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중복음의 신약적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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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국

 

I. 서론

본 논문은 사중 복음 즉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신약적 근원에 대하여 연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사중복음은 성결교회가 뒤늦게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한 역사적 정체성과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성결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보면 성결교회는 사중복음 즉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을 전함으로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할을 그같은 복음을 전하는 데에서 찾았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성결교회는 사회 제도의 기능적 입장에서 볼 때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그 하나는 종교의 유효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론과 관련지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 체계(stock of knowledge)와 관련지은 것이다. 유효구조라 함은 사회 내에서 종교적 삶이 유효하도록 하여 소속된 공동체 구성원들로 하여금 종교적 정체성을 발견하고 또한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사회적 토대를 말한다. 지식 체계라 함은 그 유효구조를 가능케 하는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지식의 총체적 체계로서 공동체의 정체성과 역할과 그리고 세계관을 설명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종교적 실재를 인식하고 또 계속적으로 그것을 전수시키는 도구다. 버거에 따르면 현대 교회는 산업혁명으로 밀어닥친 세속화 현상에 의하여 기독교의 유효구조가 점점 약화되며 오늘의 기독교를 있게 한 기독교의 전통적 지식체계는 상대적으로 다원화 돼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사중 복음은 현재적으로 경험할 것(중생, 성결, 신유)과 미래에 경험할 것(재림)으로 구분된다. 성결교회는 불신자들에게 중생의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이 거듭나 교회에 속하게 되고 또 그들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 성결의 능력 안에서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게 하는 사회적 토대를 제공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밀어닥친 산업 자본주의의 혁명에 의한 세속화 현상은 재림과 함께 종말이 온다는 세계관의 이완을 야기했고 아울러 성결의 체험에 대한 기대와 의미를 희석시켰다. 또한 세속화와 함께 다른 여러 요인들에 의하여 성결 교단에 나타난 현상은 교단 정치의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교단 정치의 분열은 성결의 체험과 삶에 대한 가시적 모형 (model) 의 상실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종말론에 입각한 세계관의 희석과 성결의 체험에 의한 영적 능력의 결여는 교회로 하여금 죄에 대한 지적과 그에 대한 회개의 촉구를 전하므로 죄인들을 중생의 경험으로 이끄는 에너지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혁명의 직접적 혜택중의 하나인 의술의 발달로 육체의 질병에 대한 신유의 기대가 점점 희박해지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성결교회의 사회적 토대인 유효 구조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유효 구조의 붕괴는 유효 구조를 가능케 하는 언어 수단인 지식 체계(사중 복음의 내용)를 객관화된 사회적 실재로가 아닌 추상적 개념으로 뒤틀어 놓게 된 것이다. 엔토니 월레스 이와 같은 현상을 가르쳐 메이즈웨이(mazeway: 정신적 형상)의 붕괴라고 말한다. 추상적 개념화의 위험성은 공동체원들 사이에 지식 체계의 효력의 상실, 그것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실재적인 경험에 대한 기대감의 상실이라는 것이다.

유효 구조의 붕괴와 그것에 따른 지식 체계의 추상적 개념화는 성결교회의 신자들을 역사적 전통에서 이탈시키며 그러므로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할의 혼돈을 초래하였다. 월레스는 이같은 사회적 상황은 아노미적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를 그냥 내버려두면 그 사회는 죽음의 선상에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그리고 성결교회가 사회적으로 아노미적 상태에 빠진 것이 사실이라면 성결교회는 분명히 성결교회라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은 그 역할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생명력을 잃은 이름만 가진 하나의 종교적 제도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책은 다른데 있지 않고 역사적으로 성결교를 이 땅에 존재케 한 그래서 그 정체성과 역할을 갖게 한 사중 복음을 오늘의 현실 속에 다시 찾아 성결교에 속한 성도들로 하여금 사회적 실재로서의 역동적 힘을 발견케 하는데 있다. 이렇게 볼 때 본 논문에서 사중 복음의 근원을 신약에서 찾는 다는 것은 성결교회가 사중 복음을 오늘의 현실 속에 다시 찾아오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임에 틀림없다.

물론 사중 복음이라는 어휘는 신약에서 체계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고 역사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심프슨(A. B. Simpson)에 의해 사중 복음(the Four-Fold Gospel)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체계화된 것이다. 심프슨은 그 책에서 사중 복음이라는 제목 하에 사중 복음을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Christ Our Saviour), "우리를 성결케 하는 그리스도"(Christ Our Sanctifier), "우리의 치료자 그리스도"(Christ Our Healer), "우리 오시는 주님 그리스도"(Christ Our Coming Lord)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라는 제목 하에서 "중생"(regeneration)이라는 개념은 "영혼의 중생"으로 단 한번 사용하고 성결의 주제를 다룰 때 "중생"(regeneration)과 "성결"(sanctification) 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치료자 그리스도"라는 제하에서 처음부터 "신유"(divine healing)라는 개념 속에 포함될 것과 안될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오시는 주님 그리스도"라는 제목 하에서 그는 오시는 주님은 "재림"(the second coming)하시는 주님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같은 네 개의 개념 속에서 복음을 사중적으로 체계화할 때 그는 계속적으로 성경적 근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사중복음의 신약적 근원에 대하여 논의할 때 그것은 이미 주창자가 사용한 방법론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언급된 것을 빌어다가 반복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같은 사실은 본 논문의 연구 방향을 아주 제한적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고 있다. 즉 사중 복음의 재현이라는 당면한 필요성에 맞추어서 신약에서 반영되고 있는 초대 교회 또는 기독 공동체들의 일차적인 경험으로서의 사중 복음의 문제를 분석하는 작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은 신약이 당시의 여러 기독 공동체의 신앙과 경험 그리고 삶을 반영하고 있는 기독 공동체의 내부 문헌들이기 때문에 신약의 문헌과 사용된 언어를 통하여 우리는 당시의 공동체가 경험한 사실들이 무엇인지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신약 공동체들의 경험을 재구성함에 앞서 그들의 경험의 하나의 원형적 경험으로서 예수의 삶과 사역속에 나타난 바를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이다. 사복음서를 통하여 우리는 그것을 재구성할 것이다. 그후 신약 공동체들의 경험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다. 신약 공동체들의 경험을 재구성함에는 비바울적 기독 공동체와 바울 공동체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비 바울 공동체는 바울 서신서 외의 사도행전과 소위 일반 서신서 들이라고 불리는 서신들과 요한 계시록에 반영되고 있는 공동체를 총체적으로 말한다. 바울적 기독 공동체라 함은 바울이 쓴 편지 13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사역에 관한 기록들에게서 나타나는 바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총체적 공동체를 말한다. 각 공동체의 경험으로서의 사중 복음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 후, 오늘의 성결교회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제안함으로 본 논문을 끝맺고자 한다.

II. 원형으로서의 예수의 삶과 사역을 통해 본 사중 복음

사도 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초기의 제자들의 사역과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삶이 원형으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사도 행전 저자는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체험은 요한의 증거의 초석이 되었으며(요일 1:1-3) 히브리 저자의 히브리 공동체에 대한 권면의 기초를 이루고 있고(히5:7-9) 베드로 공동체에게는 고난의 본이 되기도 한다(벧전 2:21). 뿐만 아니라 바울의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를 본 받는 자되는 것이며 그러한 그의 삶은 그가 세운 기독 공동체원들 사이에서도 이어지기를 원했다(고전 11:1). 바울의 그같은 원함은 바울이 세운 기독 공동체 내에서의 예수의 삶을 통한 그들의 삶이 어떻게 형성돼야 할지를 잘 대변해주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초기 기독 공동체 전체 안에는 신앙인 들의 모든 삶의 표본이 바로 예수의 삶과 사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복음서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의 삶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의 율법의 규례를 따르는 배움의 삶,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 받으심으로 전적인 복음 전파의 사역을 위한 준비의 삶, 시험을 겪는 삶,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는 삶, 병들고 굶주리고 마귀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체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삶, 때로는 기존의 제도의 권위에 강력히 도전하기도 하며, 종교적 위선에 대하여 예리하게 지적하기도 하는 삶,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혹은 인자라는 사실을 서슴없이 말하는 삶, 소위 당시의 천민계급에 속하는 사람들과 식탁을 나누기도 하며 보통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그들과 함께 하는 삶, 많은 기적들과 표적들을 나타내는 삶, 아무도 그에게서 어떤 것에서든지 흠 잡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니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준비하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와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가르치기도 하였다. 자신이 고난받고 죽을 것이지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미리 말하기도 하였다. 마침내는 자신이 미리 말한바 데로 당시의 정치와 종교 제도의 힘에 의하여 폭력을 당하며 고난받고 수치를 당하며 십자가의 형벌로 처형당하였다.

위에서 간단히 열거한 것들 외에도 복음서들에서는 예수의 삶의 모습들을 여러 방향에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삶의 모습에 대하여 열거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예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 되야 할 바는 그의 삶이 자연 발생적이거나 우연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삶은 그에게 맡겨진 사명 혹은 사역을 달성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 복음서 중요한 복음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선언하였다(요 6:38).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친히 계시하였으며, 영생의 길을 계시하였으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계시하였다. 다음으로는 그같은 계시적 삶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의해서 능력 있게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예수는 빌라도 자신도 죄를 찾아 낼 수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무흠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순종하였다. 끝으로는 예수의 삶은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에 기인하는 일회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기독 공동체를 통하여 실현되고 전수돼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삶과 사역은 그후에 생겨날 기독 공동체가 본받아야 할 원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가운데서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와 모든 사람들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혹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가장 심각한 관심사이었다. 그 질문은 요한 복음 3장에서 사실상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선포한 것과 니고데모의 의심에 찬 질문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공관 복음서에서 예수는 율법의 행위로는 그들의 관심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면 요한 복음서에는 율법의 준행자인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 율법에서 제시하고 있는 그림자를 통하여 실체를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모세 때에 광야에서 뱀을 들므로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죽음의 길에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인자 되신 예수가 십자가상에 들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은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또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구체적인 길에 대한 제시인 것이다. 예수의 사역의 시작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선포는 바로 그같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예수의 삶과 모든 행위들 그리고 가르침은 모두 그러한 본질적인 진리에 대한 계시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축귀의 사건은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권능이 이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대 속에 침투하여 그 세력을 분쇄시키고 새 세대가 도래되었음을 알리는 가시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역할을 계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죄인들, 세리, 창기들, 비천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과의 교제는 그 나라에 초청 받은 많은 사람들 중 율법에 따라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제외되고 오직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 복음에서는 자신의 모든 기적을 베푸는 행위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요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영생의 길은 바로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예비 한 것과 연계되어 있다.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계시는 이유는 자신이 항상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고 그 뜻을 항상 순종하기 때문이라고(요 7:28-29; 8:29) 말하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의 사역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고 불완전한 사람들을 완전케 하는 사역이다. 이 사역 역시 자기 나라를 예비한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다. 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는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 온전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예수의 치유 사역에는 세 가지 면이 나타나 있다. 하나는 당시의 사회 제도의 현상으로 생겨나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회의 소외 계층들이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중받는 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온갖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 고침을 받으며 육체적으로 온전치 못한 (예를 들면, 소경, 손 마른 자, 귀머거리, 않은 뱅이: 이들은 율법에 의하며 저주받은 자로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긍휼을 얻으며 온전케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각종 귀신들과 악한 영 혹은 마귀에게 시달림을 받는 사람들이 그 나라의 임함과 함께 그 사슬을 끊고 온전하게 된다. 위의 세 가지는 사회와 관련된 질병의 치유와, 신체와 관련된 질병의 치유와, 영혼과 관련된 질병의 치유인 것이다. 이로 보건대 예수의 이 같은 사역은 사람들이 온전하게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 영, 신체와 관련된 치유의 사역인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실질적인 실현은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종말론적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의 현현은 곧 인자의 임함과 같이 한다고 하였다(마 24:44). 예수가 인자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에 대하여 인자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볼 때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현현은 인자된 예수 자신의 다시 나타남과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때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의 그룹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보화를 찾은 즉 예수를 옳게 고백하고 의인된 사람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그룹과 다른 하나는 악한 사람들 중에 있으므로 천국에서 배척받는 사람들의 그룹인 것이다(마 13:44, 49-50). 위의 사실은 예수의 세계관은 자신의 이 땅위의 첫 번째 임함과 두 번째 임함이라는 구조 위에 이루어져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예수의 제자들이 자신의 두 번째 임함을 항상 염두에 두고 청지기적인 삶과 복음 전파에 힘쓰는 가운데 재림을 준비하라는 것이다(참고, 마 25장과 28장에서의 지상 명령).

예수의 삶과 사명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특히 고려해야할 점은 요한 복음에서의 증언이다. 요한 복음 17장에서의 예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 있다. 예수의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결과적으로 자신도 영광을 받았다는 점과 그같은 사역이 제자들을 통하여 연속되어질 것을 위한 기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내용에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삶의 본질에 대하여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룩과 관련된 것이다. 예수는 그의 기도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자신이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하였다(요 17:19). 그리고 그들도 그처럼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하였다(요 17:17,19). 그렇다면 과연 여기에서의 거룩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전체의 기도의 맥락에서 볼 때 그것은 예수의 사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냄으로 영생을 얻게 하는 것과 그 일이 계속되기 위하여 제자들을 세워 파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과 동일한 거룩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의 지상 생애 전체에 걸쳐서 그것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대로 완전하게 살고(참고, 요 8:29) 그 목적을 완성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 요19:30). 요약한다면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의 실현이며 거룩함으로 말미암는 거룩한 사명의 완성인 것이다.

 

III. 초기 기독 공동체의 경험 속에 나타난 사중 복음

지금 까지 우리는 예수의 삶과 사역 속에 나타난 특징들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 사중 복음적 삶과 사역이 반영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 범위를 조금 넓혀 예수의 제자들 혹은 사도들의 글들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초기 기독 공동체의 경험을 분석하여 그 특징을 살펴 볼 것이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초기 기독 공동체의 경험을 재구성함에는 비 바울 공동체와 바울 공동체라는 두 개의 총체적 공동체를 따로 따로 분석하게 될 것이다.

3. 1 비 바울 공동체

예수의 제자들의 사역이 어떤 것이었는지 탐구할 수 있는 자료들이 신약 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자료들은 면밀히 분석하여 보면 초기의 기독 공동체의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먼저 다룰 것은 사도행전 초반에 나오는 기독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사도 베드로의 사역과 관련된 공동체의 경험이다. 그 후에 야고보서,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 서신서에 나타난 공동체들의 경험을 다루게 될 것이다.

3.1.1. 베드로 공동체

사도 행전 초반부와 베드로 전, 후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사역과 글들을 통하여 그들의 경험들이 어떤지 살펴본다. 먼저, 베드로 자신의 경험을 보자. 그는 틀림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경험을 통하여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순절의 체험은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능력을 받은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 능력은 첫째로,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과 예수의 사역과 고난 그리고 부활과 승천이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점을 구약에서의 증언과를 연결시킬 수 있게 하는 영적 감동에 의한 인지 능력과 인지된 것을 조직하는 조직력이다. 그 능력의 두 번째는 그의 그같은 조직력뿐만 아니라 그것을 설파할 때 사람들의 심장을 파고드는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능력의 세 번째는 두려움 없는 그의 사역이다. 그는 핍박과 죽음의 위협 그리고 옥에 갇히는 경우에도 두려움 없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의 네 번째는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다. 그 능력의 다섯 번째는 성령님의 강림을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마리아는 물론 이방인에게까지 체험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능력이다. 그 능력의 다섯 번째는 어떤 환경에서도 선한 일을 도모하고 모든 악과 방탕과 정욕으로부터 자유한 삶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베드로에게 나타난 이같은 능력은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도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초기의 다른 전도자들에게도 나타난 능력임에 틀림없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를 따랐던 초기에는 그같은 능력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오직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의한 성령 충만 후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초기의 베드로 공동체내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능력들은 성령 충만의 결과임을 말한바 있다. 그런데 베드로 서에서는 이상하리 만치 성령 충만에 대한 언급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대하여(벧전 1:2) 그리고 성도들의 거룩함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의 거룩함에 대하여 강조할 때 거룩의 기준은 어떤 외형적 조건이나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두고 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벧전 1:15-16). 위의 본문은 모든 행실에 거룩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본질이 거룩하여 모든 일에 거룩함이 드러난 것처럼 너희 자신들도 본질적으로 거룩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한다. 모든 도덕적 정결함과 경건된 삶 그리고 사랑과 선에 대한 명령은 거룩함을 전제로 한다. 분명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능력을 나타내었던 베드로가 성령 충만에 대한 명령 보다 거룩해야 한다는 명령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성령 충만은 거룩함이 전제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영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는 순종함에 대한 언급은(벧전1:2) 그 같은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베드로 공동체가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역시 예수의 재림에 있다. 베드로 공동체가 받는 고난을 참고 견디며, 이 세상과 짝하여 방탕과 음란과 우상 숭배 연락의 삶을 거부하고 경건하게 선을 행하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모든 삶의 이유는 마지막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에 있다(벧전 3:15). 왜냐하면 그 때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벧전 4:17). 참고 견딘 자에게는 구원과(1:5),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있을 것이며(1:7; 비, 4:13, 5:1), 온전한 은혜가 나타날 것이며(1:13) 즐거움이 있을 (4:13)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벧후 3:13)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설교의 마지막 권면에서 그는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라고 한다(행2:38). 그리고 구원을 받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에 대한 약속을 언급한다. 베드로서에서 베드로는 거듭남(1:3, 23), 영혼의 구원(1:9), 또는 망령된 행실에서의 구속(1:18) 등으로 회개의 결과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의 설교가 서신서에서의 권면과 다른 이유는 전자에서는 기독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결단에 대한 권면이고 후자에서는 이미 기독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들에게 성도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이 땅에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권면의 글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베드로에게 있어서 구원, 구속 또는 거듭남은 강조 점의 차이에 의한 서로 다른 표현이지 본질적 경험의 차이를 나타내는 표현은 아니다.

사도 행전에서의 베드로와 초기 전도자들의 주요 사역 중 하나는 치유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 후 최초로 나타난 치유의 기적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하여 이루어 졌으며(행 3:1-10),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그에 의해서 나음을 얻었으며(5:14-16), 빌립에 의해서도 그같은 유의 치유가 일어났으며(8:6-7), 아나니아가 바울을 위해 안수하니 바울이 다시 보게 되었고(9:12), 중풍 병든 자가 베드로에 의해 치유 받았으며(9:32-35),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하였다(9:40). 그러한 치유의 경험의 중심부에 있었던 베드로가 그의 서신서에는 그러한 치유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강조 점은 재림을 기다리는(벧전 4:7) 공동체가 외부로부터의 핍박 때문에 소망을 잃어버린 채 포기 상태에서 과거에 돌이켰던 정욕적인 삶으로 되돌아가지 말 것과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선행에 힘쓰게 하기 위한 윤리적 측면이다. 그러나 은사를 어떻게 활용하여야 하는 가를 말하고 있는 점은(벧전 4:10-11) 이 공동체의 정황이 위에서 언급한 윤리적 측면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해야할 정황이었지만 그것과 함께 그들이 이미 경험하고 있는 은사의 활용을 통해서 공동체내의 결속력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피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그 은사의 목록이 바울에게서처럼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다만 말과 관련된 것과 봉사와 관련된 것은 바울 공동체 내에 나타나고 있는 은사들이 베드로 공동체내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은사는 사실상 베드로가 말하는 것처럼 말과 관련된 은사들과 봉사와 관련된 은사로 대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베드로 공동체내에도 베드로의 경험과 함께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3.1.2 야고보 공동체

야고보 공동체의 경험의 문제는 야고보서가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방에 흩어져 있는 기독 공동체를 향한 서신이라는 전제하에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서신이 기독교가 완전한 율법의 완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유대인 기독공동체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야고보서에 나타나고 있는 야고보 공동체의 경험에 대하여 쉽게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야고보서에는 그같은 인식과는 정반대 적인 야고보 공동체의 부정적 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수많은 어휘들이 서신 전체에 걸쳐서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공동체가 실현해야할 과제로서 참 종교성을 들어내는 어휘들 또한 부정적 면을 나타내는 어휘만큼이나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야고보 공동체는 실현 가능한 또한 실현해야할 사명이 있는 종교성은 있지만 실은 그것을 어떤 이유에서 현실적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적인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로 하여금 이 공동체의 경험에 관한 빛을 던져주는 결론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경험이 그들에게 있었을까.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다(1:18). 이렇듯 새로 태어난(거듭남 혹은 중생 혹은 신생) 그들은 첫 열매로서 참 종교성을 실현해야 할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현상 때문에 이 공동체 내에는 여러 세속성을 들어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지적과 원인제시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이 이 서신서에 담겨 있다. 그 해결책을 통하여 거듭난 공동체가 경험하여야할 참 종교성이 무엇인지 재구성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

거듭난 야고보 공동체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참 종교성을 실현해 나가기 위하여 전제되는 것은 그들이 가져야 할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이 땅에서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믿음을 지키며 진리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모든 삶이 오늘만의 한시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에 기인한다는 것이다(약 5:7-8). 그날에는 심판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5:9). 그리고 그날을 소망하면서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5:11). 그러나 그들이 그같은 삶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성결치 못한 마음속에 있는 정욕(1:15; 4:3)과 악한 것과 더러운 것(1:21) 그리고 시기심(3:16)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마음에서 발로되는 것은 세속 지향적 삶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내에는 다툼(4:1) 과 차별 대우(2:4) 및 착취(5:4) 또는 압제와 법정 비화(2:6)가 나타나며 그 결과 실족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떠나게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5:19). 그리고 이 공동체 내에 질병에 의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5:14).

질병에 대한 치유에 대한 언급은 죄의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연계는 질병의 원인이 단지 개인적인 죄의 문제라기 보다는 위에서 지적한 전 공동체내에 만연하고 있는 공동체원 사이의 갈등 즉 공동체내의 죄에 의한 결과임과 치유에 전제되는 것은 연대적인 죄의 고백임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치유(하나님의 치유) 는 내적인 정화 즉 공동체 내의 사회적 질병의 치유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질병의 치유로서 죄를 고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사회적 질병의 근본 원인인 마음의 정화와 관련이 있다. 마음의 정화로서 야고보는 "마음을 성결케 하라"(4:8)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야고보서에서 야고보 공동체의 경험과 관련하여 성결의 문제와 공동체 내의 사회적 질병과 치유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고보 공동체는 거듭난 공동체로서 성결의 체험을 통하여 치유의 사역을 재림 때까지 이루어 가야할 경험적 종교성 실현이라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3.1.3 히브리 공동체

히브리 공동체도 역시 이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제시라는 점에서 위의 야고보 공동체의 경우와 유사성이 있다 하겠다. 이 공동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힘입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을 섬겨온 공동체이다. 이 서신에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험으로서 직접적으로 거듭남과 관련시키고 있는 곳은 없다. 그러나 이들은 양심이 깨끗하게 되었다고(9:14),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기움 받았음을(10:22),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함 받았음을(10:14, 29), 또는 빛을 받았다고(10:32) 말함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들의 구원의 경험을 거룩하게 됨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시작한 처음부터 고난을 견디며 옥에 갇히기도 하며,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견디었다(10:32-34). 그러한 삶이 거룩하게 된 공동체의 거룩한 삶의 표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계속되는 고난은 그들의 거룩한 삶에 대한 회의심과 신앙 생활에 대한 포기(10:38)라는 위기 상황까지 몰고 갔다. 이같은 상황하에 있는 이 공동체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히브리 저자는 이 공동체가 거룩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시작할 때 거룩하게 된 자신들의 완전한 거룩을 위하여 전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3: 14; 12:14). 뿐만 아니라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마음이 강퍅하게 됨을 피해야 될 것(3:7-13) 과 물질적인 고난 때문에 진정한 축복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12:15-17).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에 이르며(9:28) 하나님이 다스리는 완전한 도성에 이르러 완전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영광을 경험하기 때문이다(13:14). 그처럼 고난을 겪을 때 끝까지 견디어 완전에 이르는 것은 이미 예수의 삶에서 그 원형을 보았고 그들은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5:7-9). 예수의 뒤를 좇는 것은 결국 예수가 하신 것처럼 아직 거룩케 되지 못한 사람들을 거룩케 하는 사역에 참예함을 말한다(13:12-13). 결론적으로 이 공동체는 거룩케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가 된 후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완전케 될 거룩을 기대하면서 지속적으로 죄를 거부하며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케 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경험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3.1.4 요한 공동체

요한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쳐, 생명을 가진 자(3:14; 5:12), 하나님께로서 난 자(3:9; 5:1, 4, 18), 하나님께 속한 자(3:11; 4:2),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4:13)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는(4:15), 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2:20; 4:13; 4:24; 5:13)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모든 표현들은 참 생명이신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그와 생명의 관계를 가진 자들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거듭났다 혹은 중생을 경험했다 라는 말은 이같이 생명을 소유하고 생명의 관계를 가진 신자들의 경험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그같은 생명의 관계를 갖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예비하신 것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은 독생자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것이다(4:9).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며(4:10), 세상의 구주며(4:14), 우리를 살리는 분이며(4:9),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1:9)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비한 사실을 믿으면(4:2, 15; 5:1) 죄를 씻음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세계관은 이중적인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상과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의 종말론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악한자가 기독 공동체를 대적하는 장으로서(2:13), 마귀가 일을 꾸미며(3:8), 영적 싸움과(4:1-6) 미혹이 있는 곳이다(2:16).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신자들은 오직 성령 안에서 그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 안에 거할(3:23-24) 때에만 세상을 이기며, 악한 자를 이기며, 죄를 이기며 승리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핍박과 미움과 고난이 있겠지만 그것은 영속적이 아니며 한시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2:20) 함께 종말의 사건을 맞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심판의 날이자(4:17) 영광의 날일(3:2) 것이다.

그같은 이중 구조는 이들의 역할에 대한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 된다. 이들의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서로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은 죄에게서 해방되며(3:6) 세상을 이기며(5:1) 빛 가운데서 진정한 사귐을 갖게 되는 것이다(1:7). 이것이 세상과의 분리지만 세상은 예수가 그렇게 하셨든 것처럼 참 생명의 소식을 전해 들어야 할 대상이다(5:16). 공동체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증거의 삶을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살아야 하는 것이다.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 받았다는 말은 이들이 거룩한 공동체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사랑이 온전케 되야 한다는 시사는(4:17) 완성된 거룩의 또 다른 표현이다. 마음으로 거리낌이 없는 또는 죄로부터의 참 자유를 누리는 상태, 온전한 사랑을 함으로 온전한 사귐을 누리는 상태 이것이 온전한 거룩의 상태인 것이다.

 

3. 2. 바울 공동체

3.2.1 회심의 경험

바울의 공동체들은 어떤 경우에든지 이방 사회에 세워진 기독 공동체들로서 이들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로마서에 반영되고 있는 로마의 기독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이방인들이다. 바울은 기독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도 포함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예, 엡 2:11-19).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기독 공동체의 경험은 로마서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 먼저 유대인들이 기독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과거에는 율법아래서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으나 그 열심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는 그릇된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롬 10:2-3) 율법으로는 죄인임을 인정하고(롬 3:9-20)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 인해서이다(롬 3:22). 이방인들은 그들의 과거의 이방 신들을 섬기던 삶과 롬 1:23) 그로 인한 부도덕한 삶에서(롬 1:24-32) 하나님께 회개하고(롬 2:4) 예수의 구속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므로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의롭게 됨으로 인해서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로마서의 강조 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경험을 통하여 기독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칭의의 개념이 구원의 개념보다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분명한 점은 의롭다 함에 대한 강조나 구원에 대한 개념이 덜 사용되었다 하지만 칭의와 구원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구원은 칭의를 전제하며 칭의의 결과로서 구원을 말함으로 서로 필연적인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롬 1:16-17; 10:9-10).

로마에 있는 기독 공동체외의 다른 공동체들에게 있어서의 그들의 경험은 그들이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기독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의 종교적 삶의 전형인 하나님을 모르며 율법도 없고 오직 우상을 섬기며 소망도 없이 퇴패된 도덕적 삶 가운데 살아오다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변화된 경험이다. 그러한 경험을 칭의, 구원, 구속, 그리고 화목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바울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공동체원들의 최초의 신앙의 경험에 대하여 중생 혹은 거듭남이라는 어휘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이 중생의 경험임을 밝혀주는 결정적 단서가 디도서에 나온다. 그곳에서 바울은 중생의 경험이 위에서 언급한 서신서들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구원과 칭의가 중생의 새로운 창조와 관련돼 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이 긍휼 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우리로 저희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그러므로 바울의 글을 통하여 나타난 바울의 기독 공동체의 초기 신앙적 경험은 신앙인 들이 성령의 새로운 창조인 중생을 통하여 본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고후 5:17)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독 공동체의 초기 신앙적 경험은 구원, 구속, 칭의, 또는 화목이라는 관계적 변화와 중생이라는 본질적 변화의 동시적 경험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2.2 회심후의 경험

사실상 바울의 서신들은 바울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초기적 경험에 대하여 상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최우선의 관심사는 회심 공동체의 보존에 있다. 바울은 회심 공동체가 내적 또는 외적 요인들에 의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데 실패하여 자신이 제시한 복음의 길에서 이탈하기 때문에 복음 전파와 복음의 수호와 복음의 진전을 위한 자신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바울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첫 번째, 자신이 직접 교회를 방문하여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두 번째는 각 교회에 각각의 교회의 특수 여건에 상응하는 편지를 보내는 방법; 세 번째, 자신의 대리자를 파송하는 방법; 네 번째, 세워진 지도자들과 교신하여 문제 해결하는 방법이다. 바울이 서신서 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학적 어휘들 혹은 교리적 어휘들은 사실상 각 회심 공동체의 보존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교리적 또는 신학적 내용은 실제적인 경험과 전혀 상관없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어휘들의 나열이 아닌 바로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현상에 대한 설명 혹은 명령 혹은 계율 혹은 명제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각 회심 공동체에서 당면하고 문제들은 추상적인 형이상학과 관련된 이념이 아닌 새로운 종교에로 전환하여 생기는 많은 문제 속에서 어떻게 하면 신앙을 잘 지키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가 하는 실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제의 삶 속에서 가시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들이 새로 발견한 복음적 삶의 영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직접적인 경험과 관련된 언급은 말할 것도 없이 교리적 혹은 신학적 언급을 통하여도 회심 공동체의 회심후의 경험이 어떤 것들인지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회심 공동체의 보존과 전수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경험한 것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제시한 경험화 돼야할 것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먼저 회심 후에 (중생을 경험한 후에) 그들에게 나타난 변화는 무엇이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지금까지 여러 측면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변화에 대하여 단순히 명제적인 답을 추구하는 대신 회심과 관련하여 논의된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봄으로 우리의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려고 한다. 데이비드 스노우와 리챠드 메칼렉(David A. Snow and Richard L. Machalek)은 회심후의 변화는 회심의 네 가지 지표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1) 일대기의 재구성; 2) 새로운 해석 체계의 확립; 3)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 그리고 4) 자신의 역할의 재구성. 바울의 회심 공동체에 나타난 변화를 위의 네 가지 지표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들은 먼저 과거와는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바울의 회심 후 형성된 기독론에 입각한 묵시적 종말론과 같은 것이다. 베커에 따르면 유대교적 묵시사상에 기초를 둔 바울의 메시아 관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되었고 하나님의 마지막 승리에 대한 기대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실현될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이 바로 회심 공동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임을 발견한다. 종말론적 신앙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궁극적 완성(consummation)이 이루어지지만 실상은 예수의 초림에 의해서 이미 실현되기 시작해서(already) 재림에 의하여 완성된다. 이렇듯 이중적 종말론이 회심 공동체의 세계관이다. 초림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삶은 재림을 대비하는 삶이라는 큰 구조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데, 그 일대기는 그들의 모든 삶의 방향은 자신들의 몸을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예배적인 삶의 실현에 두고 있다.

바울의 회심 공동체들이 그같은 세계관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자신들의 삶의 일대기를 구성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때 그는 자신의 모든 수고가 긷든 선교적 사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고 보았다. 물론 그 역할을 감당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것이 단순히 인본주의적인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점이다. 세상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게 저해하는 요소들이 이 세상과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갈 5:16-24). 믿음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성도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을 이해하고 또 세상안과 우리 안에 있는 저항 요소를 이해하며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어디 있는지 이해하게 하는 체계가 회심 후에 성도들에게 주어진 해석 체계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재림 때까지 이 세상에서 세상과 죄와 마귀의 궤계를 이기고 승리하는 비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회심 공동체 내에서의 성도들간의 튼튼한 교제와 하나로 묶여짐 속에서 함께 성숙해 나가는 것이다(예, 엡 4: 12-16).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이 세상과 다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목표 지향적 삶을 통하여 세상과의 분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듯 세상과 분리한 가운데 서로를 교화(edification)하면서 함께 성숙해 나가기 위해 회심 공동체내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은 조직 신학적 표현으로는 은혜의 수단들이다. 은혜의 수단들은 교회, 은사,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도다. 그 중에 은사는 여러 종류의 은사들이 나오는데 모든 신자들은 각자 성령님의 수여에 따라 받은바 은사를 활용할 것이 기대되고 있다(롬 12: 3-13; 고전 12:3-31; 엡 4:11-12). 많은 은사들 중 특이한 사실은 고린도 교인들은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하였다는 점이다. 은사에 대한 언급이 기록된 서신들을 통하여 로마 교회나 에베소 교회에는 이 은사가 나타났다고 하는 언급이 없으나 고린도 교회에는 그 은사가 자주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전 12: 30). 위의 두 교회에서는 분명 병 고치는 은사가 행해졌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나머지 은사에 관하여 언급되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회, 빌립보 교회, 갈라디아 교회, 골로새 교회는 그들 교회들의 특수한 정황 때문에 은사에 대한 언급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지 은사가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언급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병 고치는 은사에 관한 언급이 없던 아니면 은사 자체에 대한 언급이 없던 간에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나타난 치유의 은사나 고린도 교회에서 분명하게 병 고치는 은사가 나타났다는 점은 병 고치는 은사가 당시의 모든 교회 안에서 공통적으로 활용되었던 중요한 은사였다고 결론을 내리게 한다.

두 번째로는 적극적으로 기독 공동체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방어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일에 참예 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 공동체를 공동체 되게 하는 영적 힘은 그들이 세상과 차별 화된 소극적 삶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방어하고 확장하는 일에 바울과 함께 동참함에 의해서 가능하다. 바울은 그 일을 위하여 직접 권면하거나 또는 격려하기도 하고(빌 1:5), 기도 제목을 내기도 하고(골 4:2), 헌금할 것을 장려하기도 하고(빌 4:14), 사람을 파송하기도 하고(빌 2: 19), 고난을 받기도 했다(고후 11:13-27). 바울에게 있어서 온 기독 공동체가 그 일에 투신하는 것은 이 복음이야말로 어느 특정한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로마 제국에 걸쳐서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여야 할 사회적 실재(social reality)인 것이다. 그렇게 되므로 전 기독 공동체는 하나의 전 세계적 바탕 위에서 존재하며 그 신앙 생활을 실천하는 유효 구조를 이루게 된다.

세 번째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를 달성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독 공동체에게 있어야할 영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공동체가 재림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그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롬 15:13; 고전 2:5).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는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갈 5:16; cf. 롬 8:12). 복음 전파 시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도 했다(롬 15:18; 살전 1:5; cf. 빌 1:6). 바울에게 있어서 그같은 성령의 능력은 거룩함, 깨끗함, 사랑의 충만, 그리고 성령의 충만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 공동체가 거룩함을 늘 유지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고후 7:1). 바울이 문제 많은 그래서 복음의 빛을 가리는 고린도 교회를 가르쳐 육체에 속한 교회라고 칭하고 있다(고전 3:1). 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고의 초점이 교회의 거룩성에 맞추어 졌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에게도 많은 권면 중에서도 "거룩"해져야 한다는 권면이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그같은 권면은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뿐만 아니라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개인의 신앙 생활은 물론 모든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의 동력과 목표로서의 거룩한 삶을 말하고 있다(딤후 2:3).

바울에게 있어서 거룩의 개념은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 자체를 이교도적 삶에서 구별되어 깨끗하게 된 상태로서의 거룩의 개념이다. 그같은 사실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에서 유추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결혼하여 자녀를 가지고 있는 그러면서 부부 중 한쪽만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신앙의 차이로 인한 이혼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한다. 이 때 바울은 한 쪽의 신앙을 인하여 다른 쪽과 자녀들도 거룩하게 될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전 7:12-14). 여기에서 바울은 신앙을 가지게 될 때 거룩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경우의 거룩은 신앙 인으로서의 근본적인 분리에 대한 상태적 거룩임에 틀림없다.

다음으로는 신앙이 된 후에 경험되어야 할 본질적(ontological) 거룩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이 서신을 보낼 때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성적 부도덕으로 말미암아 부정케 될 수 있으며 이 경우에 거룩은 아직 달성되지 않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살전 4:4-7).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신앙을 가진 공동체지만 그 공동체 내에 나타나고 있는 성적 타락, 분파주의, 법정 싸움, 빈부의 차별, 비판, 탐심, 은사로 인한 갈등 등을 보게 될 때 바울은 이 공동체가 아직 거룩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혹은 체험하지 못한) 공동체라고 말하고 있다(고후 7:1). 그러기에 바울은 이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거룩을 온전히 이루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온갖 더러운 것에서부터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IV. 결론

4. 1. 요약

우리는 지금까지 사중 복음 즉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조명하였고 초기 기독 공동체의 경험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 속에 하나의 원형으로서 예수께서 중생의 경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제 일차적인 경험이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음을 보았다. 자신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에서 지시하고 있는 영생을 얻기 위한 실체임을 보여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치유 사역은 세 가지 영역에 걸친 사역임을 보았다. 그 하나는 사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소외 계층을 향한 사회적 치유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를 온전케 하는 육체의 치유이고 마지막으로는 영혼이 건강케 되는 치유이었다. 예수의 사역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가 이룬 사역의 내용들이 그의 재림 시까지 계속되게 하는 종말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같은 사역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일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임을 알아 그 일을 이룸으로 자신과 그 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예수는 본질적으로 거룩하였지만 그 일을 완성함으로 그 거룩을 완성하게 되었다.

초기 기독 공동체의 경험으로 우리는 비 바울적 공동체와 바울 공동체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비 바울적 공동체는 베드로 공동체, 야고보와 히브리 공동체 그리고 요한 공동체로 분리하였다. 베드로 공동체에서도 예수의 경험과 유사한 경험들이 나타남을 알게 되었다.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회개와 믿음에 의한 중생으로 가능하였고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적 사건을 향한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선한 삶에 대하여 강조함을 보았다. 베드로는 자신이 성령 충만함의 경험을 그의 서신서 에서는 본질적으로 거룩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거룩의 강조는 이미 거룩하게 된 상태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함이 경험되어야 할 당면 과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오순절 경험하였던 유의 경험일 것이다. 그에게 나타난 치유의 능력은 그의 공동체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의 뜻으로 새로 태어난 야고보 공동체는 참 종교성을 실현하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것을 위한 전제로서 주님의 재림 시까지 참고 견디며 세속적인 것을 배척하여야 할 것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성결치 못한 마음속에 있는 정욕과 악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인해 그 과제를 실현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로 인해 공동체내에서 상처를 받고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야고보 공동체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성결의 체험이 필요하며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체내에 존재하는 육체적인 질병과 사회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히브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험으로 중생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힘입어 거룩하게 된 새로운 존재에 대하여 말함으로 새롭게 태어남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룩하게 된 공동체가 완전한 거룩을 실현을 위하여 정진할 것에 대하여 말함으로 성결의 체험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를 완전한 구원을 소망하면서 예수가 하신 것처럼 거룩케 되지 못한 사람들을 거룩케 하는 사역에 참예하는 것이 이 공동체의 역할임을 말하고 있다.

거듭나서 새 생명을 가진 요한 공동체는 거룩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안에 있는 참 생명을 증거 함으로 어두움과 거짓 진리와 죄책에 짓 눌려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사귐과 사랑 안에서의 동료들과의 사귐을 통해 진정 자유함과 담대함을 얻게 하는 치유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주님 재림 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요한 공동체의 역할이라 하겠다.

바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험으로 성령의 새로운 창조인 중생의 경험이라는 본질적 변화와 구원, 구속, 칭의, 또는 화목이라는 관계적 변화의 동시적 경험이다. 그처럼 중생의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세계관속에서 예배적인 삶의 실현을 그들의 역할로 보고 있다. 예배적인 삶은 기독 공동체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방어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일에 동참함을 포함하고 있다. 바울 공동체내에 널리 활용되었던 중요한 은사로서 병고침의 은사가 있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거룩의 개념은 이중적 구조라 하겠다. 이교도적 삶에서 구별된 상태로서의 거룩과 그후에 경험하여야 할 본질적 거룩이다.

4.2. 결어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의 경험은 분명 사중 복음에 입각한 것이다. 기독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직접적으로든 혹은 간접적으로든 중생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세워준 자신의 재림에 입각한 세계관은 모든 공동체에 내에서 확고하게 유지된 세계관이다. 모든 기독 공동체는 중생을 통하여 세상에서 분리된 의미에서 거룩한 공동체라고 명명되어졌으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도 거룩하게 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의 방법이나 시기 등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정의는 내려지지 않고 있지만 그에 대한 결정적 단서는 사도들의 오순절 후의 변화된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끝으로 기독 공동체의 이 세상 속에서의 역할은 복음을 증거 함으로 치유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그리고 예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초기 기독 공동체 내에서 경험되어진 또는 경험되어져야 할 것들은 중생, 성결, 신유(치유) 그리고 재림이라는 사중 복음의 골격 안에서 통합되어 진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렇다며는 성결 교단이 사중 복음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는 의미는 자명해 진다. 그것은 이 천년 전에 예수의 삶과 사역에서 그 원형을 보았고 그 원형에 따라 그 후의 기독 공동체들의 경험이 실재적으로 형성되었음을 신약은 증거하고 있다. 그같은 신약적 경험은 신약 당시의 경험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천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 경험되어졌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요한 웨슬레의 성결 운동에서 더욱 명확하게 들어 났고 심프슨에게서 체계화됨으로 성결교단의 탄생을 가능케 한 경험들이다. 그러한 경험들과 그에 대한 지식 체계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유효구조와 전통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성결교단이 오늘의 세계 속에서 그 역사적 존재 이유를 찾으며 사명을 감당한다고 한다면 모든 교회들이 이같은 사중 복음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체험하게 함으로 성서적 복음의 요체가 현대에 있어서 유효구조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성결교회는 성서적 복음의 요체를 전세계에 전파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