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의 다원성과 신학의 미래

황덕형

서울신대 성결신학 정립을 위한 연구위원회, 10월 2일, 서울신대 성봉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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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성결 신학의 정립을 위한 해석학적 전제와 일반적 요구

 

I-1. 논고의 과제와 목표

본 논문은 지난 최근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신학형성을 위한 노력을 재평가하고 그 가운데서 성결교 신학의 성립에 공헌한 것 같았던 여러 요소들을 가능하다면 다시 창조적으로 재생산하여 앞날을 위한 지표로 삼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 말은 본 논문의 성격이 두 가지 성격을 함께 띄고 있음을 암시한다. 먼저 본 논문은 그 자체의 과제를 살펴볼 때 철저한 역사 연구이어야 함을 강요받고 있다. 이미 발표되었던 논문들을 뒤따라 사유함으로써 그것들의 의미를 새롭게 되짚어보는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다양한 저자들의 텍스트를 뒤따라가며 생각하고 이해하는 역사적 작업은 꼭 필요한 것이며, 작업 그 자체로서도 흥미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번째 이러한 노력은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과제 앞에 서 있게 한다. 이미 발표된 저자들의 한 주제에 대한 생각을 검토하다가, 우리는 이 다양한 논문들과 저자들의 생각이 만나는 전체적 의미를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또한 철저하게 해석학적이어야 한다. 의미의 전체성과 그 단독적 저자들의 주제에 대한 이해는 자연히 우리로 하여금 아직 그 해당 저자에게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차원의 성결의 숨겨진 의미를 생각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해석의 과정에서 말하자면, 저자가 지향한다고 생각되는 그 의미들을 성결을 주제로 하여 쓰고 있는 다른 저자들의 의미 세계와 연관시킴으로써, 우리는 하나의 통일적 전망에서 각 저자들의 글을 다시 비판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미 하나의 의미의 연관성을 이루면서도 아직 그 저자들에게 차이와 구분 속에서 나타나도록 만들었던 그 관점들을 찾아서 미래를 위한 자산으로 삼는 것은 이런 비판적 작업의 가장 중요한 과제에 속할 것이다. 그 각각의 차이 속에서 모든 저자들이 결국 주관적인 확신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세계는 실제로는 이미 그 성결의 사태가 여타 다른 역사와 자신을 구분시키며 스스로 자신의 특성을 드러내는 자리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결의 통일적 지향성만이 아니라 그 성결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다의성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점에서 본 연구자는 이 연구가 일반적 역사 사료 연구의 일차적인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본래적 미래와 연관된 전체적 조망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I-2. 해석학적 준칙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비록 이 논문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더욱 철저하게 해석학적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결의 신학을 해석학적 과정으로 살피는 데 있어 그 중요한 과제들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첫째 우리의 과제가 가진 해석학적 성격은 바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작업의 기본 전제를 살펴봄으로써도 알 수 있다: 성결 신학이 온전하게 그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그 사태인 성결 자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어떤 부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부름의 성격과 그 부름의 목적을 살펴보는 것은 성결 이해의 전체성을 위한 중요한 첫 실마리를 제공한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떻게 이 성결이란 개념에 이르게 되었는가? 즉 우리가 자유롭게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믿음의 현실에 서게 될 때, 자연스럽게 이 개념 앞에 이르게 되었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 개념을 어떤 의도된 상황 속에서 작위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이 과제를 생각하게 되는 우리의 이 사유가 갖는 그 부름은 근원적으로 어디에서 왔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실증적 실체로서 어떤 물리적 힘과 교단적 혹은 공동체적 단위의 주장이 거기 개입되어 있다면, 이 개입은 사실 모든 논의를 잘못으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단지 그 실증적 실체로서의 성결의 이념을 규명하고 유포시키기 위해 여기 있다면, 여기에 더하여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은 채 성결의 이념을 보편화하기 위해 여기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무리일 것이다. 이 성결에의 부름은 자유롭고 근원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부름이어야 한다. 과연 그러한 성격이 온전하게 이전의 성결-신학의 수립을 위한 노력에서 제대로 드러나고 있는가?

둘째로 성결 신학의 수립이란 과제를 생각할 때, 성결 개념이 현실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의미의 총제적 구심점의 역할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누가 이런 저런 글을 남겼음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이미 성결 신학이 존재하는 일차적이며 실증적인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소박)한 생각이다. 신학에서 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 중의 하나로서 해당 개념이 갖고 있는 보편적 상징의 능력이다. 즉 해석의 대상으로서 드러난 그 해당 개념들이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 의미를 담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그 언어와 변환(대치)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연 성결이라는 언어를 통하여 현대의 모든 정신들이 축약적으로 이해되고 있는가? 아니라면 적어도 모든 다른 개념들 내지 다른 정신들이 지향하는 그 궁극적 대상이 성결이라는 개념 하에서 표시되고 올바른 관계 하에서 이해되고 있는가? 현대에나 미래를 위한 우리의 작업은 이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전체성의 차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셋째로 성결 신학의 구체적인 전개 내지 그 발전을 위한 모색에서 성결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여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지금 상정하고 있는 성결이 가진 의미의 궁극성은 언제 어떻게 무엇을 구체적 대상으로 하여서 사용되고 인용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이미 성결이란 개념이 기호에 불과하지 않고 어떤 해석되어야 할 대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묻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 성결에 대한 논의들이 역사상 다양한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터인데, 그 역사에서의 다양성이 의미하는 바를 염두에 둔 가운데 그 대상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성결 신학을 다루고 있는 다양한 저자들과 우리가 생각한 그 의미의 전체성과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저자들의 글을 통하여 드러난 것과 감추어져 남겨진 부분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는 해석학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서 언어화된 것이다. 각 해석자들이 이미 그 저자의 사회적 차원과 문화적 지평 속에서 자유와 진리를 위한 해방을 경험하고 개방적 태도에서 그 작업이 성취되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성결이해가 과연 온전한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역사 안에 진리로 오셨다는 것은 역사의 모든 오해의 과정을 통하여서 자신을 알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진리는 우리 가운데서 언제나 새롭게 표현되어야 할 상대성을 갖고 있지만, 그 상대성은 회의나 질문을 야기시켜 우리로 방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역사 안에서 체험되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전적인 신뢰를 더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탐구는 그 한 과정이다.

편의를 위해 위의 논의들에 대한 중간 결론을 내리자면, 우리의 작업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해석학적이라는 의미는 성결교회의 신학정립을 위하여 제시되었다고 상정되는 다양한 시도들을 신학적 작업이 근거해야 하는 최초의 계시적 사태를 배경으로 하여 이해해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각 신학자들의 성결 신학에 대한 탐구와 연구과정에서 그들이 성결 신학이 가져야 할 보편성을 어디에서 찾는가를 살피는 작업이 될 것이다. 단순히 성결에 대한 주의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가져야 할 신학적 발전과 계시적 사태에 대한 해명으로서 본연의 자리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새로운 어떠한 신학적 진로에도 적극적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결의 신학의 미래를 위해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분명한 목적과 내용은 계시적 사태의 원형적 사실 자체에 대한 이해에 근거를 두고 지금까지 주어졌던 각 시도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그들의 삶과 신학적 표현들은 미래의 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이정표들로 변환될 수 있을 것이다.

 

II. 성결 신학의 형성의 다양한 가능성들: 성결의 지평들

실제적으로 우리가 성결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 이미 있었던 구체적인 성과들을 돌이켜보면, 그들은 각기 다른 전제와 다른 관점에서 성결의 구체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한 가지 동일한 것은 그 저자들 대부분이 한결같이 성결의 지평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궁극적 언어에 속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점이다. 그 확신이 단지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II-1. 성서적 구원론 중심의 실존적 사건으로서의 성결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첫 번째 그룹은 "성결"에서 상정된 자신의 회심의 체험을 신학의 일차적인 대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성서에서 찾아야 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인류에 대한 메시지와 완전히 일치시키고자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추구하는 신학의 언어는 체험 위주의 개별적인 구체성을 띄게 되고, 그 안에서 의미의 전체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짐작하듯이, 주관적 체험으로 얻어진 특수한 경험을 신학의 척도로 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남에게 전파하기 위한 일반성을 그 안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 역시 지난(至難)한 작업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업은 자연히 신학의 제일차적 자료인 성서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자의적이 될 수 있었던 위험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이 그룹은 확고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의 신학적 여정의 독창성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성결이 역사상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 이 그룹에 속한 저자들의 글을 앞에서 논의한 바 있는 해석학적 통찰의 근본 요소들에 비쳐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몇 가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첫째로 이들에게는 성결의 체험이 곧 바로 하나님 체험이며 신앙의 중심적 사태이다. 성결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수여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라고 그들은 알고 있었다. 성결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교육을 통하여 성취할 수 있는 도덕적 변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성결의 체험은 하나님의 사역이 성결함이라는 인간의 내적 존재의 변화에 의하여 확증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소중한 신학적 자산이었던 것이다. 성결은 단순히 윤리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없는 궁극적 지평의 것이었고, 그러므로 그 경험들은 성결이란 단어를 보편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성결에의 부름과 초대가 소중한 것이며, 성결의 개념은 하나님의 행동을 보여주는 개념으로서 상징의 보편성을 충분히 드러내 주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시는 많은 일들이 있을 수 있는데, 유독 이 성결을 이토록 강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두 번째로 물론 웨슬리로부터 내려오는 오랜 전통의 근거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보다 그들 역시 이 성결의 지평을 개인적 구원의 완성의 차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결 이해를 위해서 역사적인 어떤 다른 고증의 자료를 가지고 그 내용을 서술해 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그 신학은 언제나 실천적인 요구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결이란 각 개체로서의 구체적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가졌던 실존적 변화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천적인 장에서 가장 중요한 은총으로 이해된 방식에 대한 탐구로 이해된 것이다. 죄와 죽음의 옛 시대와 새로운 시대, 육과 영의 전투 등으로 표현되는 묵시문학적인 시대상들이 개인의 신앙적 체험의 결과로 빚어진 그 자신의 변화 안에서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성결은 이 주관적이며 실존적인 개인의 완성으로서의 신앙의 틀 속에서 완성되고, 그 신앙은 거꾸로 성결이라는 개념 하에서 최후의 완성을 보았던 것이다. 잘 알려 진 대로 성결교회의 사부로서 통하는 이명직이나 김응조 양자는 자신들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그들이 가졌던 성결의 체험이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성결이라고 불리는 각별한 영적 체험을 통하여 자신들의 신학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하며, 그 성결-체험의 전파와 반복 생산을 신학의 목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많은 부분에서 그들의 성결에로의 부름은 언제나 실천적이며 체험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최초의 성결의 이해는 개인적 신앙의 완성으로 이해된 것이었다.

세 번째 그에 따라 그들의 성서해석방법은 매우 알레고리적이었다. 사실 그들의 공통적 자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성서였다. 어디에서나 그들은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삼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서를 신학의 온전한 본문으로 삼고, 그 성서 가운데서 찾아지는 구원론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결의 체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통괄하는 구원의 구체적 확증으로 인정되었고, 이렇게 이해된 성결은 그 성결-체험에 적합한 성서 해석방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영해라고 말한 그것에 의하여 신학적 사유는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대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로는 심리주의로 낙인찍힐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들의 성서론은 자주 성서의 본문의 텍스트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내적 체험과 더불어 구성된 어떤 주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후의 과제는 성서가 이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신앙의 사실로 새롭게 이해될 가능성을 갖는다고 할 때, 그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는 무엇이며, 과연 어떻게 이해의 전반에 걸친 규범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밝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네 번째로 이들에 따르면 성결이란 이 중심적 개념은 직접적인 만남을 매개하고 있다. 성결이라는 구체적 체험 속에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하여서도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영원과 지금의 접촉점이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지만, 그 반대로 언제나 모든 시대의 광범위하게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듯이, 성결의 체험론적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만이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전체로서 하나의 통일된 실제로서 직접적으로 만나고 있다. 비록 허무주의적 색채가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세계는 전체로서 그리고 직접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 하나님이 직접 지금 이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기에, 나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허상과 자만감은 세계의 실체가 드러남과 동시에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그룹에 의하면 비록 세계를 비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성격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성결의 체험은 전체로서의 세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궁극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의미와 성결의 의미를 발견한 것은 바로 이 세계의 참된 모습을 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결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죄의 성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고, 그들이 살핀 그 세상은 죄에 의하여 부패되어 있는 그 부패성 그 자체였고, 이제 이 성결을 통하여 새로운 환경으로 변화되어야 할 변화의 대상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첫 번째 그룹들의 신학의 특징은 성결의 신학이 나가야 할 특징에 대하여 고무적인 견해를 제시해 준다. 이 첫 번째 그룹의 고민과 신학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얻게 된 것은, 우리들이 더욱 이해하여야 할 구체적인 과제는 옛부터 있었던 성서 중심의 언어상황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첫 번째 그룹이 구원론과 실천적 해석학의 관점에서 성결의 체험을 신학화 할 때,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직접성에 의거한 그 언어계발에 떠밀려 있음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성결의 은총을 우리가 체험한 그대로 적시할 수 있는가가 바로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는 이 첫 번째 그룹이 성서주석을 통하여 그 작업을 해 나가고 있던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사실 성서를 통하여, 더 정확하게 말해서 성서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적합한 언어를 해명하는 해석학적 요구에 떠밀려 있었던 것이며, 오늘날에는 이것은 더욱 필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흥미 있게도 초대교회에서부터 성서 영감설의 형태로 이미 자신들의 언어를 통하여 정립하였던 그 성령중심적 신학의 사태는 오늘날 그 성서 주석적 언어들의 유비적 이해나 활용적 이해의 성령론적 지평에서 그 참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체험의 현상을 극복하고 보다 공동적이며 대화적인 체험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주관주의적으로 채색된 오류의 핵심을 교회적인 공동체의 언어로 환원시킬 수 있을 것이다.

II-2. 역사의 전망을 통한 새로운 성령신학의 가능성으로서의 성결

지금 이제 다루려고 하는 두 번째 성결신학의 정립을 위한 시도는 주로 성결교회의 역사적 기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앞에서 다루었던 첫 번째 시도들이 신앙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언어를 통하여 성결신학의 가능성을 논하고 있었다면, 지금 다루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들은 거꾸로 철저하게 신학화된 사유의 역사를 전제로 성결신학의 가능성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특별히 성결의 역사적 의의와 그 시초를 분석하고 우리 성결교회가 가진 신앙적 원형을 찾는 작업을 통하여 그 원형에서 제시되었던 본래적 역동성을 다시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있는 것은 거의 모든 우리 성결교회의 신학자들이 이 역사적 논의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전거 안에서 성결 신학의 기준과 미래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전제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역사적 논의는 성결교회의 역사적 시초에 대한 세 가지 기본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다: 먼저 가장 오랜 이론으로서 성결교회는 웨슬리의 신학으로부터 연원되었으며, 성결의 신학은 다름 아니라 웨슬리의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인 증거로서 비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헌법에도 "만국 성결운동"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이 19세기 성결운동의 실제적인 정신적 아버지는 웨슬리라는 것에 이의가 있을 수 없으며, 두 번째로 비록 사중복음 혹은 사대복음 안에서 성결이 무엇이냐를 설명할 때, 그 성결에 대하여 갖고 있는 주요한 생각은 철저하게 웨슬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의에 의하면 성결신학은 반드시 웨슬리안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천명한다. 두 번째로 성결교회가 비록 외국의 선교사들로부터 도움을 입고 있었지만, 자생적 교단임을 강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웨슬리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신학적 입장에 대하여서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결교회의 사실상의 모체는 19세기말 미국의 성결운동으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도 비록 성결교회의 성결 이해는 근원적으로 웨슬리에게서 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웨슬리의 신앙부흥운동이 아닌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이 다양한 역사적 근원에 대한 주장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이며, 여기에서 어떻게 성결신학의 미래의 지침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인가? 위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성찰은 표면적 이유에서 보면 지나간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반성이지만, 실제로는 지금 현재 성결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걸어야 할 방향에 대한 강력한 암시들이다. 그것은 성결의 이념이 가지고 있는 그 신학적 의의를 철저하게 과거의 역사적 모습들에서 추구하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성결신학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그 개념의 가능성을 제한하거나 개발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지금 여기서 논의되는 것은 성결이란 개념의 역사적 해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 방식에 대한 차이를 찾고 있는 것이다.

먼저 성결교회의 신학의 배경을 웨슬리에게서 찾는 주장에 따르면 성결의 도리는 두 가지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 철저한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거룩한 사랑은 단순히 넘치는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호응을 요청하는 인격적이며 대화적 관계의 은총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총은 단지 자신의 은혜를 전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에게서 책임과 의무를 불러일으켜, 그 인간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접목한 성결 신학은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불안한 미래(죄의 깊이와 천박한 낙관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속의 은총을 강조할 수 있다는 웨슬리의 신학의 특성을 자기화할 수 있으며, 이는 신학적으로 전통적인 구원론을 웨슬리의 특성 하에서 전개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세련되게 존재하고 있는 웨슬리 신학의 구조 가운데서 우리의 경험들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며, 웨슬리가 체험하였던 성결에로의 부름이 여타 다른 모든 이들의 성결 체험을 위한 표준적 해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성결교단이 자생적인 교단이었음을 강조하는 주장에 의하면 성결 신학이 가져야 하는 근원적 체험은 신앙 안에서 갖게 되는 성결이란 특수한 체험에 국한될 수 없다. 사실 자생을 강조하는 입장에 선다면, 그 성결 신학이 가진 참된 사명은 성결의 체험 여부를 떠나 그 이전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의 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 성결교회가 동양선교회의 도움으로 성장한 것과 그 미국의 동양선교회가 미국의 성결운동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역사적 방식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증과 상충되지 않는다. 더욱이 일제 말 성결교회가 강제 해산된 것은 실로 뼈아픈 고통이었지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창조의 부활 곧 자생적 독립교파교단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수립을 위한" 꼭 필요한 고난의 시기였던 것이다. 우리 교단의 자생적 근원을 강조하는 이러한 주장은 실로 한국의 역사 전체의 의미를 고난의 역사로서 밝혔던 함석헌 옹의 "성서로 본 조선 역사"의 역사인식과 다르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단지 한 분은 한국의 역사를 살폈던 것이고, 다른 한 분은 우리 교단을 통하여 섭리하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된 것이다. 신학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웨슬리와 연관이 있는 교단이 된 것은 우리의 과거의 뿌리이며, 우리의 현재의 정체성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더 포괄적인 입장에서 인식되어야 할 것이라는 암시가 거기 있다. 즉 성결이 우리 교파의 특징이라면, 이 성결은 단순히 우리의 당파적 이해가 아니라 보다 포괄적이며 우주적인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온 현재의 교파와 교단의 한계만이 아니라 역사 안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초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 교단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탐구하여 성결 신학의 기초로 삼는 그 마지막 입장은 성결교회와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성결의 체험은 단지 웨슬리가 가졌던 신학적인 이론과 그 범위에서 멈추지 않고 사실은 더 역동적인 세계사 속에서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즉 이 성결의 운동은 한 시대 한 사람의 영웅적 신앙의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이며 보다 대중적인 광범위한 신앙운동의 한 과정인 것이다. 즉 이 주장에 의하면 우리의 성결의 체험은 구원과 깊은 연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신학이 가진 구원론적 도식에 의하여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오순절 계통의 성령신학의 관점을 통하여 더 잘 이해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견해도 성결의 체험을 웨슬리와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운동을 성결의 해명이라는 관점에서 찾는다면, 웨슬리와 19세기 성결 운동의 차이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사실 19세기의 성결 운동은 웨슬리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성결 논쟁에 뛰어 들었던 것인 만큼 유사한 점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더욱이 웨슬리와 달리 이 성결의 운동에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고 하지만, 원죄의 부패성을 제거하는 것과 성결의 구체적 체험을 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내면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그것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 등은 모두 다 웨슬리에게서 찾아 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별히 이 성결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다시 강조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웨슬리의 신학이 전통신학의 틀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다시 살아있는 신학으로 만들어가는 이론-실천의 겸비의 모습을 갖춘 과거 지향적 성령운동이라면, 박명수 교수가 말하고 싶은 역사 안에 있는 성령의 운동은 아직 그 정형이 갖추어지지 않은 미래를 향한 운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역사 안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운동으로서 성령의 운동을 말하면서 또 다시 그것의 한 역사적 현상만을 통해서 원형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웨슬리 신학을 대치할 만큼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이 신학적 새로움은 그것이 아직 일어나고 있는 운동의 한 과정이라는 자각 의식 속에 있다. 그렇다면 성결이라는 그 개념을 통하여 이 새로운 제3의 주장이 찾고 있는 것은 일종의 "성령신학의 추구"이다. 성결운동이 순복음의 형태로 남아 있으려는 것을 모범으로 하여, 우리 성결 신학의 미래를 추구하려는 것은 복음적 성령중심의 신학적 확립을 바라는 것이다.

역사연구와 연관된 성결신학의 가능성은 성결의 현상이 주관적인 심령의 세계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상 하나님의 객관적 사역에 의거한 것임을 다시 보여주었다. 성결이란 주제는 의미의 전체성을 포괄할 수 있는 해석의 한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상이한 해석에 그 미래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령의 사역을 인간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를 시도할 것인지, 아니면 보다 보편적인 세계사를 통해 선교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찾을 것인지, 아니면 역사 전체를 새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장으로 볼 것인지 문제이다.

II-3. 현실과 미래의 사회 변혁의 구성적 능력으로서의 성결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위 제3세대 신학자들의 성결의 이해는 보다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보편성의 세계의 언어로 나타난다. 이 그룹 내에서의 편차는 무시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은 성결이란 개념이 보다 반성(反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 이들은 성결이란 개념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역 전반을 이해하고 싶어하고, 또 그것이 우리의 세계이해에 적극적으로 공헌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 그룹에서의 또 하나의 특성은 성결이라는 개념을 신학화하는 데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성결을 우리의 신앙의 전통의 귀한 자산으로 여기지만, 동시에 다른 전통과 대화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이 가진 다양한 의미의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그 성결이 가진 차원을 재해석하려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이 그룹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미래성을 가장 중요한 사고의 범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 지향적 사고보다는 될 수 있으면 미래지향적 의미창출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이 그룹 중에서 성결의 정체성을 교단의 신학적 전통과 연관시켜 이해함으로써 교단신학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시도가 있다. 웨슬리는 신학적 교부이고 그 웨슬리 신학이 사실은 전체 신학의 중심적 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은 이 신학적 고찰을 따라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의 전통을 지킨다는,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계발하고 더 발전시킨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한영태 교수는 웨슬리 신학의 전통 위에서 자신의 교의학을 내놓았다. 하나는 삼위일체론을 성결론과 연관시켜 이해한 것이고, 다른 한 권의 저서는 웨슬리의 이름으로 교의학을 내놓았으나, 이는 이전의 다른 성결교회의 교의학과 분명하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성결을 19세기 이후 전통적인 웨슬리안 성결론자들이 성결을 주로 성령론적으로만 해석하여 웨슬리의 신학을 경험론적 신학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하고, 그 오류에서 벗어나 웨슬리의 신학의 뿌리가 전통적인 신학의 깊이에 연원되어 있음을 다시 확인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결을 모든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있는 보편적 은총의 차원으로 다시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자가 웨슬리를 세계사적 공간에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한국의 성결교회의 신학이 보편화되는 그런 효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전성용 교수는 이 성결론을 바르트의 신학과 접목시켜서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신학적 의미를 획득하고자 한다.

이 그룹에서는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결이라는 그 하나님의 은총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웨슬리적 전통의 신앙의 가치를 재확인하면서도, 그것이 보편적인 지평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성결이라는 이 개념 안에는 인간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미래가 포함되어 있으며 아직 기대해야 할, 그리고 우리 자신이 함께 살아야 할 세계의 미래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과 그 신앙의 양태 안에는 이미 밝혀졌지만,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의미의 나머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행동 안에 남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결이란 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원초적 경험과 의미에 충실하지만 굳이 웨슬리라는 신학적 전통 한 가지만이 우리의 해석의 주제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럴 때, 웨슬리의 성결의 경험은 고귀한 공동의 체험으로서 전승되어야 할 내용이지만, 그것은 다른 우리의 경험들 가운데 하나로서 상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성취되어야 할 성결의 신학은 과거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경험들에 대한 비평적 분석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를테면 목창균 교수는 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적 유산으로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성서중심주의, 비교파주의, 선교지상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험적 복음주의이다. 그리고 이 유산을 이어받아서 수행하여야 할 중요한 과제로서 그는 먼저 실용적 학풍을 지킬 것과 웨슬리 정신을 이어 받을 것, 마지막으로 성결교회의 신학을 정립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웨슬리 정신을 지킬 것과 성결교회의 신학을 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따로 구분하여 논함으로써, 그 신학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전제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 성결교회의 특유한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신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상정한 것이다: 성결 신학은 우리의 것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성결의 정신을 오늘날의 시대에 맞추어서 재진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를 위해서 대화의 상대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 때로는 여느 현대신학자와 함께 의논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진리의 본질에 관한 한 타협과 굴종의 여지가 없지만, 부수적인 것과 제2차적인 것에 대하여서는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해 주는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보유할 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결이라는 그 의미의 총체성은 모든 사람들 사이의 상호 간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관용과 사랑의 정신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결신학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상호이해의 폭을 넓힌 하나님의 나눔의 신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그룹은 이 성결의 정통과 그 역사적 전승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은 될 수 있으면 자제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과제들을 오히려 성결 신학의 발전으로 재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성결이란 용어가 신학화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그것이 그 자신의 의미를 충족시켰던 어떤 시대가 있었다는 말이고, 이제 새로운 역사적 경험과 함께 그 언어는 새로운 언어로 대치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정신사에서 존재의 의미가 변화하면서 새롭게 쓰이는 것처럼 성결이란 언어도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 상호 간에는 여전히 차이가 여전히 존재할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지금까지 다루었던 그 어떤 그룹 사이의 차이보다도 오히려 더 깊은 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결신학의 정립과 연관해서 갖는 형식적 공통성은 같은 역사적 근원으로부터 와서 성결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바로 그 역사적 사실에 있다. 이를테면 이신건 박사의 성결이해는 과거의 전통에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함께 자라는 그런 온전한 신학에 대한 꿈이었고, 최인식 교수에게는 성결은 자신의 문화신학을 전개해가는 원형적 신앙사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황돈형 박사에게는 성결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예표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런 차이 속에서 그들은 각각 그들 자신이 그리고 있는 신학적 미래와 목표를 이 성결이라는 개념과 완곡하게 일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결이라는 특정한 신앙적 체험의 형태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는 위대한 공동체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성결이란 이 기존의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변화시키는 그 변화의 계기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옛 것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변화되는 그 변혁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싹트고 성결의 체험이 새롭게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위대한 창조의 경험은 바로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가꾸어 놓은 성결의 차원과 일치될 수 있을 것이다.

 

III. 성결의 다중적 의미와 미래적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성결의 다중적 차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다중성은 인간이 갖고 있던 시대의 경험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시대나 한 세대의 각 저자들에게 성결은 무한한 의미의 보고가 될 수 있었고, 또 그 하나님의 나라가 가져온 이 땅의 비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험과 그 체험 안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결의 신학을 세우고자 하는 우리의 과제는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내적 충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언제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다양하게 그릴 수 있었고, 그렇게 하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성결을 통해 얻어진 하나님 이해는 실존적이며 개인적인 체험으로 나타날 자유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자유로운 자기 드러냄의 차원들 속에서 이해될 수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 사고의 모형 변화의 역사과정 속에서 그 변화와 개혁의 계기로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변혁과 변화의 가능성에 바로 성결의 미래가 달려있으며, 성결교회의 미래가 놓여있다. 하나님이 이 미래의 주인이 되시는 한, 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한, 신학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총의 학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꿈꾸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