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자를 깨우는 묘책?

  설교에서의 예화 사용법

 

 

설교에서 회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새로운 경청의 전환 기능으로 작용하는 것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예화이다. 물론 예화 없이도 논리적 긴장감과 논쟁적 전개로 설교의 탄력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를 작성한다는 것이 쉽지 않고 또 자칫 지나친 논쟁적 구조는 설교의 경색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경색을 피하면서 회중의 관심 이완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가 예화의 사용이다.


왜 예화가 필요한가?

바우만(J. Daniel Baumann)은 설교에서 예화가 필요한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논리적인 이유로 그날에 선포된 메시지를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둘째는 너무 딱딱한 설교 분위기가 계속될 때 그것을 좀더 부드럽고 쉽게 풀어주며 변화시키는 심리적인 이유에서, 그리고 셋째 더 큰 감동을 유발하기 위한 감정적인 이유에서 예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적인 설명 말고, 예화의 기능을 집과 창문에 비유한 스펄전 식으로 볼 때에도 창문 없이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만 되어 있는 방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반대로 사방이 온통 창문으로만 되어 있다 해도 안정감을 줄 수 없다. 설교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예화는 필요하다. 하지만 분수를 지키는 것이 삶의 공리인 것처럼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원리는 설교와 예화의 상관성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리이다.

예화에 대한 필요는 일찍이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마르틴 루터는 설교와 관계된 어떠한 특별한 이론을 남기진 않았지만 그러나 자신이 즐겨 사용했던 설교의 기법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자료를 남기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설교의 내용을 어떻게 전개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그는 중세 설교가 지나치게 수사학적 기법에 의존함으로 추론적인 작업이 가능했던 일부 지식층에만 부응하는, 소위 귀납적인 방식을 거부하면서 설교가 가급적 단순해야 함을 주장했다.

루터는 먼저 설교자가 말하려는 내용을 말한 뒤 그것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말하는 방식을 적극 권장했다. 그는 예화 중에서도 성경에 나오는 사건,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설교자 자신의 체험을 중요한 예화의 범위로 제시한다. 루터에게 예화라는 것은 설교의 내용을 쉽고 이해하기 용이하게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설교에서 예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그리고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예화란 말하자면 ‘진리를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끌어내린 것이 예화이다. 진리가 가장 잘 전달되는 것이 ‘경험적 차원으로 접맥될 때’임을 염두에 둔다면 설교에 사용되는 예화의 가치는 매우 크다. 또 적절한 예화의 사용은 흩어졌던 회중의 집중력을 다시 모으고 잠자는 회중까지도 깨울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좋은 예화란?

이처럼 예화의 사용이 설교 내용의 전달에 있어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면 어떤 예화가 좋은 예화이겠는가? 첫째, 예화는 설교의 주제를 살릴 수 있고 그 주제와 일치할 수 있어야 한다. 예화의 사용은 주제의 도입이 되었든 주제의 반증이 되었든 반드시 주제를 부각시키고 주제를 각인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예화는 회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같은 맥락에서 보편적이어야 한다. 너무 전문적인 용어와 상황이 동원되면 회중에게 전달될 수 없다.

셋째, 예화는 경험적인 맥락에서 회중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추상적이거나 회중의 삶과 상관없는 소재는 예화로서 적절치 않다. 넷째 같은 맥락에서 예화는 회화적이어야 한다. 회중이 들으면서 머리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예화, 함께 느낄 수 있는 예화가 바람직하다. 다섯째, 예화는 가급적 신선하고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회중이 이미 들어 알고 있는 것은 예화사용의 취지를 살릴 수 없다.

다섯째, 예화가 지향하는 것은 지적인 정보가 아니라 본문으로부터 나오는 메시지를 위한 길잡이 혹은 그 메시지에 대한 경험적 반추이다. 따라서 예화 자체가 어떤 정보를 주는데 치중하기보다는 정적인 터치에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려해야 할 사항

이런 기준에 맞는 좋은 예화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항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이론적으로 가장 좋은 예화는 성경 속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맞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조심할 게 있다. 한국교회 회중이 성경읽기에 특단의 열심을 가지고 있기에 성경 스토리의 단순한 전달은 자칫 예화의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인 신선함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 예화를 사용하려 한다면 표현기법을 달리한다든지 언어를 바꾸는 등의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2. 매일의 생활 속에서 숨어 있는 예화를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주의를 끌거나 감정을 동하게 하는 소재들은 좋은 예화가 될 수 있다.

3. 신문이나 TV 잡지 인터넷 등에는 시사성 있는 예화들이 무진장으로 깔려 있다. 비록 사건을 이루는 예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중요한 수치나 통계자료 등도 인용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님을 염두에 두라.

4.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나 교회의 역사를 참조하라.

5. 관찰된 것은 일단 적어 놓으라. 그리고 이렇게 모아진 자료들을 주제별로 정리하여 자기만의 예화집을 만들라.

예화가 이처럼 설교를 꾸미는 보석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화로 인한 폐해도 적지 않다. 너무 많은 예화로 인해 창문뿐인 집을 만드는 경우가 허다한가 하면 예화와 설교주제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이것들은 설교를 살리기보다는 설교를 죽일 수 있고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이 더 크다. 따라서 우리는 예화는 예화이어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정언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은 로이드 존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예화는 설교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예화 사용의 다양화

우리는 대개 예화를 설교를 여는 서론에 사용하거나 자신이 이야기하려는 내용의 증빙자료로 사용한다. 거의 대부분의 용례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예화는 훌륭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 용례를 다양화한다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우선 설교를 여는 서론에서 언급한 예화를 결론부분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방식이 있다. 이런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회중은 설교의 튼튼한 짜임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으며 설교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방식은 논증으로 사용했던 예화를 그 다음 논지를 염두에 두고 두 가지로 나누어 사용하는 방식을 들 수 있다. 가령 한 사건을 다룬 예화라면 그 사건의 절반까지를 첫 번째 논지의 예화로 사용하고 다음 논지를 언급한 뒤에 나머지 예화의 부분을 그 논지의 예화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 방식을 사용할 때에는 설교의 내용과 예화의 내용이 일치해야만 한다.

다음의 내용이 하나의 예시가 될 것이다:

(1)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은 다양한 필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필요들은 각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시급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밀려드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이적,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기대하기보다는 빵이라는 일용할 필요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진단은 우리 한국민에게도 유효합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이래 교회가 부흥했던 때를 가만히 살펴보면 교회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었을 때입니다. 즉 그들의 필요의 일단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때 교회가 부흥하더란 말이지요.

제가 고등부 학생일 때 저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 하나가 갑자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와는 담을 쌓은 것 같던 친구가 제 발로 나온지라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야, 어떻게 된 일이야? 네가 교회에 다 나오고...” 반가워 던지는 저의 말에 그 친구는 빙긋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그 친구가 평소 마음에 연모하는 여학생이 우리 학생회에 출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자기 필요를 교회에서 충족시킬 수 있다고 느끼니까 자발적으로 교회로 나오더란 말이지요. 필요가 있을 때 사람들은 교회를 찾고 주님을 찾습니다.

(2) 그런데 최근 들어 한국교회를 일컬어 성장이 멈추었다느니 침체일로를 걷는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교회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이 됩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요? 몇 주일이 지났는데 그 동안 꾸준히 잘 나오던 친구가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보이질 않는 겁니다. 마침 시내에서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니까 아무런 말도 안하고 겸연쩍게 웃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연모하는 여학생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가 거절당하고 상심해 있던 차에 다른 친구의 소개로 다른 여학생을 소개받아 -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여학생입니다마는 - 목하 열애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을 수밖에요. 자기 필요를 교회에서가 아니더라도 해결할 수 있으니 교회와 작별을 고할 수밖에요. 오늘 한국교회가 비어 가는 것은 바로 이렇게 교회가 아니더라도 자기들의 필요를 얼마든지 충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 한 원인입니다. 영원의 차원보다는 차안(此岸)의 필요에 더 민감한 그 반종교적 성향 말입니다...

 

예화와 유혹

설교자는 매우 유용하다 싶은 예화를 발견하게 되면 어떻하든 그것을 설교에 도입하려고 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예화를 먼저 생각하다보면 설교자는 아직 성경본문이 잡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할 메시지의 방향과 내용을, 예화를 중심으로 대략적으로 머리 속에 그리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본문을 정하고 연구하다 보면 많은 경우 예화와 본문 사이에 적지 않은 간격이 생긴다. 성경본문에서 찾아낸 메시지가 아닌 예화를 중심으로 구성하는 주객이 전도된 설교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설교를 아무런 생각 없이 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 우리의 설교는 위기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오류에 대한 칼 바르트의 권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본문을 주해함에 있어 현대인의 실상과 연계로서 나타나게 되는 사고의 연상을 토대로, 성경 본문 자체에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사고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이를 무조건적으로 설교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삶에서 유리(遊離)된 설교로 떨어지는 그런 실수를 피해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영적인 공백을 초래하고 본문을 황폐화시키는 더 심각하고 더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