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중의 필요를 채워주기

 

  설교자의 두 유형

설교자의 설교 스타일을 기준으로 설교자를 지칭하는 용어 가운데 전령(Herald)과 목양자(Pastor)가 있습니다. 전령으로서의 설교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포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들으라!’ 지금까지 설교자는 주로 이런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설교자의 권위와 메시지의 내용은 항상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경우 메시지의 내용도 당연히 하나님, 죄, 은혜, 사랑, 구원 등 교리적인 면에 집중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이에 반해 목양자로서의 설교자 이해는 그 초점이 메시지를 듣는 회중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즉 이런 설교자는 회중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전령으로서의 설교 스타일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 바르트나 투르나이젠을 중심한 변증법적 신학의 설교라면, 목양자로서의 설교자 이해는 오늘날 크게 각광받기 시작한 상담설교, 치유설교가 그 대표적 유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양자는 모두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혹은 설교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 가능한 개념들입니다.

 

회중의 필요를 인지하라!

문제는 오늘이라는 상황입니다. 문화낙관주의(Kulturoptismus)로 대변되는 오늘의 과학문명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의 탑을 드높이 쌓아 올렸고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도 될 정도의 과학적 성취를 이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신뢰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처절한 생존경쟁의 벼랑 위에 인간이 서 있고 인간 소외라는 칼날이 인간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대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오늘처럼 실감나는 때가 일찍이 없었고 이런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화되어 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누구에겐가 위로받고자 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현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설교가 교리설교 일방으로 흐르기보다는 회중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환원하면 청중지향적 설교가 요청되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설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지식에 못지 않게 그것을 듣는 회중의 삶과 그들의 요청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험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음과 같은 일곱 개의 각기 다른 범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의 이론은 설교자들이 회중을 이해하는 데 좋은 지침이 될 것입니다.

먼저 매슬로우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근본적인 필요를 생리적 욕구(음식, 산소, 물, 휴식, 섹스 등)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 욕구는 안정의 욕구(육신의 보금자리, 경제적 안정, 정서적 안정)이고, 세 번째가 사랑과 정, 소속감에 대한 욕구(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갖기)입니다. 네 번째 욕구는 존경의 필요, 다섯 번째는 자아실현에 관한 욕구로, 이것은 창조, 성숙한 관계, 심오한 종교적 표현, 그리고 성숙감에 대한 욕망 따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잠재력을 발달시키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욕구는 깨닫고 이해하려는 욕구입니다. 인생에 대한 갖가지 요인들을 깨닫고 이해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심미적 필요(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한 갈망)입니다.

매슬로우는 이런 욕구 가운데 인간이 어느 한 가지만을 갖는다든지 아니면 한 번에 한 가지씩만 작용하면 삶이 단순해지고 마음에 아무 갈등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진단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에서 인간들은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는 것이지요. 또 이 갈등을 해소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름대로의 질적인 세계를 머리 속에 만들어 보관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실세계와 일치되지 않음으로 인해 또 다른 갈등 속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오는, 이유가 불분명한 염려 그리고 인간 내면깊이 뿌리박고 있는 인생과 건강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대강 마음, 육체, 정서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둘러싸인 회중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복음으로 위로하며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의 문제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윌로크릭교회 담임목사인 빌 하이벨스는 사람들의 문제와 필요를 해결하는 데 목회의 중점을 둔 경우입니다. 그는 목회의 지도력을 경청이라고 주장하면서 설교자가 말하기 전에 여러 층의 다양한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회중의 문제를 파악하기

설교가 주일목회의 절정이라면 이것이 성공적이 되기 위해서는 주중목회가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회중을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적지 않은 문제입니다. 또한 회중의 파악이 무슨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 속에서 되어지는 것처럼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상황만 놓고 본다면 한 교회의 회중의 삶은 그리 큰 변동이 없이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설사 어느 가정에서 화재가 났다 하더라도 그 사건이 온 교회의 공통 관심이 될 수는 없고 또 설교에서 짧게 언급은 가능할지 몰라도 설교의 전체 주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시대정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좁은 의미에서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우들을 살펴야 합니다. 전통적인 방식이긴 합니다마는 심방을 통한 회중 상황의 파악 그리고 상담을 통한 회중 관찰이 그것입니다. 물론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심리 그리고 맞벌이하는 사회구조가 심방을 어렵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마는, 동시에 여전히 심방을 원하는 회중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회중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시간이 가면서 전통적인 심방보다는 목회상담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내담자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상담에서 회중 파악을 목적으로 설교자가 내담자를 선정하는 공격적인 상담으로 나가야 합니다.

김만풍 목사는 회중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주제의 선정이 중요하다고 보면서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첫째, 성경말씀이 해답을 제시하는 주제를 선정한다. 이 경우 설교를 듣는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에 근거하여 힘있게 주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둘째, 회중의 필요에 대해 객관성 있는 주제를 선정한다(하나님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말이다). 셋째,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주제(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를 선정한다. 넷째, 가장 준비를 잘 할 수 있는 주제(선택의 여유가 있는 주제)를 선택해야 한다. 다섯째 특정 개인에게 상처나 마음의 부담을 줄 가능성이 없는 주제를 선정한다. 여섯째 다양한 주제를 균형 있게 선정한다. 회중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다음 설교를 기다리게 해 준다. 일곱째 가능한 경우에는 연속적인 주제(사랑-인내-소망-용서-화목-축복 등)를 선정한다. 이 역시 회중으로 하여금 다음 편을 기대하게 하며 말씀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한다. 여덟째 다른 분야의 설교들과 조화를 이룬 주제를 선정한다. 성경 말씀을 골고루 섭취하도록 말이다.”

회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설교는 말하자면 치유적 의미와 상담적 의미가 고루 내포되어 있습니다. 물론 설교자가 설교 프로그램을 세워 다양한 교리도 취급해야 하지만 각박한 현대사회를 염두에 둘 때 회중을 감싸안는 설교 쪽에 그 비중이 놓여지는 게 바람직합니다.

이런 면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선정하는 것은 회중 지향적 설교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불의, 역경, 고통, 노여움, 타락, 의심, 질투, 실패, 두려움, 무익, 험담, 고독, 거짓말, 가난, 편견, 추정, 탐욕, 소심, 죽음, 우울증, 낙심, 자포자기, 절망, 불성실, 부정, 불순종, 이혼, 죄책감, 불리한 상황, 부도덕, 위선, 모순, 무관심, 배은망덕, 편협, 무책임, 교만, 모독, 원한, 이기심, 슬픔, 고난, 유혹, 시험 등.

또한 회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설교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설교 주제의 문제인 동시에 설교 스타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주제를 교리식으로 일방적으로 나열하게 되면 회중의 마음을 열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열어야 의지적인 결단도 가능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설교일수록 ‘사람 사는 이야기’가 많이 첨가되는 것이 좋습니다. 일방적인 관념적인 설명보다는 사실적이고 경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많이 다루고 그것들을 정언적인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목양자로서의 치유적 설교를 하려면 설교자에 대한 인상이 회중에게 전령이 아닌 목양자로서 각인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즉 목사님에 대한 신뢰, 내 문제를 안심하고 말할 수 있다는 안심과 포근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런 전제요인이 충족될 때에만 회중은 설교자의 메시지에 대해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목양적 설교자는 이미 단하에서 그 위상이 결정되며 전달의 성과 역시 판가름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양적 설교의 당위를 인정하고 그 시급함을 강력히 요청하면서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설교가 자칫 회중의 가려운 데만 긁어주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전하는데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복음의 공적 책임과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설교를 인간중심의 ‘정신건강’적 차원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목양적 설교를 자처하는 설교자들은 이런 위험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