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거부당한 기도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렘 14:1-15:4)

  [활천 2001년 12월]

 

 

1. 영욕(榮辱)을 함께: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렘 14:9)

예레미야 14:1-9은 심한 가뭄으로 인한 참혹한 상황(2-6절)과 이에 대한 백성의 탄식(7-9절)이 묘사되어 있다.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야웨의 말씀이라”는 1절은 이어 나오는 14:1-15:4까지의 표제에 해당된다. 먼저 첫 번째 단락(2-6절)부터 살펴보자.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한다”(2절). 즉 유다와 그 도시들은 예루살렘과 같이 힘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통곡한다.

신분이 높은 귀인들은 관습을 따라 그들의 종을 보내어 물길으러 보냈으나 우물에도 물은 비어 있었다. 그 종들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머리를 가린다(3절). 머리를 가리는 행동은 깊은 절망감을 표현한다(삼하 15:30; 에 6:12). 농부들도 땅에 비가 오지 않아 밭이 갈라지니 깊은 절망감에 그들의 머리를 가린다(4절). 들의 야생동물도 고통을 겪기는 매한가지다. 특히 야생 암사슴이 새끼를 낳았지만, 풀이 없어 새끼에게 젖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자기 새끼를 내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5절). 마찬가지로 들나귀들도 벌거벗은 언덕에 올라 배회하면서 늑대처럼 숨을 헐떡이는데 그 눈동자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6절). “힘이 풀려버린 눈”이란 죽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꼼짝도 못하게 된 눈을 묘사하는 것이다.

유다 백성이 처한 가뭄의 현실은 비어 있는 우물(물이 없음), 말라버린 초원(비가 없음), 그리고 기아로 죽어 가는 야생동물들(풀이 없음)의 묘사로 더욱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가뭄은 사람들(귀족과 농부)뿐 아니라 온갖 들짐승들과 초원 등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고 있다.

두 번째 단락(7-9절)은 이러한 가뭄에 처한 백성들의 탄원을 보여준다. 이 탄원은 다음에서 보는 바같이 공동체 탄원시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탄원시가 외견상 백성들이 행한 탄원시로 보이지만 현재의 맥락에서는 탄식 예배에 참석한 예레미야도 이 백성과 함께 그들을 위해서 야웨 앞에서 기도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이 민족의 죄악들을 고백하면서 이 민족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것이다(참조. 11절).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 즉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이 백성을 가뭄에서 구원해달라고 간구한다(시 25:11; 79:9; 109:21 등).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시고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가 아니신가(8a절).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 거하는 나그네(게르)같이, 오직 하룻밤 잠시 묵고자 들른 길손처럼 이토록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관심하신가(8b절). 어찌하여 하나님은 놀라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위기에서 구원할 힘이 없는 용사처럼 되셨는가(9절)!

예레미야는 자신의 민족이 가뭄으로 생존권에 위협을 느낄 때, 그들의 탄식 예배에 참여하여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한다. 자신도 그 죄를 함께 짊어지고 통감한다. 비록 유다 백성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지라도 그 백성들의 운명에 자신을 예속시킨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모름지기 그가 상대해야 하고 섬겨야 할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지 그와 영욕(榮辱)을 함께 하는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2. 입술예배(lip service)가 아니라 손발예배(life worship)를 보시는 하나님: “그들이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야웨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렘 15:10)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탄식 예배 때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간구로 끝나면 이어서 제사장이나 성소 예언자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임박한 구원을 선포한다. 다음 단락인 예레미야 14:10-12이 바로 이 부분 즉 하나님의 응답에 해당된다. 그런데 그 응답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정반대이다: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12절). 이 대답은 구원이나 위로가 아니고 심판이다. 그들은 가뭄의 극복을 위해서 탄원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기근의 지속뿐 아니라 칼과 전염병의 심판을 더 가중시키신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가혹하신가? 유다 백성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였기”(10a절)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탄식 예배 때 자신들의 죄악(아온)과 범죄(하타)를 자백했지만(7절), 그들의 삶은 죄악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술(예배)과 손발(삶)이 따로 움직이는 고질적인 이중적인 삶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들인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예레미야에게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11절)는 중보기도의 금지령이 또다시 떨어진다(렘 7:16; 11:14).

삶의 고백으로 실천되지 않는 회개는 거짓 회개이다. 하나님은 예배 때의 고백(lip service)에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다. 그 고백에 합당한 삶(life worship)을 살고 있는지를 살피신다. 하나님의 눈은 거짓된 경건의 가면 이면에 숨겨진 본래의 얼굴을 꿰뚫어보고 계신다.

 

3. 백성도 거짓 예언자와 동일한 운명: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렘 14:15)

예레미야는 이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금지 당한다. 아마도 그의 내면에는 인간적 감정(동족을 위한 중보사역)과 하나님의 명령(중보사역의 금지)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갈등이 표출된 것인지 모르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이 백성 편들기를 시도한다. 이 백성들은 헛된 구원을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현혹되었다는 것이다(13절). 이 백성들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피해자라는 점을 감안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점에 대해서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14절). 그들은 야웨의 이름으로 설교(예언)하지만, 그들의 설교는 거짓이다. 그것은 기만적인 계시이며 헛된 점술이며 스스로 꾸며낸 속임수에 불과하다. 예레미야서 안에서는 처음으로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구분이 분명히 명시된다. 결국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의 판결이 선고된다: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다”(15절).

그런데 이러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받아들인 백성들은 어떤 판결을 받았는가? 의외로 이 백성들에게 내려진 판결도 그들이 선호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그것과 같다: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16절). 유다 백성들은 장사지내줄 자도 없이 예루살렘 거리에 내던져질 것이다(렘 8:2).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장되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가장 무서운 운명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한 심판이 아닐까? 잘못된 판단과 선택 때문에 감당해야 할 심판치고는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백성의 심판은 단순히 그들이 거짓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악행도 거짓 선지자 못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16절)고 말씀하신다. 백성들은 심판의 책임을 다른 선지자에게 미룰 수 없다. 그들의 실제적인 삶이 이미 체질화된 악행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10절).

청중이 듣기 원하는 설교만을 하는 선지자는 다수의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와 그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풍성한 복채에 길들여져 있고, 하나님의 법도보다는 세상적인 처세를 따르며 출세한 청중들은 그들의 세상살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정해주고 복을 빌어주는 선지자의 설교에 큰 위로와 은혜를 받는다. 이들은 상부상조(?)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대책 없는 책망의 설교도 문제지만 근거 없는 위로의 설교도 문제이다. 책망이 없는 위로는 물론이고, 위로가 없는 책망도 불완전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중심을 잡아가도록 선포자뿐 아니라 청중도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선포자와 청중은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거절할 때까지: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렘 15:1)

유다 백성이 겪고 있는 가뭄으로 인한 굶주림의 고통은 훨씬 더 심각한 재앙의 조짐에 불과하였다. 하나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12절). 이런 상황을 생생하게 미리 내다보고 있는 예레미야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17절). 들에 나가면 칼에 죽은 자들로, 성읍에 들어가면 기근으로 병든 자들이 널려 있다. 엄청난 재난 앞에서 사태를 수습하고 선도해야 할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도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18절).

백성들의 탄원의 절규가 다시 한 번 터져 나온다(19-22절). 이번에도 예레미야는 그의 동족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탄원한다. 그런데 두 번째 탄원은 첫 번째 탄원(7-9절)보다 훨씬 절실하다. 두 번째 탄원의 죄의 고백에는 “조상의 죄악”까지도 포함되고(20절), 신뢰를 고백하는 것도 좀더 절실하다: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나이다”(22절). 하나님이 개입해주셔야 할 근거도 단순히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만 아니라 “주님의 영광의 보좌(예루살렘)를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위해서”라는 이유도 첨부된다(21절). 하나님이 구원해주셔야 할 온갖 근거가 총동원된 듯싶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종적인 대답은 단호하다: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15:1). 모세와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상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중재한 가장 위대한 중보자로 통한다(시 99:6). 그러나 이제는 모세와 사무엘이 함께 동원되어도 더 이상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구원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 누구의 기도도 더 이상 들으시지 않는다(참조. 렘 7:16). 당연히 탄원 예배를 드리려고 성전 앞뜰에 모였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야 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기도 때문에 쫓겨나야 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백성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 칼, 기근 그리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밖에 없었다(2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백성을 위해서 더 이상은 기도하지 말라는 최후의 통첩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였다(15:1). 예레미야 14장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그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끊임없이 중보기도하는 자였다. 민족을 위한 예레미야의 끈질긴 중보사역은 실로 감동적이다. 중보사역은 한두 번 해보고 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이라면 모름지기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