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희망으로

- 희망을 전하는 설교!-  

 설교가 회중에게 푸른 희망으로 다가서려면
설교자는 문자적 의미의 또 다른 면까지 보아야 한다


 

"아빠 오늘도 혼났어?"
어느 주일 저녁 교회에서 돌아온 아빠를 보며 아들이 이런 말을 한다: “아빠, 아까 어른들 예배드릴 때 왜 목사님이 그렇게 화를 내세요? 아빠가 무슨 잘못한 거 있으세요? 아니 오늘뿐 아니라 매번 목사님 설교하시는 것 들으면 무슨 꾸중하시는 것 같아요...”

얼핏 들으면 어느 문제 있는 교회의 이야기처럼 들릴는지 모른다. 당연히 나 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날 수많은 강단에서 이렇게 ‘꾸짖는 설교’가 행해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예배를 끝내고 나오는 회중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다. 집에서 가장으로 남편으로 아빠로 존경받는 어른들이 이렇게 꾸중을 듣는 경우는 교회가 아니고서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편 생각하면 그런 설교를 듣고도 아무 대꾸도 않고 묵묵히 듣고 있는 그 '어른들'을 회중으로 가진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어찌 보면 무척 행복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적으로 따져보면 꾸중에서 자유로울 성인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하는 것부터 마음 쓰는 것 그리고 세상 사는 것까지 말씀에서 벗어난 것 투성이인 것이 오늘 현대인의 모습임을 부인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회중의 부족함이 꾸짖는 방식으로 고쳐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주먹으로 버릇을 고쳐놓는 것과 눈물로 호소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이겠는가?

직접적으로 회중을 꾸짖는 내용이 아닌 경우에도 설교가 꾸중시간 혹은 아주 무거움을 전달하는 시간이라는 인상을 주는 또 다른 요인은 설교의 내용전개가 너무 직설적 부정적 단정적 강제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환원하면 설교가 '하지 말라', '해야 하는 것이다', '진노의 하나님', '인과응보' 등으로 귀결되고 본문의 내용과 교훈을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옮기기에 급급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기에 가령 아나니아 삽비라 기사의 종국이 두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이고 보니 통상 그 본문의 설교 역시 ‘...하면 벌받습니다’ '벌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등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물론 성경이 전하는 교훈을 설교자가 곡해하거나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런 원칙에 대한 준수는 지혜가 밑받침될 때 빛을 발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진정 복음이 전하려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과 무능력 그리고 어두운 회색빛 암울함은 아니지 않는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죽음이라 할 때 설교자의 역할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면에 있는 생명을 엿보는 것이어야 한다. 학력에 상관없이 우리의 회중 대부분은 한 사안을 추론할 수 있을 만큼 지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설교자들은 본문으로 잡은 성경의 문자적 교훈 이면을 들춰 보여주어야 한다.

 

마틴 루터 킹에게 배우라!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그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왜 그리도 능력 있는 설교자였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63년 워싱턴에서 열린 인종차별철폐를 위한 집회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대회 성격상 우리 같으면 "이 땅에서 인종차별이라는 인간의 수치는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비인간적인 수치를 참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모두 백인의 인종차별 정책이 이 땅에서 영원히 종식될 수 있도록 우리 힘을 합칩시다"라는 식으로 문제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거론했을 것이다. 그러나 킹 목사는 그런 직접적인 방식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 날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지난날 노예의 아들들과 지난날 노예 소유자의 아들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마주 앉아 함께 식사할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불의와 압박의 찌는 듯한 더위에 시달리고 있는 사막 같은 주, 즉 미시시피 주조차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날 주지사의 입술이 현재 간섭과 연방법 실시거부의 발언으로 침방울을 튀기고 있는 앨라배마주가, 어린 흑인 소년 소녀들이 어린 백인 소년소녀들과 손을 맞잡을 수 있고, 형제자매로서 함께 걸어다닐 수 있는 상태로 변모하리라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직설적인 언급보다는 오히려 한 차원 돌아서 미래에 대한 꿈을 그려주는 방식을 취할 때 대회 성격상 폭도로 변할 수도 있었던 25만의 회중은 손에 손잡고 평화의 행진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는 전하려는 메시지의 양면성을 항상 생각하라는 것이다. 즉 '하지 말라'라는 말 이면을 보면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에 대해 '하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아나니아 삽비라가 성령을 속임으로 죽음을 당했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을 영광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본문 속에 숨어 있는 긍정적 포인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아나니아 삽비라는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가서는 안될 길을 갔지만 여러분에게는 또 다른 가능성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바로 여러분으로 인해 하나님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게 할 수 있는 가능성 말입니다!"


희망은 절망을 이긴다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메시지는 언제나 피동적이고 움츠러드는 소극적인 윤리를 창출해 낼 수밖에 없다. 그 설교는 회중을 움츠리게 하고 자기를 돌아보게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피동적이면서 반강제적인 자기성찰이다. 말하자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 좋으신 분이라기보다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생각하여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움직이기보다는 벌받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동기에서 움직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반대로 긍정적인 메시지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윤리를 가능하게 한다. 성경의 주인공들이 간 길이 비극적인 길이었다면 설교자는 그들이 택하지 않은 길, 가지 않은 길을 보여 주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격려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결과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는 한 학기 내내 꾸중하고 질책한 반면 다른 그룹에게는 칭찬과 격려로만 지도하였다. 그 결과는 불과 한학기만에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꾸중만 듣고 자란 아이들은 매사에 소극적이고 눈치만 보고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당연히 학습 진척도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반면 칭찬과 격려 속에 자란 아이들은 쾌활한 표정과 기탄 없는 의견발표 창의적 생각 그리고 괄목할 만한 성적 상승으로 나타났다. 희망을 보게 하고 비전을 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삶의 원리요 나아가 기독교의 복음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초점이다.

두 번째로 이 긍정적 포인트는 가급적 회화적으로 눈에 그릴 수 있는 장면으로 연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설교는 '듣는 설교'였지만 오늘의 설교는 '보는 설교' 쪽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 내용은 긍정적이면서 그것이 자연스레 장면으로 연결되도록 설교하도록 하라. 미래를 그리며 희망을 회화(繪畵)화할 수 있도록 푸른 빛으로 설교를 그려 주라. 꾸짖어야 할 순간에 꾸짖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는 것만으로도 당사자는 자기의 양심에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고 또 다른 분발을 다짐할 수 있지만 맞아야 할 사람을 때리게 되면 긍정적 결심보다는 부정적 반감을 갖는 것이 사람임을 명심하자! 설교는 더 이상 꾸중 듣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순간 회중은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며 그 희망과 너무도 거리가 먼 스스로에 대해 경성하는 채찍이 된다.

더욱이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설교가 설교자의 한풀이 장소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소위 '치는 설교'로 통칭되는 이런 유의 한풀이는 결코 회중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회중의 감정을 격동시켜 교회를 혼란으로 빠뜨릴 뿐이다. 흔히 듣는 이야기로 장로는 기도를 통해 목사를 공격하고 목사는 설교를 통해 반격할 기회로 삼는다는 것은 얼마나 한심하고 하나님 앞에 죄송스런 작태인가! 또 목사가 거룩한 복음의 공적인 사역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시적인 이야기나 개인의 신변잡기 내지 자랑 등으로 강단을 장식하는 것 역시 속히 멈추어야 할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런 맥락에서 할포드 루코크(Halford Luccock)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설교의 목적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설교의 합리성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비전을 보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설교의 종결이 적극적이요 진취적이며 긍정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을 생각해 보라!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그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며 모험적인 시도를 눈여겨 보라! 기독교의 복음이 바로 이렇게 무서우리만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이 있음을 알진대 우리 메시지가 그 반대 방향을 강조하고 들춰낼 수는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외침은 실상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른다. 그러나 죄인들에게는 그것처럼 무서운 소식이 없다. 설교자는 말하자면 천국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의 설교는 기다리는 천국이 아니라 마치 죄인이 두려워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이야기하는 쪽에 가깝다. 이것이 어찌 복음일 수 있는가!

희망을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미래와 비전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다른 복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설교단이 목사가 교인을 치고 꾸짖는 장소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물론 설교는 권면이라는 중요한 직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때로 회중의 잘못을 지적하고 통렬하게 꾸짖는 예언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진정 회중을 사랑하는 목자의 애끓는 심정이 수반되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자기 성찰과 회개 이후의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강단에 자신만 덜렁 남은 채 텅 빈 의자들을 향해 설교해야 할 날을 곧 각오해야 한다. 성경의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설교자의 시력, 긍정적인 하나님을 드러내는 설교가 이 시대에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