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노자 강의에 대한 한 단상



이 글은 요즘 진행되고 있는 김용옥의 강의가 혹시 불신자들에게는 교회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키고, 교회의 청년들에게는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회가 정신 문명사적으로 동양적 가치에 훨씬 못 미치는 이류 혹은 삼류라는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으므로 그것에 대한 해명을 하고자 쓴 것입니다.

긍정적인 면

먼저 그의 노자 강의에서 몇 가지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 교회는 김용옥 씨의 박학다식한 지식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의 지식은 수년간의 유학생활과 성실한 탐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확실합니다. 그의 지식과 통찰은 현대 철학과 대화을 통하여 그리고 언어학 등 다양한 학문적 소양을 통하여 익혀진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가 말한 것처럼 그는 노자를 현대의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훈련받았으며 그래서 그의 지식은 옛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적인 새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의 현대성 때문에 그의 강의가 살아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지성들도 이러한 작업을 수시로 하여야 할 것이입니다. 과거의 문서와 본문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놓고 있는 그의 강의는 훌륭해 보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선지자적 작업을 무시할 때 더욱 대다수 국민들에게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강의가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그 동안 현대 일반 대중들에게 망각되어 왔던 동양적 지식의 한 특징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노자의 본문은 바른 지식은 올바른 행동을 촉구한다는 것을 전제로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번째로 비록 김용옥 씨 본인의 행동과 태도, 그리고 가끔 사용되는 욕설과 공개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색(色)에 대한 부적절한 주제화 등이 우리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여하튼 그는 많은 면에서 우리 한국 민족의 현주소가 우리의 전통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상적 빈곤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모든 강의를 통하여 가장 큰 공헌이 이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의 문화와 정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적나라한 고발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현재의 철학 없음과 염치 없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할 대목

위와 같은 긍정적이며 예언자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좀더 유의하면서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할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강의를 듣는 사람은 은근히 기독교회를 비롯한 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동양의 아류 정도로 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가 가끔 가다 양념처럼 사용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런저런 비평은 적절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시시콜콜히 다 지적할 수는 없지만 두 가지만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동서양의 정신적 근원을 통달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요한 서신의 로고스 사상을 철저하게 영지주의자들의 민중신앙과 연결시키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요 원하지 않은 말이 터져 나왔을 때에는 좀더 신중하여야 했을 것이며, 혹시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면 요한의 로고스 사상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한 증언 공동체의 언어로서 그 증거의 역사적 성격을 좀더 잘 이해하고 난 후에 말하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됩니다. 또 하나 기독교의 신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창조주의 사상에 대하여 촌평하기를 그 신을 낳은 이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창조주에 대한 신학적 반성에 대비하면서 그가 ‘도거 자연’(道法 自然)이라는 노자의 문귀에서 도의 궁극성을 주장하고 그 철학적 반성을 ‘도’라는 개념을 통하여 수행하고 있음을 말하지만, 이 ‘도’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서구에서 하나님을 진술하게 되는 모든 개념은 ‘궁극적인 것에 대한 진술’임을 왜 모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편견은 다음의 두 가지 철학적 오해를 통하여 더욱 강화되어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먼저 동양 정신의 ‘불이사상’(不二思想)이야말로 서양의 사상들을 넘어서는 가장 위대하고 원대한 정신이라는 동양인의 자폐적 태도입니다. 동양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전제처럼 거의 일상화 되어버린 편견입니다만 김용옥 씨 역시 동양의 ‘불이’(不二)정신을 서양에 대한 압도적인 우위를 일궈내는 특징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고 있습니다: 서양의 사상 특징인 이원론적 요소들이 그들과는 다른 전통에 서 있는 동양정신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근거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 세계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는 전제가 들어 있습니다. 철학적 전통 사이의 차이를 올바름의 가치 문제로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서양적인 사고 발상일 뿐 아니라 동양적 사고의 모든 부분을 유심히 뜯어보면 거기에도 이원적 태도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有意와 無意’, ‘氣와 理’, ‘己發과 未發’, ‘體와 用’ 등 세계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 필연적으로 구분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만에 하나 백 보 양보해서 서양의 사고가 이원론적 구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전통의 특징을 우리들의 사상적 우월성을 나타내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서양의 사상가들 역시 자신들의 사상 속에 이런 이원론적 태도가 혹시 갈등의 요소들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육체와 영혼, 질료와 형상, 물질과 정신 등 인간 및 세계의 존재 이해에서 두 차원으로 구분될 수 있는 차이와 구별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두건대 이런 이원론적 착상이나 소지는 사실은 지금 여기, 보이는 세계의 여러 난제들의 해결을 위한 사고의 시작이며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서구의 사상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실은 이 이원론적 태도를 기점으로 해서 보이는 세계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원론적 사상의 근원으로 지목 받고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사실은 이 보이는 세계의 문제를 보이지 않는 영원의 질서의 힘을 빌어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며 문제 해결을 위한 사유의 출발점에 불과한 것임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의 한결같은 사상의 근원에서는 영원한 신에 대한 향수와 그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영원 불멸성에 대한 신념과 지성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희망은 그들 속에 존재하던 종교적 희망의 자취 곧 만물의 근원이 갖는 신적 단일성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얼핏 주장된 것처럼 동양의 우위성을 입증하여 줄 그 어떤 특별한 사상적 특징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은 대상을 다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진실로 그 둘 사이를 구분짓는 유일한 잣대는 이 세계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로부터 있다고 말하는 자연(김용옥 씨가 주장하는 동사적 의미에서)주의적 태도와 이 세계의 근원이 이 세계의 밖으로부터 온다는 초월적 태도에 대한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표현방식의 차이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둘이 갖고 있는 전제와 사상적 적합성의 서로에 대한 우월성은 철학적 지식이나 반성에 의하여서는 절대로 증명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서 근본적 직관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의 특징으로부터 타 종교나 사상을 가르치려는 태도는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동양철학의 서양철학에 대한 편견과 질시는 우리 기독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그리고 천국과 지옥, 원죄론과 원죄 이전의 무흠한 인간의 상태 등 성서의 중요 내용을 그 계시적 의미의 심오함에서 보지 않고 단순하게 서구의 이원론에 의거한 것으로 매도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성서의 진리는 서구 철학의 이원론적 어떤 요소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철학적 사상은 성서로부터 새로운 활기와 힘을 오히려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서구사에서 성서가 갖는 독특한 위치는 서구의 철학사에 한 내적 발전의 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 한 분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만물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한 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며 그 한 분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세계에 대한 서술은 현실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재발견하는 놀라운 동기와 역동성을 부여해 주었으며 많은 사상가들에게 오히려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준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구분은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질서에 대한 사유의 언어로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하도록 하는 강력한 도구이며, 종말론의 주제인 천국과 지옥은 여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나타난 계시의 현실에 대한 은유적 언어로서 이원론을 배격하기 위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은 오히려 이원론적 구분이며 어떤 명분에서도 이원론적 태도와 가정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찾는 것이며 그분 때문에 우리의 삶의 의미가 주어져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서의 내용이 서구(서구라 함은 고대 교회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스콜라 시대에서 왕성하게 형성된 유럽의 사유임)의 철학적 정신에 활력소로서 초월의 현실을 묻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발전의 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관계가 동양적 사상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즉 살아 있는 신앙은 동양의 철학을, 노자의 사상을 인도하는 선도자가 될 것입니다: 즉, 노자의 본원적 사유의 지평을 오히려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살아나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자는 성서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언의 섬김이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김용옥 씨의 강의에서 우리 기독교회가 반드시 짚고넘어가야 할 숨겨진 또 하나의 전제는 바로 진리의 성격, 그 자체와 연관이 있습니다. 노자에 따르면 인간이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이 양자가 모두 다 사실은 ‘도’라는 근본적 실체의 다른 두 모습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진리의 본질은 도이며 이 도는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서 이 도라는 진리로부터 만상의 진리와 인식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김용옥 씨는 인간 삶에 궁극적인 것은 인간의 언어로서는 표현될 수 없으며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드러낸 노자의 사상이 가장 심오한 사상이며 ‘虛, 無意’ 등 부정적인 방식으로 진리에 대한 가장 심오한 통찰이 담고 있는 노자사상이 인류의 스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넘어가야 할 한계가 있습니다. 노자 사상이란 결국 이 세계의 문명의 한 축이었던 동양이라는 정신세계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道 可道 非常道, 名 可名 非常名’이라는 첫 장에서 이미 드러난 것처럼 그의 철학적 전통은 노자가 살았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주장하던 그 주장에 대한 비판이며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입니다.

노자 철학은 철저하게 그와 더불어 진리 주장을 하며 논쟁을 벌이던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일 때 그 의미가 분명하여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가 말하고 있는 독자는 사실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그 대중을 지도하고 있는 엘리트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의 문명사에 대하여 부정적 방식으로 이루어진 노자의 비판적 태도는 김용옥 씨가 스스로 지난 1999년 12월 14일자 방송에서 말한 것처럼 오히려 동양적 사상들과 정신성이 서양의 정신성과 투철함을 찾아가지 못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고 보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서구의 고대시대인 중간 플라톤주의에서 시작되어 서구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부정 신학적 전통을 공부한 분이라면 노자의 이러한 문명 비판적 태도에서 진리에 대한 동서양의 근본적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나아가 이 부정 신학적 전통이 서구의 사상사에서는 유비론 안으로 확대 포섭 발전되면서 서구의 사상사는 우주와 세계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그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서 오히려 더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을 오히려 노자가 배워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서구정신을 배태하고 거기에 언제나 새로운 충동으로서 마르지 않는 샘물의 역할을 다한 기독교적 사유의 계시성은 노자사상의 진리관을 포섭하면서 오히려 바르게 지도하고도 남음이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