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성결 운동

현대 사회의 새로운 출애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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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국

 

들어가는 말

본 소논문에서는 현대화에 의한 사회현상과 그것이 기독교에 미치는 문화적 영향을 조명하며 그 영향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적 대안으로서의 성결 운동을 말하려고 한다. 현대화가 미치는 문화적 영향과 대안으로서의 성결 운동은 오늘의 사회 문화적 흐름과 기독 교에 나타나는 현상과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의 상항을 대비하며, 출애굽의 시작과 궁극적 목적을 조명함으로 현대 교회는 새로운 출애굽을 실현해야 하며 그같은 운동이야말로 성결운동에서 시작되며 끝이 난다고 제안하려고 한다.

앤토니 월래스가 제시한 사회 변혁 운동 (갱생 운동: revitalization movement) 에 관한 이론에 따르면 사회의 각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사회, 문화, 행위 규범 그리고 그것들과 연관되어진 자아와 세계에대한 정신적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정신적 형상을 "메즈웨이"(mazeway)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어떤 개인이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메즈웨이와 상충되는 실재적 상황에 쳐하게 될 때 그는 그것때문에 정신적 긴장 혹은 부담(stress)을 갖게되고 그러한 긴장과 부담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자신의 메즈웨이를 변화시키든지 아니면 그러한 상태를 그대로 감수하든지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만 한다. 자신의 메즈웨이를 변화시키는데는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자아와 사회와 문화와 세계에관한 자신의 관 전체에 대한 수정과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수반되야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수정된 메즈웨이와 실재가 동일선상에 오도록하여야 한다. 즉, 현재의 긴장과 부담이 있게한 현재의 체계를 변화시키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월레스는 다음과 같이 갱생 운동에 대하여 요약하고 있다.

메즈웨이와 체계의 실상을 변화시켜 더욱 효과적으로 긴장 완화가 있게하는 노력을 갱생을 위한 노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성원이 합동으로 그러한 노력을 할 때 그것을 가르쳐 갱생 운동이라고 한다.

그에따르면 갱생 운동은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를 거치게 된다: 1. 정체 단계; 2. 긴장의 기간; 3. 문화적 궤리 기간; 4. 갱생화의 기간 (이 기간중 메즈웨이 재형성, 교신, 조직화, 수용, 문화의 변혁 그리고 제도화가 있게 된다); 5. 끝으로 새롭게 되어진 안정된 체계). 정체 단계에서는 긴장과 부담이 있긴하지만 전체적인 비중으로 볼 때 사회전체를 혼란하게 할 정도로 발전된 상태는 아니고 견딜만한 정도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단계이다. 그러나 그 긴장과 부담이 지속적으로 오랜기간 가중되어 다른 방법으로는 그것을 견딜만한 상태에 머물게 할 수없게 될 때 메즈웨이의 분열까지 이르게 된다. 여기까지 오게되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지탱해온 정신적 형상에따른 삶의 방식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며,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기 시작한다 (이 때에는 저속한 삶 또는 자포자기의 삶까지 경험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삶의 가치관의 상실, 그리고 그로인한 불만족이 만연하게 된다.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생동력있는 삶의 지표를 제공하는 사회의 기본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기본적 기능면에서 볼 때 사회의 죽음인 것이다. 그러면 그 긴장과 부담은 더욱 가중되게 마련이고 이를 완화 시키려는 노력이 새로운 차원에서 시작 된다. 이러한 노력이 시작되는 시점이 곧 갱생운동의 시작인 것이다. 갱생화의 기간에는 첫번째로 메즈웨이(우주관에관한 정신적 형상)의 재형성이 우선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어느 누군가가 그러한 실상을 직시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선지자적 사명을 가지고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비젼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셋째로, 그 비젼을 따르는 구룹이 형성된다. 그 구룹은 점진적으로 체계적인 조직체를 형성하게되며 그 조직체를 중심으로하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된다. 사회는 기존의 문화 형태를 변혁하기에 이르며 그 변혁된 문화는 새로운 안정된 상태에서 지속되게 된다. 이것은 곧 죽음을 겪었던 사회의 재생인 것이다. 이렇듯 죽음에서 재생되는 전 과정이 갱생운동인 것이다.

먼저 본 논문에서는 위에서 요약한 월레스의 이론에 근거하여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의 전통적 메즈 웨이가 변화게 되는 그리고 그에 따른 지표의 상실과 그 결과적 삶의 양태를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변 사회의 문화적 영향이 어떻게 기독 교회를 변질시키고 있는가 분석한 후에 그의 이론에 따르는 기독교 갱생 운동으로서 성결 운동을 현대 교회의 출애굽이라는 맥락에서 전개해 나갈 것이다.

 

현대화의 물결과 그 파장

현대사회의 현주소를 말할 때 산업 자본주의에 의한 현대화의 물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피터 버거에 의하면 현대화의 물결은 산업 자본주의의 혁명에 의한 세계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혁명적 힘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창조적 파괴력 이라고 하기도 한다. "창조적 파괴력"으로서의 자본 주의 혁명의 물결은 서구 유럽 사회의 계몽주의에 의한 기술의 혁신과 신앙을 바탕으로 한 금욕주의적 삶과 성실한 노동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여 그 파장은 이제 온 세계를 덮어 가고 있다고 한다. 그 영향을 받은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제 3 세계 각 나라들은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각 나라의 문화적 능력과 노력으로 서구 사회에서 처럼 산업화에 의한 자본 주의의 혁명의 파장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파장은 사회 제반 구조속에서 조용한 혁명을 이루어 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는 돈 (money), 대중 (mass), 마켓팅 (marketing) 의 상호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원리에 의해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결과적으로 물질주의적 세계관을 창조하고 있다:

(1) 많은 사람들에게 부를 안겨다 주었다

(2) 이 부는 물질의 소유 능력을 향상시킨다. 물질의 소유 능력은 결국 다량 생산에 의한 그리고 돈의 소유에 의한 엄청난 구매력에 의하여 가능해 진다. 이전에는 승용차 하면 돈이 왼만큼 있어도 살 수 조차 없었다. 다량 생산이 이루어 지지 않았고 그러므로 희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힘에 의하여 다량 생산은 가능해 졌고 이익은 증대 되게 되었고 그러므로 오늘날은 마이 카 시대가 온 것이다.

(3) 물질의 소유 능력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내에서의 획득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획득적 지위의 향상은 그에 따른 마땅한 대우 내지는 대접을 받게 하므로

(4) 우리의 물질적 성공이라는 성공의 척도를 창출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다. 우리 주위에서 보았던 공직자들의 부정 부패, 각종 비리, 대형 참사, 또는 패륜적 행위등은 그 밑바탕에는 돈이라고 하는 물질적 성공에 대한 가치가 얼마나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깊이 내리고 있는가 반영해 주는 구체적인 실례들이다.

(5) 물질적 성공은 기술과 지식 습득에 의해 그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지기 때문에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 중요성의 강조는 곧이어 물질의 소비를 강요하게 된다. 영어 과외, 논술 과외, 무용 교습,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교습, 바둑 교습, 컴퓨터 교습, 외국 언어 문화익히기 위한 해외 연수 기타등등 우리의 자녀들은 어려서 부터 이렇듯 교육과 기술 습득을 통한 물질적 삶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며 자라가고 있다.

그러한 교육과 기술 습득을 향한 노력은 죽을 힘을 들여 일구어 놓은 자산을 부모에게서 빼앗아 가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어떤이는 집을 팔고 전세로 들어가서 그 차액으로 재정을 충당시키는 이도 있고, 어떤이는 집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 그것으로 충당하는 사람도 있고, 노후를 위해 저축해놓은 통장을 헐어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물질주의적 사회를 창조 하고 있다. 위에서 본 바대로 1)물질 소유 능력과 물질 소유능력은 삶의 질을 더욱 향상시킴으로, 2)성공의 척도와 획득지위의 잣대가 부의 크기에 의존하며, 3) 기술 습득을 위한 물질의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세 요인이 함께 맛물려 물질주의적 사회를 창조하게 된다. 역으로 물질 주의적 사회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물질 주의적 사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고 그들의 내적 의식 속에 하나의 피할래야 피할 수없는 실재로서 내면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싸이클은 계속 순환하며 더욱 더 물질 주의적 세계관은 사람들의 의식에 뿌리깊게 자리잡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물질 주의적 세계관의 형성에 의한 영향은 두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인간 관계에 나타나는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와 사회와의 상관 관계에 나타나는 측면이다.

1) 인간 관계에 미치는 영향

사회 구성원 사이의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질적 가치 기준에 의하여 사회를 보는 의식과 습관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보는 사람의 눈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향한다는 것이다. 나의 물질적 삶의 향상을 위하여 나에게 해줄 그 무엇을 너는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앞선다는 것이다. 인간이 한 인격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서의 한 인간을 인간으로서 보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유무에 의하여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 추상화"라고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호텔에 간다. 그러면 예외없이 도오 맨 (door man)들은 아주 정중하게 그를 맞으며 호텔 문으로 안내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이 고급 승용차 대신 봉고 벤을 타고 가면 그전에 아주 정중하게 대접받던 동일한 사람이 이제는 봉변당하기 쉽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인간으로서 변한 것은 없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그의 외형적 조건 또는 물질적 가치가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은 외형적 조건의 변화에 의하여 그는 다르게 취급 받았고, 그러므로 그는 추상적 존재일 뿐이지 하나의 실존적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변이를 가르쳐 인간 추상화라고 한다.

타인에 의한 인간 추상화적 취급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오직 물질적 유무에 의하여 평가하는 물질적 존재화라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고, 그것의 심화는 상대적 빈곤 의식의 심화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적 빈곤 의식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보자. 얼마전 까지만 해도 우리의 사회는 생존 자체를 위한 식량 조달이 심각한 문제였다. 매년 5 월이 되면 그 이듬해 걷어 들인 양식이 곳간에서 바닥이 나기 시작한다. 이제 남은 것은 보리 타작밖에 없다. 보리가 타작되면 그 보리로 다음 쌀이 추수될 때까지 견딜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보리 고개라고 하지 않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먹는 문제 즉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위한 최저 수단자체도 결핍되어 있어 그것 해결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요 궁극적 관심사였다. 이것을 가르쳐 절대 빈곤이라고 한다. 이제는 이러한 절대 빈곤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물질적 존재로의 전락은 나의 가진 것과 나의 이웃이 가진 것과를 비교하게 만들고 있다. 너는 그렌져 가지고 있는데, 나는 겨우 티코, 아니면, 아벨라, 아니면, 엑쎈트, 아니면, 아반테, 아니면 쏘나타 등등. 1947년에는 승용차가 200여대 정도였다고 하였다. 그때는 먹고 살기 바빠서 그 승용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정도의 가능성으로 아예 포기 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먹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너는 . . ." "나는 . . ." 식의 비교를 통한 빈곤 의식의 심화라는 것이다. 그때는 없는 중에 풍요로운 인심을 나누었는데 지금은 풍요로운 중에 가난하고 각박한 인심이 우리의 인간 관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자신이 스스로를 물질적 가치에 의하여 남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하니, 비굴해지고 비굴해지다 보니, 그 비굴해진 자신을 보상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이 가질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그러한 추구뒤에 자신에게 찾아 오는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인지할 능력을 상실하고 비 인간적 또는 비 윤리적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가진자는 더많이 가지려고 하고, 온갖 비리를 저지르기 까지하며, 그것으로 모든 특권을 누리며 가지지 못한 자들을 멸시하며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2) 종교에 미치는 영향

그러면 현대화된 사회내에서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종교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물질주의적 세계관은 인간의 의식속에서 종교적 세계관 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즉 과학 기능의 발달은 인간의 숙명과 자연에 대한 두려운 의식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자신이 태어난 그리고 자란 고향의 토지에 대한 신성한 의식이 있어서 좀처럼 그곳을 떠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원하면 아무 때나 집도 버리고, 전답도 버리고, 땅과 산도 버리고 훌훌 떠나 도시로 몰려 들고 있다. 그러므로 그 세계관은 자연의 신비와 신화에 뿌리를 둔 종교적 세계관이라는 정신적 뿌리와 사회적 지형적 뿌리로 부터 우리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 사회에서의 세속적 사회로의 변천이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그것이 문화적 의식 이든 사회 제반 제도등--종교적 세계관이 영향을 미치고 그 세계관에따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살도록 규정하였는데 세속 사회에서는 모든 것들이 종교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의하여 지배받게 되는 사회가 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사회를 지탱해오던 전통적 질서, 가치, 관습, 도덕율, 제도등이 그 지지력을 상실하게 되고, 전통적인 것들과 경쟁 관계에 있는 것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들게 되고, 그러므로 모든 사회 가치가 절대적 가치 체계로서의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로서 다른 것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다른 가치와 비교해 볼 때 그저 하나의 견해로 받아 들여지게 될 것이다. 이렇듯 여러 가치 체계가 공존하며 어느 하나가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는 상대적 가치로 용인되는 사회를 다원화 된 사회라고 한다.

이처럼 다원화된 사회내에 나타나는 사회 심리적 요소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그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역할을 정해준 유일한 정신적 지주를 파괴 시키고 상대적 가치인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새롭게 세워짐으로 그들은 사회내에서 소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소외는 무력증, 무의미, 무가치, 주변적 외계인 의식등으로 나타난다. 무력증은 사람들이 사회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기대하고 예견한데로 일어나지지 않고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그들은 그것들에 대하여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좌절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아침에 학교 잘 다녀 오겠습니다 하고 나간 어린 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다 다리가 무너저 내려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은 누구 하나 그럴 거라고 예견한 사람도 없고 그러한 사건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바로 무력함의 표현이다. 사회의 기능은 일차적으로 그 구성원들의 사회에 기여하는 행위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 그 대가를 사회가 되돌려 주는 법인데 그렇지 못할 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구성원에게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소외된 사회이다. 마찬 가지로 사람들은 가치를 찾지 못하게 되고 그러므로 그 사회는 사람들에게 타국에 온것 같은 외계인 같은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회는 소외된 사회이다. 사회와 구성원 사이에 소외 현상이 있게 될 때 사회 기능의 아노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아노미 현상이 나타나면 자신들의 무력증과 무의미와 무가치성때문에 방종의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종교의 역할중 하나는 사회의 전통적 가치 체계를 지탱해 줌으로 사회의 기능이 유지되도록 함으로 사회의 아노미 현상을 방지하는 것인데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정통성 유지 체계로서의 종교의 영향이 상대화 되어 하나의 견해로 인정받게 되어 아노미 현상을 막을 수 있는 힘이 거의 없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다원적 사회 현상이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일가? 이 문제는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 될 수 있다. 하나는 신학의 방법이요, 다음으로는 신앙의 실천 방법이요, 끝으로는 기독 교회의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역할에 관한 것이다.

(1) 신학 방법

모든 사회 가치가 상대적 가치로서 하나의 견해로 받아 들여지는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신학의 방법에 있어 결정적으로 세속화 신학이라는 방법이 하나의 운동으로 등장하고 있다. 종교적 전통이 구속력을 갖지 못하게 됨으로 초월적 신관이 제거된다. 이 말은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견해나 인간의 제도내에 침투하셔서 역사하시는 초자연적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제거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계시에 입각한 신학의 붕괴요 인본주의적 신학의 승리라는 말이다. 기독교내에서도 신학은 다른 학문과 유사하게 상대적 가치만을 갖는 학문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위 다원주의 신학이 파생되는 것이다.

(2) 신앙의 실천 방법

신앙의 실천 방법에 미쳐지는 영향은 세속화 신학 방법에 의해 연역되거나 아니면 그 신학 방법과는 관계가 없지만 물질주의적 현실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실용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의해 연역되는 것 중의 하나 일 것이다. 두 방법 공히 그 내용면에서는 실존론적, 심리 분석적, 사회적 인간 이해로 부터 출발하여 사람들이 현존의 세계에서 당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에 대한 신앙적 도움을 줄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 문제에 대한 이해와 해결 방안에 대한 접근은 "전통적 신관"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세속적 신관"에 의한 것이냐로 달라 지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비록 "전통적 신관"이라는 접근 방법을 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의 실천이 실용적이라는 점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초월적 신과 그 분이 인간의 제도내에 침투하며 일을 이루시는 초자연적 역사를 이루신다는 믿음이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대치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눈에 보이는 것이며 가시적 효과를 당장 나타낼 수 있는 것이지만 전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어렵고 길고 더디며 가시적 효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독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결국 초월적 신관의 제거든지 아니면 초월적 신관은 견지한다 해도 실제적으로는 그것과 상관없는 인간의 제도라는 물질주의적 세계관때문에 초월적 신에 대한 믿음에 따라 실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3)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역할

위에서 언급한 실천적 문제로 인해 파생되는 것으로 실용주의적 실리에 초점을 맞추는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도입하기 때문에 각 교회 마다 자신들의 교회가 있게된 전통에서의 이탈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서로간에 다를 것이 없는 즉 정체성을 잃어버린 다만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의 생존의 방법이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기독교와 관련된 많은 사회적 사건들은 이러한 사회적 아노미 상태에서 기독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어가며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며 반대로 그 사회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표상이다.

요약한다면 이 사회속의 기독교회는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백성이로되 애굽나라에서 애굽왕 바로밑에서 종살이하는 히브리인들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기독교회의 물질 문화에로의 침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화의 물결에 대항하는 성결 운동

그렇다면 이러한 물질 문화에로의 침전으로 이끌어 가는 격류앞에서 역류할 수있는 성서적이고도 사회속에서 증험된 역사적이며 사회적 실재로서의 기독교의 정체성과 역할은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싸움이다. 이 싸움은 우리 인간만의 힘만으로는 승리를 보장받을 수없는 싸움인데 이것은 영적 싸움이기 때문이다.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는 첫째, 세속화와 다원화라는 물결뒤에 숨어 있는 마귀의 궤계를 읽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본다. 둘째, 세속 주의라는 무기를 가지고 마귀가 지배하는 사회속에 침투하셔서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하여 민감하여 그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로 우리 자신들을 드릴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필자는 이러한 싸움의 성서적 모델로서 출애굽 사건을 제안한다. 그러한 제안을 설명하기 위하여 현대적 기독교의 대응과 미래적 전망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 현대화의 물결에 대한 대응

위에서 말한 물질주의적 세속화 현상은 기독교회로 하여금 그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가능한 대응책은 두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세속 신학자들이 제안한 것을 받아들여 세속의 물결에 항복의 백기를 들고 세속주의를 따라간다. 이 때에는 전통적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 체계 즉, 초월적 하나님이 역사 내에 침투하시며 때로는 기적의 사건을 통하여 그 자신의 섭리를 이루어 간다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모든 교리 체계는 현대인의 과학적 이성적 세계관에 맞지 아니하므로 버린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다른 가치 체계에 비하여 하나의 견해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현대적 감각에 맞추어 각색시킨다. 그 각색의 하나는 객관적 신앙체계를 주관화시켜 사람들의 실존적 의미를 제공하게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역시 주관화 시킨 것으로 프로이드의 심리 칭유적 해방의 기법을 제공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타협을 거부하며 전통을 고수하되 접근 방법을 조절하는 대응이 있다. 그러나 전달 방법의 변화를 강조하게 될 때 자칫 잘못하면 방법의 틀 속에 고백적 내용이 감추어져 소위 무한 경쟁이라는 세속적 방법이 기독교 내에 만연해 질 수 있다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마틴 마티가 지적했듯이 교회들은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데 이기고 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라는 경쟁적 기업화 다른 말로 말하면 실천의 세속화 (고백은 전통적이지만 실재의 삶은 세속적 의식으로 사는 것)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위의 두가지 어느 것도 아닌 제 3의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대를 거슬러 올라 가는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이다. 즉 현대적 의미의 출애굽으로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결 운동이라는 것이다. 다음에서 언급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견과 영적 싸움이라는 면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왜 이 길만이 우리가 견지해야할 길임을 알게 될 것이다.

 

1) 미래적 사회 현상에 대한 예견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 나겠는가?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구체적인 예견은 불가능하며 다만 하나의 원칙적인 사회 흐름의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선교적 차원에서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의 신 세대들이 물질주의적 삶의 공허를 느끼고 앞으로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될 때 어떤 상항이 일어 나겠는가 하는 점을 들어 보자. 그들은 전통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자유 분망하며,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원하는 데로 선택하며 살아 온 세대들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많은 일들이 그들의 추구의 대상으로 다가 왔으며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과 사고력을 투자하며 살아 왔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어느 정도 이루어 놓고 영적인 공허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공허를 채우기 위해 반드시 전통적인 것에 대하여 추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러한 것들에게 메이는 삶을 살아 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에는 많은 종교적 집단들이 특히 기독교 이단들이 그들의 필요에 대한 수요를 만족 시킬만한 나름대로의 종교적 상품을 만들어 그들의 호기심을 유발할 것이며 어느 정도 성공할 것이다. 그 상품들은 종교적 신비성을 부각시켜서 최상의 종교적 상품이라고 선전할 것이다. 현재에도 불교의 사원들이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깊은 산골을 등지고 세속도시 속으로 내려 오기 시작하고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위에서 말한 신비적 상품에 대하여 앞으로 있을 것에 대한 예견을 위해 우리의 주의를 끌만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미래적 전망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는 것이며 그 도전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이라고 하는 이 시간에 이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영적 싸움

이미 앞에서 영적 싸움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마귀의 궤계를 통찰하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면 과연 마귀의 궤계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조직 신학에서 다루는 마귀론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 관하여 한가지 집고 넘어 가야할 것이 있다. 즉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나 헤프게 마귀의 이름을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를 그렇듯 자신의 마음대로 언제라도 헤프게 책임 전가나 받을 존재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귀는 그러한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무속적 귀신론에 입각하여 마귀를 마구 잡이로 대하고 있을 때 그는 좋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를 그렇듯 하찮은 존재로 꼬리표를 달아 줌으로 그는 그 꼬리표 밑에 교묘히 숨어서 경계당하지 않고 자기의 궤계를 획책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치명적으로 우리 기독교회에게 손상을 끼치는 마귀의 궤계는 다름아닌 교회를 물질주의적 세계관과 보이는 세속적 방법론에 의존하게 함으로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제도속으로 침투하셔서 자신의 섭리에 따라 역사를 이루시는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세상 것을 믿고 따르게 함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과 벗이 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아니하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게 될 때 교회는 더럽혀 지는 것이며 질서가 무질서로 되며 깨끗함과 (성결함) 질서라고 하는 하나님의 영역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며 이 때 교회는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모습이다.

2. 우리에게 요청되는 성결 운동

위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도전과 영적 도전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그 도전에 대한 승리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본질적으로 우리가 세상과 다른 존재이며 그렇기에 다른 존재로서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현대 교회가 출애굽 당시의 애굽 나라에서 종살이 하는, 하나님을 알고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영역과 능력 밖에서 신음하는 히브리인들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언급하여 왔음을 상기 하기 바란다. 만일 히브리인들의 그 당시의 상항과 오늘의 기독교의 영적 상태를 대비할 수 있다면 우리의 궁극적 질문 즉 오늘의 기독교가 어떻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가? 에 대한 모형적 답을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출애굽의 사건을 주의 깊게 살펴 보면 출애굽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성결케 하고 사명을 맡기는 데서 부터 시작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은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 땅에 인도하여 성결한 처소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성결한 처소에로의 진행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의와 공의와 사랑을 실천해나가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의지하며 모든 역경을 뚫고 나가 안식을 누리는 가운데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드높임으로 그분께만 영광 돌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점에 있어 현대 교회의 애굽의 종살이와 같은 상항에서의 새로운 출애굽이라는 맥락을 제공하며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결 운동의 재 발견이라는 맥락인 것이다. 이제 출애굽 사건을 음미해 보면서 성결운동의 의미를 살펴 보려고 한다.

(1) 하나님의 시작

출 2:24, 3:7,9,16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며 탄식하는 소리를 보고 들으시고 아심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속하시기로 뜻하신 것이 바로 출애굽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중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속하시고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셨도다" (출 15:13). 거룩한 하나님께서 고통중에 신음하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곳에서 나오게 하시고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시작이요 목적인 것이곧 출애굽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당신의 백성들이 자신도 모르게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쇠 사슬로 묶어 세속적 물질주의라는 속박가운데서 하나님을 알고 믿으면서도 그의 영역 밖에서 능력을 잃고 세상과 벗이되어 종살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오늘의 교회들의 고통, 신음,부르짖음, 슬픔, 탄식의 소리를 들으시고 아시고 보시고, 그곳에서 건져내어 이 세상안에 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성결과 거룩은 동일한 어원) 백성으로서 그의 은혜와 인도하심과 능력을 힘입어 정복자의 삶을 살게 하시기를 원한다. 즉 성결을 경험하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한 계명을 실현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삶이 모든 신자들에게서 살아지게 하는 운동 이것이 오늘의 사회에 요청되는 성결운동인데 이 운동은 하나님의 시작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2) 모세를 부르심

출애굽사건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모세를 부르시는 것으로 부터 구체적으로 인간의 역사속에 실현된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의 생애는 그 극적인 순간을 전후로 해서 구분된다. 애굽에서의 그의 생애는 세상의 모든 자원을 가진 자였지만 실패자였다. 그는 애굽의 궁중에서 애굽의 절대 권력자가 될 수 있는 모든 비밀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데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자원과 방법만을 요구할 뿐이다. 그의 광야 생활은 한마디로 말하면 애굽의 문화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과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형성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같은 혹독하고 외롭고 쓸쓸한 과정을 통해서 준비되 있었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남았으니 그것은 바로 성결의 체험인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첫번째 모세에게 주어진 명령은 이 곳은 거룩한 땅이니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모세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이 찾아 오신 그곳에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3, 4장에서 나오는 세 가지 특이한 경험을 이해함으로 모세가 경험한 성결의 내용과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을 벗으라"라는 천상으로 부터의 소리이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사막에서 신을 신지 않는 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신을 벗고 어떻게 사막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둘째,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이다. 그의 지팡이는 양떼를 치는 목자로서 절대적인 도구이다. 그는 그 지팡이를 의지해서 자신의 생명을 부지해왔던 것이다. 그가 40여년 동안 의지하던 그 지팡이가 알고 보니 본질적으로 뱀이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손을 가슴에 품은즉 손이 문둥병이 발하였다는 것은 모세의 생명 자체인 그의 심장이 부패의 근원이었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사건은 자신의 지금까지의 모든 삶의 유지 구조, 수단, 생명 자체가 모두 세상적이요 마귀적이요 부패 자체로서 하나님의 존재와는 절대적으로 상관될 수 없는 그래서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깨달음인 것이다. 그의 지팡이 성결케 되어 다시 되돌려 졌다. 그의 신 거룩케 되어 다시 신게 되었다. 그의 심장 성결케 되어 하나님의 품성인 거룩과 사랑을 품는 그릇으로 새로워 졌다. 그 심장 가지고, 그 신 신고, 그 지팡이 의지해서, 이제 출애굽을 이루는 하나님의 참 종이 되었다.

출애굽의 목표는 현대적인 표현으로 히브리인들의 탈 애굽 문화화, 하나님의 새 법인 율법에 의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을 살게 하는 재 사회화, 고난과 역경중에도 법을 의지하므로 승리하는 삶 (광야 생활의 상징적 의미), 끝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복인 안식의 삶 (가나안 안주의 상징적 의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능력을 베푸셨다. 10 재앙을 통해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바는 모세의 하나님은 탈 제도를 경험하고 그 제도권내에 들어간 모세를 통하여 애굽의 모든 제도내에 침투하시고 그 제도의 힘과 원리를 극복하여 하나님이 참 하나님,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이심을 들어 내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러한 모세와 그의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통해서 현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성결 운동은 어떤 것이 되야 할까?

3) 현대 교회의 성결 운동

위에서 언급한 모세의 성결의 체험의 양상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체험되어야 할 모형이다. 먼저,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신을 벗어 버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해 왔던 소위 돈, 대중, 마케팅으로 대표되는 세속주의적 물질주의라는 우상에 대한 숭배를 포기하며 회개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지팡이의 뱀으로의 변신은 바로 우리가 손잡고 따라 가던 세속 주의 바로 그것이 보이지 않는 마귀의 궤계를 따라간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미워하며, 두려워 하며, 경악을 금치 못하며 회개하며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손에 문둥병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이렇듯 세상과 마귀를 이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여기에서 온갖 더러운 것이 스며 나오는 시궁창 같은 것임을 말이다. 여기에서, 온갖 탐욕이 솟아나며, 자기 영광과 만족을 추구하며, 자기 중심적이 되며, 자긍하며, 자존하며, 아집하며, 원망하며, 불평하며, 교만하며, 분노를 일으키며, 비방, 판단, 정죄하며, 성적 욕망에 사로 잡히며, 시기하며, 차별하며, 이중적이며, 세상을 사랑하며, 간사하며, 강팍하며, 성령의 역사에 순종치 않고 오히려 불순종하게 하며, 그러므로 참 안시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히 3:7-13)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빛으로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다시 여상해 졌다는 것은 손에 문둥병이라는 부패를 일으키는 이 부패한 마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 마음이 성결하게 되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것이 모세의 사건에서 보았던 성결의 체험의 의미이며 바로 우리 모두가 체험해야 할 성결이며 그러한 운동이 우리가 일으킬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성결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성결을 체험한 모세처럼 새로운 사명과 능력을 부여 받게 된다. 이전에는 이 세상 것으로 능력을 삼았지만 이제 성결케 된 사람속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러나 바로 그 분이 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하는 비밀을 발견한다. 이전에 즐기던 것 사라지고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차게 된다. 마음의 평안과 확신이 생기며, 늘 기쁨이 넘친다. 고난과 역경중에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고난이 올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인하여 기뻐한다. 얼굴은 늘 밝은 빛과 미소와 온유함과 만족함으로 가득찬 광채가 나며, 유혹을 이길 힘이 생긴다. 삶의 의미가 전혀 새로워 진다. 이전에 율법적으로 봉사하며, 수고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육체의 소욕을 싸워 이기려고 하였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던 그리고 자기 의를 내 세우려고 하였던 것 이제 성결케 된 마음에 충만하게 임한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승리하며 하나님께 감사 찬양드린다. 모든 것에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 (히 11:6) 의지하게 된다. 소망은 보이는 이 땅의 부귀 영화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고 산다. 이전에는 수많은 기도중 이루어진 것 아주 소수였는데 많은 기도가 아니라도 정확하게 이루어 지는 경험을 통하여 기도의 삶으 폭과 깊이는 더욱 심오해 지며, 기도의 비밀을 터득하여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여쭙고, 간구하며, 중보하며,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영으로 말씀하심을 경험한다. 이전에는 눈에 보이는 능력과 방언과, 기타 영적 은사들을 추구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사랑의 충만함을 추구하게 된다.

이같은 역동적 능력의 삶을 가능케 하는 성결의 경험은 모세의 출애굽 사건에서 보았듯이 교회로 하여금 탈 세속주의 탈 물질주의로 탈 세속 신학화, 탈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쟁으로 이끌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법으로 살게 하는 재 사회화가 이루어 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을 힘입어 많은 어려움과 고난과 시험 투성이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도피하여 금욕주의적 혹은 율법주의적 삶을 사는 패배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늘 승리를 경험하며 늘 하나님이 쉬신 것처럼 참 안식과 자유와 평안을 가지고 살도록 인도할 것이다. 또한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베풀며, 선한 열매를 맺으며, 전도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며, 참다운 부흥을 경험하게 하는 신앙인이 되게 할 것이다.

 

끝맺는 말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혁명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물질적 세계관이라고 했다. 그 영향권 내에서 기독교는 현대 사회의 문화적 예속을 경험하고 있다. 초월적 존재로서 인간의 역사와 제도내에 침투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믿음과 신뢰가 상실되어 가고 그 대신 자본 주의의 원리가 대치되고 있다고 말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의 상태와 유사하다. 현대 기독교회는 바벨론 포로시대가 아닌 애굽의 노예 시대와 같다. 그가운데서, 만족 없으며, 신음소리, 부르짖는 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들려오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질문 즉 이것이 선택받은 선민들의 운명인가?라는 질문이 우리의 질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의 사회와 교회들은 바로 우리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한 것처럼 거룩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성결 혹은 거룩을 상실함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며, 세속주의적 물질주의에 종살이 하는 가운데 신음하며, 애통하며, 고통하며, 슬퍼하며, 부르짖고 있는 오늘의 교회들의 그 신음 소리를, 그 처량한 모습을, 그 현주소를 듣고, 알고,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교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깨우치는 소리를 듣고 성결을 경험하고 성결운동을 일으킬 것을 위하여 이제 시작하고 계신다.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출애굽의 시작이다. 그 시작의 구체적 실천이 출애굽의 사건이 있기전 모세를 거룩하게 하고 그 일을 맞기신 것처럼 오늘에도 그렇듯 준비된 모세와 같은 사람을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사명을 맡기심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요한 웨슬레는 이러한 성결의 경험없이는 "어떠한 부흥도 기대하지 말라" 그리고 "완전을 지향하지 않고는 모든 신자들은 냉냉해지며 죽어 갈 것이다; 그리고 단지 경박해지며, 잡담하며, 험담을 지어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 그들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파괴 될 것이다" 라고 이미 경고 하였다. 포싸이쓰 (P. T. Forsyth) 는

"우리 기독교 신학에서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거룩에 있다" 라고 했으며, "과거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으로 교회가 충전돼 있었드시 앞으로 우리에게 닥아올 미래에는 하나님의 거룩의 개념으로 철저하게 사람들을 [교회를] 충전시켜야 할 것이다"라고 권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 현장에, 교육 현장에, 예배에, 가정에, 사회에, 선교 현장에 이 운동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질크리스트 로슨의 시 "일어나 비추라" (Rise and Shine)를 소개하고자 한다.

오,하나님의 자녀들아 깨어 일어나라,너희 눈을 하늘로 향하여 바라라

주의 영광 너희 위에 높히 떠 올랐으니,이제 소리 드높혀 그를 찬양하라

후렴: 너희 빛 임하니 일어나 비추라; 어두움 사라지니 일어나 비추라

낮이 이르렀으니 일어나 비추라, 주의 영광 너희 위에 높이 떠 올랐도다.

어두움 다시는 너희 앞을 어둡게 못하네, 너희 원수 너희를 조롱 못하네.

주의 영광 너희 높이 떠 올랐으니, 너희 흑암 변하여 밝은 빛되리라.

마음의 두려움 염려 사라져 없어 지겠네, 머리에 기쁨의 면류관을 쓰겠네.

주의 영광 너희 위에 높이 떠 올랐으니, 평안 능력 사랑 위에서 내려 오네.

너희의 눈물을 그가 깨끗이 씻어 주겠네, 너희의 생애는 구름없는 날되네.

주의 영광 너희 위에 높이 떠 올랐으니, 그를 찬양함이 언제나 가득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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