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환의 토착화 기독론; 未知의 神을 찾아서

- 한 비판적 고찰 -


I

카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은 우리 한국사람들이 신학함에 있어서 해결하여야 할 중대한 과제중의 하나를 다음과 표현하고 있다.

"한국 카톨릭의 고유한 사명은 우리의 신학과 전례와 영성 생활을 한국의 전통적 범주로 재해석하여 그리스도 신앙이 한국인의 마음 안에 뿌리내리고 소화되므로써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빌려서 사고하고 표현하는 우리의 정신적 빈곤은 우리 자신들의 빈곤에 그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편교회에 기여할 바를 못하는 것이므로 교회 전체를 그만큼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적 신학의 본래적 사명의 하나와 연관해서 주목할만한 일이 근자에 벌어지고 있다: 과거 군국주의의 부활을 재촉하는 것 같은 일본의 우경화현상에 대응하여 한국에서는 단군 신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한 때 이 나라의 살아있는 양심으로 비판적 지성의 큰 획을 그었던 김지하씨가 이제는 단군 이데올로기의 전도사가 되어 신화의 불을 지피고 있다. 단군을 기록하고 있는 몇 몇 고대사의 기록들을 인용하면서 우리 민족의 상고사에 펼쳐진 단군과 신시에 대한 표상들이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자본주의의 한계로 인한 갈등과 환경 오염등 도탄에 빠진 세상에 구원을 전해 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그의 개인적 신념의 정도가 매우 심각한 증후를 보이는 것은 이 잃어버린 낙원이 역사 속에서 실재하였던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역사를 넘는 초월적 희망의 자취는 허탄한 신화의 역사성속에 갇혀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니라 신화속의 神市이다. 역사와 역사 이후의 초월을 신앙의 대상으로 갖고 있는 기독교는 역사와 초월 사이의 연속성의 문제에 진지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희망을 우리 민족의 상고사 속에서 구형화 시키고자 하는 이런 낭만적 원시성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전개 될 른 지는 미지수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 들여 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 단적인 증거인 것이다.

단군신화가 몰고 올 수 있는 한국사회의 고대 상고사에 대한 무절제한 신봉과 지나친 관용은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나을 소지가 있는 예민한 문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그것은 신학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의 일부 신학자는 자신들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아직 고증되지 않은 것으로 아마도 조선조 말 후대사람들에 의하여 날조되었을지도 모를 상고사에 대한 기록을 마치 진실한 것 인양 무책임하게 본문화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이들은 조상들이 갖고 있다고 상정한 신의 관념과 성서에서 계시된 신의 자유사이의 차이를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다소 차이점이 발견되더라도 모든 문화 신학의 근본적 명제처럼 생각되는 전제 - 즉 조상의 하나님 사상 안에서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논리적 전개 - 역시 앞에서 제시한 다분히 감정적이며 비약적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주의 할 점은 만일 이 논리에 어떤 제약이 없다면 악의 직접적 근원을 하나님으로 지목 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간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전통문화의 신학적 수용은문화와 계시의 관계를 다루는 중대한 문제로서 어떤 류의 문화신학이 정당한 것인가를 비판적으로 묻게 하며 그런 의미에서 신학적 판단력의 提高의 필요성을 재확인 하는 계기였던 것이다. 그것도 이 보이는 세계 속에, 세계의 문화와 사회 속에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그리스도의 주권의 계시 속에서 이해 할 수 있는 능력, 즉 우리의 신앙을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이해 할 수 있는 판단력의 提高가 모든 신학적 사유의 핵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여 줄 결정적 계기였던 셈이다. 따라서 문화신학의 넓은 바탕에서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들이 한결같이 한국적 사상의 순수한 구조적 특성을 찾는 노력을 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나타난 신의 관념을 서구의 전통과 대화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각별한 주의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도전의 정신을 가지고 신학을 수행한 그룹의 신학자중 대표적 인물이 변선환이다. 그는 "한국 문화 한가운데 서서 한국의 인간화를 위해서 한국의 다른 종교와 손을 잡고 일하기 시작하는 포괄적인 인간화의 선교를 지향한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이 신학자의 문화 신학적 업적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 당연히 그의 그리스도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이름이 신학적으로 큰 혼동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삼스럽게 그의 신학적 성과를 다시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원치 않는 효과를 가져 올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과정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사정에서 변선환에게서 그 어떤 기독론적 흔적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과연 우리의 것으로 보편을 사유하고 우리의 전통적 범주로서 우리의 신앙적 영성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하는지를 재삼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며 진정한 토착적 신학의 기준으로서의 예수의 영이 과연 어떻게 표현 될 수 있는지를 다시 반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적인 기독론의 중요한 논점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의 기독론이 가지고 있을 신학사안에서의 위치를 정하고 그 가운데서 그 의미를 다루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론의 핵심문제는 단 하나이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혹은 만났다고 할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기독론 전체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덧 붙히자면 이 신비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의 발견 역시 필수적이다. 과연 변선환은 이 작업을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II

변선환은 무엇보다도 기독론과 구원론의 문제를 종교라는 현실의 장에서 다루고 싶어 한다. 그가 보고 있는 종교의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선교의 이상은 어떤 것인가? 그가 바라는 선교의 모습은 철저하게 각 개인의 인간화를 지향하는 실존적 자각과 연관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그가 바라보는 전통적인 방식의 선교의 미래는 암울하다 못해 무가치한 것이다: 즉 선교가 개종으로 일어나서는 안되며 사실 개종을 통해서 인류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뭉치게 된다는 理想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되 뇌인다.

" 우리들은 지금 여호수아처럼 아무리 이스라엘의 옛 계약이나 새계약인 복음의 나팔을 불며 이방종교의 성곽을 돌아도 타종교라는 여리고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또 오늘의 이방인들은 복음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만큼 나이브하고 미개하지도 않다. 오히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재래종교는 크게 부흥하고 기독교 서구에서는 기독교 문화에 대한 반문화 운동이 젊은이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선교의 현실에 대한 판단과 함께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의 전도방식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의 소리를 내고 있다.

"왜 우리는 어떤 간교한 수단을 써서든지 비 기독교인을 회개시키고 강제로 세례하려고만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태도가 가능하였던 것은 기독교이외의 한국의 기존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속에서 "복음에로의 준비(preparatio evangelica)"를 발견 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계속되는 그의 표현에 의하면 기독교만의 배타주의는 물론이고 보편주의적 포괄주의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안에 이방종교가 버젓히 존재해 왔고 존재하는 현실에 적합한 언어는 무엇인가? 그는 이를 다종교의 공존을 모색하는 다원주의의 언어 속에서 찾고자 한다. 변선환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날의 시대가 다종교 시대라는 것을 인정한다. 특별히 기독교와 연관해서 보건데 이제는 Post-Christian, Post-Protestantism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확언한다. 그는 희랍문화에 의한 제1교회, 라틴문화에 의한 제2, 그리고 오늘날 제3의 교회가 등장하고 있는데 그 제3의 교회는 비 기독교적인 제3세계 문화 속에서 일어난 교회들이다. 제1, 2교회의 문제가 교리와 선교와 연관된 것이라면 이들 제 3의 교회에게 제기된 문제란 어떻게 복음을 이교적인 종교와 정치적 체계에 적응시키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모습은 구체적으로는 소위 "이단의 시대"를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하도록 준비 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다원주의가 갖을 관용의 필요성은 기독교와 이교사이의 외적 관계에만 관여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기독교의 생성과 성장 그 자체와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기독교는 문화엾이 존재할수 없으며 서구 기독교는 이 사실은 명백하게 보여 주었다. 즉 서구 기독교의 역사는 우선은 유대적 기독교였으며, 역사의 중심무대의 변화와 더불어 희랍적 기독교, 라틴적 기독교, 게르만적 기독교, 서구 자본주의적 기독교 였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제 이 기독교는 한국의 땅에서는 한국적 기독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으로 한국적 기독교는 이제 한국적 문화 안으로 성육신 하여야 하고 그 성육신의 현실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저자 니이버 처럼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혁자로서 생각 할 수 없게 만든다. 그 대신 그리스도는 철두철미 이방문화를 섬기는 종(the servant of culture)이어야 한다. 문화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의 목표는 다름 아니라 이 세계 위에 하나의 세계신학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 세계종교는 신-중심적인 하나의 통일된 종교신학을 꿈꾼다. 역사적 기독교나 예수라는 특별한 인물의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다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신 체험에 바탕을 둔 세계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세계가 하나로 지향되는 초월적 신-중심적인 통일 신학의 전망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계의 많은 종교는 세계종교사라는 넓고 큰 맥락 속에서 재 해석되어야하며 초월자 체험이라는 보편적 근원에서 만나서 사이 없이 대화하고 협력하며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초월적이며 보편적 신은 여기 역사적 기독교의 한계를 넘고 변선환에 의하면 통일된 종교신학의 수립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신학이며 과거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놓여진 해방의 신학인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그의 토착화론은 먼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더불어서 시작한다. 지난 세기의 선교신학은 서구이외의 다른 지역의 문화를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찬 반 기독교적 무신론적 문화라고 규정하여 결국 우리들은 탈 민족 문화화의 모순적 현상에 직면하여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는 김용복이 주장하는 문화선교의 핵심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문화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기독교 문화의 정체는 문화를 변혁하고 창조하여 문화적으로 해방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역동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양성을 전제로 한 신학의 발전이 과연 그 근거를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에 의하면 이 다원주의 현실은 이미 우리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다. 이와 연관해서 흥미 있는 것은 변선환의 1893년 시카고 종교박람회의 정신에 대한 판단이다. 그에게는 이 일이 새로운 미래를 위한 한 획을 긋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변선환의 신학적 근거와 출발점은 바로 이 다종교의 현실과 그 공존의 이유을 설명하고자 하는데에 있다. 다종교의 현실이 갖고 있는 의미를 하나님의 다 종교에 대한 허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변선환에게는 아름다운 미래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천년왕국은 이 미지의 신에 의해서 보장되는 다 종교의 공존이라는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인 판단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변선환의 이 꿈을 고발하듯이 여기 저기에서 종교로 인한 전쟁은 지속되고 있으며 그것은 지옥에 가깝다.

 

III

변선환의 기독론이 지향하고 있을 방법론적 전제는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Fritzer Buri의 실존론적 종교신학, K.Rahner의 익명성의 신학, 그런가 하면 P. Knitter와 R.Panikkar의 다원주의 종교신학등이 변선환의 신학적 뿌리로 거명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소위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설정하면서 역사적이며 현실적인 예수를 주장하기보다는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를 더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상징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뜻이다. 특별히 힌두교의 신학화를 꾀한 파니카는 힌두교의 이쉬바라를 절대자 브라만의 계시자로 보는 동시에 이를 힌두교안의 감추어진 무명의 그리스도로 칭한다: 힌두교의 이쉬바라가 보편적 로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동일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선환은 이러한 종교신학을 넘어서서 나아가고자 한다: 그는 파니카가 힌두교가 기독교의 예비적 단계로 보고 힌두교가 기독교에서 완성에 이른다고 하는 생각을 비판한다. 변선환은 기독교 신학 내에 부정 신학적 전통이 존재하듯이 힌두교 자체에도 부정 신학적 전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변선환은 힌두교의 전통은 예비적 존재가 아닌 당당한 주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변선환 자신은 파니카의 여러 가지 물음들을 정리하면서 결국은 파니카의 물음 자체가 너무 유럽신학에 깊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파니카의 신학을 넘어서 각각의 고유한 종교의 전통이 기독교적 전통과 더불어서 동등한 것으로 취급받는 시대의 신학적 방법은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각 종교의 구체적 틀은 수긍하는 신학, 즉 다원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의 신학에 변선환이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G. Kaufman은 이점에서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작업은 실은 신학적 이해의 해석학적 과정을 밝혀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변선환과 카우푸만의 신학이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변선환 대신 그 방법론적 고찰로서 카우프만의 신학을 여기 해명하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카우프만에게서 변선환의 암시적 고찰들이 명료한 언어로 등장하고 있기 까닭이다.

이러한 비교를 위해서 우리가 알아 보야야 할 첫 번째 비교의 범주는 먼저 현실에 대한 이해의 유사성이다. 카우프만은 현대를 post-christianism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로 규정하고 일상언어를 통하여 신학함의 근거를 찾을 것을 제안한다. 그는 계시의 현상을 단지 신학적 사유의 "결과물"로서 추측하도록 만들며 그렇게 함으로서 신학적 담론의 주제를 인간의 언어적 가능성과 한계 안에서 철학적 신학의 가능성으로 추구하도록 한다. 소위 후기 기독교시대로의 진입이 우리 시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전통에 대한 전반적인 재 해석이 필요한 때라고 규정한다. 변선환이 단지 오늘의 시대가 후기-기독교 시대라고 선언한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로 카우프만과 변선환사이의 또 하나의 공통적 문제는 신학의 언어와 연관이 있다. 양자는 모두 신학적 언어가 교회와 신앙에 의하여 전승된 "사회적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주장하게 된다. 특히 카우프만은 신학은 그 언어가 전승되어온 더 큰 연관과 맥락속에서 즉 사회라는 문화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문화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언어적 현상으로부터 보고자 하는 전형적인 인문주의자들의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종교 현상에서 신학의 직접적인 근거를 찾은 것이 아니라 언어의 근원성을 주장한다. 언어 이전의 그 어떤 신비의 경험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문화적 이해의 차원으로서의 신비 그 배후에는 특별한 객관적 대상을 세우지 않으려는 의도와 연관이 있다. 세 번째로 신학에서의 하나님개념이 갖고 있는 역할과 의미 역시 둘 사이의 공통점을 재 발견하게 한다. 신학이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과는 달리 하나님개념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상상력에 의한 구성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신학의 본래의 사명도 기술(description)이나 설명(exposition)과 같은 것이 아니라 구성(Construction)내지 재구성(Reconstruction)에 있다는 것이다.신의 개념은 단지 유사-경험적 방식(quasi-experiential)으로만 접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신의 개념이 구성적 개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 의하면 "이는 먼저 경험의 대상들이 우리에게 소여 되는 맥락을 정의해 줌으로서 그 구성 개념들은 우리 삶의 근본적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는 근거와 우리를 엄습하는 모든 요인들 속에서 중요성과 의미를 분별 할 수 있는 해석 원리들의 원천을 제시해 주는" 인간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준비하는 신학의 궁극적 목적은 이 세계를 "초월적으로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神이란 상징의 이해는 구성된 세계 안에서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을 통하여 이해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이 신에 대하여 갖을 수 있는 상징적 이해는 언제나 토착적 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고 이점에서 그는 변선환과 일치한다. 이러한 신 이해의 구체적 평가는 다음의 그리스도론을 통하여 가능하여 지는데 그것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현실을 볼수 있는 구체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변선환과 카우프만은 한결같이 그 장소가 다름 아니라 상징의 세계라고 말한다. 상징의 세계는 우리의 구원의 세계의 문인가?

 

IV

위의 방법론적 전제들이 있는 변선환의 기독론은 철저하게 상징의 세계속에서 존재하는 기독론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그 상징의 세계란 단순하게 객관적인 대상을 통하여 형상화 될 수 없고 그 대신에 이해의 차원으로 이해되는 꿈과 희망의 언어, 그리고 관념의 언어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관념의 세계가 중요한 하나의 현실의 범주안에서 사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변선환은 자신의 기독론을 이 관념의 세계속에서 펼치고 있으며 그것도 자신의 실존적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변선환의 미지의 신은 이 그리스도로를 설명하고 있는 그 자신의 평가속에서 기독교적으로 받아 들일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게 한다고 할수 있다. 먼저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기독론을 토착화의 과제로서 생각한다. 이러한 종교적 관심이 변선환의 신학을 상상력의 신학과 일치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유이다. 그의 기독론의 근본 전개과정은 기존의 서구의 전통적 기독론을 그 시대와 역사의 한계로 "상황화"시키고 정통 기독론을 상대화 시키는 것을 통하여 한국 고유의 기독론이 나올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서구 기독론이 형성되어 왔을 때 가졌던 문화의 숨어있는 해석학적 기능과 같은 동양적 기능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중점으로 생각하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관심을 비록 자기의 본래적 지평과는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실존론적 관심속에서 사실은 의미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이 의미는 동양사람들에게는 동양의 문화 안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가정과 전제가 있는 것이다. 이 동양적 상징 세계속에서 주어진 실존적 만남안에 예수는 구원의 문이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 바로 신의 인간화이기에 이제 인간화가 일어나는 곳 어디에든지 신이 계시며 신의 역사는 곧 인간화이다. 이 인간화의 물결이 성취되는 곳이 진실한 의미에서 동/서간의 만남의 장소이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와의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문화적 종교적인 역사적 제약 때문에 서로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같은 근원적 진리, 초월자 앞에 선 휴머니티의 다양한 표현의 차이" 라고 본다. 그가 종교의 핵심적 부분을 인간화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핵심적인 상징은 인간적 실존이해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제 기독론은 한국적 정서와 한국적 문화의 언어 안에서 찾아져야 할 영적 진리의 표현이 된다. 기독론이란 만들어져 가는 의미의 해석인 것이다. 이것이 변선환이 추구하는 기독론이다.

두 번째로 변선환의 기독론의 특성은 현재 역사적 기독교의 중심인 전통 기독론을 해체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해체의 과제를 "현대과정신학에 나타난 기독론"과 "세속화 이후의 미국의 기독론"에서 다루면서 결국 과정신학의 기독론을 자신의 동양적 기독론을 위한 기초로서 활용하고 있는 데에서 분명히 나타낸다. 그는 콥과 그리핀이 각각 선재의 로고스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킨 것 때문에 그들을 배타적 식민주의자로까지 혹독하게 몰아세우고 있다. 변선환에 의하면 우주적 로고스의 기독론은 전통신학의 언어 안에서 제한되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상상력과 조화된 오늘의 동양적 기독론은 이 우주적 로고스를 통하여 서구 전통의 해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그의 기독론은 정통 기독론에 기식하면서 그것을 변종시키는 일종의 그림자 기독론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여러 가지 그의 논문들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종교의 배타성을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배타적 절대성을 고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종교의 배타성에 대한 고발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론의 참뜻을 보여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독론은 또한 세속화의 기독론 이라든지, 현대적 Kenosis의 기독론 보다도 더 과격한 결과를 나타 낼 수 있다. 서구 전통을 해체하기 위한 그의 기독론은 결국 양성론과 그리스도의 선재 그리고 부활의 현실성등을 완전히 배제하게 만든다. 그리스도는 누구냐? )에서 그는 전 기독교의 중심적 과제를 기독론이라고 규정하고 기독론의 비의(?儀)를 수육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현대적 意義의 문제로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참된 의미는 단지 참된 인간화를 위한 하나님의 호소이고 십자가의 죽음은 현대인에게 타인을 위한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실존의 모범이며 부활은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 타인을 위한 자유가 승리하고 있다는 적극적 상징이라고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논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양성론의 핵심인 동일본질에 대한 설명을 기독교 폐해의 하나로 간주하고 철저하게 인간 예수가 부처등 여타의 종교 지도자들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하여야 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가 올바르게 이해된 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재라든지 양성론의 교리(Anhypotase, Enhypotase, Communicatio Idiomatum등)은 완전하게 버려야 할 환영론적 기독론의 근거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전통의 해체을 주장하는 기독론만이 기독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변선환의 기독론의 특성은 동양적 기독론을 문학적 작품으로 여기려는 그의 미학적 태도속에서 찾아 볼수 있다. 즉 그의 기독론은 매우 심미적인 실존의 자기 결단의 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그가 성서를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일종의 문학적 작품이다. 이 성서를 통하여 만나는 예수는 우리의 실존적 가능성으로서의 예수인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도 참된 자기를 만나는 것이다. 이 참된 자기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불트만이 주장할 때 변선환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불트만의 비신화화가 그 십자가에 머 물을 때 그리스도 신화 앞에서 서있는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단지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은 우리에게 실존적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이 있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것이다. 예수가 신이었던 것은 단지 예수의 사랑이 신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비는 예수 안에서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실존적으로 만나진다고 말한다. 타종교의 초월자 체험은 우리를 신의 신비를 향해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수 있던 유일한 통로는 바로 이 실존의 심미적 지평 뿐이었다.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동양적 기독론의 모습에 어느 정도 한계와 선을 마련하여 준 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대로 그는 기독론에 대한 어떤 교리적 설명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꾸준하게 기독론을 인간의 실존적 구조해명과 연관해서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기독론은 사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빈 상자와 유사하다. 형식과 그 형식에 맞는 사유형태까지 알려졌지만 그 형식을 채울 내용은 공허하다. 마치 텅 빈 선물보따리와 같은 형국이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 것이 있는가? 그는 기독론에 대하여 말함으로서 우리에게 는 우리에게 심미적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 기독론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할 뿐이다.

 

V

타 종교간의 대화가 물론 긍정적 측면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하는 신학은 반드시 그 대화의 성격과 그 대화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일차적인 사명인 것이다. 신학은 신앙의 이해와 연관된 신앙적 사태의 판단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기독교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모두 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사태의 중심적 존재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단지 문제는 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삶가운데서 정당하게 말할수 있게 되는가이다. 그럼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신학함의 판단이란 그리스도를 향한 언어의 재발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언어의 중심에 서는 것이 바로 그 판단이다. 신학적 판단에서 일어나는 판단을 규명하자면 그것은 언어의 획득인데 그것도 단순한 언어의 획득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증시되는 언어"의 획득이며 그리스도가 주인됨의 자리라고 해야만 한다. 우리의 판단은 그의 계시적 지평안에 흡수되어 나의 언어적 변형을 미쳐 준비하기 이전에 노출되고 그에게로 부름을 받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다. 나는 종이요 그는 주인이라고 규정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언어를 그럼으로 일차적으로는 사건의 언어요 존재의 언어요, 타자의 언어요, 언어의 구조안에 있는 생기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규정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수단이며 우리의 육신의 형상을 따른 신의 은총의 현실을 말한 것뿐이다. 둘째로 신학의 언어가 신앙의 언어와 동일하다는 그 속에서는 언어의 본성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과 통찰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언어를 통하여 제시되는 대상과 언어와의 차이도 드러나야 함을 말하게 한다. 물론 그 차이를 우리는 언어적 구조안에 주어진 생성의 사건 속에서 재해석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가 제시하는 활용론적 의미론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나의 언어가 "신앙의 언어의 사건"을 지칭하는 언어라고 한다면 나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유비의 사건이다.

이와같은 신학적 언어의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변선환의 신학적 특성을 이해하자면 위에서 이미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그의 기독론은 그림자 기독론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어느곳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서술을 만날 수 없었다고 할수 있다. 그가 추구한 상징의 세계는 다양한 세계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을 뿐 그 대상의 초월과 상관이 없다. 두 번째로 그가 주장하는 토착화로서의 기독론은 사실은 서구의 실존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 그가 수시로 주장하는 실존성이란 범주가 동양적 불교와 연결된다는 말은 매우 애매하다. 이점에서 그가 신학을 수행함에 있어서 사용하는 모든 범주가 실은 카우프만과 유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토착화가 사실은 서양적 사고로서도 번역될수 있는 것으로서 그만큼 고유하게 자기만의 것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세번째로 신앙의 역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어떻게 교회의 신앙과 구분되는 신앙을 말하는지 그 신앙은 유명론적이다. 마지막으로 기독론의 전통적 개념에서 하나님의 비밀로서 예수를 생각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변선환의 각 종교의 비교속에 나타난 불균형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는 바 그가 추구하는 미지의 신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우주적 로고스인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종교의 등장과 함께 혹시 이해될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기독교라는 범주에서 생각되기에는 매우 어렵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