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살리기"를 시작하면서


요즘 시중에 “공자가 죽어야...” “대학이 죽어야...” 등의 제목이 붙은 책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붙이면서도 언뜻 제목 자체가 수고하는 설교자들을 모욕하는 말로 오해될 수 있을 것 같아 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표현을 쓴 것은 설교의 차원을 한 차원 올려 보자는 견마지로(犬馬之勞)의 심정입니다.

지금까지 설교가 한국 교회 부흥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면, 같은 의미에서 교회의 정체가 공공연히 이야기되는 현 상황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지금 새 천년이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예상되고 사람들의 변화 역시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우리의 설교 역시 이런 변화에 대해 민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필자는 이런 인식 위에서 설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 설교의 내용, 형식 그리고 전달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 글을 전개해 갈 것입니다


설교가 뭐지요?

포사이드(P.T. Forsyth)라는 설교학자는 “기독교가 설교와 함께 일어서기도 쓰러지기도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 말은 기독교 본래의 정체성과 교회의 부흥이라는 양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대개 이 말을 설교가 가져오는 교회의 양적 부흥이라는 측면에 강조점을 두고 이해하곤 합니다. 또 ‘설교’ 하면 우선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기능적인 면과 효과적인 면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교회 성장과 설교의 관계를 테마로 논문을 쓰는 것은, 이런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누가 설교의 이런 차원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성장하는 교회를 가 보십시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힘있는 강단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회중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말씀 좋은 설교자’ ‘능력 있는 강단’을 선호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사람들을 모으고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기에 그래서 설교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벌써 설교는 사라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설교 말고 회중의 흥미를 자극하고 기호를 맞추어 더 많은 회중을 모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을 때 설교가 포기되고 바로 그 회중을 모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대치되어도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설교의 존재 이유가 회중을 모으는 기능 때문이라는 생각은 곤란합니다. 물론 그런 기능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회중을 모으는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는 것도 모든 설교자들이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책무입니다마는,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설교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면 왜 설교가 예배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인가 자연스럽게 밝혀집니다. 기독교적인 신관에서 보면 하나님은 다음의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되는 분입니다. 첫째,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이 찾아낼 수 없는 철저히 은폐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의 이해 저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을 파악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철저히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이해하는 인간이야 말로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되겠지요. 결국 인간으로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무엇인가 행동하셔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둘째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드러내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즉, 무한한 근원이면서 동시에 인간 세계 속에 유한한 형태로 자신을 알리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알림을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으로, 바르트의 표현처럼 ‘유한과 무한의 역설적 모순합일’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예수 안에서 공존한다는 ‘화해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친히 말을 걸어오셨고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말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입니다.

루터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편이요 안경”입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며,단 한 번으로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나아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 걸어 오심’인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은 이제 그 ‘말 걸어 오심’에 대해 대답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즉, 복음의 요청에 대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인간은 대답해야만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방법인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말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는 통로가 열렸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방법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합니다(요 1:1).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먼저 화해를 청하시고 말을 걸어오시는 분이라는 하나님 이해의 세번째 차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예수 사건으로 모든 것을 끝내고 침묵하고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배 중에는 설교 속에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을 설교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설교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거시는 ‘하나님의 말 걸음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옛날 영국의 이신론이 주장한 것처럼 창조는 하되 간섭하지 않는 그런 방관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성령을 통해 성경을 쓰신 분일 뿐 아니라(딤후 3:16)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당신의 뜻을 설교자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설교란, 말하자면 우리에게 말을 거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입니다. 칼 바르트가 말하는 것처럼 ‘설교는 행동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좀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 개신교가 이해하는 예배는 크게 두 가지 차원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봉사라는 차원입니다. 사실 한국적인 정서로 예배를 이해하면 영어의 ‘예배’(worship)에 가깝습니다. 즉, 인간이 지성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worth)을, 그것을 받으실 만한 신분(Ship)의 하나님께 드린다는 쪽에 가깝습니다마는 이렇게 되면 자칫 인간이 예배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고 나아가 예배가 ‘인간의 일’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로 대변되는 개신교의 예배 신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이 그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겁니다. 예배의 성립과 시작은 인간이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하나님 뜻의 통로인 설교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만찬을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하면서 전자는 후자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폅니다. 루터에 의하면 이 두 가지는 곧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봉사에 대해 인간은 찬양과 기도로 응답함으로써 하나님을 봉사한다는 것이 루터가 보는 예배의 또 다른 축입니다.

이리 보면 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인간적 작업이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설교는 이런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 걸음’입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가 다 사람들의 행동과 관계가 있고 또 하나님을 향하는 상향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설교만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말을 거시는 하향식 성격을 띱니다. 그러니 설교에 대한 이런 신학적 성격을 알고 나면 당신의 생각은 조금 바뀌게 될 겁니다. 아니 바뀌어야 합니다. 설교는 사람을 모으는 실용적 성격 이전의 문제입니다. 설교! 그것은 ‘우리를 향한 지금 여기서의 하나님의 말 걸음’입니다. 따라서 설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 때문에 설교는 항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의 정체성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그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이러한 신학적인 주장에만 안주한 채 설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래서 회중들 입에서 설교무용론이 나오게 된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원리를 내세우면서 원리의 힘에 의존해서 정작 자신이 해야 하는 설교자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설교의 신학에 충실하면 할수록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력 있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자신에게 맡겨진 전달의 책무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설교의 존재 이유는 신학적인 이해가 앞서지만 내용적으로는 전달의 책무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인지할 수 있다면 목청 높여 설교의 존재 이유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그 강도만큼 설교 전달의 책무 앞에 고개 숙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