워진 “의무/책임/책무”라는 뜻을 가리킨다. 따라서 언약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에 철저히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 책무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할 때, 즉 하나님의 목소리를 순종하고 그분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4절).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표현을 일컬어 “언약공식”이라 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언약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5절). 그러나 언약의 파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청산과 다름이 아니다. 이는 언약의 저주조항에 따른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들인다(3절).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다가오는 재난은 하나님이 임의로 아무렇게나 내리시는, 이해할 수 없는 재난이 아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결과로 주어질, 미리 예고된 재난이었다. 언약의 파기행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되는 축복을 정지시키고 저주발동의 버튼을 누른 격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의 언약이 원치 않는 저주의 언약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마저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인간들이 빚어낸 비극이다. 늘 좋으신 하나님(사랑)만 바라볼 것이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실치 못함에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드시는 하나님(공의)도 볼 수 있어야 한다.

 

2. 기도가 막히기 전에: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렘 11:14)

하나님은 본래 당신의 백성이 심판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렘 29:11; 애 3:33). 당신의 피조물들을 괴롭히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일 리가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한다. 심판을 재촉하는 이스라엘과, 할 수 있으면 심판을 막아보려는 하나님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날부터 예레미야가 활동하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 경고하셨다. 그러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7-8절). 그러니 언약의 저주를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한 그들의 조상들이 저질렀던 죄악을 반복한다(10절). 드디어 그들에게 재난이 예고된다(11a절). 조상 때부터 그칠 줄 모르고 지속되어 내려온 불순종의 역사가 결국 그들의 기도마저 무익하게 만들어버렸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같이 이제는 하나님도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언약을 파기한 자들의 기도는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11b절). 그들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거부에 부딪혀, 그들이 지금까지 섬겨왔던 우상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우상들은 재앙의 때에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없다(12절).

이스라엘 백성의 심판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부르짖음도 돌파구를 만들지 못하고 차단되어 버렸다. 이 지경에 이르자 예언자의 개입도 무용지물이다. 예언자란 먼저 백성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것이 첫 번째 사명이요, 하나님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두 번째 사명이다. 그러나 예언자의 첫 번째 역할이 거부된다. 하나님이 기도를 금하신 것이다(14절).

재앙의 때에 이스라엘의 기도는 전혀 효과가 없고, 그들의 도움이 될 줄로 믿고 숭배했던 우상들도 속수무책이었고, 마지막 보루인 예언자의 중보기도도 거절되었다. 이스라엘은 기도의 때를 놓친 것이다. 하나님이 더 이상 듣지 않으신다. 이때는 기도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 누구의 기도도 효과가 없다. 하나님이 기도의 문을 닫으시는데 누가 감히 그 문을 열 수 있겠는가? 기도가 막히기 전에, 기도할 수 있을 그때가 바로 은혜의 때이다. 큰 축복의 때이다: “너희는 야웨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3. 제물이 삶을 대신(?):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렘 11:15)

예레미야 11:15-16은 헬라어 번역본(LXX)에 의존한 표준새번역이 비교적 본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유다가 악한 음모나 꾸미더니, 내 성전에 들어와서 어쩌자는 것이냐? 살진 짐승을 희생제물로 바친다고 해서,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느냐? 유다야, 한때에 나 주도 너를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달린 올리브 나무’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내가 그 잎을 불로 사르고, 그 가지를 부러뜨리겠다.”

예레미야는 이 백성들이 성전을 피난처로 삼는 행태에 도전한다.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이르지 못함같이, 그들의 희생제물도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성전예배도 희생제물도 그들에게 닥칠 재난의 방향을 돌이킬 수는 없다. 하나님은 유다를 “내가 사랑하는 자”(15절)라고 부르고 또한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달린 올리브 나무”(16절)라 칭하고 있다. 특히 후자의 이미지는 구약성서에서 “의인”을 가리키며(시 92:12-14), “야웨의 율법에 몰두하는 자”(시 1:2) 그리고 “야웨를 철저히 의지하는 자”(시 52;8; 램7-8)를 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들은 궤도를 이탈했다. 결국 하나님은 그 잎을 불사르고 그 가지를 부러뜨리기로 작정하셨다.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들인 것이다: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야웨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16절).

물신(物神)인 바알 숭배와 불의(不義)의 삶을 근절하지 않는다면 모태부터 지속되어온 성전출입도, 제아무리 값비싸고 정성스러운 제물이라도 소용이 없다. 예배와 예물이 어찌 의롭지 못한 삶을 대신할 수 있는가? 예배와 예물이 사람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사람이 예배와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똑바로 살아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야 똑바로 살 수 있다는 역도 성립된다.


4.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 “나는 끌려서 도살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으므로”(렘 11:19)

예레미야 11:18-23은 예레미야 개인의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일련의 본문들(12:1-6; 15:10-21; 17:14-18; 18:18-23; 20:7-18) 가운데 첫 번째 본문이다. 학자들은 이 본문들이 흔히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고백록』(Cofessions)과 유사하다고 하여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고 부르고, “예레미야의 탄식”이라고도 한다. 이 시들에서 예레미야는 비통한 마음으로 자신의 운명에 관해 탄식하며,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때로는 원망하기도 한다.

예레미야의 첫 번째 고백 본문은 세 가지 구성요소로 짜여 있다: 불평(18-19절), 청원(20절), 하나님의 응답(21-23절). 예레미야는 그의 고향인 아나돗 사람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와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린다(19절).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양 이미지는 이사야 53:7에서는 자신의 운명에 묵묵히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주 순진하게 즉 전혀 뜻밖에 도살당하는 것을 상징한다(렘 51:40; 시 44:22).

예레미야와 아나돗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주인이 잡아죽이려고 끌고 가지만 짐승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다. 예레미야는 완전히 제거될 뻔했다. 그의 존재와 활동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한 것이다. 그것도 남도 아니고 고향 사람들에게서. 아나돗 사람들이 왜 예레미야를 이렇게 제거하려고 했는지는 정확히는 더 이상 알 수는 없다. 아마도 21절에서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야웨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고 위협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심판 메시지가 주원인으로 작용한 듯싶다. 아무튼 어머니의 품 같은 고향에서조차 내몰린 예레미야는 인생 막바지에 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아나돗 사람들에게는 예언자에게 침묵을 강요한 죄, 즉 하나님의 말씀을 봉쇄한 죄로 심판이 예고된다(22-23절).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의 인생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지 않았다면, 아니 청중이 듣기 원하는 말씀만 전했다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그의 선포가 땀흘림이 없는 번영, 전투가 없는 축복, 고난이 없는 성공, 사회적 정의가 없는 민족의 영화, 인격적 성결함이 없는 하나님의 인정 등을 부추겼다면 틀림없이 인기를 누리며 대접받고 잘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세상의 인기에 영합하기보다는 그를 부르신 한 분의 눈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사심 없이 순복하는 삶은 고독하고 괴로운 길일 수도 있다. 세상의 인기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외면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눅 4:29; 참조 막 3:21). 이런 고난은 “하나님의 부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의 버리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끌어안으심”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빚어낸 고난이라면 마땅히 감사함으로 감수해 볼 만하지 않을까(약 1:2-3)?

 

5. 예레미야의 복수(?)요청 기도: “그들에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렘 11:20)

이제는 예레미야의 청원부분(20절)을 보기로 하자. 그는 하나님을 “의의 심판자”로 부르고, “사람의 마음(문자적: 콩팥과 염통)속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분”이심을 강조한다. 그리고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예레미야는 그의 소명사건에서 하나님이 그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넣어주시는 체험을 한 바 있다(렘 1:9).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박해를 받고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입“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박해는 곧 그를 부리시는 야웨 하나님을 박해하는 것이기에 결국 예레미야의 적은 곧 하나님의 적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직접 보복(공의로운 조치)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내가 보복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고, “주님이 보복하시는 것을 나도 보게 해줄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보복요청 기도는 단순히 한 개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좀더 심오한 차원의 기도이다. 이 기도가 야웨신앙과 일치함은 21-23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조치를 요청한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는 또한 자신이 직접 벌주는 일에 나서지 않고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긴다(참조. 신 32:35). 이 또한 옳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뒤를 이은 스데반은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눅 23:34; 행 7:60). 그들의 기도는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의 옳음”과 “예수님의 바람직함.” 예수님은 한 차원 높은 윤리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도 옳음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바람직함을 향하여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