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복제와 하나님의 형상

   <활천 2003년 2월호>

 

우리들은 누구일까? 우리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살아야 하고, 무엇 때문에 우리의 삶은 정당한 것이고, 혹시 그렇게 해도 된다면 우리는 오래 살고 싶은 그런 희망을 가져도 될 것인가?

누가 보아도 이 질문은 우리 현대인들의 근본적인 물음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한 영화에서는 이 질문들을 우리와 닮았지만 우리와 다른(?) 존재들, 우리 인간에 의하여 피조된 인간들이 제기한다. 리들리 스코트가 감독하고 해리슨 포드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인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형식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피조된 인간(?)들이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그 영화의 주제는 자신의 존재의 본분과 한계를 망각한 미래의 인간들이 저질러 놓을지도 모를 무책임한 행위에 대한 경종이었다.

주인공인 해리슨 포드도 정상적인 인간 속에서 숨어살고 있는 그 이상한 피조적 존재들을 찾아내어 처리하는(?) 직업을 가진 그런 냉정한 사람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 그도 인간들의 교만과 욕심이 낳은 사회의 한 피해자인 것이다. 다른 피조된 인간들에게는 살인 집행자처럼 여겨졌던 그가 피조된 인간들이 갖고 있는 생의 의욕과 삶에 대한 질문과 회한을 만나면서 그 피조된 인간들의 질문이 바로 인간인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그는 그 사회로부터 벗어나 한계를 받아들인 겸손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는 인간의 삶이 시작과 끝이 있는 하나의 여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비록 성서적 통찰이 명시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오늘 우리가 성서와 함께 말하고자 하는 진리의 한 단편이 녹아 있다: 인간이란 어떤 한계 안에 있는 존재임을 우리 모두가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메시지가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라엘리안 운동이란 이상한 사이비단체의 한 교단 설립자가 세운 클로나이드 사의 인간복제주장이 정초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면서 특별히 종교계와 윤리학계에 큰 파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확인되지 않은 주장에 의하면 이브라는 이름을 가진 여 신생아가 어머니의 체세포로부터 이식, 개체 복제되어 탄생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앞으로 몇 명의 어린이들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탄생할 것이며 그 중의 한 아이는 우리 나라의 여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보도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영생의 교리나 인간의 기원 등과 같은 허무맹랑하고 난잡한 교리에 대하여서는 일말의 고려의 가치도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욱이 인간복제의 최후 목표가 현존하는 인간들의 영생을 위한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그들이 얼마나 파렴치하며 비윤리적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가의 여부를 일단 뒤로 묻어두고 그들의 발표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정작 그들의 주장이 배경으로 서 있는 인간 복제의 현실적 가능성 때문이다. 1997년 스코틀랜드의 과학자 윌무트(Wilmut)가 양 둘리를 체세포복제를 통하여 성공적으로 분만한 후 세계는 복제기술의 의미를 새롭게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이번에는 1998년 경희대학교 불임클리닉이 인간의 세포 핵 이식기술을 사용하여 기증 받은 난자의 수정에 성공하여 그 배아를 무려 4세포기까지 배양하였다는 보고를 했고 그것은 인간의 복제가 시간문제라는 강한 염려와 의구심을 갖게 해 주었던 것이다. 금세기 초부터 시작하여 2002년에 들어서면서 인간복제를 위한 준비 작업과 이미 있었던 여러 계획들과 시도들이 차례로 보도되면서 인간복제의 현실이 이제 바로 문밖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던 차였던 것이다. 한 발 앞서 이제 클로나이드사가 터뜨린 인간복제 성공의 주장은 비록 사기일지 모르지만 잠재되었던 우리들의 문제의식을 활성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복제는 무엇이고 그것을 사람들은 왜 문제시하고 있는가? 이 인간복제에서 문제시된 것은 무엇인가? 복제(Cloning)란 다른 한 개체 동물 혹은 식물과 유전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구성을 가진 개체들을 재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한 개인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또 다른 인간을 만드는 것을 인간복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인공적으로 일란성 쌍둥이들을 연구실에서 재생산하는 것이다. 단지 이 과정에서 정상적인 과정에서는 부모가 맡을 성(性)의 역할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도외시한다면 이 재생산의 과정은 자연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즉, 자연이야말로 사실은 복제의 주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인간들이 자연 안에 축적되었던 개체들의 재생산의 복제의 비밀을 알아내고 실험실에서 인공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시행하려는 것이다.


현재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인간복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다루어야 한다. 먼저 개체복제이고 두 번째가 배아복제이다. 개체복제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 인간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다른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면 배아복제란 그 목적이 개체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분화되기 전 배아 기간 세포(embryonic stem cell)를 얻거나 혹은 그 과정을 연구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카톨릭교회에서는 배아 복제이건 개체 복제이건 간에 모든 인간의 태아를 복제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는 반면 개신교회는 개체복제에 대하여서는 카톨릭과 동일한 입장이지만 배아복제에 대하여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배아복제를 통하여 인간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개신교회의 신학자 중에도 알트너(Guenter Altner) 같은 이는 복제기술이 내포하고 있는 인간성의 훼손의 가능성에 반대하여 모든 복제에 대한 반대를 천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교회의 사명은 인간성의 존엄은 어떤 실용적인 이유에서도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태도는 어떤 단계의 인간의 수정란을 이미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수정된 태아를 보호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한편 이외에도 많은 과학자들과 세속적 윤리학자들은 아직 인간복제기술이 온전하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그것들을 충분하게 해명하지 못한 가운데 인간복제를 시도한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라는 점에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직도 과학자들은 둘리가 복제되면서 보여준 현상과 다른 쥐들의 복제에서 보여준 현상의 불일치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둘리는 6년 된 양을 모체로 하여 복사되었기에 수정하여 태어나면서 둘리의 세포들은 이미 6년 된 세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던 반면 쥐의 복제에서는 그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전반적으로 동물복제를 통하여 알려진바 대로 복제의 성공률과 개체의 출산에 이르는 성공률은 최고의 가능성으로 생각해도 1% 미만인 현실인 것이다. 이것은 아직 복제기술이 위험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이다.


이와 같은 기술적인 이유에서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이 인간복제의 기술이 현재 인간의 개체복제를 목적으로 시도된다면 그것은 결국은 무고한 많은 예비-인간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이는 인간성을 훼손시킬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다. 혹시 이 기술적 문제들이 가까운 미래에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윤리적 질문들이 제기된다. 복제된 인간은 어떤 자아상을 가지게 될 것인가? 그가 자신을 충분히 한 독립된 자아로서 이해할 수 있을까? 바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물론 인간복제와 연관해서 제기될 인간의 정체성의 위기에 대한 질문은 거꾸로 그 복제가 일어난 시점과 전개과정의 이해를 통하여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즉 일단의 복제 찬성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복제를 통하여 완전히 동일한 유전적 복제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커다란 간격을 가진 일란성 쌍둥이를 얻는 것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복제된 아이가 성장하면서 환경과 만나면서 새로운 인격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런 답변은 이 인간성의 문제를 품을 수 있으며 그 복제된 개인에서 해석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전형과 일치가 주어져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는 복제가 현실화되면서 기존의 사회 자체가 혼란에 빠질 공산이 더 크다. 이 새로운 기술은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부정하게 만들 수 있게 되며 더 극단적인 사회의 행태를 재촉할 수 도 있게 될 것이다. 즉 복제된 아이는 이미 어떤 특정한 목적에서 어떤 다른 사람을 모범으로 복제되었으므로 그 아이의 독자적 가치가 다른 사람과 유사성의 정도로 대치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상존한다. 더 나아가 만일 인간의 개체복제가 실험실에서 성공적으로 실행되었다면 이 개체복제의 사실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한 개체 인간을 복제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벗어나 어떤 특정한 목적을 지닌 인간을 맞춤형으로 만들거나(이를테면 히틀러의 등장) 아니면 ‘대량생산’(?) 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문제의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별들의 전쟁 에피소드 II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복제된 인간들이 거대한 노예-군대를 형성하게 되는 그런 가능성들이 상존하며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극단적으로 파괴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특별한 종교적인 배경과 기술적 난점을 고려하지 않고 윤리적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인간복제의 사태를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기존의 사회적 통념과 체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가 현실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불편이나 거부감을 넘어서서 한 사회의 체제 전부가 담아내기 어려운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질서와 사회질서의 난점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체계가 작동할 수 있는가 하는 생존기반의 문제를 의미한다. 당장 눈앞의 과제를 일견해 봐도 재산권의 문제와 친족 범위의 문제가 풀기 어려운 난점으로 등장하게 될 전망이다. 복제된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구인가? 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혈연과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문명전체를 한꺼번에 위기에 던져 넣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인간복제의 현실적 가능성은 우리에게 난해한 질문을 던져놓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예상하였던 급격하고 심각한 새로운 문제들은 의료기술과 유전자 공학의 획기적 진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사회공통의 과제가 되어 버렸다고 인정해야 한다. 즉 우리는 인간복제를 실제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까지 낙태와 연관된 일련의 토의과정에서 이 일을 해왔다. 수정된 배아(embryo)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지키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발전된 과학기술의 지식과 언어를 통하여 새롭게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갔으며 그를 통하여 인간이 누구인가를 결정해 온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 스스로 인간의 한계를 정하고 인간이 누구인가를 규정한 역설적인 예들이다.

우리는 인간복제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교만한 인간들이 그 일을 자행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이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가치를 그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사실에서 찾는다. 모든 인간은 그의 독특한 개성과 가치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그가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바로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사랑과 관심을 통하여 존재하게 될 때 그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참된 인간이라면 우리는 이 태아가 인간의 조작이나 다른 목적에 노출되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할 것이며 혹은 개성의 희생을 강요받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그를 지켜 주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그를 하나님에게 인도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책임적 사랑 안에서 태아는 참된 인간으로 다시 성장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