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강단에 바란다

 

I.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에 선포하게 되기를!

설교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만 동시에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설교하는 나 자신이 이 글을 쓰기가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설교자 나 자신을 향한 권고이며 바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킨로우(Denis F. Kinlaw)목사가 빌리 그래함 센터에서 설교에 관한 특강을 하면서 말씀한 간증 한 토막이 생각납니다. 이분은 아즈베리 대학의 학장을 오랫동안 지내신 분으로 훌륭한 설교자입니다.

그가 부임한 교회에서 처음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하고 열심이 설교를 하였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설교를 대단히 잘 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데 라이드버그(Otto Reidberg)라는 신사가 따로 만나 뵙고 싶다고 하드랍니다.

아마 설교를 잘 했다고 칭찬과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것인가 보다 하고 그를 따로 만나 반갑게 악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신사는 손을 잡은 채로 하는 말이, "목사님, 당신은 갈급한 영혼을 도울 줄 모르시는 군요. 하나님이 그리 유식한 말을 좋아하시나요?"고 하드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킨로우목사님은 입을 벌린 채 턱을 숙이고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답니다. 그 신사는 이어서 말하기를, "목사님, 우리는 사람의생각하는 것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듣기를 원합니다. 집에 가셔서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때까지 기도하면서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우리들에세 말씀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드랍니다. 킨로우목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당황하였었는지 어떻게 대화를 마치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신사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 마자 무릎을 꿇고 성경말씀을 새로운 시각에서 진지하에 읽어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킨로우박사는 말합니다. 이 때의 충격과 교훈이 그가 신학교에서 배운 설교학의 전부보다 더 유익했다고 합니다.

바라기는 오늘의 교회 강당이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며 선포하는 강당이 되었으면 합니다. 설교한다는 말이나, 전도한다는 말들 자체가 주어진 메시지, 또는 복음을 전달하며 선포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설교는 개인의 생각이나 학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에 말씀되어져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세상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세상이야기나 오늘의 현실상황 그리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恨)이나 희망 등을 말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이야기나 또는 사람의 체험담이 주제가 된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교회 강당을 살펴볼 때 시정되어야 할 점이 적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은 설교자의 체험담, 세상에서 일어났던 감동적인 이야기, 여행기등을 들으면서 감명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듣는 자의 귀를 즐겁게하기 위하여 설교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의 텍스트가 오늘의 상황이나 듣는 이들의 삶에 부닥치게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딤후 4:2).

사도 바울께서 일찍이 목회자 디모데에게 권고하셨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이어서 경계하시기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하였습니다.

2. 성경의 진리에 입각한 강해설교를 많이 했으면 합니다.

설교자는 공부를 많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오늘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명이 있기에, 설교자는 지식적으로도 많은 것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선 선포하여야 할 케리그마(Kerygma) 곧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여야 할 상황(Situation) 곧 세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전달하는 (Communication) 기술에도 숙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계속하여서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성경공부를 많이 하여야 합니다.

18세기에 부패했던 영국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한 요한 웨슬레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요 독서를 폭 넓게 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곧 성경 한 권의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성경에 있는 진리를 그대로 전하기로 다짐했었습니다. 그의 설교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교회 강단에서의 메시지는 성경에 근거한 진리라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신도들이 기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강단에서 설교의 본문(text)으로 성경말씀을 택하는 이유는 성경 말씀이 설교의 텍스트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진대는 성경의 말씀을 옳게 전하는 설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설교자가 택스트로 성경본문은 택하였지만, 설교의 내용은 성경에 있는 뜻과는 다른 이야기로 채워져 나감을 종종 봅니다. 성경의 몇 구절을 인용하며 결국에는 그가 하고 싶은 사람의 생각을 말할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주석하거나 강해(exegesis, Exposition)하는 것이 아니라 사욕으로 푸는 것(eisogesis, Imposition)일 것입니다. 이는 설교자의 생각과 신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하는 위험한 모험입니다. 성경말씀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벧후2:21).

설교자는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말씀과 의미를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읽으며 상고할 때에,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케하신 성령께서 설교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믿습니다. 웨슬레는 그렇게 믿고 성경을 상고하신 분입니다(딤후3:16).

사실 성경책이 유식한 신학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된 책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의 신자들보다 무식한 신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바로 그 성령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사람이 학문적으로 만 이해할려고 함으로 말씀의 핵심에서 벗어나 곁길로 나가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상고할 때는 무릎 위에서 성경을 상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이해된 메시지는 확신과 능력이 동반합니다.

이와 같은 재언은 성경에 대한 복음주의 신학적 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이 지적하듯이,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적 사건으로 계시하셨습니다(God has acted in history). 또한 하나님은 말씀으로도 계시하셨습니다(God has spoken). 이런 하나님의 계시는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에서 극치를 이루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계시가 우주적이요 모든 세대의 사람을 위한 것이 되기를 원하시기에, 계시의 삼 단계로 이것들(계시의 역사적 사건과 말씀)을 성경에 기록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그에 대한 의미 곧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해석도 함께 설명하며, 이를 오늘의 상황에서 성실하게 증거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신학적으로 이해할 때, 성경이 설교의 근거와 텍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며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연결시키는 "강해설교(Expository Sermon)"가 가장 바람직 하다고 생각됩니다. 죤 스탓트는 이런 강해설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설교(true Chrsitian preaching)라고 했습니다.

3. 말씀이 권위와 확신으로 선포되었으면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들은 복음을 체험적 확신을 가지고 증거하며 선포하였습니다. 이런 확신은 객 관적인 역사적 계시에 근거할 뿐 아니라 사도들의 내적 증거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요일 1:1-3,4:13). 따라서 사도들의 전도와 설교는 사람의 말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받아드려졌습니다(살전1:3,2:13). 오늘의 교회 강당에서의 설교도 이렇게 '능 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전파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이 사도적 설교의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이면에서 오늘의 교회 강당은 위기에 봉착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는 권위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반감 심리(The Anti-authority Mood)로 가득차 있어 권위적인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학문하는 자세(the spirit of Modernism)도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많은 설교자가 복음에 대한 확신(confidence)이 흔들리고 있어 확신있는 복음선포를 주저하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그의 설교는 '능력과 확신'으로 들려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설교자는 첫째로 복음의 유일성(행4:12)과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여야겠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로마'를 향하여서도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자랑할 수 있는 용기를 회복하여야겠습니다. 사도들이 그랬고 교회사에서 능력있는 설교자들이 간증하듯이, 설교자는 성령의 체험으로 성경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여 선포하는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요한 웨슬레가 올더스게이트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신앙 체험을 함으로 그는 성경말씀을 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설교는 확신과 능력의 설교가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오늘에도 성경말씀을 통하여 능력으로 말씀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 한가지 설교자가 기억해야 할 신학적 인식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와 전도자에게 권세를 주시어(authorize to preach),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며 사탄을 내어 좇는 사역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마10:1,7;막16:15-16;마28:20). 여기에 권세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또한 그 권세를 사용하는 권리(the right to use that power or authority)를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이 권세를 갖고 담대히 설교한 것입니다. 마치 교통순경이 지나가는 차를 향하여 손을 번쩍 들 때 그는 국가의 권위로 손을 드는 것과도 같이. 오늘의 설교자들이 이런 신학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씀선포에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권세는 설교자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을 때 곧 성령 안에 있을 때만이 의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일4:13,요8:29). 사도시대에 확신과 권위로 말씀을 증거, 선포한 제자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하며 성령에 이끌려 설교할 때, 오늘의 교회의 강당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력'으로 전하여 질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유의할 것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걸 맞는 '거룩한 삶'을 보일 때에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로 받아드려 진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의 성실성과 거룩한 삶은 가장 강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