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th 신학과 해석학

황덕형

I.

지난 4월 26일 연세 대 연합신학원에서 한국 조직신학 회의 모임이 있었다. 비록 적은 수가 모였으나 진지한 논의가 있던 뜻 깊은 자리였다. 그곳에서 두분의 발제가 있었는데 전선용 교수의 "바르트 신학의 발전 과정에 관한 연구" 와 박재순 박사의 "민중 구원과 의인론"이 발표되었다. 발제에 대한 논평과 각기의 논문에 대한 질문이 제기 되는 가운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해석학에 대하여 간단한 논고가 있었다. 이 해석학에 관한 논의 중 본 저자는 하나의 질문을 제기 하게 되었고 당시 충분하게 그 질문이 이해되지 못했던 것 같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같아 제삼 그 질문의 참뜻을 분명히 하여 그 논의의 중요성과 의미를 새롭게 조명코자 한다.

질문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개념 사용에 대한 反問에서 시작되었다. 본 저자가 당시 제기했던 질문은 바르트의 신학을 해명하는데 있어 解釋學이라는 개념을 적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김재준 교수는 해석학의 어원을 상기시킴으로 본 저자의 질문을 답변하고자 하였다. 즉 "헤르메노이에인"이 란 처음부터 "신들의 말을 인간의 말로 옮겨오는 행위" 이며 그것은 해석학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차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이해 행위에만 그치지 않고 언어의 신적 깊이의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며 더더욱 바르트에게 있어 교회의 선포의 언어가 신학 안에서 책임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신학 본래의 취지와 더불어 신학 함에 있어 인간들이 사용하고 또한 그 계시 사태로부터 사용되는 말이 천상의 독백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이해되는 말이라면 결국 해석학이라는 과정을 떠나서는 그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며 해석학의 이념과 학문적 방법을 통해서 바르트 신학의 깊이가 드러날 수 있으리라고 강조하였다.

과연 해석학이란 틀을 벗어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사유할 수 없는 것일까?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적 봉사라고 한다면 신학 활동이 인간의 말로 이뤄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공헌하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권능은 어떤 범주에서 언어화 될 수 있을까? 일찍이 Ebeling은 자신의 해석학적 신학의 이론의 정립을 시도하는 가운데 Barth의 말씀의 신학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는 이해되어야 할 해석학적 과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Ebeling은 만일 언어에 대한 일반적 고찰과 그 것으로부터 얻은 이해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적용하여 전개한다면 - 물론 에벨링이 이 작업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 이는 Barth의 신학이 해석학적 과정을 무시한 자기 모순 속에서 점차 해체되어 가는 중임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한다. 비록 에벨링이 이같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바르트의 신학을 비판하기를 피하고 있지만 에벨링의 신학적 해석학은 이해의 문제를 바르트가 곡해하였다는 것으로 더욱이 그 이해에 대한 오해는 신학의 본래적 사명인 "하나님 사태가 언어로 전달되어 오는 중심적 현상을" 바르트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적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라고 결론을 짓게 한다. 왜냐하면 에벨링이 지적한바 대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처한 보편적 해석학적 지평 위에서 검증할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즉 에벨링이 목표로 하는 그 검증이란 단순한 이해(개념의 파악이란 의미에서)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화 되어진 것으로서의 인간의 언어가 현실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는 변화의 상황을 내포하며 신앙의 언어는 바로 이 언어에 의한 사건으로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에벨링이 강조하는 바는 이 변화와 변혁이 일반 언어의 가능성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에벨링에게는 이 참된 언어 이해와 그 실현은 신학적 이해에서 가능할 뿐이다. 기실 에벨링의 이같은 견해에 꼭 동조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바르트에게서 현대의 철학적 해석학의 사유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 그래서 바르트의 신학이 해석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신학임을 말한다면, 그리고 그를 통하여 바르트의 신학이 현대적이거나 혹은 책임적인 신학이라는 것을 규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유감스럽게도 바르트가 그의 신학을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비록 현대 해석학의 거장 Gadamer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서 현대 해석학의 선언적 의미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를 해석학의 범주로 묶어 둔다는 것은 나는 새를 새장 속에 넣어 두는 遇를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바르트가 신학의 방법론적 해명을 충실히 다루지 안았음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의 신학의 특징이 마치 그 방법적 특성에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편으로 바르트 신학의 한계를 보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유익하고 정당한 것일 것이다. 어떤 신학도 완전성을 주장할 수 없는 나그네의 신학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 해석학적 해명이 오늘날 누리고 있는 그 全能性을 아무런 비판 없이 인정하여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반복해서 에벨링이 해석학이란 단지 형식적인 면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내용과 연관된 학문임을 주장하는 것은 바르트 신학에 대한 일종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르트를 해석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바르트가 시작한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다시 덮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해볼 만 하다. 이와 연관해서 본 저자는 만일 바르트에게서 그 어떤 해석학적 과정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 성령론적 해석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말씀의 신학" 으로서 바르트 신학의 다른 이름이리라고 생각한다.

성령론적 해석학, 그것은 무엇인가? 성령론적 해석학이란 말 자체는 그 해석학 속에서 이뤄질 해석의 과정을 다시 한 번 성령에 의한 변증법 적인 내적 긴장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지 않는가? 해석학의 이념이 해석의 과정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곳에서 이해가 아닌 여전히 우리의 이해밖에 있는 신의 계시의 문제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 진술로써 신의 계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방법론적으로 이해한다기보다는 그 진술을 통하여 규범적으로 현실을 해명하고 그 현실을 재구성을 해내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진리" 라고 진술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진술은 신앙의 명료화로써 그 진술을 가능케 하는 성령에 대한, 성령에 의한 진술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자기를 명료하게 드러낸 존재나 언어의 자기 드러냄이 아니라 계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기 은폐로서 주어지는 신 인식의 최초의 시작이며 완전성인 것이다. 따라서 해석학적 해명을 신학 본래의 지평으로써 피안과 차안의 공동의 장의 해명이라기 보다는 그 해석의 장 자체가 신 앞에서 (Coram Deo) 본래의 위기 속으로 불려 드려지는 단초가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해석학적 과정은 이해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이해의 결과임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반성은 구성적으로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구체적인 대관계(對關係)를 형성하고 있지 않는가? 바르트가 주장하는 신 인식과 신앙의 현실이란 바로 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대관계라는 불가해성의 역리(Paradox)의 언어의 모습을 넘어서 모순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 자체로부터 주어지는 신 인식의 근원에 대한 언사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가 해적인 것이 이해되는 역리의 언어 과정이 해석학적 노력과 유관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인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게 인간들에 의해 이해된 언어의 사건으로 변화 될 수 있는가? 언어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하나님의 현실에서 획득되고 있다면 이 언어의 본성은 무엇인가? 본 저자의 이러한 물음은 해석학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고찰로써 순전히 형식적인 개념으로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다는 것조차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학적 시도로서 바르트 신학의 해명이 무의미하다고 함도 아니다. 저자의 물음의 원의 도는 해석학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바르트의 신학의 본래적인 의도가 해석학의 이념을 넘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리라는 기대와 함께 제기된 것이다.


II

이러한 의도를 충실하게 다루기 위해 바르트 신학 내에서 해석학적 적용이 가능한 몇 가지 개념과 사유 방식에 대하여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르트의 신학이 가지는 내적 구성과 그 신학적 원리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해석학이 어떤 것인지 그 존재 근거와 그 범위를 정확히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바르트 신학이 해석학적으로 이해되기보다는 다른 파라디그마가 필요하다는 요청은 바르트의 신학뿐만이 아닌 해석학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부터도 생각되어져야 한다. 이와 연관해서 우리가 먼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은 아직 진행 중인 그리고 언어와 관계해서 현대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는 해석학의 한계를 정하고 그 이념을 전체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해석학의 이념 자체가 중세기나 근대 정통 주의 시대의 해석학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거기에 더하여서 해석학의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한계성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해석학적 철학의 원의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하나의 독립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본론에서는 해석학의 철학적 특성들이 각 개별 존재자들을 그 존재자들의 은폐성으로부터 드러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아포판시스(apophansis)의 존재의 성격 과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하면서 현대 해석학에서 이해된 구체적인 내용을 Otto Poeggler가 해석학적 철학의 세 가지 특징(동시에 과제)을 규정하는 데에서 찾고자 한다. 즉, 해석학적 이해가 제기하는 구체적인 해결 과제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문제시된다 : 첫째로, 어떻게 한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가? 타자로써 자기에서 다가온 그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가? 둘째로, "해석학적 순환"이 보여주듯 전체를 단독 자들에서, 그리고 단독자를 그 단독자가 속한 전체성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이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단독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그 전체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전체성의 한계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상호간에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면 이해(Das Verstehen) 와 설명(Das Erklaeren) 이라는 서로 다른 해명 방식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겠는가?

푀글러에 따르면 이 세 가지 문제들은 해석학의 가장 긴요한 문제들이며 이의 답변에 따라 그 해석학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문제들을 "개방성"으로서의 존재이해하에서 통합적으로 다룬다는 사실은 해석학을 단지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숙고라는 한 특정한 과제로 보는 제한된 관점을 넘어서 보다 더 근원적으로 해석학을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해석학 본래의 질문인 이해와 연관해서 내가 만나고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이해, 즉 내가 이미 전승된 특별한 문화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면서 내 안의 타자로서 만나게 되는 여러 낯선 것을 이해하게 되는 현상에 대한 탐구는 그 사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긴장을 인간의 삶의 가장 근원적인 현상인 "이해" 라는 삶의 원래적 사건에 대한 방법론적 숙고와 적용을 통해서 해명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근본적으로 거의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만나게 되는 대상들은 해석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해석학적 이해의 순간은 다름아니라 해석학적 순환의 형태 속에서만 비로소 그 의미의 완전성에 이르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해석학적 순환의 궁극적 표현은 인간의 삶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고 이는 언제나 삶의 전체성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해의 근원성으로부텨 볼? "설명"과 "이해"는 기실 그 구분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해의 수단이 어떤 것이건 간에 이미 이해의 수단은 주어져 있다는 것이 해석학적 철학의 근본 전제이다. 현재의 사건이 그 사건에 대한 반성의 원리를 이미 내포하고 있으므로 각 개별적 사건의 참다운 이해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혹은 해석학적 순환의 원리로 주어져 있던 보편적 의미의 반성적 현재화의 구조 속에서만 참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현재화를 포함한 전반적 이해의 모든 문제는 결국 보편적이며 전체적인 의미의 연관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와 연관된 학문인 해석학은 이제 해석학의 일반적인 역사,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석학이 의미 연관(Sinnzusammenhang) 이라는 이 공통의 지평을 떠나서 생각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해석학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문제 제기가 있어 왔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는 보다 객관적인 학문성의 질문과 연관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회 철학의 비판과 연관되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시도의 일환으로 아펠의 보다 폭넓은 과학 철학의 이념을 알아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먼저 Apel은 그의 논문 에서 해석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비판학을 포괄하는 학문 이론을 세우고자 한다고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한다. "인식 인간학" 이라고 명명된 이 학문은 인식의 선험적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비판철학의 사유 단초를 더 확대하여 단지 의식 일반에 대한 객곽적인 조건뿐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적인 물음이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드려질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마치 아인쉬타인이 물리학의 근본 개념들을 재 정의 할 때 그 대상뿐 아니라 그 대상을 관찰하게 될 도구의 여러 기술적 요인들을 함께 고려한 데어서 알 듯이 현대에 있어서 자명해진 것은 칸트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자연 과학자들이 자연을 연구할 때에 단순하게 사유의 법칙에 적합한 선험적 기획을 전개하는 것만이 아니라 특별한 기구의 도움을 받아서야 성과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적인 주/객의 단순 구조로는 대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행위에 어떤 의미가 획득되기 위해서는 주관이 매 순간 적극적으로 대상들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주관의 적극적인 참여(Engagement)가 단순히 그 인식하는 주관의 의미 획득뿐만 아니라 모든 의미 구성의 간 주관적 관계에도 필수적인 요소로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언어는 이 간주관성과 주관성 모두를 근거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표식(Zeichen)으로서의 언어는 인식인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감각기관, 기술적 도구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대상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 지향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써 이 표식이 전제되어 그 결과로 인식의 대상이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이 표식 기호인 언어는 단지 인식의 논리적 의식 조건으로만 환원되어서는 안된다. 언어란 오히려 한 개인의 주관적 선험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개인적인 조건을 아펠은 선험적 육체성(Leibapriori)과 의식적 선험성이라고 둘로 나누어서 이해하고 이 두 선험성은 인식에 있어서 상호보완적이지만 구체적인 인식의 형성에서는 양극 적으로 활동한다고 본다. 즉 보다 일차적이며 직접적인 경험의 세계에서는 선험적 육체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행하지만 반성적인 지각에서는   의식적 선험성이 인식의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인식에 있어서 인식의 관심은 인식의 한 주도적 동기로서 이 관심이 각 특수한 인식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는데 기술적인 인식의 관심은 근원적으로 현대 물리의 실험의 참여에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즉, 현대 과학의 인식의 진보에 있어서는 이 인식의 관심이 현대 물리학의 물음과 그 물음을 기술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상호 연관에서 찾아진다고 할 수 있다. 즉 현대 물리 학자들은 그 관심이 기술적인 조건에 적응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과학이 방법적으로 인과율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해명의 길을 걷는다면 이에 반해 정신과학은 보다 실천적이며 이 세계 존재 이해에 참여하는 이해(Verstehen)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상호 보완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구분되는 것으로 아펠은 보고 있다.

아펠은 먼저 하나의 단일한 기준을 가지고, 인식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단지 별도의 개별 과학으로 예컨대 심리학이나 지식사회학의 문제로 구분하여 다루면서 철학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든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과학 이념을 거부한다. 그들에 따르면 딜타이로부터 유래된 소위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구분에 따른 해명과 이해 사이의 차이에 대한 관심은 단지 세속화된 신학이 학문성을 위장하여 지속적으로 학문을 지배하고자 하는 일종의 이데올르기인 것이다. 자연과학의 인과율의 해명의 이념 하에서 정신과학의 특성인 이해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했던 시도도 일종의 이런 신 실증주의자들의 하나의 변환일 뿐이다. Th.Abel의 Interpolation은 이러한 시도의 대표적인 것으로 분명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해란 단지 인과율의 해명의 한 논리적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아벨은 논리적 객관성과 실험에 의한 경험적인 관측을 학문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와 반대로 W.Dray는 역사 과학이 일반적인 법칙을 조명하는데 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이해에 의해 오히려 완전하여 진다는 것을 구체화하였다. 이 두 학자의 입장을 비교함으로써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아벨이 이해의 대상인 인간 행위와 이 인간의 행위가 지향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정보들의 전이해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며 이것이 그의 치명적인 약점인 것이다. 이는 다름아니라 이 정보들이 후기 비티겐 쉬타인이 밝혀 놓은 바대로 언어 게임이라는 한 특수한 삶의 연관 분야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 한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Dray가 비록 자연과학적 방법이 해석학적 방법과 상이하다는 것과 상호간에 보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손 치더라도 아펠은 해석학적 물음이 오히려 자연과학의 현재화와 그 사건의 해명에 공헌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양자가 서로 보완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서로를 배제하고 있는 것의 의미는 어디서 드러나는가? 아펠에 의하면 자연과학의 가능성과 그 진실성을 언어적 조건에서 드러내고 다시 이 질문을 본인의 인식 인간론적 사유에 의해 철저화할 때에야 비로소 두 상이한 학문적 전통이 통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해석학적 관심과 자연과학적 관심 이 양자가 만나게 되는 공통의 자리는 전승이다. 전승과 연관하여 전승된 본문의 중요성과 함께 언어학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학이 언어학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언어학은 바로 그 본질상 해석학적인 역사 과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언어학이란 시간/공간의 사건을 자기의 의미의 필요 충분조건으로 가지고 있는 각 단어들의 의미의 해석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 인간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식의 육적인 선험성이 자연과학에서는 도구 성을 통한 자연에 대한 관여와 연관되어 있다면 해석학적 연관에서는 의미의 간 주관적 발현이 그 의미의 구체적 표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으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와 연관해서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써 해석학의 철학적 근거는 인간의 간 주관적 이해의 차원에서 한 저자에 의해 의도된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해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주제화 할 수 있는 방법적 추상(mothodische Abstraktion)의 길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의 답변에 달려 있다. 이 물음을 딜타이를 비롯한 19세기의 해석학자들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였고 실제로 이 방법론적 물음의 결과 이해가 학문적인 엄밀성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자신을 스스로 객관화시키는 그 해석학의 이념이 보편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의미하며 이 때문에 아펠과 가다머는 19세기의 해석학이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로부터 시작되고 가다머가 강조한 해석학의 새로운 관점은 이러한 근세 해석학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반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바로 우리가 해석의 대상을 통하여 우리의 삶속에서 알게 되는 실제적인 의미의 방법론적이며 점진적인 객관화에 대한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어떤 추상적 방법에 의해 확인된 이해가 아닌 실제로 여기서 사용되고 구체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적용적인 이해를 이해의 사건에서 드러내는 것을 본래적 이해로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번역자와 재판관, 혹은 영화 감독들의 임무에서 보는 것 같이 그들이 대상으로 가졌던 그러나 해석의 과정을 통해 이해된 본문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게 되는 적용 적인 이해의 사건이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펠은 이러한 가다머의 새로운 해석학을 두 가지로 평가하고 있다. 가다머가 역사주의의 객관적인 이상화를 비판 한데에서 그와 동의 하지만, 진리의 문제에 대한 해석학적이며 방법론적인 추상적 접근을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가다머가 정신과학의 이해 가능성의 조건에 그 이해하는 자의 역사성을 포함시킨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펠은 과학적인 의미 이해에 있어서 방법론적 추상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삶의 구체성의 역사적 상황이 과학적인 본문 이해의 과정에서 이미 한 구체적인 개별자의 이해 가능성의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과학적 이해의 앞에 놓여 있는 전 반성적인 참여는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이해에는 본문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은 옳은 것이지만 이 시간의 간격에 대한 사유는 가다머가 주장하듯 한 진리의 현재적 적용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쉴라이에르 마허가 강조한 것처럼 과거와 현재의 동시대 화의 방법론적 이상에 의해서 제기되는 것이다.

역사의 이해가 역사의 진리를 대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아펠은 부정적으로 대답하였다. 더 나아가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전근대적인 역사의 연속성이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주어져 있지 않으며 이러한 현실은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 해석학의 범위를 넘는 새로운 관점을 유지해야 할 것은 촉구하고 있다. 서구의 철학적 상황이 해석학적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사회의 진보 방향을 주시해야 한다. 아펠에 의하면 이 비서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통과 현대의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야말로 해석학이 어떤 도전을 받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이 보다 폭넓은 이해의 과정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문화사이의 전승이 처음으로 이해되기 위해 이해의 대상과 이해의 주관 사이의 직접적인 해석학적 연관성이 먼저 주제화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결국 해석학적 주제화에 이르기 까지 인식 주관에 의한 그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 요구되며 주제화 되는 것이다. 실제로 두 대상 사이의 해석학적 대화의 직접성의 단절은 오히려 보다 더 나은 이해를 위한 방편이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야말로 간 문화적 해석이 문제되는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사고방식인 것이다. 즉 해석학은 단지 번역가로써의 해석학적 기능뿐만이 아니라 심리 치료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과정을 내포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펠은 이해와 해명 사이의 이 변증법적 중개과정을 "이념 비판(Ideologiekritik)"으로 부르고자 하며 이는 육적인 표현들에서 정신적인 것을 찾아 나가는 과정으로서 "자연의 인간화"를 의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자연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아펠의 이러한 해석학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푀를러는 해석학적 지평에 대한 관점으로 보고자 하였다. 현대 해석학이 가지고 있는 목표 의식이란 다름아니라 이 의미연관에 대한 혁신적 개발을 통한 새로운 의미 창조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전반적인 의미연관에 대한 반문과 그 반문 구조에 통하여 소위 철학적 해석학의 한계를 이념비판학은 물었으며 이는 그 의미연관의 계급 성과 은폐된 정신적 의미 구조를 다시 조명함으로써 새롭게 해석의 길을 확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펠의 이러한 시도는 또한 Halberds와 일치하는 것이다. 해석학에 대한 이러한 시도들은 해석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다시 처리될 수 있으며 푀글러는 다양한 해석학적 철학의 방향성을 언급하는 가운데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서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해석학적 추구는 의미 있는 일이며 신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재삼 강조하듯이 신학의 자리는 성서와 선포의 연관성이라는 일차적 본문을 벗어나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참된 주제를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하나님이 언어화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화의 사건이란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구성하고 있을 어떤 의미연관에 대한 구체적 착념화, 소위 성육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바르트는 이 진지한 신학적 물음을 어떻게 답변하고 있는가?

 

III

間奏曲

바르트가 신학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였다는 것은 일반 상식에 속한다. 더욱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일어난 계시 사건을 통해서 교의학 전체의 주제들을 재해석하고 모든 것들을 주체화할 때 이 기독론적 사건과 연관 시켰다는 것도 상식에 속한다: 그의 교의학적 주제들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 계시와 연관되어 있고 그 계시의 의미는 우리에게 신학적 해석학의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계시의 사유에서 이해의 문제는 매우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바르트가 그의 신학적 숙고에서 계시 그 자체를 계시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마치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분하여 제기하고 있으나 존재가 드러나게 될 지평으로서 해석학적 과제인 존재의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고 한 것과 같이 말이다. 만일 바르트와 하이데거의 시도를 같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양자 사이의 아무런 차이를 살피지 않는다면 이는 바르트를 오해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 사이의 차이를 다시 한번 주제화 하여 그 차이를 다시 해석학 내지 구조 학적으로 구성화한다는 것 역시 바르트 신학의 의도를 놓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위에서 제기된바 계시 의미를 해석학적 과정으로서 언어화함으로써 신학의 중심부에 세웠다고 믿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적 사유의 본래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그는 해석학적 과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바르트가 강조하는 계시는 절대적 타자의 절대적 자기 계시이다. 거기에는 어떻게 내가 그 타자를 이해하게 되는 가라는 이해의 객관적인 사유가 부차적인 역할을 할뿐이며 성서 본문은 이해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타자 성의 장소이다. 이해하는 내가 이해의 대상과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전체성의 관점이 연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건널 수 없는 무한한 차이에서 나에게 자기의 말함을 통하여 이해하도록 다가오는 자와 말하는 타자를 지적한다.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여기 인간 개인의 탈존이 아닌 하나님의 탈존 그 자체이다. 즉 하나님의 실존이 우리의 사고 속에서 우리의 인식 구조를 타재화의 空洞으로, 울리는 동굴로 등장시키면서 계시한다. 우리의 해석학적 구조는 이 공동의 구조로서 구성되어 있으며 계시의 언어와 그 언어의 해석 사이의 차이는 다시 한번 계시 사건을 되돌아 가리키고 있다. 이 이념은 언어에 의존했건, 개인의 실존적 결단에 의존했건 간에 이해의 대상과 이해의 과정이 하나로 만나고 있는 공통성과 전체성의 이념에 근거한 해석학적 과정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이 계시 사건이 불가해성만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이 사건은 말을 걸고 있다. 그의 계시 이해가 해석학과는 다른 어떤 다른 파라디그마를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해석학이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 인가? 단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말이나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사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대한 말 가운데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마치 하나님과 같이"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 하나님이 스스로 사유하는 길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성서 안에 하나님을 사유하는 길이다. 성서를 성서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책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바르트의 의도가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는가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그것은 해석학을 모르는 해석학의 반대가 아니라 해석학을 넘어서는 해석학 이후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다.

 

IV

바르트의 신학이 방법론적 의미 탐구에서 해석학과는 경계 선상에서 만나지만 동시에 그 경계선의 저편 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르트의 신학적 해명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철학자이며 훌륭한 신학자인 레비나스의 생각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의 현상학적 시도는 지금까지의 신학적 해석학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그의 노력이 이미 관념적이며 선험적일 수 있다는 의심을 놓치지 않은 채 레비나스의 견해를 들음으로써 바르트 신학의 깊이와 해석학 이후의 신학으로서 말씀의 신학이 갖는 구체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해석학의 의도와 그 한계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일깨워진 사유를 해명하는 두 가지 가능성을 본다. 즉,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 세계의 초월을 사유하는 사유와 이 의식의 현상학적 사유를 극복하려는 사유이다. 이 세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가장 심오한 내면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사려된 신을 향한 경험의 사유를 해석학은 삶으로서, 그리고 종교적 경험 안에 있는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 해석학은 이 내재적 초월의 극복을 추구하는 사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사유는 지향적 의식에 의해 개명되고 시도된 자기 초월 (Aus-sich-heraus)과는 구분되는 초월인 것이다. 이 상이한 두 가지 사유의 문제란 끊임없는 메타 논리의 무한정의 추론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부터의 초월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적 피안에 대한 超越과 자기 자신으로부터라는 구체적인 형태적 구조를 가진 志向性사이의 있는 差異의 문제이다.

훗설의 현상학적 지향성은 우리의 의식이 항상 그 무엇에 대한 의식임을 분명히 노출시켰으며 따라서 이 지향적 의식이 갖는 근본적 원리에서 볼 때 존재는 그 자신의 소여성의 존재방식을 지배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존재는 인식의 방식을 규정한다. 이 지향적 의식이 갖는 의미는 이 지향성에 대한 주장이 선험적으로 혹은 더 나아가 경험적인 의미에서 한 사태(Sachverhalt)에 대한 언급으로서 관철되는 한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이 존재와 인식의 상호관계에 대해 전혀 올바르게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지향성을 단지 형상적 진리로서 인식하게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인식 내지 의식과 현실의 실제성의 관계는 존재와 의식이라는 두 상이한 개물의 만남이라고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후설에게 있어서 존재와 주관성의 차이가 다름 아니라 자아성(Selbstheit)에 연관되어 있으므로 존재와 의식의 만남을 어떤 심리학적 법칙에 의해 해소시키려는 시도는 이미 불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적 자의식은 현상(Erscheinen)을 의미하는 존재자의 존재 혹 에네르기를 발현시키는 그 일어남의 사건 안에서 고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존재자의 존재는 탈/속(Ex-position)으로서 먼저 이 존재가 한 구체적 존재자로 자리잡는 형태화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현재", "여기"라는 현재화(따라서 동일화)의 실증성을 의미하며 이로써 근거 지어진 것의 理性性(Rationalitaet)이 가능해진다. 또한 둘째로 탈속으로서의 존재란 존재를 자기 드러남의 현상(Sich-zur-Schauen)에 귀속시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존재란 體現(Emphase) 되는 것이다. 이 체현의 존재는 현재의 본래적 현재화(Ver-gegenwaertigung)속에서 정신적 삶을 전개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만일 사정이 그렇다면 인식의 과정이란 다름아니라 헤겔의 말대로 존재 그 자체의 운동이 아닌가? 라고 되묻고 있다. 이 인식 과정의 포괄적이며 종합적인 활동을 통해 선험적 統覺은 현재를 확정한다: 현재는 현재화(Ver-gegenwaertigung) 안에서 스스로에게로 돌아가서 그 자신을 완성시키며 자신 자신을 그 현재화 안에서 동일화시킨다. 비록 그 현재화는 나자신의 개인적 삶속에서 일어나지만 그 삶의 내용에서 현재는 사건 내지 현재의 지속으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이 현재화 속에서 전체성에 대한 인식이 일어난다. 인식 작용의 이 특성은 시간 구조상 동시화(Synchronie)와 깊이 연관되어 있고 이 동시화는 통시성(Diachronie)보다 더 철저하게 의식 안에 작용하며 의식의 시간으로서 현재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향성은 바로 현재화이다. 훗설이 밝힌 의식 작용의 특성은 다름아니라 이 의식의 현재화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망각의 작용이다. 이 자기 망각을 통해서 의식은 존재가 자기 속에서 나타나도록 현상화(Erscheinenlassen) 하는 것이다. 자기망각속에 드러난 이 침묵의 자기 의식의 지향성은 이제 진리 안에서 존재의 구성(Konstitution)으로 나타나게 된다. 선험적 환원(transzendentale Reduktion)이란 이 침묵의 의식을 언어로 가져오는 노력이며 언어화된 이 지향적 의식을 세계 내의 한 객관적 존재자와 구별하는 방법론적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훗설 현상학의 초월론적 관념론은 존재를 의식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있는 모든 인식론의 피안에 있는 것을 알게된다: 물 자체(An sich)의 개념도 결국 그 개념 자체가 경험되는 의식의 지향적 과정과 분리된 상태라면 역시 하나의 추상(Abstraktion)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훗설의 의식의 지향성이 밝혀 주는 공헌은 대상으로의 초월을 의식이 자기 스스로 사유하면서 갖게 되는 자기의 본성의 깊이와의 연관에서 문제로 삼았다는 데에서 뚜렷해진다. 즉 이 지향성안에서 주어진 사물에로의 초월은 그 초월의 대상에 대해서 거리둠(Entfernung)과 접근(Zugaenglichkeit)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거리둠과 연관해서 의식은 파악(Wahrnehmung, Ergreifen)이며 이 가운데 앎과 지식은 가능해지고 그렇게 세계의 현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향성이란 이 존재를 근거로 하여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지으려는 정신성(Geistigkeit)이다. 그래서 "존재자와 존재자의 자연스러움(So/Sosein)의 경험은 자명(Evidenz)한 것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현재와 현재화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 관계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즉 존재의 구체적 체현 그 가운데서 정신성은 다 해소되고 말 것인가? 이는 정신성이 그 안에서 존재가 전개되며 동시에 경험되었을 존재의 언어(Sage des Seins)를 통한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의식이 자신의 대상을 향해 초월할 때 그 때에도 그 초월 안에 내재하고 그 지향적 대상이 갖는 (원래적)타재성(Exterioritaet)에 이르는 운동 속에도 자기를 확인(identifizieren)하는 가운데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한 의식이 사유하는 기준에 따라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의식의 평형 상태를 깨고 자신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서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실로 이 지향성의 물음 자체는 레비나스에 의하면 의식이 비/규범적인 것, 측량할 수 없는 것(Un-mass)으로의 초월을 지향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초월의 시간성은 현재화의 현재 속에서 가능한 동시화(Gleichzeitligkeit)를 벗어난 시간성이요 이 측량할 수 없는 것과의 만남의 의식이란 그 이전에는 사유할 수 없던 것을 의식이 통렬하게 만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 어떤 내재성의 언어로도 임의적으로 대치될 수 없는 차이에 대한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신에 대해 말하는 사유는 그러므로 이 초월성에서부터 사유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레비나스는 이 신의 사유가 갖을수 있는 초월성을 지향하는 의식의 내재적 초월로 환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고의 피안에 대해 말하는 근본적인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피안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단지 지향적 거리 인식에 대한 은유(Metapher)라고 말하고자 한다. 이때 언어로서 주어진 이 은유의 진실은 사고와 그 표현 사이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사고의 표현이란 결코 유리에 비치는 자기화상과 같은것일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을 경험하는 대화의 상황에서는 말하기(Das Sagen)란 지향성이 갖는 조건과는 다른 조건, 즉 그 타자의 타자성을 다시 내부적으로 나의 의식 속에 있는 어떤 원리로 환원할 수 없는 그런 관계를 조건으로 갖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해 준다. 대화와 은유의 진실은 지금 말하고 있는 타자(Der-Andre-Sagen)로의 초월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이 해명은 단자론적 존재자로써 각 개인의 주관의 모든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있는 절대타자의 이해에 더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 속에서 의미가 획득되는 까닭은 말해진 것(Das Gesagte)의 영역 안에서의 은유의 방식을 통해서 그렇게 말하는 타자(Der Andere Sagen)로의 초월(Transzendenz)에 기인한 것이다. 말하기, 대화란 다름아니라 의식 속에 있는 이 틈, 내지 간격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틈의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말하기를 지향성에 의존할 수 없게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말하기를 존재의 목적론적 구조 속에서 분석하는 것이 틀렸다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의 내재성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현재화의 좌절이란 더 높고 본질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설 현상학의 개념인 Appraesentation 은 현재화에 이를 수 없는 타자성의 간접적 지향성을 의미하고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후설의 이 개념적 세계는 바로 이 경험의 피안성, 절대적 초월, 철두철미하게 윤리적 언어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초월의)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존재 사유와 동일성의 사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윤리적 타자성이 요청하는 원래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애절한 기도와 간구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바는 다름아니라 고독한 자신의 영혼 안에 사로잡혀 있는 자족의 사유가 아닌 끝없이 질문으로 다가오는 타자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 타자와 갖게 되는 이 타자성의 관계는 상호관계에서 주어지는 교환 관계가 아니다. 더 나아가 관계라고도 할 수 없는 그 어떤 공통성의 근원도 성립되어 있지 않는 무관계의 관계, 그러한 타자에 대한 관계인 것이다. 사실 시간 자체가 이런 무관계의 관계(Beziehung/Nicht/Beziehung)가 아닌가? 이 시간의 통시성에서 인간의 정신은 미래와 과거의 수동적인 통합으로서 바로 신에 대한 물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는 noema-noesis의 평형 상태나 한 표상의 실제성과 (Leere Erfuellung des Signitiven) 상관없이 주어진 차이의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데가르트가 강조한 우리 안에 있는 무한자의 이념(Die Idee des Unendlichen)의 방식으로 다가온 타자성이 이 지향적 관계의 본래적 비밀이다. 비록 우리가 윤리적 관계에서 이 타자성의 사유를 할 수 있고 이러한 타자성의 사유에서 신으로의 초월을 묻는 것인지 아니면 그 관계와 그 초월을 근거로 해서 신이란 언어가 그 참뜻을 획득하게 되는 것인지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 무관계의 관계로서 참된 초월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고 해도 신이 이 타자성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 타인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키에르케고르가 이 신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던 첫 번째 사유자이다. 그는 신에 대한 사유란 미완성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묻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언제나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바로 이 신의 사유에서 주어지는 올바른 관계를 보여준다.

결국 레비나스는 이 무관계의 관계를 해석학의 경계선 저편에 놓인 가능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다가오는 의미의 한없는 불가능성의 유한한 놀이이며 그 불가능성이 닿아 있는 무경계의 끈이다. 언어의 변증법적 자기부정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기대하는 이 연약한 사유의 인연은 중성적 통합적 시간의 사유가 아닌 배타적이며 분절되어 있는 인격적 사유의 존재론일 수밖에 없으며 그 인격적인 것의 올바른 범주는 다시 한번 중성적인 개방성이 아니라 타자의 출현( das Antlitz des Anderen)인 것이다. 만일 해석학이 이 불완전한 사유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을 사유하는 사유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V

이에 상응하는 방법론적 엄밀성을 가지고 바르트가 자신의 신학적 작업을 계시 이해로써 수행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해석학적인 모델로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무관계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타자성과 함께 사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인식론적으로 확정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바르트는 삼위일체적 신 인식의 특성 속에서 시행하고 있다. 다름아니라 우리의 신 인식의 근거를 융엘이 올바르게 지적한 것과 같이 신 인식의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차적 객관성을 가능케 하는 삼위일체내의 일차적 대상성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융엘이 지적한 것과 같이 바르트의 신학은 삼위일체 적이며 이는 동시에 선택론적이고 기독론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을 이 세 가지 관점의 내용적 설명을 통해서 분석할 수 있으며 이는 보다 신학적 해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구체적인 바르트 신학의 특성은 앞에서 제기된 대로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의 언어 구조의 삼중적 층을 확인함으로써도 다시 구체화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의 말씀론과 연관시켜서 탐구해 보도록 하겠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르트는 결단코 자신의 한 사유모델를 절대화 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삼중적 구조란 어떤 개체 인간의 독립적 사유구조라기 보다는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찾아지는 신앙의 자기 해명의 구조이다.

1) 일차적 언어로서의 대상적 언어와 존재와의 관계:

왜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의 방법론적 근간을 이루고 있던 개념들에 대하여 명백한 철학적 해명을 주려고 하지 않았던가? 불트만이나 고가르텐이 한결같이 바르트에게 요구했던 것은 바르트가 사용하고 있던 그 방법론적 개념들에 대한 정확하고도 철저한 철학적 명료화였다. 이것은 정당하고도 바른 요구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어떻게 그는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후설(E. Husserl) 의 현상학적 명제, 즉 "사상 자체에로 (Zu den Sachen Selbst !) "를 지적함으로써 대답할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가? 여기에는 바르트가 가지고 있는 특유한 언어이해와 연관이 있다. 바르트의 전 교의학에서 우리가 만나는 삼중의 언어사용의 구조가 있는데 이는 언어를 의미론적으로 규정 짖는 전통적인 서구 신학의 길과는 다른 것이었다. 바르트는 그의 언어사용에서 활용론적 특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말씀론에서 바르트 신학의 해석학적 열쇠를 찾으려는 노력이 특별한성과가 없다는 Ford의 견해가 암시하는바 신학의 프로레고메나부분에 속하는 말씀론에서 오히려 활용론적 언어 특성이 해석학적 역할을 넘어서는 언어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언어의 활용론적 특성은 바르트 신학의 전체 해석에 표준적 역활을 해야 한다. 방법론적 문제와 연관된 질문과 대답의 맥락에서 볼 때 먼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르트의 신학언어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언어의 불연속 성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사건으로서의 직접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의 직접성은 루터의 성례전적 직접성과는 물론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르트가 주장하는 것은 의미론적인 직접성이 아닌 활용론적 직접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임으로 "활용"으로서의 그 말이란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란 특별한 사건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지시/지시체라는 인간 지성의 지향 속에서의 대상을 찾는 해석학적 관심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 활용론적 관심은 그 말의 주체의 타재화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내지 선택론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는 선택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진술하는 바르트의 대상적인 진술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지향적 사고에서 즉시 그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는다. 바르트 언어의 대상이란 어떤 의미론적 대상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신학적 진술을 통하여 일어나는 언어의 활용론적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타재화를 신학 언어의 핵심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영향사 를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천명한 해석학이 목표하는 바는 역시 지시체와 지시의 언어적 공동성에 의존한 반면 바르트가 제시하는 이 언어사용의 방식은 우리의 언어가 대상으로 설정한 그 대상이 자기를 지시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우리의 사유영역밖으로 자신을 은폐시키는 고유의 타자와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우리의 대상적 언어의 의미들이 그 진실을 획득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바로 말씀론의 삼중적 형태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적 형태의 첫 번째 대상으로서 "선포된 말씀" 을 들고 있다. 선포된 말씀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현실 앞에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현실에 인간이 노출되어 있지만 결코 인간이 그 말의 중심적 현상으로 등장할 수 없이 또한 이 초월적 사건의 의미론적 주제화를 피하는 방식으로 이 사건이 사건으로 전개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선포된 말씀과 연관해서 바르트가 제기하고 있는 물음은 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로서 발설되어진 인간의 말의 참된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스스로 이 질문은 유명론과 실재론의 양자택일을 결정짓는 중대한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말의 주체를 인간의 이해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부여한 위임(Auftrag),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의 대상(Gegenstand des Wortes Gottes)이요 또 그 언어적 성육신에서 일어나는 계시의 현재화의 판단 기준(Das Urteil)으로 재발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대상적 언어로서 직접적 매개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대상화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이 말씀속에 있는 영원한 당신으로서의 타자를 우리는 만나게 되는 은폐성, 바로 하나님의 은폐성이다. 하나님은 이 언어화된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은폐하는 것이며 이 현상이 선포된 말씀의 일차적인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때 그는 신학이 난외주석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었으며 또한 스스로 한 때 그가 신학에게 부여했던 난외주석으로써의 제한적 성격을 극복하고 오히려 더 포괄적인 조직적인 정통주의적인 길을 걷을 수 있는 기초를 타재화된 언어 현상의 진리, 곧 하나님의 직접성에 대한 유비의 그림 언어적 진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르트가 자신의 교의학의 명칭을 "기독교 교의학"에서 "교회 교의학"으로 개칭할 때 그는 자신의 교회교의학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전제를 "실존인가? 아니면 말씀인가?" 라는 양자택일의 방식을 제기 함으로써 그 신학적 방법론에 대한 엄격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이 때 그 말씀은 분명히 신학의 실존철학적 근거 지음에 대한 대치 수단으로서 바르트가 보기에 신학 본래의 방법론으로 정당한 것으로 선택된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는 그로 하여금 Scholastik의 근거에서 신학을 전개하는 것보다 더 철저한 성서 중심의 신학을 가능하게 하였고 "정경으로서의 성서"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이해는 쉴라이에르 마허으로부터 유래되는 신학적 전통을 비판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바르트 자신에게 있어 그 결과는 잘 숙고되고 철저화된 신학적 주석과 하나님 중심의 계시 중심적 사고의 단단한 연관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 바르트는 방법론적 고찰에 대하여 무심한 것처럼 보이고 있는가? 융엘이 1960년대 바르트의 유비 개념을 해석학적으로 해명할 때 융엘의 해명이 자신보다 더 철저하며 조직적이라는 것을 매우 높히 평가하면서 동시에 융엘에게 개인적으로 자신을 연구했던 다른 연구서를, 성서적 주석 연구를 통한 유비 연구를 읽어볼 것을 권해본적이 있다. 그것은 그의 신학에 있어서 성서의 유형론적 해석이 그토록 중요한 입장을 갖기 때문이고 사실 그는 자신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하고 있는 말을 다시 한번 그대로 말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세간에 널리 퍼져 있는 것처럼 그가 전혀 철학적 세계와는 담을 쌓고 그들의 언어를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서 그가 그의 신학적 사유의 유쾌한 음악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은 아닌 것이다. 신학의 언어를 단순히 철학적인 언어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을 신학과 성서의 독립성에 거슬린 것으로 보았던 이유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아온대로 신학적 언어가 실제로 할 일이란 이 활용적 특성 속에서 하나님의 직접성을 증거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행동일 뿐이다. 이 때 그가 얼마나 풍성한 언어의 세계를 대하고 있는가! 그가 얼마나 많은 철학적 해명을 하고 있는가!

2) 형식적 메타언어의 특성인 해석:

바르트가 그의 초기 신학의 발전 과정에 변증법적 개념들을 쓰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논문인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의 과제"라는 그 글을 통해서도 분명히 나타나려니와 그는 계시 이해에 있어서의 변증법적 필연성을 인간의 자기 의식에 대한 비판적 사용과 연관시켰다. 그 길은 처음에는 절대적 부정의 길(Via negativa)처럼만 보였다. 바르트 자신이 주장하는 바대로 끝임 없이 긍정에서 부정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쉬지 않고 반복 되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는 긍정과 부정을 넘어서는 진리 자체의 현존에 대하여 부정하지는 않는다. 보다 명료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말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인간의 말로 나타내어 질 수 없다는 절박한 하나님의 현실이 문제시되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실존 이 바로 신학의 문제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 길은 해석학적 이해의 길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진리의 현현의 의미나 진리의 드러냄이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현존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타자성이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진리를 통해서 획득되는 의미가 아니라 진리의 현존을 가능케 하는 진리의 타재화 현상 그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신학이 기독론의 서설이라고,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것이 말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신학이 더욱 성숙해 가면서 이 부정의 길이 신학 전반에 매우 구성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점점 뚜렷해졌고 형식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르트에게는 계시 사건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하나로서 구체적인 이해의 사건을 넘어서는 이 의미의 발생 자체가 문제시 되어 있다. 그렇기에 모든 교의 학적 교설들은 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만 하고 이때 인간은 다름아니라 신학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말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교회학 전체에서 새로운 주제들을 다루기 앞서 항상 되물어 지는 방법적인 고찰들은 그 주제들이 매순간 새롭게 그 빛 자체로부터 드러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미 방법적으로 규명되어 있는 가능성을 통해서 단순하게 연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교의학적 언어로써 말하는 것을 사실은 매번 계시의 사태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교의학을 읽어본 사람들은 그런 그의 방식들을 다 찬성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 지루하게 느끼거나 불필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는 그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가? 매번 새롭게 사유해서 그것을 다시 주제화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신학적 해석으로서 계시의 현상에서 주어진 대상 언어에 대한 바르트의 해석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은폐하는 하나님에 대한 말을 그 내용적 이해로 갖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바르트와 같이 인간의 신학적 이해를 넘어서 우리의 신학적 해석의 구체적 대상으로 임하는 이 신적 실존의 현존을 우리의 교의학적 언어가 보여주는 그 문장 내용의 타재화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 현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론의 한 대목인 "기록된 말씀"을 기억해 보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고 말하고 있는 구체적 인간의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인 것이다. 성서가 쓰여진 채로 성서 안의 계시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성서가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인간의 말이라는 그 어떤 철학적 이유를 선험적 동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자연신학적 동기를 비판하면서 성서의 근거에서만 신학을 해야 하는 그 어떤 선험적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다만 거기에는 사실적 이유만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전해진다면 그리고 그 성서에서 그 어떤 표준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여기 현재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현재화로써 그 성서가 우리에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는 것이다. 성서가 증거하고 성서가 말하며 성서가 선포한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 성서라는 인간의 말의 경험 한복판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참된 초월의 타재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이 타재화에 의한 내용적 접근이 한없는 거리와 무한한 차이를 가지고 사건으로서 우리 가운데 유비로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모든 해석과 석의는 이 역사적 중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와중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차별과 동시화의 과정이란 그 어떤 공동성의 발견이 아니라 차별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기 반복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반복속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서게 되는 것이다.

3)해석의 한계와 메타언어의 극복으로서 일반 언어의 활용적 의미: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과제로써 생각해야할 사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의 신학적 사변이 언제나 구체성을 띤다는 것이다. 덧 붙여서 말하자면 그의 신학의 신체성 내지 구체성은 다름아니라 윤리적인 구체성이며 그것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윤리라는 추상적인 언어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닌 도덕적 성격을 가진 보다 직접적인 존재의 요청으로 이해하게 된다. 구성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회교의학의 모든 분야가 항상 윤리적 통찰로서 마쳐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데 이는 윤리가 일종의 부록으로서 생각되어서가 아니라 계시의 완성으로 사유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계시가 가지는 인간학적 결과들을 재음미해서 계시적 사유에 대한 결론적 대칭의 구조적 요소로서 세워 놓았다는 말이 아니다. 바르트의 문제의식 속에서 그가 왜 그의 교의학안에서 해석학적 문제를 성령의 문제로 바꾸어서 다루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불트만의 의인론적 해석학이 그 자체에서 의인화하는 하나님의 복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에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데 반해서) 비춰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타자의 하나님이 스스로 역사 하시는 그 현실을(지금 교의 학적 진술을 행하는 바르트를 포함해서) 진리로써 해명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교의와 연관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의 의미를 바르트가 제시한 계시된 말씀이란 삼중적 형태중 하나의 핵심적인 서술 분야에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성서와 선포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하여 사건으로 일어나는 계시를 증언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서의 계시에 대한 중언은 바르트의 원 말을 그대로 옮기면 "in eine bestiommte Richtung ueber sich selbst hinaus und auf ein Anderen hinweisen (어떤 일정한 방향성으로 자신을넘어 타자를 지칭하는 것)" 이다. 이때 자명하게도 바르트는 증언의 참됨은 다름아니라 이 타자에 대한 정당한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증언으로서 신학의 교의학적 언어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바르트는 이 언어의 성취(Vollzug)로서 활용적 언어사건의 특성을 "성취된 시간(Erfuellte Zeit)이요 동시에 시간의 성취(die Fuellung der Zeit) "으로 묘사하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이 시간 안에서 이루어졌는가? 타자를 지칭하는 이 성취는 어떤 시간인가? 이 시간 속에서 나의 개인적인 자아는 주어진 실존적 인식으로만 남아있을수 있는가? 이 구체적인 만남과 타자성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시간성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바르트가 강조하고 있는 이 시간은 도데체 무엇인가? 여기서 바르트는 계시 이해에 있어 선험적(apriori)으로 사유하지 않고 후험적(aposteriori)으로 추상적이지 않고 사실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Ubi et quando visum est Deo! 이러한 성취의 언어로서 주어진 인식의 진리는 인간의 연속적 시간성의 차원에서는 이해할수 없는 비연속성의 우연성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실행적 진리의 인식의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단지 인식론적 차원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게 된다. 그가 면도날 위의 길이라고 명명한 그 신학적 사유에 있어서의 필연적인 그 길을 순간의 가능성으로 보았던 것은 과연 어떤 길인가? 그 길은 이 길은 하나님의 우리에게 대한 길을 지적해 주는 표현이다. 초기 바르트의 글로 부터 지속적으로 찾을 수 있었던 그 순간의 길은 키에르케고르가 역설이라고 말했던 순간의 계기를 현시 한다. 그러나 이 주관성을 넘어 더욱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계시의 의미로서 다가오는 존재론적 불가해체성으로서 타자이다. 그 하나님의 사건으로 일어나는 계시의 사건은 예수그리스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대상을 넘어서 살아 있는 인간의 삶과 연관되어 고려될 때 가질 수 있는 이해의 근본 동기로서 인간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존재자를 참된 神이요, 참된 人間으로 말한다는 것은 사실은 이 존재자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그 진리의 절대적인 타재성에 대한 간격의 인식뿐이다. 반면에 해석학이란 이 존재론적 불가해체성을 의미 연관 이란 인식적 대 지평 위에서 해석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간격의 인식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식의 연속성의 반영으로 봐서는 안되고 타자의 출연이 갖는 시간성의 완성이다. 타자와 타자가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완성은 얼굴과 얼굴의 만남이며 바르트의 표현대로 라면 주인과 종의 만남이요 용서와 화해의 만남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간의 완성은 인간 존재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인식론적 인간이 아니다. 물론 인간은 Hom Sapiens이다. 하지만 원래적 인간의 이성성은 신체성과 환경,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앞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이다. 말하는 존재!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존재로서 이 인간이 올바른 말을 하는 존재이다. 이 교의학적 말로서 주어진 선포에 대한 반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행동하는 양심이 되게 한다.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간 존재의 참여로써 그 참됨을 證示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윤리적 결단이 다시 한번 신학의 핵심적 언어로 드러나게 된다. 바르트 자신이 로마드카의 편지 교환에서 촉구한 정치적 예배의 필연성은 온갖 오해의 소지에도 불구하고 그 계시 사태로부터 주어지는 계시 사유에 대한 윤리적인 해명이요 완성인 것이다.


VI

우리는 바르트의 언어사용의 활용론적 특성을 그의 계시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연관시켜 살펴보았다. 활용론적 언어 이해는 해석학적 관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통에서 자라난 것으로 바르트가 계시의 해석학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으면서도 보다 색다른 특성을 갖게 해준 동인 중의 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 바르트 신학의 특성의 내용적인 원인은 뭐라고 해도 바르트의 신학적 특성을 유지하고 그러면서도 해석학적 관점을 포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월성에 있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계시의 절대적 초월성이 인간의 모든 역사적인 형태와 문화적 표현을 임시적인 것으로(Vorlaeufig) 말할 수 있도록 해주듯 그의 신학 역시 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의 연관에서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신학을 임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위의 일련의 물음의 세덩어리들을 내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과제가 아직 하나 더 있다. 소위 계시의 해석학적 해명의 과정에서 해석학적 사유의 대상인 진리의 의미 연관성으로서 필연적인 의미 구조의 형태인 해석학적 순환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진리의 순환(circulus veritatis)과는 구분된 하나님의 진리의 순환(circulus veritatis Dei)에 대한 바르트의 해명이 눈에 띈다. 먼저 바르트는 이 두 사유의 방식이 매우 근접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결국, 개념에 의하여 대상을 사유하는 것이라면 계시의 사유도 다른 일반 대상의 사유와 형편이 크게 달라질 수 없으리라는 추측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만큼 두사유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진리의 순환이란 이 명제를 주제화할수 있다는 것이 그를 통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의 진리로 만들려는 유혹과 구분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바르트는 말하고 있다. 이는 믿음의 시련과 연관되어 있다. 신앙이란 결코 값싼 믿음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참된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투쟁의 원천인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곳,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말씀하시는 곳, 우리의 사변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타자 성의 세계!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사유를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하여 사실적이며 존재적진리임을 증거할수 있을 뿐 그 어떤 초월성도 거부하여야 하는 곳!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우리의 한계와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하는 참되고 영원한 경계에 대한 올바른 언어의 발견은 결국 그리스도론 적으로 그리스도론의 문장들의 내연이나 외연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둘째로 타는 목마름으로 기독인은 기독인의 자리를 지켜 나가야 한다. 구체적이며 분명하게 이 세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

끊어진 길을 이어주는 것은 화해이며 하나님의 진리이다. 이 화해와 사랑은 막힌 것을 뚫는다. 신학적 문장은 인식론적 문제를 실천적인 진리로 옮긴 진리의 문장이다. 이렇게 신학 안에서 인간의 언어로 자기를 증거 하는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서 인간을 통해서 길을 내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섬김은 인간에 대한 봉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