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2의 천성인 인간의 죄성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렘 13:1-27)

  [활천 2001년 11월]

 

 


1. 허리띠는 허리에 있어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렘 13:11)

예레미야 13:1-11은 예레미야서에서 맨 처음으로 나타나는 상징행위를 보여준다. 구약성서에는 30여 개의 상징행위가 나오는데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이 예레미야서에 집중되어 있다. 예언자의 상징행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상징행위는 현재의 삶에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선취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즉 미래사건의 선취모사(先取模寫)이다. 둘째, 상징행위은 그 행동 자체보다는 그 행동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셋째, 상징행위는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이지, 그 자체에 어떤 마력이나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미래의 사건을 실제화하는 것은 그 자체적인 힘이 아니라, 그 행위를 명령하신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넷째, 상징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를 소개하고 표현함으로써 예언자의 메시지를 강화시켜준다.

상징행위는 보통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즉 실행명령, 실행보도 그리고 해석이다. 13:1-11의 본문도 이를 잘 보여준다. 1절의 명령과 2절의 보도[붙들어 매어둠과 꼭 붙어 있음], 또 3-4절의 명령과 5절의 보도[떨어져 나감], 또 한 번 6절의 명령과 7절의 보도 그리고 8-11절의 해석[떨어져 나감의 결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베 띠(속옷처럼 허리에서 무릎 위까지 가리는 아마포로 된 천)를 사서 허리에 두르고 물에 닿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예레미야 그렇게 하자, 하나님은 또다시 허리에 두른 띠를 가지고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틈에 숨기라고 하신다. 예레미야는 이번에도 말씀대로 행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또다시 임하였다. 다시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 감추어 두었던 띠를 취하라고 명령하신다. 예레미야가 그곳에 가서 띠를 취하니 그 띠가 썩어서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상징행위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부분은 그 행위의 뜻을 풀이해주는 본문이라 할 수 있다. 8-11절이 싱징행위의 해석부분에 해당된다. 이 부분은 세 번에 걸친 상징행위의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첫 번째의 명령과 보도(1-2절)에 따르면 허리띠를 허리에 띠고 있을 때는 띠가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예레미야가 허리띠를 허리에 붙들어 맨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꼭 붙들어 매어두셨다. 하나님이 백성을 꼭 붙들어 매어 두시고 백성은 하나님께 꼭 붙어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 명령과 보도(3-5절)에 의하면 허리띠는 예레미야의 허리에서 떨어져 나와 강가의 바위틈에 숨기게 된다. 이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 9절은 그들이 떠난 이유를 제시한다. 그들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이다. 10절은 그들의 교만이 무엇을 말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세 번째 명령과 보도(6-7절)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백성의 결과를 보여준다. 결국 허리띠는 썩어서 쓸데없는 띠가 되어버렸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징벌로 썩은 허리띠와 같이 더 이상 쓸모 없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자신에게 붙들어 매어두기를 원하신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붙잡힌 상태에서 그대로 붙어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래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고 더불어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될 수 있다(11절). 허리띠가 허리에 붙어 있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한다. 아기가 어미의 품에 있을 때 가장 평안하고 아름답듯이, 모름지기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존재이기 때문에(창 1:26; 2:7)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을 때가 가장 평안하다.


2. 포도주로 가득 채워진 항아리처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렘 13:13)

13:12-14은 예레미야가 포도주 항아리 이미지를 사용하여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예레미야는 먼저 청중들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통속적인 농담으로 시작한다. “모든 항아리(개역: 병; 개역개정: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 이 말은 술꾼들이란 포도주로 가득 채우려고 만들어둔 포도주 항아리와 같다는 뜻의 당시 유행하던 농담이다. 유다 백성들은 이 농담을 농담으로만 받아들여 농담조로 되받고 있다: “모든 항아리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12절).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 것의 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이 농담을 화제의 실마리로 삼았을 뿐 결국은 유다의 파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층들도 백성들도 모두가 포도주로 가득 채워진 항아리가 될 것이다: “야웨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13절). 즉 “포도주로 가득 채워진다”는 술꾼들의 농담은 결국 “포도주(독주)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다”는 심판의 말이 된 것이다. 유다 백성은 포도주로 가득 채워진 술독인 셈이다.

그들은 포도주에 만취하여 비틀거리고 서로 부딪치고 상대를 해치는 지경에 이른다. 자제력을 상실한 그들에게는 부모도 자식도 없다(14a절). 이 “분노의 잔(항아리)”이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은 충격이자 비극이다: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14b절). 그들에게 임할 파멸은 무자비하고 가혹하게, 그리고 일말의 동정도 없이 비극적으로 전개된다.

잔(항아리)은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그 잔의 진가는 잔 자체가 아니라 그 잔의 내용물로 결정된다. 기쁨의 포도주로 채워진 “축복의 잔”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성을 마비시켜 천륜마저 저버리게 하는 독주로 채워진 “진노의 잔”이 될 것인가? 우리 안에 출렁이는 포도주는 남을 즐겁게 해주는 “축복의 포도주”인가 아니면 자신은 물론 타인도 황폐하게 하는 “저주의 독주”인가?


3. 산고의 고통과 성폭행의 수치: “네가 고통에 사로잡힘이 산고를 겪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렘 13:22)

13:15-16은 유다를 향한 야웨의 마지막 경고를 보여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야웨의 말씀을 멸시하고 교만하고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최후통첩에도 여전히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이제 그들을 향한 멸망은 더 이상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그의 백성의 운명에 대한 깊은 슬픔만을 토로하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17절).

또한 예레미야는 왕과 왕후(실제로는 “태후”를 뜻함)도 왕의 지위에서 축출되어 평민의 신분으로 폐위되고(“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유다 백성들과 더불어 바벨론으로 유배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18-19절). 이는 아마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그의 태후 느후스다가 유다의 상류층들과 더불어 포로로 잡혀간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왕하 24:8-16). 예레미야는 그런 일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 그 재난이 닥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다.

13:20-27은 예루살렘이 당하게 될 고통과 수치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준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명령형으로 시작된다: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20a절). 여기서 “너”가 여성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루살렘 도성을 향하여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20b절)라고 추궁한다. 여기서 “북방에서 오는 자”는 바벨론 군대를 가리킨다. 또한 “아름다운 양 떼”란 유다 백성을 말한다. 추궁은 계속된다: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우두머리로 세울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네가 고통에 사로잡힘이 산고를 겪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21절). 여기에서 “친구”란 아마도 유다가 이전에 앗수르 사람들에게 대항하려고 손잡은 바 있었던 바벨론 사람들일 것이다(참조. 왕하 20:12-19). 20-21절은 한때는 친구였던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주전 597년)하거나 정복(주전 587년)했던 사건을 암시하는 것 같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그들에게 정복당한 여인 예루살렘 도성은 마치 고통에 사로잡혀 산고를 겪는 여인에 비유된다. “산고의 고통”이란 견딜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참조. 렘 4:31; 6;24; 22:23; 호 13:13; 사 26:17 등).

고통 중에 있는 유다 백성들은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22a절)하며 괴로워한다. 예나 지금이나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 때문에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또한 유다의 심판은 그들의 치부가 노출되는 것에 비유된다: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22절). “치마를 들춘다”라는 표현은 성폭행 당하는 것에 대한 완곡한 어법이다(신 22:30; 27:20; 사 47:3; 나 3:5). “발뒤꿈치가 상하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발뒤꿈치가 큰 곤욕을 치르다”라는 것으로 이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 완곡한 어법이다. “발뒤꿈치”란 생식기를 가리키는 완곡어법이다(참조. 삼상 24:3; 사 6:2 등). 예레미야는 파멸당한 여인 예루살렘의 상태를 발가벗겨지고 성폭행 당한 육체로 표현한다.

여인에게 가장 큰 고통은 새 생명을 낳을 때 겪는 산고의 고통이며, 또한 가장 큰 수치는 자신의 육체가 유린당하는 성폭행의 수치가 아닐까. 이것들은 죄의 결과로 묘사된다. 최악의 고통과 극도의 수치심을 겪게 된 유다 백성의 절규,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는 외마디는 오늘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죄의 결과는 이처럼 소름끼치는 것이다. 사소한 죄라도 결국은 죽음의 고통과 죽음으로 내모는 극도의 수치심으로 치닫게 한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지 않은가(롬 6:23)!


4. 제2의 천성으로 굳어진 인간의 죄성: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있다면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13:23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유다의 상태를 묘사한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구스인”이란 에디오피아 사람을 가리킨다. 피부가 검은 구스 사람이 그의 피부를 바꿀 수 있느냐? 물론 “아니요!”이다. 표범이 얼룩덜룩한 반점을 바꿀 수 있느냐? 이 또한 “아니요!”이다. 전혀 불가능하다.

예레미야는 말한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다면 악에 익숙한 유다 백성들도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다의 돌이킴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처벌은 불가피한 것이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무슨 변화를 일으킬 만한 능력도 그런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탄식인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27절)는 표현은 예레미야가 아직도 그들에 대하여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여전히 죄의 구렁텅이에서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고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음을 날카롭게 비난하는 것이거나 더 이상의 기대를 포기하는 체념을 의미한다.

유다의 죄성은 지속적이고 이미 굳어버린 습관이 되어버렸다. 어찌 유다 백성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모두 그러하다. 모든 인간의 죄성은 마치 타고난 것 같은 “제2의 천성”이 되어 버렸다. 성서의 인간학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롬 3:23)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의 품이라는 인류의 자궁에서 떨어져나감으로 시작된다(창 3장). 따라서 인간의 본래적인 자리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실 때 비로소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참조. 요 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