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성화 여정 가운데

페터레인 체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박창훈 |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역사학)

 

존 웨슬리의 신학은 한 마디로 구원론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구원론의 내용은 중생(신생)과 성화(성결)이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여정을 통하여 이를 직접 검증하고(때로 수정하고) 가르쳐서 그를 따르는 이들이 직접 체험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웨슬리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학자에 따라 상이한 견해가 나타나는 것도 웨슬리 자신의 체험에 대한 고백과 설명이 때로 수정되고 보완되기도 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래서 어떤 시기의 웨슬리의 생각을 어떤 입장에서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는 웨슬리의 설교, 일지(Journal), 일기, 편지, 소논문 등을 해석자가 나름대로 취사선택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해석자 자신의 전통과 입장을 통해 웨슬리를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만큼 넓고 풍부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성결교회는 어떤 입장에서 웨슬리에 대한 해석을 해 왔는가?

성결교회는 웨슬리가 평생 추구하던 성서에 나타난 성결(성화)의 모습을 신자들이 세상을 사는 동안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는 것과, 이는 회심과 구분되는 이차적 사건으로 순간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이러한 전제에서 웨슬리의 신앙의 여정을 살펴보면, 웨슬리의 신앙의 삶 자체가“구원의 길”(Ordo Salutis)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된다.

“구원의 길”에는 크게 중생(신생)과 성화(성결)의 큰주제 안에 각각의 이전과 이후에 해당하는 중생 이전, 중생 이후, 성화 이후 등 세 가지의 상태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웨슬리 학자들은 웨슬리의 생애를 각각 이“구원의 길”각각의 단계에 대응하여 일치시키는 해석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웨슬리 자신의 고백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즉 특정한 시기의 웨슬리의 주장과 고백과 간증이 각 단계(중생 이전, 중생 이후, 성화 이후 등)의 전형적인 내용과 설명으로 이해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체험이다.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그리스도만이 구원이시며, 그분이 나같은 죄인의 죄를 사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일지에 적고 있다. 여기서“올더스게이트에서 체험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또한 올더스게이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후의 여러 체험에 대한 해석도 달라지게 된다. 결국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첫 단추를 바로 끼워야 하듯이 먼저 있었던 체험, 좀더 많은 설명이 남아 있는 체험, 그리고 그 내용을 좀더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체험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페터레인(Fetter Lane) 체험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다름 아니라 올더스게이트에 대한 해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1738년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이전과 이후의 영적 순례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청교도적 시각이나 부흥운동의 측면에서는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웨슬리의 회심으로 본다. 즉 1738년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통해 웨슬리는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견해다. 이 경우 1725년 웨슬리의 변화를 윤리적이고, 교리적이며, 성례전적인 회심으로 이해하는 한편, 1738년의 체험을 복음주의적인 회심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즉 1738년 이전은 중생 이전의 상태가 되고, 1738년 이후는 중생 이후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1738년 이후 웨슬리가 언제 또 다른 축복, 즉 성결의 상태에 도달했는가?”에 대한 부차적인 궁금증을 일으킨다.

또 다른 견해는 1738년 올더스게이트에서 웨슬리가 성결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맥키(A.C. McKee), 피터 젠트리(Peter Gentry), 데이빗 큐비(David Cubie), 롭 스테이플스(Rob Staples) 등 최근의 성결운동 내부의 주장이다. 이들은 웨슬리 전체의 삶을 통해 볼 때 올더스게이트 체험만큼 자세하고 소상한 기록이 없다는 점, 이후에 웨슬리의 변화가 현격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올더스게이트를 웨슬리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순간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견해를 따를 경우, 1738년 이전에 이미 웨슬리가 회심하고 중생한 표가 나타났다고 주장해야 하는 난처함이 함께 따른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어떤 이는 1725년에 웨슬리가 회심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1725년부터 1738년을 전체적으로 회심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1738년 회심과 성결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제 올더스게이트 체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페터레인에서의 체험을 이해하기 위해 웨슬리 자신의 고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웨슬리는 한 번도 자신이 성결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밝히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후세들의 어려움은 점점 커진다. 여기에 올더스게이트 체험에 대한 웨슬리 자신의 견해가 변화와 수정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문제를 점점 미궁으로 몰고 있다. 사실 올더스게이트 직후, 젊은 웨슬리는 설교와 고백을 통해 1738년 이전에는‘비그리스도인’이었는데, 이후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노년의 웨슬리는 1738년 이전에 종의 믿음이었으나, 비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어린아이의 믿음’이었다고 수정하고 있다.

1738년 올더스게이트에서의“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그리스도만이 구원이시며, 그분이 나 같은 죄인의 죄를 사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라는 웨슬리의 고백은 구원의 믿음에 대한 진술이다. 그리고 믿음은 확신을 동반한다는 분명한 진술이다. 이는 분명히 중생과 연관된 진술이다. 물론 당시 모라비안의 영향을 받아 웨슬리는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영적 행복의 상태를 기대했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로도 웨슬리에게는 영적인 침체와 좌절이 간헐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러고 난 후 1739년 1월 1일 페터레인에서“(새벽) 3시쯤 우리가 계속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우리 위에 임하였고, 많은 이들이 넘치는 기쁨으로 소리를 높이고, 많은 이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전능하신‘하나님의 현존’앞에 이러한 경외와 놀라움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우리는 한목소리로 외쳤다. ‘오 하나님, 우리가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주님 되심을 압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에서 중생의 체험에 가장 중요한 구원의 확신을 얻었고, 이후로도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찾고,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단서를 주는 학자는 바로 리처드 하이젠레이터(Richard P. Heitzenrater)이다. 그는 웨슬리의 일지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올더스게이트 이후에도 웨슬리의 영적인 순례가 끝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1738년 이후 1746년 즈음이 되어서, 웨슬리가 모라비안 식의 구원(단번에 동시에 이루어지는 중생과 성화) 이해를 부정하였고, 중생의 순간으로부터 시작되어, 이후 분명히 구분되는 성화의 과정을 통한 전체적인 구원의 길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페터레인 체험을 또 한 번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것으로 주목하고 있다. 즉 웨슬리 자신의 일지를 따라 살펴보면, 실제로 페터레인에서의 체험은 성령의 충만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고, 이후 웨슬리의 분명한 신앙과 사역의 변화를 동반했다. 우선 1739년 정초의 이 체험은 웨슬리의 개인적인 차원의 체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여럿이 동시에 체험한 것이다. 함께 간절하게 기도할 때, 집단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도 올더스게이트의 체험과분명히 다르게 작용했다. 다시 말해 페터레인의 체험은 웨슬리 사역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웨슬리의 설교 청중이 숫자에 있어 늘어나기시작했다. 당장 1월 10일 웨슬리는 비치레인(Beech Lane)에서 500-600명의 청중 앞에서 설교를 했다. 즉 웨슬리 자신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이전까지는 특별히 없었던 청중들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2월 25일에도 성 캐서린 예배당(St. Katherine)에서 많은 청중이 웨슬리의 설교를 들었음을 알리고 있으며, 3월 11일 더머(Dummer)에도 다수의 청중이 함께 했다. 이틀 후 화요일에는 옥스퍼드에서 더 많은 이들이 그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더욱 기뻐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둘째, 늘어나는 청중, 그러나 영국국교회에서는 더욱 비협조적인 것에 도전받은 웨슬리는 휫필드의 조언을 따라 조심스럽게 새로운 형태의 설교방법을 실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옥외설교(Field Preaching)였다. 옥외설교가 국교회 전통에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이었기에 웨슬리는 오히려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셨다는 것이 옥외설교의 효시라는 확신과 함께 4월 2일 옥외설교를 시작했다. 옥외설교는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가난하고 억눌리고 병든 사람들, 특히 탄부와 광부와 농부와 도시 노동자들에게로 다가가 전도한다는 근대적 전도방법이었다.옥외설교가 웨슬리 부흥운동의 특징으로 자리 잡자 웨슬리의 설교를 듣는 청중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셋째, 페터레인 체험 이후, 구체적으로는 옥외설교 실시 이후, 웨슬리는 자신의 사역지가 영국의 전지역으로 확대되었음을 밝혔다. 그의 친구 존 클레이튼(John Clayton)에게 쓴 편지에서, “세상이 나의 교구이며, 구원의 복음을 듣기 원하는 이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 생각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남의 교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대한 국교회의 비난과 감시에 의식적으로 대항하였다.

넷째, 웨슬리에게 더 많은 사역자를 필요로 하게 되면서, 평신도 설교자를 인정, 파송하는 일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목회적인 사역에 도움의 손길이 긴요함을 느꼈던 웨슬리는 영적인 필요에 따라 평신도 가운데 그를 도울 사람을 찾았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것은 1739년부터 은사가 나타나는 성령의 사역이 더욱 자주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웨슬리는‘능력’(power)이라는 설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옥외설교가 시작되고 나서는 웨슬리가 거리에서 설교할 때 사람들이 지옥과 같은 고통 가운데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기쁨과 사랑을 체험하는 일들이 더 자주 보고되었다. 1744년 12월 24일과 25일도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웨슬리가 스노우필즈(Snowfields)에서 기도문을 읽고 있을 때, 그는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빛과 능력을 깨달았다. 그리고 웨슬리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을 낱낱이 떠올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였고, 25일 아침 성령과 함께 깨어 하루 종일 경이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였다.

1762년 10월 28일에는 영국 전역에서 성화된 이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찬양하며, 그 구체적인 예로 성화되어 숨을 거두는 여인의 임종을 지켜보면서,웨슬리는 성령의 충만을 고백하고 있다. 특히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감사와 찬양의 모습을 통해 성령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웨슬리의 신앙여정에 있어서 구원의 확신을 동반한 중생의 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의 웨슬리는 성화를 시작한 기간으로 볼 수 있고, 웨슬리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순간으로 추측할 수 있는 순간이 그 후로 몇 차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웨슬리는 계속되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성령의 충만을 반복적으로 체험했으며, 이는 단순히 웨슬리의 개인적인 고백을 넘어 실제적인 변화와 능력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올더스게이트를 통해 촉발된 성령의체험은 웨슬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동기가 되었고, 페터레인 등의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은 젊은 날의 웨슬리의 고백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관조적인 노년 웨슬리의고백에 따를 것인가라는 입장에서, 모라비안이나칼빈주의와 구분된 독특한 신학을 펼치며,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변화된 모습으로 뜨겁게 부흥운동을 주도하던‘젊은 날의 웨슬리의 모습’이 우리 성결교단의 입장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활천 2010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