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학공부와 신학하는 입장

조종남(에모리 대학, 조직신학, 서울신대 학장 역임)


I.  나의 경력과 저서

1. 나는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황해도와 평양북도에서, 고등학교는 평북 신의주와 경기도 개성에서 마쳤다. 대학과 산학 공부는 서울과 미국에서 했다. 서울신학교, 숭실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60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62년에 애즈베리 신학교에서 석사학위(M.Div.)를 받고, 1966년에 에모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 성결교회의 교역자로서 목회를 담당하기도 했지만, 주로 서울 신학대학에서 봉직하다가 떠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이리노이 주에 있는 올리벳 나사렛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는 나에게 좋은 훈련기간이 되었다.

1967년에 귀국하여 모교인 서울신학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서울신학대학은 42세인 나를 학장으로 선임했다. 선임통고를 받은 후 고민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그 결정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통 18년간 학장으로 시무하였다. 현재는 학교법인 명지학원의 이사와 선교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 내외 타 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아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중국 (대만) 고급 웨슬레 신학원 강사로, 그 후 감리교 신학대학, 나사렛 신학대학, 중앙신학교 강사, 미국 애즈버리신학교의 방문교수(1993,1995년), 미국 아쥬사 패시픽대학교의 방문교수 (1980,1981,1994,1998년), 그리고 1989년에는 일본 교회들이 연합해서 주최하는 성결대회의 주강사로, 또한 명지대학교 교수, 교목실장, 인문사회대 학장 (1984-1988)등으로 봉사하였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1970-1971),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이사장(1990-1992), 대한성경공회 회장(1975-1976),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신학위원회 부회장(1976-1983), 로잔 아세아교회지도자대회 대회장(1987,1992,1997), 서울올림픽 전도협의회 회장( 1986-1988),

한국스포츠선교회 회장 및 명예회장,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 부회장 및 회장 (1990-1994), 한국복지재단 이사(1976-), 한국 웨슬리학회 회장(1997-) 등.

특히 세계복음화 로잔 운동에는 처음부터, 중앙상임 임원, 신학분과위원, 아세아 위원회의 임원 등, 1974년부터 현재까지 깊이 참여하고 있다. 현재, 국제 위원회의 부회장(1992-), 아세아 위원회의 회장직(1987-)을 맡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 교회 특히 미국과 카나다, 독일 등 해외에 있는 여러 한인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나 자신이 성결교회의 목사이기에, 신학대학교에서 일하는 외에도 교단의 일에도 관여하여, 총회에서 신학교육부장, 고시위원, 선교부장, 지방회에서는 인사부장 등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일관한 주요한 사역은 가르치는 일과 설교 또는 부흥회를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의 신학적 입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설교, 전도와 연결되지 않는 신학은 죽은 신학이라고 보며, 산 신학은 선교의 도장에서 개진되고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2. 그간 출판한 저서 및 역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요한 웨슬레의 신학(1984, 1993 개정중보판), 로잔 세계복음화 운동의 역사와 정신(1991), 전도와 사회참여(1986),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사중복음(1991), 웨슬레의 선교운동의 특징(1991), 웨슬레 신학의 메니페스트(일본어판/1989),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사중복음의 유래(1998). 로잔 언약(1986), 스나이더, 혁신적 교회갱신과 웨슬레(1987), 요한 웨슬레 성경주해(1990), 복음과 문화(1991), 도날드 덴톤, 오순절신학의 신학적 뿌리(1993), 웨슬레 설교선집(1994), 켄 부루, 하나님의 병 고치는 권세

II. 내가 신학을 하게 된 동기

나는 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일제 말엽에 성결교회의 교역자의 아들로 성장하면서 교역자들의 생활의 어려움을 목격한 나는 교역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도리어 교회에서 집사나 장로가 되어 교역자를 도우면서 교회를 섬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젊은 시절에 교회의 집사가 되어 주일학교, 찬양대, 청년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러던 중, 해방 직후 있었던 한 부흥집회에서 주님을 극적으로 영접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어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내 나이 22세로 신한공사 금융출장소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직장을 정리하고 신학교에 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돈을 모아서 공부할 학비와 졸업 후 교역자 생활을 할 때도 자신의 생활비는 확보하여 소신 것 일하고 싶다고 하나님께 시간 여유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3년이 지연되었다.

1949년 9월에 서울에서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함으로 나는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해 6.25 사변이 일어남으로 공부는 중단되었고 1.4 후퇴로 가족은 북역에 남고, 나는 일선에서 종군하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일년간 배운 영어 덕택으로 미군부대의 통역관으로 일선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신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복교할 의사가 없었다. 그 당시 나의 생각은 전쟁이 한창이니 전쟁이나 끝난 다음 형편을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시던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치시기 시작하셨고 나는 소명에 대한 불신을 회개하고 다시 학교에 복교했다. 이 때에 나를 깨우친 성경말씀은 로마서 4장 18-24의 말씀이다.

나는 부산에 내려와 열심히 공부했다. 전쟁 중 생사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들은 나의 신앙을 돈독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나로 하여금 좀더 뜨거운 신앙의 분위기에서 공부하고 싶은 소망을 갖게 하였다. 곧이어 나는 서울 신학교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열심히 기도하며 공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시련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징집 해당 연령도 아닌데 나는 군대에 소집당하여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신학공부는 다시 중단되었다. 나는 그 상황에서 또 다시 의심에 빠졌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소명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인가, 전쟁터에서 부산으로 내려 올 때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지시였는가, 아니면 나 혼자만의 착각으로 환상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부르심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그러나 진실하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나를 또 찾아와 주셨다. 내가 경주에 있는 육군병원에 와 있을 때였다. 하루는 아침에 병원 뜰에 있는 꽃밭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부르신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었다. 얼마 후 나는 제대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신학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사역자로 부르신’소명의식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바울이 말한 대로, '너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산전5:24)’라는 믿음에 굳게 서게 되었다.

나는 1956년에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였다. 6.25가 지난 직후 몹시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를 했으나, 그런 시련 끝에 얻은 확신이 있었기에 닥치는 많은 어려움도 이길 수 있었다. 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도우심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III. 나의 신학 공부

1. 신학을 어떻게 공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신학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감리교 신학교에서 서울신학교로 옮겨, 서울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였다. 신학교에서는 학생 시절부터 미국인 교수의 강의통역을 했다. 신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기에 유학준비를 하였다. 숭실대학에서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유학생 시험도 치렀다. 1959년에 교단에서 목사 안수도 받았다. 하지만, 가족을 대책 없이 남겨놓고 유학을 간다는 것이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가지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60년 9월에 주머니에 미화 100불을 가지고 미국으로 행했다.

처음 간 곳이 켄터키 주에 있는 애즈베리 신학교(Asbury Theological Seminary)이다. 이 신학교는 미국에서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이 학교는 세계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선교사를 많이 배출하는 신학교로 이름 나 있었다.

이 신학교의 교육이념은 복음주의적 웨슬레 신학 입장에서 고도의 학문과 가슴 뜨거운 신앙 체험의 조화를 이룬 성령충만한 사역자를 온 세계로 보내는 데 있었다. 그리고 학과정 관리는 철처한 커부시스템을 적용하며 아주 엄격했다. 이 신학교의 채플과 기도의 분위기가 대단히 은혜스러웠다. 기도실에 들어가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학기초에 전교생이 산 깊숙한데 자리 잡은 수양관에서 가진 수양회(부흥회)는 참으로 은혜스러웠다. 그 때 받은 은혜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당시의 애즈버리 신학교의 학풍과 분위기를 고맙게 여겼다. 내가 다닐 때의 서울신학교에서는 경건 생활을 강조하였지만, 그에 따르는 고도의 학문성이 없어서 아쉽게 생각하던 나였기에 경건성과 함께 고도의 학문이 겸비된 애즈베리 신학교의 학풍에 나는 만족하였다. 나의 신학교육의 이념도 여기서 그 기초가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그 분위기에 잘 어울리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졸업할 때는 이 학교 역사이래 성적에 있어 최고의 기록을 냈다고 광고를 듣게 되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이 모교와 늘 관계를 갖게 하는 사연이 되기도 했다. 나는 1993년과 1995년에 비손 국제 학자 석좌교수(Beason International Scholar)로 초빙되어 강의했다. 그 인연으로 현재까지 애즈베리 신학교의 개원교수의 일원(adjunct faculty)으로 내 이름이 신학교 카다록에 수록되어 있다.

2. 나는 애즈베리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교수들의 권면으로 박사과정을 하게 되었다. 이는 내가 미국에 갈 때에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ersity)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하여 1966년에 학위(Ph.D.)를 받았다. 동양사람으로는 최초의 박사라고 한다.

내가 에모리 대학교를 선택한 것은 내가 전공하려는 웨슬레 신학의 권위자인 케논박사를 위시하여 웨슬레 신학자가 4명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에 28명이나 되는 신학 교수들이 다 웨슬레신학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교수들의 신학적 입장은 다양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하는 올타이저(Altizer)박사도 있었으니 말이다. 세계의 신학파를 모두 축소해다 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이런 환경은 처음에 나를 당혹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거칠게 부는 파도 속에서 세미나를 하기에, 나의 복음적 신학입장이 사면으로부터 비판과 도전을 받았다. 또한 그 파도 속에서 중심 없이 흔들리는 신학도들의 모습과 고민상도 목격했다. 그러나 나는 그 파도 속을 거쳐 나오면서 많은 연단을 받았다. 진주가 무거운 압력과 마찰을 거쳐서 귀중한 진주로 형성되어 나오듯이, 나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복음적 신학의 고귀함을 새삼 느끼면서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IV. 나의 신학적 입장

에모리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기 전에 치르는 종합 필기시험과 구두시험이 있다. 이를 위한 준비는 시간이 걸린다. 여기에 나는 나의 신학적 입장, 곧 신학의 권위, 출발점과 방법론을 정립해서 발표해야만 했다. 그 곳은 교수들의 입장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나는 여러 신학적 입장에서의 비판과 도전을 받는 가운데서 나의 입장을 발표하여 그들(시험관)의 인정을 받아 합격을 하여야 했다. 내 신학적 접근이 보수적이라는 것 때문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환경에서 나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나의 신학은 요한 웨슬레의 신학접근 방법을 틀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신학적 접근 방법과 입장을 정리하는 데는 많은 현대 신학자들의 영향과 도전을 거쳤으며, 또한 그들에게서 많은 도움도 받았다. 나의 교수님들, 특히 웨슬레신학의 대가이신 캐논박사, 톰손 박사님의 지도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면 간략하게 말해서 나의 신학적 입장은 어떤 것인가?

1. 성경에 근거를 두는 신학

나의 신학의 근거와 원천은 성경이다. 그러므로 나의 신학에서는 성경에 대한 견해와 해석의 원리가 중요하다. 나는 성경의 말씀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에 있어 오류가 없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이런 신앙은 바로 내가 서울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성결교회 목사님들을 통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나의 성경관은 에모리 대학원에서의 세미나 시간에 날카로운 비판과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성결교회에서 나에게 전수해 준 전통이기에, 가볍게 버리지 않고 그 도전에서 나의 성경관을 학문적으로 다듬어 나의 고백이요 신학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런 과정에서 오스카 클만의 구속사적 접근과 죠지 래드의 성경신학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웨슬레가 말했듯이,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케 하신 바로 그 성령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신자에게 영감으로 도와주신다. 성령께서 이와 같이 증거 하실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의 권위를 믿을 뿐 아니라, 성경의 능력 (Authority and Power of the Holy Scriptures)을 믿는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을 통하여 신자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로잔 언약을 통하여 세계 교회의 대다수의 교회 지도자가 믿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는 통일성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경으로 풀이 할 뿐만 아니라, 성경구절 가운데 불분명하거나 애매한 것들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큰 원리 곧 중요한 교리(예를 들어, 이신득의<은총으로 인한 구원>, 예수가 온 인류의 구주요,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교리 같은 것들)에 조화를 이루도록 풀어 나가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의 통일성(Unity)을 믿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앙이 개인의 주관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공통적인 증거 곧 교회의 전통(신조)을 존중한다. 이것이 바로 웨슬레가 취했던 접근 방법이다.

2. 거룩한 하나님의 은총 (Responsible Grace)을 강조하는 신학

웨슬레는 전통적인 교회의 맥락에 서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웨슬레 신학은 정통신학이다. 그러나 칼빈, 루터 또는 다른 신학자들과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주로 어떤 신학개념을 근간(orienting concept)으로 삼고 신학을 전개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예를 들어서, 루터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득의가 그의 출발점 (orienting concept)이었다. 칼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곧 하나님의 영광이 중심 개념이었고, 최근의 어떤 신학자에서는 '해방의 개념' 또는 '과정 (process)의 개념이 중심이 되어 신학작업을 이론적으로 전개하였다. 나는 그런 신학적 전개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이 추상화되거나, 또는 신앙생활과 선교상황에 걸맞지 않는 취약점을 들어내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웨슬레는 그의 신학을 설교의 도장에서 전개하였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되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로 인하여 그 후에 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는 호응(response)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호응을 기대하는 은혜(responsible grace)로 이해하며, 신학을 인격적 대화적 관계에서 개진함으로 전자들의 약점에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에 적응성 있는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웨슬레는 성경이 주장하는 대로, 죄로 인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주장하면서도 구원과 선교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을 인정하는 놀라운 은총관(곧 복음적 협동설- Evangelical Synergism)을 수립하였다. 이런 접근 방법이 나에게는 큰 매력(lure)이었다.

이에 나의 신학작업에서의 중심사상(Orienting concept)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웨슬레가 그랬듯이 'Responsible Grace'이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나는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람을 향한 구속의 은총을 사랑으로 이해하게 될 때, 이 은총은 이론적이며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인격적(personal)인 것으로, 그 은총은 인격적인(personal) 호응(response)을 기대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인류가 범죄로 인하여 정죄 당할 때, 동시에 은총의 손을 뻗치신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선행적 은총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총에 호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근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강조하며 동시에 그 은총에 대해 믿음으로 호응하라고 설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구원은 신분상의 성결 뿐 아니라 주관적인 성결을 포함한다. 내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은혜는 값비싼 은혜일 수가 없다. 따라서 구원론은 성결사상을 중심으로 한다. 성결교회는 바로 이 성결의 도리를 웨슬레가 가르친 대로 전파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삼고 있다. 더 나아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재림과 신유를 전파함이 성경적 성결운동에 큰 도음이 된다고 믿어, 성결의 도리와 아울러 사중복음을 전파함을 강조한다. 이는 귀중한 전통이다. 세계복음화 로잔운동에서 온 세계의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기를 외치고 있다. 이는 바로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이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성결을 중심한 신학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을 말로 행실로 그리고 능력으로 증거하는 선교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3. 선교적 신학

위에서 말했듯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신학은 선교로 직결되며 또선교를 뒷받침한다. 신학은 선교적 신학(Missionary theology)이라야 한다.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오늘의 상황에 적응성 있게 해석하고 설명하여, 듣는 자가 깨닫고(회개) 호응(믿음)하도록 인도하 는데 그 중요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웨슬레는 가슴 뜨겁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고 나니, 그 감격으로 인하여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학은 바로 이래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세계복음화 로잔운동에 깊이 관여하면서, 이런 확신을 더욱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오늘에 요망되는 신학자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신학자인 동시에 전도자 곧 'Theologian-Evangelist'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신념에서 나는 신학도이면서 늘 설교와 전도집회 또는 부흥회를 인도하곤 한다.

4. 신앙체험이 따라야하는 신학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흥분과 감격이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신학의 대상(Subject)이 고상하지 않는가? 박사과정을 하면서 가끔 철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학도와 함께 세미나를 가진 적이 있다. 그들은 만사를 의심하고 사색하느라고 회의(懷疑) 속에서 고민한다. 확신 있는 결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모두 상대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학은 확실한 데서 시작하며, 확실한 결론으로 끝난다. 이 진리가 체험적으로 수긍될 때 신학도에게는 감격이 있고 신학은 진리선포로 연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격과 그 은총과 진리를 남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을 때 신학은 아주 의미 있는 학문이 된다. 그러므로 신학은 기도하는 가운데 공부하여야 하며, 선교하는 상황에서 개진하여야 한다. 깊은 신앙이 있는 신학도에게 신학은 참으로 재미가 있고 '아멘'을 불러일으키는 학문이다. 나는 강의실에서 이 사실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나는 신학이 그의 신앙체험에서 이해되며 또한 확인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계시(곧 말씀) 그리고 신학 언어는 인격적인 언어(personal language)이기에, 인격적인 호응, 곧 체험을 통하여서만 이해되는 것이다. 신학은 이성의 논리로 추리하는 학문이 아니다. 이런 접근방법을 이해함에 있어 영국의 죤 매쿠머리(John Macmurray)의 실존적 인격주의 또는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의 관계(I-Thou Relation)에서의 접근 방법은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기에 신앙 체험은 중요한 것이다. 곧 Orthodoxy가 Orthopathy로 체험될 때, 확실한 Orthpraxy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닌가? 서울신학교에서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시던 노교수들의 마음이 이해된다.

5. 나의 신학도로서의 모토

마지막으로 나는 신학을 하면서 나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성구를 나눔으로 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나는 신학을 시작하면서 베드로전서 3:15-16의 말씀을 모토로 삼았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 말씀은 신학도에게는 세 가지 훈련(Discipline)이 항상 있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누구에게나 언제나 설명할 수 있도록 부단히 공부하여야 한다. 케리그마, 곧 복음에 관하여, 오늘의 상황(Situation)에 관하여, 그리고 복음 전달의 기술(Communication)에 관한 것들을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두 번째로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수양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유식한 신학도가 되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도덕성이 무너지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늘 있어야 한다. 들판에 세워진 풍차가 아름답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 찬란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 풍차가 풍차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는 위에서 흘러 나려오는 물결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듯이, 신학도는 하나님의 영과의 교분이 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신학을 하여야 한다. 이런 훈련들을 계속 할 때, 신학도는 부끄럼 없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것이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