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타자성

- 오늘을 위한 한국신학의 기초 모색 -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전 17장 22-23)

I

오늘의 한국신학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회를 위한 신학이 어떻게 하면 한국을 위한 신학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교회를 도외시한 그 어떤 기독교 신학도 사회를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많은 사회의 인사들이나 교회 안의 숨어있는 비판적인 지도층은 교회의 현재의 상황을 일종의 자폐 현상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한국 교회의 신앙적 확신과 실천의 내용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있으며 교회가 역사와 인간 구원을 위한 본래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어려울 것이라고 비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많은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신앙유형이 한국적이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보편적이며 세계적인 신학적 진리의 차원으로 승화되지도 못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의 이름으로 사회에 많은 봉사를 하고 있더라도 그 봉사는 어느 면에서는 가현설적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들의 윤리적 판단과 행위가 신앙의 내면을 심사숙고하여 자발적으로 수행된 기독교적 존재의 자기해석으로서 책임적 행위라고 생각되기보다 일정한 사회적 현실이 요구하는 어떤 특정한 이념적 전제에 따른 사회의 요구사항을 일방적으로 맹종한 것 같은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누리고 있는 영적 독립성과 비교해서 생각해 볼 때 지금 같은 윤리적 비 독립성은 일련의 새로운 루터의 해석이 루터의 두 왕국론을 각기 영적인 면과 현세적인 면으로 구분하였다는 비난을 생각나게 하며 실지로 그대로 똑 같이 한국교회에도 적용 될 수 있어 보인다. 즉 교회의 신앙은 아직도 그 본질적인 면에서 초월적이며 피안적 세계의 성격이 너무나 강하게 각인 되어 있는 반면 사회 안의 교회는 초월적 신앙의 주체와는 구분되는 또 다른 이중적 주체로서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도 깊숙히 연관되어 있으면서 쉽게 타협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아직 한국이란 사회 속에 그 메시지대로 성육신하지 못 한 것이다. 이런 경우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성령의 폭발적 능력을 상실 한 채 결국 인간해방의 진정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아쉬움을 갖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유전자조작을 통한 생명복제의 문제 등 나날이 복잡해 져 가는 새로운 환경에 대하여 교회와 고전적 신학은 아무런 관심을 표시하지 못한 채 과거 정통주의의 깊은 잠을 깨지 못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더욱이 이 정통주의신학을 두터운 외피로 삼은 한국 교회는 그 한계를 답습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새롭게 대두되는 사회의 문제 앞에서 정통신학과 그 정통신학으로 무장한 교회는 과연 무엇을 제시 할 수 있는가? 과연 교회가 그런 문제에 대하여 답변을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가? 이 모든 과제와 문제의식의 근저에는 계시가 갖고 있는 의미의 불확실성이 놓여 있다. 계시라는 언어로 표현된 교리적 내용들이 그대로 옛날의 것 일뿐 혹시 오늘날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모든 우려들은 사실은 계시가 갖고 있는 현실성을 분명히 인식하는 데에서 해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우리 한국의 교회의 염려스러운 현상은 다름 아니라 계시의 현실성을 상실한 데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면에 일부 신학자들은 바로 이 병적 현상을 과장하여 계시에 대한 모든 언급들이 현대에 아무런 접촉점이나 연관성을 찾지 못한다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보게된다. 하지만 그들이 주의 깊게 다시 되 새겨보아야 할 과제가 있다. 우리 신학자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이 세계만의 문제가 아니며 그 세계를 한 특정한 세계로 발견하게 만드는 바로 그 존재와 인식의 계기가 문제인 것이다. 이는 다름아니라 바로 계시의 문제이다. 이 계시의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 질 수 있는가? 첨부해서 우리는 계시가 신학과 교회의 존재의 근거라는 점에서 교회의 使臣이 교회가 이 세대를 향해 외쳐야 할 정당한 현실이요 과제 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 교회의 신앙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우리 교회가 갖고 있는 이 본질적 가능성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신앙 자체에 더 적합한 것일까? 이 교회와 사회의 공동성은 어디로부터 생각 될 수 있을 것인가? 교회자체의 신앙에 적합한 신학적 탐구만이 사회와 교회의 괴리를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계시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우리로 하여금 성육신적 책임성을 갖게 할 것이며 과거전통에 의거한 내용적 신학(material theology)은 현대에 대한 더욱 책임 있는 자각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우리의 사신에 적합한 구체적 사유를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있는 계시적 자유를 말 할 수 있는가? 가장 한국적인 신학은 그 신학이 추구하는 바의 목표로부터 근원적으로 이해될 때 얻어진다. 즉 복음이 가진 초월적 성격을 보다 명백히 함으로서만 계시적 사유가 한국적 신학형성에 가장 적합한 연결고리를 놓으리라고 확신한다. 한국의 신학의 현실은 토착화나 종교신학적 해석학에서 그 출발점을 얻기 보다 복음 그 자체로부터 그 초월적 능력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현재의 문화적 상황을 주도적으로 극복할 능력을 가진 문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점과 규범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여야 하며 그 노력은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식의 단편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의 문화(종교)신학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한 근원적인 신학사상을 탐구하고자 한다. 현재 한국의 토착화의 종교신학적 해석학적 지평에서 성실하게 대화의 신학으로 발전 시켜가는 다양한 모습들을 이해 하는데에는 상상의 신학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II

트레시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다름 아니라 과거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현대적이란 의미는 어떤 특정한 공동체의 한계 안에 잡혀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이해 될 수 있는 보편성을 통하여 과거의 전통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조직신학이란 종교적 경험의 근원적 사건을 사유 안에서 중심적 개념으로 형성해 가는 것을 포함한다. 이때 우리에게 문제 시 되는 것은 신학적 사유가 중심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언제나 부정 신학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특징 속에서 부정 신학적인 특질을 가지고 표현될 중심적 진리가 이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유효한 개념을 얻을수 있을까? 트레시는 종교의 해당본문에서 드러난 중심적 사태와 해석자(저자)의 대화가 일어났는가의 여부를 신학적 진술이나 종교적 체험의 유효성의 명료화을 위한 최후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더욱이 그 신학적 진술의 특성상 공공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한 특정한 단체가 갖고 있는 종교적 특성이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칠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전(classic)에 대한 이해와 평행적인 관계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전은 한 마디로 과거와 현재가 성공적으로 만난 것이며 또한 그 만남의 자리에서 모든 인간이 필히 다루어야 할 본래적인 해석의 과제가 성공적으로 언어로 표현되어 저자가 해석자와 더불어 공감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참된 종교고전의 해석은 그 문서 뒤에 지금까지 숨어있던(이는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가 재창출 되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새로운 의미획득이 가능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고전적 현실에 대한 재구성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그 해석이 재차 적용될 상황에서는 그 해석을 통하여 진리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되는 현상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이 구체적 신학의 실현을 위한 해석은 이중적인 과제를 가지고 있는데 먼저 해석의 과정과 연관해서 다음의 단계를 주목하게 된다. 고전적 종교적 표현들로서 해석하기 위해서는 표현들에 대한 해석과정의 세 단계가 필수적인 과정으로 남는 것이다. 즉 전이해 - 영양사의 의식화 - 공동의 관심의 발견을 통한 전문적인 대화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가지 단계를 통하여 우리가 인식하여야 할 중대한 관점은 해석자나 본문이 아니라 공동적 주제가 참된 대화를 주도해 나간다는 점이다: 본문이 지나치게 자율적이라고 할 때에도 그 대화는 불가능하며 본문의 의미는 본문의 매개를 통하되 본문의 배후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위의 과정을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첫째로 그는 고전을 이해하고 있는 나의 신학적 이해는 이미 이 이해를 구성하고 가능하게 하고 있는 전이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이 전 이해의 개념은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전제 없는 해석은 불가능하며 모든 해석은 영양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첫째 역사성이란 인간 자신이 역사에 속하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두 번째로 더 정확하게 역사적 문화가 전승되는 과정은 언어라는 것을 알게된다. 세째로 신학적 경험이 종교적 상징 속에서 드러나고 있을 본래적 사태에 대하여 모든 해석자 들이 개방적이라는 것과 함께 그 종교적 고전을 통하여 말로 구체화된 주제 하에서 주제 때문에 참된 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기한 해석의 두 번째 단계는 해석해야 할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 物性에 대한 해명이다. 즉 언어성, 전통, 개념, 그리고 인격들은 추상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그것들이 구체적인 차이를 가지고 우리에게 등장 할 수 있는 폭넓은 존재의 층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해석은 고전적인 본문, 형상, 상징, 사건, 의식 또한 한 인물과 함께 우리의 현실적 경험의 실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제 참된 해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표현들을 구체적으로 표현으로 다룰수 있는 해석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해석의 세 번째 단계는 해석과정을 위한 대화놀이의 모델을 찾는 것이다. 즉 지평융합을 의미한다. 한꺼번에 둘이 하나의 동일한 지평위에서 논의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마머의 해석학에 기초한 해석학적 통찰에서 트레시는 중단하지 않고 그 표현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다중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의미의 다중성의 혹은 양가성에서 그는 해석을 올바르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해당 본문의 역사를 비판적 검토가 있어야 함을 제기하고 있다. 트래시는 비판철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전통의 개념 속에 잠겨있는 지나친 낙관적 요소를 극복하고 그 전통의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그 개념자체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고 본 것이다. 즉, 표현들 배후에 있는 의미의 다양성을 설명방식의 다양성을 통하여 극복하려면 의혹의 해석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에서는 이해의 대상을 파악하는 우리의 기초적 인식의 통로에 대한 조직적이며 방법론적 왜곡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자연히 방법의 문제를 예민하게 만들고 그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해의 존재를 보다 정밀한 방법적 언어로 표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적 사고의 적극적 기능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이제 의심의 해석학은 본원적인 사태을 드러내는 가다머의 재발견의 해석학의 목표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는 리꾀르의 방법론적 이해의 과정을 수용하여 설명방법들이 본문의 형식과 구조를 통해 어떻게 의미가 제시되는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단어의 의미론적 지평 위에 있는 문장의 의미론, 작품의 본문 안에 질서 지워진 구조화도 전체 개성 있는 문장력과 같이 본문의 표현력을 기억하는 것은 이해와 창조성을 더욱 발전시키는 일이 된다. 맑스는 이데올로기 비판,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 그리고 니체는 계보철학을 통하여 각기 이 의심의 해석학을 발전시켰던 것이고 이제 트레시는 이런 구체적인 예들을 쫓아서 방법론적 이해의 과정에서 표현의 구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며 이는 그 표현 하에 있는 의미의 다양성을 극복하는 방안이 되는 것이다.

신학의 새로운 모형 발견을 위한 해석학의 도움은 트레시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한 유다-그리스도교적 전통의 이해가 문제시 될 때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는 쉴레벡스의 "상호 비판적 상관성"이란 개념을 통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이 선포, 드러남, 역사적 실천의 관점에서 이해될 때 가지는 다양성을 예를 들어서 메시지와 현실적 상황의 상호 비판적 상관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은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해석학의 원리를 새롭게 한 것에 불과하다: Depositum fidei로서의 교회대신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라는 한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 사건의 구성적 요소로서 예수의 전승이 갖는 독립적인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하고자 한다. 그럼으로 그에게는 성서란 절대적인 계시 그 자체일수 없으며 단지 계시적 사건을 증거 하는 원초적이며 근원적인 증거일 뿐이다. 이러한 성서관은 교회의 전통 속에서 성서를 이해하는 카톨릭의 전형적인 사고 구조인 것이며 이런 과거의 전통이 그에게서 새로운 신학적 동기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모형을 따르는 신학의 과제는 공동적인 참여에 바탕을 둔 공동연구로서의 신학에 대한 이해를 뒤따르게 될 것이며 새로운 모형의 현대신학이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해석학적 요소는 전체 신학 공동체 안에서 책임적 다원주의를 보장해 준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세계와 하나님은 서로 상관적으로 존재하는 상호 의존적 관계(co-existent)로 보게된다. 이와 같은 그의 해석학적 경향은 다음의 카우프만의 신학적 방법에 대한 반성에서 더욱 선명하면서도 다소 과장된 표현을 얻게 된다.

III

고든 카우프만역시 유사한 신학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과거의 신학들이 오해한 것이거나 불충분하게 해명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개념에 대한 오류이다. 즉 신학이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과는 달리 하나님개념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상상력에 의한 구성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신학의 본래의 사명도 기술(description)이나 설명(exposition)과 같은 것이 아니라 구성(Construction)내지 재구성(Reconstruction)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매우 포괄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먼저 신학의 언어가 교회와 신앙에 의하여 전승된 "사회적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주장하게 된다. 신학은 언어적 전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특히 일반적인 언어사용에 관한 규칙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언어가 전승되어온 더 큰 연관과 맥락 속에서 즉 사회라는 문화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문화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언어적 현상으로부터 보고자 하는 전형적인 인문주의자들의 입장임을 알수 있다. 그는 종교 현상에서 신학의 직접적인 근거를 찾은 것이 아니라 언어의 근원성을 주장한다. 언어 이전의 그 어떤 신비의 경험도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현대를 post-christianism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로 규정하고 일상언어를 통하여 신학함의 근거를 찾을 것을 제안하다. 그가 계시의 현상을 단지 신학적 사유의 "결과물"로서 추측하도록 만드는 것은 신학적 담론의 주제를 인간의 언어적 가능성과 한계 안에서 철학적 신학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신의 실재에 대한 탐구를 생각해 보자. 그에 의하면 신의 개념은 단지 유사-경험적 방식(quasi-experiential)으로만 접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신학적 작업의 결과 우리에게 중요한 특징으로 등장한 것은 하나님은 유사-인격적(quasipersonal)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격구조에서 카우프만이 보고자 하는 것은 절대주체의 사유와 연관해서 계시론이 오랫동안 다루었던 문제이다. 즉 인격주의란 본원의 의미가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사태가 너와 나라는 대상적 구성의 차이이고 그런 한에 있어서 이제는 대상화가 문제의 관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격적 주체란 생각이 실제로는 신적 주체에 대한 진리의 대자성 (overagainstness)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대자성은 일반적 객관성을 모델로 해서 구성된 것이며 이 객관적 대상성의 초월성을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설명하려는 종교철학적 시도들을 나열하며 그 장단점을 다루고 있다. 특별히 데카르트의 본유 관념과 칸트의 유비론을 설명함으로서 그 해답을 추구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카우프만이 칸트를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개념과 세계 개념들이 (혹은 이미지들이?) 특별히 정신 내적인 기능들 때문에 정신에 의해 창조된 상상적인 구성 개념들이라는 것이며 이는 경험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논리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카우프만은 이 칸트의 결론을 문화철학이 확증해 주었다고 말한다: 신의 이해는 어느 정도 문화의 산물로서 그 문화의 뿌리깊은 개념적 사용에 의하여 얻어진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예를 확증하기 위한 또 한 사람의 고전적 신학자를 제기하고 있는데 바로 M. Luther이다. 그는 루터의 義認의 사상을 타자의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연구의 결과를 인용하면서 그 타자성을 다시 "모순으로의 환원(reductio ad absurdum)"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가 내리는 결론은 루터가 지나치게 우리의 구체적 개념의 현주소를 무시 한 채 그 신적 계시사건의 타자성을 강조함으로서 우리의 구성적 개념으로서의 신 개념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바르트를 비롯한 현대적 신학자들조차 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 루터의 타자적 하나님은 사실 우리의 사유와 경험에 의해서 수행된 상상력의 구성개념임을 발견 할 때에 진실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의 개념이 구성적 개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 의하면 "이는 먼저 경험의 대상들이 우리에게 소여 되는 맥락을 정의해 줌으로서 그 구성 개념들은 우리 삶의 근본적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는 근거와 우리를 엄습하는 모든 요인들 속에서 중요성과 의미를 분별 할 수 있는 해석 원리들의 원천을 제시해 주는" 인간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그는 하나님과 세계를 인간과 세계가 대자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대자적으로 서술 할 수 있다고 믿는 제1차 신학이나 이에서 한 걸음 발전하여 신학적 개념들이 근본적으로 상상력을 통한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신학적 개념의 정당화 작업을 추구하는 제2차 신학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제3차 신학을 시도하는 것이다: 즉 신학적 입장들은 단지 상상적 체계에 의해서 완수되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 신학적 개념들을 통해서 인간 실존을 조망해 보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카우프만은 매우 심각한 어조로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2차적 신학 내에 함축되어 있을 뿐이며 더 나아가 그렇게 해서 기껏 준비하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이해를 초월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말대로 라면 유일신론의 하나님 담론은 경험에 소여된 모든 것들의 참 된 근원, 혹은 근거가 되는 것에로 나아가는 인간의 상상적, 혹은 구성적 운동을 의미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위에서 트레시가 주장하듯이 그 역시 신학적 방법론의 자의식의 중요성(methodological Self-consciousness)을 강조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낯설음의 현상의 구조적 계기가 바로 신의 은폐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 낯설음의 본래적 신학적 지평 위에서 이해될 때 카우프만에 의하면 이 세계에 대한 가장 완벽한 기독교의 책임적 진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 낯설음의 현상의 구속적 의미는 인간의 긴 전통 속에서 대화를 통하여 성취된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태도는 이 긴 전통의 연관관계가 신의 초월적 계시성이 드러나게 되는 원형적 가능성인지 아니면 이 연관관계를 차이로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인지를 아직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만일 가족유사성에 근거한 언어 유비적 현상에 만족하는 사유는 그 가족유사성의 근거를 다시 묻어두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유사성을 철저하게 반성할 방법론적 사유의 사명은 다름아니라 한 개념의 의미가 배후의 관점으로 갖고 있는 역사적인 시간상에서의 구체적 차이에 대한 사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IV

우리는 미국의 想像의 신학자 트레시와 카우프만의 신학이해를 간략하게 기술하여 보았다. 한국의 교회를 위한 신학적 사변은 여전히 형성중이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의 토착화 신학중에서도 특별히 변선환 박사의 글은 트레시와 카우프만의 해석학적 신학이 가질 결과를 예상하는 것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의 실체란 결국은 인간들의 현실적 해석과 더불어서 주어 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해석의 결과로서 토착화의 하나님은 기독교와 민중불교와의 만남을 갖게 하였다. 실제로 변선환 박사의 해석학적 실행의 결과에 대한 보다 근원적이며 철저한 탐구는 두 미국의 신학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들에 대한 논의, 그 중에서도 특별히 카우프만의 결론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신학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다 근원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복음의 타자성이란 방법론적인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특히 트레시와 카우프만은 양자에게 공통적인 관심은 신학의 구체적 과정에 대한 탐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학 함에 있어서 인간이 가진 상상력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개념들은 단순한 묘사나 기술적 언어가 아니며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고 우리의 진리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인 탄생의 힘을 가진 모태인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하늘로부터 얻은 고유한 능력이라는 점에서 신학함에 있어 상상력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바람 직 할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인간의 문화적 활동 영역 안에서 계시(?)가 이루어 졌기에 인간의 두터운 언어적 전승에서 그 계시의 의미가 획득되는 것이라면 계시적 현상과 언어적 구체성은 상호간에 무한 소급의 관점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 아닌가? 물론 다른 차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자신의 형이상학의 신론에서 이 무한소급의 불가능성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신학적 탐구에도 적용된다고 하겠다. 혹 더 나아가 계시와 문화는 상호간의 의존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것도 없이 동일한 현상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우프만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예수는 기독교에 의하여 핵심적인 상징으로 자라난 인물로서 그 상징을 다루는 기독론이야 말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제치고 기독교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현실보다는 기독론적 상징이 기독교라는 역사적 실증종교 중심부에 놓인 것을 보여주었다. 그에 의하면 이 신화적 상징성은 자칫 공상의 언어로 전락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역사적 연구에 의하여 알려진 역사적 사실로부터 매번 새롭게 역사적 진리를 재해석하여야 한다.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함께 경험한 초대교회는 그 경험에 의하여 전통적인 메시야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기독교의 출발점이 된다. 결국 역사와 해석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존재와 의미는 하나의 존재자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의 교의를 넘어선 현대인이 누구나 동의 할 수 있는 보편적 인간성을 찾는 노력을 기울어야 하며 그것은 역사적 예수의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고 그 해석은 동시에 예수라는 역사상 새로운 실체를 얻는 것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참된 인간성과 참된 신성을 알아 낼 수 있는 기준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카우프만에 의하여 주어져 있다: 우리의 생각과 이념을 인간화하는 것이며 철저하게 우리를 상대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카우프만은 이제 그 자신의 진리의 기준에 의하여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여행에 떠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의 의미를 지탱해 주는 역사와 차이라는 두터운 층이 있기 때문이다. 대략 트레시의 견해도 같은 결론에 이르고 마찬가지로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두터운 이 언어적 묘사를 넘어서는 초-언어적 사건의 언어적 구성의 계기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이미 구조주의의 구조이론을 극복하기 위해 초 구조의 주변적 환경의 질문을 제기한 푸코의 관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상상력이 계시와 어떤 관계로서 나타날 수 있는가? 혹시 우리는 우리가 지닌 문화의 차이가운데 존재하게된 의미획득의 구체성을 계시적 구체성과 연관시키려고 하지 않는가?

종교 신학적 태도를 주장하는 많은 이들이 한결같이 오늘날 교회가 경험하는 괴로운 분열 현상, 즉 교회의 자폐적 현상과 교회의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사신사이의 이질성을 지적하면서 이 이질성을 모든 종교가 경험하는 일반적인 모습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현상은 자기들의 신학적 인식론을 위한 좋은 변명거리이다. 즉 그들에게 구원이란 한 종교의 도그마를 벗어나 그 종교의 원의도 라고 생각되는 폭발적인 해방사건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그 해방사건을 올바르게 가져오지 못하는 기존의 종교는 이제 내적인 한계와 유한성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어느정도 유한하기 때문에 그 분열현상은 자명하고 당연한 것이고 그의 치료는 이제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자신의 전승의 육체적 物性을 깨닫는 것이 주장하다. 즉 모든 종교는 그 물성이 담겨있는 제한성을 넘어 설 수 없지만 그 물성의 구조만이 그 종교가 본래적인 영원성의 지평을 회복하는 보편성의 문이 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종교의 초월성은 그 물성의 표현의 범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인식과 그런 제한된 범위에서 얻게되는 보편성으로 종교가 회귀하는 것만이 참된 승화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추구된 종교의 초월이란 자기 안으로의 초월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역사적 현실에서 차이에 의한 회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신학의 사명은 이 유한성의 단순성을 방법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기획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즉 구성과 재구성의 실천과 반복을 통하여 해당 주체에 대한 변화와 변화 받은 현실 하에서 그 주체에게 적합할 새로운 주도적 의미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기존의 범주와는 다른 보편적 지평을 찾아서 그 위에 신학의 언사를 흩뿌려 놓음으로서 자신들의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해석학적 신학자들이 있다: 그 보편적 지평이란 인간의 생소함을 드러내는 장소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말해 질 수 없는 분이며 그분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유비적 능력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에서 논리적 사고 끝에 스스로를 자신들의 언어공간의 능력 속에 폐쇄하려는 일단의 신학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생소함의 원천에 대한 사유를 단지 그 생소함 자체에 대한 사유와 혼동하고 만다.

생소함의 원천에 대한 사유와 생소함의 현상 그 자체에 대한 사유는 다른 것이다. 생소함에서 경험되는 그 생소함의 구조적 계기들을 밝히는 것은 그 생소함의 계시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언어적 준비를 설명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 언어적 준비로서의 생소함의 사건이 다양한 변용(transformation)을 통하여 증폭된 언어적 현시성을 얻게 된 것은 다분히 계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 대한 사유가 언제나 그 고유한 대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시간적 뒷물림의 경험은 타자성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창구이다. 영원한 타자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은 이 뒷물림의 함정 때문에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이 뒷물림의 시간에서 사유된 구분과 타자성은 참된 것 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생소함은 이미 옛 부터 우리가 경험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질문들을 제기해 왔음을 알고 있다; 서양의 신 플라톤주의는 그 대표적 예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생소함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성실히 들어 왔는가?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현상 자체는 언제나 이중적 이어서 항상 다양하게 그리고 동시에 두가지로 해석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이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타자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한국적 신학이란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하는 신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인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사유되는 진리의 인식이다. 우리는 트레시나 카우프만이 주장하는 진리의 구성의 과정에서조차 먼저 차이에 대한 인식이 우선적임을 보았다. 교리와 역사의 공통의 터전은 동시에 상호간의 소외라는 간격이 성립될 때 가능한 것이다. 교리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가지 중대한 사실은 그 구체적 언어획득으로서 교리는 매번 절대적 대칭을 자체 안에 갖으면서 기존의 언어를 그 대칭점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더해 가는 것이다. 굳히 다른 말로 하자면 신학의 계시적 진리는 일반 문화적 지평 위에서 획득된 체계적 언어를 소환하여 자기의 의미로 새롭게 재구성하여 다시 그 체계를 통하여 그 체계가 표현하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즉 계시는 이런 언어현상과 연관해서는 paradox이다. 그 교리적 언어는 그 언어를 통하여 바로 그 언어가 쓰이고 있는 바대로 쓰이지 않도록 창조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때 그 언어의 문화적 의미 안에서 그 언어의 구성적 의미를 획득하도록 하는 절대적 대칭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 언어적 구성 하에 불림을 당하면서 그 구성을 이율배반적으로 뛰어 넘도록 만드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이 복음의 타자적 사건이다.

더욱이 구성을 위해서 서있는 그 주체 자신은 타자적 대상과 더불어서 주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나의 주체적인 구현은 너의 주체적 섬과 연관이 있으며 이 연관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성서의 보도인 하나님의 경험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데 그 무엇보다도 절대적 초월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특이하다. 우리는 먼저 이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요구들을 성서의 계시적 사건에서 획득한 주체적 청자(聽者: Zuhoeher)로서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타자성은 초월적 자아 현실화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유하는 길을 알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나 구성하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며 순종하며 듣는 책임적 존재인 것이다. 신학의 사명은 쓰거나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