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복음 이해

 

 

허도화

 

 

 

   "당신은 복음을 설교하는데 자유함을 누립니까?" (Are you free to preach the gospel?) 이 질문은 1963년 바르트(Karl Barth)가 1963년 바젤(Basel)을 방문한 남아프리카의 독일 개혁교회 목사 스미스(Nico Smith)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바르트의 질문은 수년 동안 스미스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그의 설교 사역의 방향을 새롭게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질문은 오늘 설교 사역을 위해 헌신한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복음을 설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인 우리가 복음이 무엇인지, 설교에서 복음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바로 알고 나면 우리가 복음을 설교하는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자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충실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자.

   설교의 건강과 힘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는데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설교에서 복음과 그 중요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지닌 문제 중의 하나이다. 많은 청중들은 설교가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문제들을, 그리고 매우 정치적인 것들을 피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이 도전을 받을 때 심하게 반대한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그 시대의 사회, 경제, 정치 문제들에 관하여 들으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으러 온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이냐 또는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설교가 개인적인 변화나 사회적인 변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하나님을 개인적 삶의 문제들을 다루며 돕는 세계적인 치료전문가의 한 분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설교하는지에 관한 위튼(Marsha Witten)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개인 남녀의 심리적인 부담들을 완화시켜 주는 도구의 하나가 된다." 하나님은 "죄책감과 자기의심의 고통을 덜어주고...가족들에게 견고한 '가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선택할 지에 대한 우유부단함을 제거해준다."1) 이런 설교들은 앞으로의 세상이 지금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이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돕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늘의 설교에서 이와 같은 치료전문 중심은 매우 깊은 문제가 된다. 그 이유는 성서의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람들이 어려운 세상에서 살아 남도록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 속에서 분명히 정의로운 사회와 세계를 다시 만드는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치료전문가인 하나님은 종종 우리 자신들이 느끼는 필요를 반영하는 그 이상이 아니다. 치료를 전문으로 삼는 설교는 쉽게 하나님을 그런 이미지로 만든다. 이와 같이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을 오늘의 문화 속에 스며들고 있는 치료중심의 관심사에 맞추어 복음이 개인주의와 심리적인 경험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새로운 시대와 복음

 

   우리는 한 천년의 문을 닫으며 동시에 새로운 천년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다.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 격한 한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전의 어떤 교회도 오늘의 교회처럼 많은 도전들--정치, 사회, 경제, 인구, 철학에 관한 이슈들--을 직면한 적이 없다. 새로운 세기에 일어날 많은 변화와 새로운 문제들이 지금까지 사회에 대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던 교회의 안정과 역량을 위협할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세기가 우리에게 줄 변화들은 새로운 도전들을 가져다 줄 것이며 아울러 새로운 형태의 사역을 하도록 문을 열어 줄 것이다.  

   흔히들 21세기를 위한 설교를 생각할 때 먼저 새로운 세기를 위해 무엇이 새로워져야 할 것인지를 질문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고 해도 설교신학의 주제는 변하지 않는다. 설교신학은 설교를 통하여 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설교의 역할과 위치는 무엇인가?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과 앞으로 올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설교할 수 있을까? 또한 설교신학은 설교를 통하여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다음 세기를 위한 설교에 어떤 기대를 할 수 있는가? 설교의 미래를 여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21세기를 위한 설교는 어떤 형태인가?

   교회의 복음 전도가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인 한, 설교는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설교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어떠하든지 미래의 설교 형태와 설교학은 현재와는 다르게 형성될 것이다. 만일 새로운 세기를 위해 우리가 자신들의 설교를 어떻게 갱신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먼저 현재 점진적으로 우리의 설교와 청중을 형성하고 있는 몇 가지 서론적인 관찰이 필요할 것이다. 설교는 문화가 설교자와 청중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항상 포함하는 문화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다음 세기를 위한 설교신학을 형성하는 새로운 종류의 접근 방법은 먼저 다음 세기의 설교를 위하여 지금 형성되고 있는 상황을 규정짓는 방법에 의존한다. 21세기를 위한 설교의 의미와 실제, 그리고 그 형태에 관한 기본적 이해에 대한 몇 가지 도전들이 새로운 상황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강단은 설교의 중심 내용인 복음과 설교의 기초와 방향을 제시하는 설교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찾고 있다.

   최근에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주된 2가지 변화들이 설교의 방향을 정하는데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첫째, 점차적으로 교회는 기독교의 미래가 사회적 관심을 가진 복음전도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본질에 관한 서구적 이해는 교회가 사회의 중심적인 기관으로 안정된 상황 속에서 주로 목회 상담과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어 왔다. 바너(George Barna)가 지적한 것처럼, 20세기에는 "도덕적 가치관, 사회적 행동, 문화 활동, 가정의 발달, 생활 방식,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인 결정 사항까지도 종교적인 관점과 영적인 감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2) 그러나 자신들의 사회를 매우 기독교적으로 간주하여 그 속에서 사는 자들을 위해 교육 목회와 목회 상담을 강조하던 서구의 교회들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다원적 사회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새로운 선교적 상황 출현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선교적 관심에로의 큰 변화가 지금 전도가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많은 새로운 이해를 필요로 한다. 즉 복음 선포가 개인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그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단순히 신경성 공포, 억압, 걱정과 싸우는 변화의 시대만이 아니라, 정사와 권력에 대항하는 선한 싸움의 시대이다. 심리적 개인주의보다 사회적 의식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혼란을 치를 것이다. 지금보다 더욱 복잡한 세계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들이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도전을 줄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선언할 때, 그들이 단지 앞으로 받게될 보상이나 지금  깊이 느끼는 내적 평안을 강매할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과 구원의 약속은 내적 충격들로부터 단순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로로 붙잡는 제도, 사회적 태도, 습관, 그리고 억압들로부터 해방되는 희망을 말한다. 우리가 전하는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과 약속으로서의 구원이 사회적이고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20세기의 마지막에 서 있는 우리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많이 성경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아직도 성경에 무지하며, 결국 교회력에 따른 설교(Lectionary Preaching)가 점차 최선책으로 등장했으나 교회들은 아직도 비고 있다. 해석되지 않은 성서주의는 생명력 있는 삶을 위해 불충분하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요구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해 온 성경 공과(교훈) 중심의 설교는 성도들을 신학적 사고에 필요한 견고한 기초가 없는 자들로 만들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실제적으로 세속적 의미의 삶 속에 분산되어 영향력을 잃은 성서적인 생각들을 가진 자들을 양산하여 왔다. 아마도 그런 교인들을 세속적 형식의 신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위한 설교는 신학적 작업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을 찾고 있다. 지금 강단이 갖는 임무는 21세기의 의식 속에 신학적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음 세기를 위한 설교는 단순히 성서의 본문을 해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설교는 의미를 주는 목회이다. 우리의 혼돈된 세계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은 확실히 설교단이 갖는 사명이다. 우리는 성도들이 시대를 분별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장래의 전투를 대비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리자로서의 책임을 부여받은 자들로 살도록 영적 토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만일 설교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 원리에 근거한 생활철학을 따라 살도록 준비시키며 앞으로 올 것을 해석해야 한다면, 사건들과 문제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설교신학과 복음

 

   우리가 복음을 설교하는데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거나 충실하지 못하다는 말은 우리의 설교가 신학에 근거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강단이 신학적인 생각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설교에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 그 설교가 분명한 목적과 초점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혼란 되고 불확실한 강단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을 상실하게 된다. 신학은 공적인 영역을 다루는 설교까지를 포함하여 설교를 강하게 한다. 신학에 기초를 둔 설교는 공적이다. 우리의 설교는 공적인 문제에 대해 권위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하는 주된 신학적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듀크 대학의 설교학 교수 라이셔(Richard Lischer)가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 설교학은 전반적으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차원에서 설교자가 자신의 신학을 구체화해야 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3) 콥(John B. Cobb Jr.)은 믿음을 구하며 이해하는 진지한 행위로서의 신학이 많은 교회들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슬퍼한다. 그의 지적에 의하면 설교가 주로 인기 있는 심리학과 상식에 근거함으로 그것들을 재확인하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마련될 뿐, 복잡한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도록 격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 루이스빌 장로교신학교의 설교학 교수 맥클루어(John McClure)는 현대 설교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을 지적한다: "19세기의 후천년설을 주장하는 설교와 20세기의 진보적 복음주의 설교에서 나타난 것처럼 현재 장로교의 설교는 지속적이고도 분명한 신학적 메시지가 부족하다."5)

   신학이 무시된 시대에서 우리의 설교는 주로 목회적 돌봄, 교육, 훈련 또는 상담과 같은 개인적 이상주의나 실리주의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설교의 주된 사명은 목회적 돌봄이나 성서적 교훈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밴더빌트의 설교학 교수 버트릭(David Buttrick)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다시 한 번 신학에로 돌아가서 신학적으로 생각할 것을 요청한다:

 

   설교는 단순히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역이며 우리가 사는  혼돈된 세상에서 의미를 주는 것이 진정 강단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이 시대를 분별하도록 도와야 한다. 신학은 신앙을 현대 언어로 그리고 현대의 사고 구조 안에서 설명한다. 만일 설교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해석해야 한다면, 그 때는 설교가 사건들과 문제들에 대해 신학적으로 생각해야 한다.6)

 

   이제까지 20세기 설교의 자취를 평가해본 대로, 우리의 설교가 세계와 사회의 변화를 위해 영향을 끼치지 못한 이유가 설교사역에 대한 전망과 일련의 우선 순위 없이 노력하는 조각난 조직체로 전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서 설교신학의 관점에서 다시 강조해야 할 설교사역의 우선 순위를 사려 깊게 결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21세기를 앞에 두고 우리의 설교는 너무 많은 사회와 세계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죄책감과 무능력의 와중에 있는 덫에 걸렸다. 우리는 외치고 싶다. 또한 우리는 이 시대에 필요한 설교와 변화를 일으킬 설교의 방법을 찾고 있다. 어떻게 사회적인 현실을 다루는 설교가 오늘의 교회에서 다시 들려질 수 있는가? 어떻게 복음에 충실하고 세상에 대해 열린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찢어지는 복음

 

   교회는 이중적 사명을 가진다. 우리는 복음을, 즉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에 관한 기쁜 소식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다. 동시에 우리는 옛 질서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에 관한 표시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 속에 있는 교회는 항상 찢어진다. 한편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문화와 접촉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에 관한 표시를 보여주기 위해 우리 자신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시켜야 한다. 한 쪽은 세상과 연결되도록 충동하며 또 다른 쪽은 세상을 거부하라고 충동한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과 대립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우리가 보존하려는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복음은 항상 찢어진 채로 전해지며 그래서 항상 왜곡된다. 우리의 설교에서 그리고 성경에서도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순수한 복음은 없다. 흔히 어떤 설교는 개인적인 필요나 문제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다른 설교는 공적인 이슈나 사회, 국가에 대한 관심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개인과 사회 두 종류의 주제 모두를 다루어 설교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개인적인 문제가 마치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듯이 복음은 격리된 개인들에게 한 말을 정치 세계나 사회적 체계에 대해 말할 때 다른 언어로 바꾸어서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복음이 총체적인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며 그들 자신의 삶과 다양하고 복잡하게 상호 연관을 맺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7)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설교자가 다양한 청중에게 균형 있는 복음으로 말하는 것이다.8) 그러므로 설교의 필수적인 목적은 항상 복음 선포이다. 설교자는 본문에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할 의무가 있다. 각 시대는 복음을 삶에 적절하게 새로운 방법으로 전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호감을 갖도록 우리가 복음을 재 포장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이유는 교묘한 마케팅과 신앙의 타협이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요구하신 진리를 축소하지 않고 오늘날의 상황과 긴장 속에서 아주 적절한 방법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일차원적인 경험이 아니라 모든 사고와 행동과 경험에 스며드는 다각적인 삶의 방법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려면, 강단은 새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탐구하라는 도전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 설교자들이 인생의 모든 면에 대한 복음의 적절함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난, 정의, 차별, 낙태, 성적 혼음 같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복음을 적용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때때로 이러한 문제들이 신학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설교자들을 진퇴양난의 상황에 봉착하게 하였다. 그러나 복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설교자는 교회 안에서 논의를 통해 자신과 청중들의 신앙을 공적 문제들에 진지하게 적용할 수 있는 상황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 이처럼 복음의 적절성에 대한 반응은 설교자와 그의 청중이 사랑, 평등, 정의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가를 알아보는 척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개인이나 사회, 일반적 상황이나 특수한 상황, 그리고 현재나 미래 중 어느 하나만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개인과 세계의 영적 상태와 사회적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우리가 왜 복음의 균형을 믿으며 그 믿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젖어 있다하여도 사람들의 의식을 꿰뚫으려면 믿음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 교회의 형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일 예배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봉사하고 참여하는 태도, 경건과 엄숙 대신에 기대와 기쁨 그리고 실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살아가는 방법을 바꾸어 비그리스도인들의 시각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사회에 참여하고 봉사해야 함을 의미한다. 복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설교는 청중이 자신들의 인생 목표를 경건한 시각에서 다시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포괄적인 인생철학의 개발이 될 것이다. 복음의 균형을 되찾는 설교를 통해서 인생의 기본 목표가 바뀔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한 사랑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고, 안락함을 위한 노력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강조하는 것으로 변화되며, 안전에 대한 추구가 신앙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복음의 균형에 대한 종교적 경험이 사고의 체계 또는 생활 양식의 본질을 변화시킨다는 의식을 일반화시켜야 한다.

   브루기만(Walter Brueggemann)은 "설교의 임무와 가능성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적절한 설교양식으로 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9) 강단이 종종 힘과 타당성이 부족하게 보이는 이유는 설교의 형식이 단순하기 때문이 아니라 설교의 변화를 요구하는 복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강단으로부터 복음이 들려지지 않을 때는 그 시대의 문제들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하나로 묶을 것이 없어진다. 만일 설교자들이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면 그들의 메시지는 청중들이 깊게 관심을 갖는 실제의 상황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 실제의 상황은 항상 사회, 경제, 정치적 상황으로 얽힌 그물과 같다. 설교자들이 복음의 균형을 되찾는 설교를 할 때 이 모든 것들에 도달된다.

   목사는 기쁜 일들을 장려하는 자보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 사역의 주된 임무가 교회 관리가 아니라 사건들과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자아상이 교회 행정가로부터 예언자와 신학자로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말하도록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성직자로서 자신의 신앙의 본성과 구조, 즉 설교의 역할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설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설교자의 신학과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설교자의 신학이 복음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지 못할 때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교회를 가르치고 이끌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설교와 관련된 설교자의 신학(신앙)과 공적 문제들(실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자의 복음 이해

 

   설교의 필수적인 목적은 항상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에 관한 기쁜 소식에 대해 생각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신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설교 신학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를 준비할 때 그리고 그 설교에서 어떻게 신학화 하는가를 말한다. 복음의 균형에 대한 캠벨(Ernest T. Campbell)의 신학적 이해가 그의 설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소개함으로 이 질문에 답하려 한다.

   우리가 설교에 관한 우리의 신학적 관점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 관해 균형 있는(총체적인)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에 있다. 설교자의 신학적 사고는 복음을 경험한 것에 근거한다. 설교자는 복음 메시지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데 관심이 있다. 신학적 사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와 우리 자신의 실존 사이의 교차점을 찾는 인식과 상상의 과정이기 때문에 설교자의 신학은 복음에 대해 생각할 책임이 있다. 설교에 대한 설교자의 신학적 생각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복음의 전체적인 의미, 그리고 복음과 인간 실존 사이의 전체적인 관계--전체적이다.

   복음이 단편으로 나누어질 수 있음으로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서 복음의 균형을 상실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함을 원하신다.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서 주인이 준비한 정식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주문하는 식으로 복음에 접근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10) 설교는 그 날의 문제들이 주는 위기에 대해 단순하게 설교학적으로 반사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복음의 부분이나 자신의 성격과 경험에 가장 잘 맞는 부분들만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단순히 자신이 선택하는 옥타브(범위) 내에서만 오르락내리락 연주만 할 것이 아니라 진리의 키보드에 다른 열 개의 옥타브들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11) 설교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듯 설교를 한다면 그의 상상된 선택이 늘어남에 따라 복음에 대한 헌신은 좁아지는 경향이 생긴다. 개신교의 종교개혁 이전이나 그 이후의 교회는 지나친 개인주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천주교가 행한 엄격한 교회의 억제에 반대하면서 지나치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교정하였다. 그 결과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고르고 선택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이다. 교회의 주된 기능의 하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분히 전파하는 것이다. 충분히 전파되는 복음, 즉 균형을 지닌 복음은 "도전과 위로, 심판과 은혜, 그리고 명령과 약속"을 동시에 전한다.12)  이것이 설교자의 주된 책임이다. 처음부터 교회의 사명은 전 세계에 거주하는 자들에 대한 사명이었다. 우리는 전세계로, 즉 "수평적으로 어떤 나라도 남기지 않고 그러나 또한 수직적으로 모든 사회의 계급, 조건, 수준, 질서와 계층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전세계로 가라는 명령 아래 있다."13) 그러므로 교회의 다른 비판적 기능은 복음에 대한 충분한 반응을 발전시키고 조정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목회의 목적이 사람들이 내적으로 바라는 것과 그들의 일시적인 필요들을 모두 전하는 복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복음과 사회적인 복음의 대칭 구조는 잘못된 이해와 분열로부터 발단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스런 구원의 행위에 근거하며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살도록 부름 받은 우리의 모든 삶에 적절한 하나의 복음만이 있다.14)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동시에 세계 공동체의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도 진실할 수 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세상에서의 봉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 같지만 어떤 회중이라도 이것과 저것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15) 하나의 복음은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어서 생각과 마음이 순수한 신앙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개인에 대한 복음전도와 복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재결합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설교에서 균형을 이룬 복음을 전하려는 설교자의 관심은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에게서 이미 나타났다.

 

   인간의 생활에는 두 가지 위대한 실체, 즉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있다. 그런데 종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구해야 한다. 영혼은 의와 영생을 구해야 하며  육체는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16)

라우쉔부쉬의 말처럼, 설교자는 독특한 복음의 구조 안에서 사회적인 행동과 영적 중생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설교 사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어떤 균형의 형태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설교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문제는 "믿을 수 없는 복음, 값싼 복음, 그리고 타당성이 없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17) 전투적인 교회는 종종 잠자는 교회가 된다. 우리는 인간을 갈라놓는 주된 문제들에 관하여는 아주 여리게(피아노시모) 말하는 반면, 개인적 죄에 관하여는 매우 강하게(포르테시모) 말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18) 침묵과 타성에 의해 우리들은 공적인 영역을 제쳐놓고 상황이 더 좋아지지 않았음을 이상히 여기는 만용을 부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지난 수년동안 복음의 개인적 의미보다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거나 모든 사람들과 기쁜 소식을 나누라는 명령을 무시한 불균형을 고쳐야 한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복음이 개인적인지 사회적인지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는 위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총체적인 신앙의 말(馬) 위로부터 이쪽이나 저쪽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각 지역 교회들은 "영적이다" 또는 "세상적이다"라는 불균형의 꼬리표를 달게 된다.19)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은 복음이 세상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목소리들은 바로 교회 안과 밖에서 널리 들려오는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에 대한 관심을 거절함으로 복음을 제한하며 복음선포를 막는 경향이 있다."20) 그들은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야 하며 그래서 교회와 국가는 각각 그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에 의하면, 교회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만일 교회가 이 일에 전념한다면 다른 어떤 것에 간섭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에서 그 시대의 사회적 문제들을 소개하는 것에 화를 낸다.

   복음주의자들과는 달리, "밖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수평적 차원인 복음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직적 차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21) 교회를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를 위해 일하는 기관으로 이해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들에게 중요한, 구원하는, 살아있는 분으로 이해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인간의 변화를 위한 노력만으로는 충분히 철저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제도의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22)

   그러나 복음의 균형을 찾는 자는 복음이 항상 개인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임을 믿는다. 어느 쪽도 다른 한쪽 없이는 복음에 대한 총체적인 증언을 할 수 없다. 설교 사역에서 중요한 사명과 목적의 일치는 오직 그 둘의 적절한 균형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늘의 기쁨과 땅의 관심을" 동일하게 추구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23) 교회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대표로서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려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으며 수평적으로는 사람들과 그들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24)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설교에서 균형 있는 복음을 위한 우리의 관심과 위치를 표현하면서 복음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요소들의 종합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균형을 설교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청중들을 더 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더 의미 있는 역사 참여에로 이끌어야 한다. 그 이유는 복음에 관한 설교가 깊이에 있어서는 개인적이며 참여에 있어서는 공동적이기 때문이다. 복음에 관한 이해는 설교자의 전제를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로부터 시험하도록 용기를 준다. 우리의 설교가 균형 있는 복음을 지향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 역사, 성경, 그리고 개인과 사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통해 우리의 강단의 방향을 다시 조준할 필요가 있다.

 

 

개인과 세계의 주

 

   첫째, 복음의 균형은 설교자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와 세계의 구주로 모든 삶에 주가 되신다고 해석할 때 나타난다. 균형 있는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는 청중을 더 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로 일깨운다. 수 세기동안 교회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사역의 개인적 성격을 강하게 심어왔다. 그러나 신약성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점차 그리스도의 우주적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너무 많은 세월 동안 너무 작은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제한함으로 그의 통치를 우습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되심을 해석할 때 그의 우주적인 의미를 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남녀 개인들을 위한 의미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세상을 위한 의미도 가지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한 구조와 질서의 힘, 즉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보이지 않는 세력에 대해 승리하셨다 (골 1: 16 -17).  

   우리는 현재의 그리스도의 통치를 개인의 마음이나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신앙인들의 고립된 집단에 편리한대로 제한시켜 그의 위대함을 약화시키는 신학을 조심해야 한다. 그런 신학은 그리스도를 일정한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지역구 대표로 제한시킨다. 예수가 개인의 구주 되심이 그리스도가 우주의 주되심을 무시할 때, 즉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무시하게 만들 때 복음은 왜곡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책임감 있는 윤리적 행동으로부터 멀어져 쉽게 특권 의식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분을 우주의 구주로 섬기며 그에게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처럼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균형 있는 주되심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와 강단이 자체의 갱신을 위해 물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균형 있는 복음이 선포되거나 받아들여질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의 주이시라는 기독교의 신앙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의 삶과 교회의 주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의 주이시다. 그러므로 복음에 관한 설교는 장밋빛 꿈이나 현실 도피를 위한 복음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설교에서 한 분 위대한 실체를 아는 유익과 함께 사물의 공통적 실체에 직면한다.

 

 

현실적이며 초월적인 역사

 

   둘째, 균형 있는 복음을 향한 설교는 역사를 진지하게 이해해야 한다. 바람직한 역사관은 현실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라면, 이것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 비록 강단을 통해 설교자가 생활과 말로 그리스도는 모두의 주와 구세주라는 기쁜 소식을 선언하도록 특별한 명령을 받았지만 이 사명에 대한 충실함은 우리를 역사 속 깊이 던져 놓아 우리가 역사에 참여하지 않음에 대해 변명을 구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의 의미이다 (마태 23:23).

   대체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진지하게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들은 인간의 역사에 대해 초월적인 견해를 취하거나 그 역사를 구원에 관한 인간 경험이 일어나는 단순한 배경으로 간주한다. 이런 부분적인 역사 이해는 실제적으로 세상 속에서 종교를 "착색 유리로 덮은 참호같이 제한시키는 것이다."25) 어떤 이들은 역사의 넓은 영역으로부터 떠나 그들 개인적 이야기를 이루는 소규모의 일들에 집중하여 자주 가족과 직업과 같은 개인적인 목표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세상이 불타고 있는 동안 교회가 삶의 현장에 대해 무관심하여 사소한 윤리적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관심사인 빈곤, 전쟁, 불평등과 같은 문제들에 열정을 쏟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영역, 삶의 모든 조건을 포함하는 내세와 영원, 정치의 세계와 기도의 세계, 자연의 질서와 은혜의 질서, 사랑과 정의, 또는 개인과 제도에 대해 분명한 책임을 져야한다. 그 이유는 각 영역이 다른 영역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삶의 사적인 과정뿐 아니라 역사의 공적인 과정에 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의 대상인 세상의 모든 이에게 말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둔지에서 기꺼이 철수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기쁜 소식이 가장 잘 전달될 때가 바로 그것이 듣기에 힘든 소식일 때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이 가장 설득력 있을 때는 복음이 "교회에 관한 페이지"로부터 빠져 나와 현재 진행중인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페이지에서 발견될 때이다.26)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려는 이유가 필연코 둘 사이에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상호관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영역에 모두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전혀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 성경으로부터 그 두 영역에 대한 연결을 찾는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라...정의 없는 사랑은 그 둘을 모두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정의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복음을 듣게 된다. 만일 우리가 약자들을 계속 억누르고 인간 이하 취급을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돕고 그들을 위해 외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가!27) 이것은 우리에게 정의를 회피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생각나게 된다. 그러므로 보존의 질서에서 주된 미덕은 사랑이 아니라 정의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설교자는 청중을 역사 속에 더욱 진지하게 참여하도록 깨우쳐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불의한 일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

 

   셋째, 균형 있는 복음을 위한 설교는 구약과 신약성경 모두에 근거를 둔다. 그런 설교는 인권, 전쟁과 평화, 빈곤, 인구억제, 환경보존 등과 같은 공동적 관심에로 향한다. 교회가 사회적 문제들에 관여하는 것을 염려하는 설교자들은 공동의 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들의 청중들로 하여금 개인적 도덕성을 뛰어넘도록 인도하지 못한다. 이런 불균형적 이해는 주로 개인의 신앙과 책임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확립된 정의를 위한 공동의 신앙과 책임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진지하게 이해하지 않는데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설교 사역은 두 성경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균형 있는 복음에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들은 균형 있는 복음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약화시키거나 지워버림으로 성서적 종교를 전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그들은 신약성경이 기본적으로 정치적 참여와 사회적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그들은 신약의 윤리적 교훈이 주로 인간의 상호 관계와 영혼에 관한 내적 미덕에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엡 4장, 골 3장). 그러나 우리는 신약이 침묵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의 소수집단이었다. 그들은 숫자상으로 매우 하찮은 자들이었다. 어느 곳에서든지 그들의 65%에서 85%가 사회의 하층 계급에 속하였다. 바울은 언젠가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집단이 될 때 그리고 그들이 민주적 질서 속에서 참정권을 가지고 역사 속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살 때가 올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이 변하였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에서와 같이 무시당하는 소수집단이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해 말하고 변화시키고 도전할 힘을 소유한 집단이다. 그러므로 공동 생활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건설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성경은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관심이 각 개인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그 창조의 보존뿐만 아니라 남녀의 구원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관심을 이해하는 설교자는 그 두 가지 관심을 동시에 말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현재 교회가 누리는 상당한 물질적 힘, 영향력, 설득력을 가난한 자, 약한 자, 밀려난 자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선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체의 생명 보존만을 위해 그 자원들을 사용하고 확장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잘못 사용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개인과 제도의 변화

 

   마지막으로, 균형 있는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개인들과 그들의 사회 제도들 모두를 위한 변화의 힘을 강조한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개인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고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변화도 포함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사회의 변혁뿐만 아니라 개인의 구원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은 설교자들이 전해야 할 복음의 원대한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서 성경을 진지하게 다루어 지체없이 인간의 본질과 제도 모두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믿기를 원하신다. 설교자는 정치적 사회적 정의뿐 아니라 또한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설교는 복음을 인간의 모든 조건과 연결하려는 총체적 설교 사역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오랜 기간 사역한 자는 누구든지 목양적인 면(하나님의 사랑)과 예언적인 면(사회 정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깨닫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복음이 충실하게 선포되고 정직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개인들이 기꺼이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위안하기 위해 의존하는 한 가지 환상은 개인들이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다면 세상을 혼란시키며 위협하는 대규모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들이 조속히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확신의 이면에는 회심한 개인들이 충분한 숫자가 될 때까지는 계속 주의를 강력히 요구하는 문제들에 대해 거의 대책이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개인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실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너무 자주 많은 설교자들이 죄는 절대적으로 개인에게 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과 싸우는 것을 꺼려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공동체를 희생시키면서 개인들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악이 제도 속에도 숨어 있으며 하나님이 개인과 사회 제도에 모두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믿는데 매우 느리다.28) 그들은 사회 구조가 개인들에 의해 형성되며 또한 개인들에 의해 변형되고 파괴되고 개조되거나 지지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책임을 기피한다.

   그러므로 상담의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개인의 문제들이 사회적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설교자는 사회 구조들이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굶주리고 갈하며 집이 없으며 벌거벗고 갇힌 자들을 생산하는 그 구조들을 변화시킴으로 하나님의 작은 자들을 섬기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 25:35-36). 실제로 사회의 구조들이 개인들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불완전한 제도 속에서 우리의 개인적인 사랑의 노력을 기울일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밖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을 위해 사회 구조들을 변화시키며 이런 종류의 싸움을 경멸하지 말아야 하며, 계속 개인적인 사랑의 행위와 사회에 대한 봉사 이 두 가지 모두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기독교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영적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 진정한 개인의 회심 경험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의 균형을 찾는 설교는 항상 인간을 더욱 인간되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균형 있는 복음을 전하려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청중들을 형성하고, 그 공동체를 균형 있는 복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며, 또한 균형 있는 복음에서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견한다. 예수께서는 가르침과 모범을 보여줌으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람들의 관심의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강력하게 옮겨 놓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나란히 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강한 자들과 가진 자들에 의해 쉽게 희생당한 이 땅의 작고 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을 믿는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설교 사역에서 도움을 요구하는 자들을 위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복음 선포의 실제

 

   지금까지 설교자가 충실해야 할 복음의 내용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한 가지 더 다루어야 할 것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방법이다. 물론,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나타낼 것은 복음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복음을 전할 때 전통적인 기존 교리들과 그와 관련된 신학과 연관해서 설교해야 한다. 즉, 말씀의 입장에서 사건을 성경적으로 연관시켜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설교자의 이미지, 이야기, 아이디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며 효과적인 방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역할이 "복음의 광선을 펼쳐 주는 프리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이다. 설교학적 순환에 의하면, 처음에 말씀이 들려지고(heard), 그 다음에 들은 말씀으로 믿게되며(believed), 하나의 고백(confession)을 일으키어 다시 그 말씀 선포에로 돌아가게 된다. 비록 실제 생활에서 그 순환이 정확하게 순서를 따라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순서의 기본적 리듬은 옳은 것이다. 복음선포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것에 관한 현재시제의 선언은 사람들에게 신앙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어 말씀과 성만찬에로 다시 모이도록 인도하며 여기에서 다시 동일한 기쁜 소식(복음)이 새롭게 들려진다.

 

 

복음 선포의 문법

 

   첫째, 현재 시제로 표현하라.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은 현재시제의 활동이다. 설교자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위해 말하도록 부름 받는다. 설교에는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을 말하기 위한 설교문의 공간과 원칙이 있으나 이처럼 하나님에 관하여 회상적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직접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복음의 주체인 하나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의 활동을 능동적 동사로 표현하라.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늘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 활동적인 단어들을 사용한다. 날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개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이들을 신앙으로 이끌고, 성령의 은사들로 생기 있게 만들고, 생활의 시련들을 견디도록 격려하며,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활동적이다.

   셋째, 1인칭을 2인칭으로 표현하라. 복음을 직접 말할 때는 1인칭("나")에서 2인칭("너")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이다. 신학적으로 설교에서 전해지는 말은 용서의 복음("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모든 죄에 대한 전적인 용서를 선언하노라") 또는 축복의 복음("주께서 너에게 복주시며 지키시기를 원하노라")과 다르지 않다.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은 "너를 위하여"라는 분명한 성격이 있다.

 

 

복음선포의 형태

 

   첫째, 특별한 인간의 문제나 상황을 다루어라. 복음을 직접 말할 때는 인간의 문제나 상황을 언급한다. 이것은 설교에서 복음을 말하는 것을 예전형식에 갇힌 선포와 다르게 만든다.  염려하거나 낙심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은 아프거나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과 다르게 이해된다.

   둘째, 확신을 가지고 말하라.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은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용서하고,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다. 이런 신앙을 일으키는 약속은 확신에 차서 말해진다.

 

 

나가는 말

 

   21세기를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설교자들은 복음의 균형에 대한 신학적 이해로부터 급변하는 사회에서의 설교 사역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설교자들은 그 어떤 방법보다 설교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설교에서 전인적(몸, 마음, 영혼) 목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모든 인간의 제도와 또한 개인의 문제들을 기독교화 하려는 목적을 반영하기 위해 특별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강단은 인간의 영적 필요를 인간의 육체적 필요와 함께 조화시켜야 한다. 모든 설교에서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함께 다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복음을 개인적이고 내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방향이나 아니면 사회적이고 외적이고 단체적인 방향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브루기만(Walter Brueggemann)이 지적한대로,

 

   보다 광범위한 공적인 세계에 대한 어떤 책임이나  기여함이 없이 그저 자기 가정이나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면서 사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주관성으로부터 좋은 설교가 방해를 받는 경향이 있다. 우리 가운데 널리 만연되어 있는 속임수는 행복을 가져다주는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인간됨을 형성하는 거대한 공적인 주제들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29)

 

우리는 설교를 자의적으로 개인적 범주와 사회적 범주로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청중들의 삶의 전 영역을 복음과 만나게 해야 한다. 때때로 우리의 설교가 목양적 색조를 또는 예언적인 색조를 짙게 띠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분명한 종류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복음의 균형, 인간의 모든 삶의 조건을 포함하는 총체적 복음에 대한 충실한 증언을 침묵시키려는 어떤 경향에도 맞서 계속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으로 들어 갈 때부터 우리 주위의 환경을 그대로 가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 그 대가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균형 있는 복음, 즉 온전한 복음을 끝까지 증거해야 한다.

 

 

1 Marsha Witten, All Is Forgiven: The Secular Message of American Protestant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1993), 34-53.

2 George Barna, The Frog in the Kettle: What Christians Need to Know About Life in the 21st Century (Ventura, CA: Regal Books, 1990), 22.

3 Richard Lischer, A Theology of Preaching: The Dynamics of the Gospel (Durham, NC: The Labyrinth, 1992), x.

4 John B. Cobb, Jr., "Faith Seeking Understanding: The Renewal of Christian Thinking," Christian Century (June 29-July 6, 1994): 642-43. 또한 참조, David Buttrick, A Captive Voice, 9-14 & 45.     20세기 설교에 대한 버트릭의 평가에 의하면, 우리의 설교는 성서적 설교의 강압적인 성서주의, 성서일과 설교의 예전적 규칙성, 또는 문제 해결식 설교의 개인적 심리학적 구원에 너무 지나치게 협소하게 빠져있다.

5 John McClure, "Changes in the Authority, Method, and Message of Presbyterian (UPCUSA) Preaching in the Twentieth Century," The Confessional Mosaic, ed. Milton J. Coalter, John M. Mulder and Louis B. Weeks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0), 108.

6 David Buttrick, A Captive Voice, 111-12.

7 Thomas G. Long, The Witness of Preaching, 196.

8 Richard Lischer, A Theology of Preaching: The Dynamics of the Gospel (Nashville: Abingdon, 1982), Preface.

9 Walter Brueggemann, Finally Comes the Poet: Daring Speech for Proclamation (Minneapolis: Fortress, 1989), 3.

10 Ernest T. Campbell, "Religion a la Carte," a sermon preached on Oct. 18, 1970 at the Riverside Church in Manhattan, New York.

11 위의 책.

12 Ernest T. Campbell, "Too Good for God!" a sermon preached on March 16, 1969.

13 위의 책.

14 Ernest T. Campbell, Christian Manifesto (New York: Harper & Row, 1970), 108.

15 위의 책.

16 Walter Rauschenbusch,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 (New York: The Macmillan, 1907), 367.

17 Ernest T. Campbell, "Where Sound the Crises of Race and Clan," a sermon preached on May 19, 1963.

18 위의 책.

19 Ernest T. Campbell, "Two Cheers for Christian Secularity!" a sermon preached in April 20, 1969.

20 E. T. Campbell, Christian Manifesto, x.

21 위의 책, 36.

22 위의 책, ix.

23 위의 책, 10.

24 위의 책, 7.

25 위의 책, 32.

26 Ernest T. Campbell, "Two Cheers for Christian Secularity!" 1969년 4월 20일에 한 설교.

27 참조, 1963년 4월 28일에 한 캠벨의 설교, "A Christian and His City."

28 Ernest T. Campbell, "The Formation of Ministers for the 20th Century: Community on Campus," Theological Education 2 (Autumn 1965): 3.

29 Walter Brueggemann, "The Social Nature of the Biblical Text for Preaching," Preaching as a Social Act: Theology and Practice, ed. Arthur Van Seters (Nashville: Abingdon, 1988),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