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설교에 대한 반성

- 새로운 설교 방식을 위한 전제 -

 

 화하는 회중의 특징

엄밀히 말하면 오늘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영역이라 할 수 있고 설교의 속성 역시 이 의사소통을 그 본질로 갖는다 할 때 회중이 어떤 양태로 변할 것인가 하는 것이야말로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회중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한 로그니스(Michael Rogness)는 변화하는 회중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멀티미디어 시대의 회중은 시각적 세대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에게 어떤 사상이나 개념은 이미지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할 때 그 효과를 더 높일 수 있다. 둘째 멀티미디어 시대의 회중은 정보를 바이트(bytes)나 인상(impression)에 의해 받는다. 이 말은 오늘의 회중이 일목요연하게 주제가 전개되고 설명되는 설교보다는 충격과 인상을 남기는 이미지나 바이트가 있는 설교를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오늘의 회중은 설명하는 것 못지 않게 움직이고 싶고 감동받고 싶고 자극받기를 원한다. 따라서 어떤 딱딱한 교리적인 이야기보다는 인간적이고 진솔한 이야기를 선호한다. 즉 전령(Herald)으로서의 설교자보다는 목양자(Pastor)로서의 설교자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낸다.

테리 영(Terry Young)은 지난 70-80년대의 회중을 대상으로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공통된 특징을 아래와 같이 여섯 가지로 정리했는데 이런 분석은 오늘의 회중에게도 역시 유효하다고 보여진다: ① 즐거움 지향적 ② 과학적 심성 ③ 실용적 ④ 세일즈 기법 거부 ⑤ 경제적 관심 증대 ⑥ 세련된 행위 동경.

 

전통적 설교의 성격과 한계

한국의 교회들이 대부분 설교중심의 교회로 출발하였고 현재의 성격 역시 이 범주 안에 머물러 있다. 이 말은 설교가 교회 성장뿐 아니라 교회의 정체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정장복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설교사역을 위한 신학 교육의 빈곤, 예배는 없고 설교만 있는 현상, 교회모임 일체를 예배로 규정하고 설교를 배치함으로 초래된 설교의 주문화(呪文化) 현상, 강연과 설교의 혼동, 성삼위 하나님 대신 설교자만 부각되는 설교현장, 그리고 설교도용 등이 제반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전통적 설교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 김외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국 개신교회의 설교자들은 그 유형이 본문 설교나 제목 설교든 혹은 강해 설교든 관계없이 대체로 서론에 이어 3대지 분석, 설명 예화 한두 개, 적용 그리고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러한 지적은 한국 교회의 설교가 보여온 특징을 잘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한국 교회 전통적인 설교란 우리가 자체적으로 고안한 설교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서구 교회의 방식이 ‘한국식’으로 고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 설교에서는 “명료한 이해와 명료한 해석 그리고 명료한 적용”을 중시한다. 즉 성경 본문을 주석적으로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해석하며 그리고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형태의 설교를 강조한다. 크래독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통적 설교 즉 “세 가지 요점의 설교는 한 공동체의 사건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담화로 간주”될 수 있다. 전통적 설교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적인 논리와 분석적인 사고이며 예화와 이야기들은 이런 이성적 논리를 예증하기 위해 쓰여진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통적 설교는 “진리에 대한 이성적 해설”이며 형태상으로 강의에 가깝다. 즉 3-4개의 대지를 통해 본문이 담고 있는 명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연역적으로 풀어 설명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설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본문의 교훈을 “가르치고” 회중에게 본문의 내용이나 메시지를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즉 설교의 기본적인 목표는 관념의 전달이며 이 목적을 위해 수사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회중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교자는 본문으로부터 대지를 추출하여 논리적으로 질서 있게 배열한다. 이 설교에서 회중이 적극적으로 설교에서 수행하는 기능은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유형의 설교는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만일 성경 본문과 진솔한 씨름을 하여 그 결과로 추출한 메시지라 했을 경우 이런 유형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설교의 기본적인 취지에 어느 정도 부합할 수 있다. 동시에 신학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공적인 말걸음”이 설교라 할 때 설교는 수평적 차원보다는 수직적 차원을 가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설교자의 권위에 입각한 ‘지도적’ 개념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인 설교는 - 이것은 역으로 설교전달이라는 차원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 종교적 담화로서의 기본적인 성격을 부각시키는 데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환원하면 사람의 말이 아닌 신언(神言)으로서의 설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전통적 설교는 유효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대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내용을 틀에 꽉 짜 맞추고 설교의 목적과 대강적인 내용의 흐름을 설교 도입부에서 밝히고 들어가는 전통적인 설교 기법은 청중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여전히 유효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회중의 이해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추론을 통한 이해가 부족한 회중의 경우 귀납적인 방식의 설교는 많은 경우 설교자의 의도와 회중의 수용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괴리를 보이기 마련인데 오히려 연역적 방식인 전통 설교는 이 점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성경이 가진 문학적 다양성 역시 전통적 설교의 효용성을 웅변해 준다. 일반적으로 설교의 형식을 결정할 때 가장 보편적인 기준이 본문이 가진 문학적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 변화 무쌍하게 바뀐다 하더라도 그런 흐름과 관계없이 전통적 설교 기법을 요구하는 본문들은 상존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서신서나 예언서 등이 그 대표적인 본문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사건이 아닌 교훈이나 교리 등을 집중적으로 담고 있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한 사안에 대한 특징을 3-4개로 정리하고 있는 본문, 한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몇 가지로 다루고 있는 본문,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과 단계를 다루고 있는 경우는 여전히 전통적인 설교의 방식이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나름대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설교 방식은 모든 장점을 뛰어 넘는 훨씬 심각한 약점을 지니고 있다. 듀크 대학의 설교학 교수인 데이비스(W.D. Davies)는 설교를 교회의 종으로 비유하면서 그것의 친밀함으로 인해 설교는 위로하는 소리로 쉽게 인지되며 비록 그것이 아둔하고 생기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동안 관용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설교가 다루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지만 결국 강단은 죽어가는 ‘지식주의’의 포로가 되어 갔고 설교는 두서없고 산만한 스타일과 언어를 사용하는 비인격적인 사안(impersonal affair)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드루 대학 설교학 교수인 라이스(Charles Rice)는 전통적인 설교를 ‘구태의연한 설교’이라고 지칭하면서 이런 설교에서는 설교자의 주관 그리고 추론만이 투사될 뿐이라고 진단한다. 이 설교에서 설교자는 전통 그리고 현재적인 삶의 실제세계로부터 유리되며 설교자는 비 인격으로 남게 된다. 라이스는 이러한 ‘인간성 없는 인격’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성경적 설교의 말씀 사건(Word-event)이 배제되는 주요인이 바로 여기 있다고 주장한다.

헨리 미첼(Henry Mitchell)은 현재 미국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설교를 멍청하고 생기 없고 지루함 그 자체라고 규정하면서 설교가 회중의 삶에서 유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로 논쟁과 개념만을 다룬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설교의 무기력함의 원인을 설교에 대한 인식의 오류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설교자들은 설교를 예술로 보기보다는 논쟁에 바탕한 삼단논법으로 보기 때문에 설교의 무력증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흑인 설교가인 미첼은 기존 설교의 두드러진 형식이 설교자에 의해 정리된 아이디어가 차례대로 회중에게 전달되는 것이라고 보면서 이러한 이성적 합리적 형식을 “백인의 설교”(White Preaching)라고 명명하면서 이런 방식은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어 다수의 미국 교회에 학적으로 심겨지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이렇게 설교자들이 설교를 ‘사람들과의 이성적 사안’으로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호소를 통해 정보가 제공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신앙은 인식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전 인간과 그의 모든 것 일체를 다 포괄한다. 인간의 인간성이란 이성적인 인식 이상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감정적 존재이다. 따라서 어느 주어진 순간에 직관적인 능력은 훨씬 멀리 나아간다. 이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은 덜 이성적이지만 그러나 이성적인 것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만일 설교가 전 인간에 대한 호소라면 설교는 의식과 동시에 무의식에 호소하여야 하며 이성뿐 아니라 감정과 직관에 호소하여야 한다.”

한편 유진 로우리(Eugene Lowry)는 전통적인 설교의 구성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로우리는 기존 설교가 자신을 이해함에 있어 너무 공간적인 패러다임에 들러붙어 있다고 보고 이런 구조 속에서 설교는 당연히 아이디어나 명제적인 진리가 설교전체의 내용이 된다고 본다. 그는 전통적으로 설교는 3개의 대지와 하나의 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념화된 성분들의 논리적 토대 위에 설교를 구조화하는 데 역점을 두어왔다고 주장한다. 이런 구도하에서는 설교자는 설교를 하나의 ‘일’로 간주하게 되고 그런 한에서 설교자의 임무는 설교의 개념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로우리는 이런 구조란 건축의 이미지를 다루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설교학 관련 서적들이 설교를 설교 구성(sermon-building)으로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한국 강단에 대한 반성

상술한 내용이 미국을 중심한 서구 사회의 자기 비판이라면 한국적 상황은 어떠한가? 사실 같은 방법론을 쓴다 하더라도 서구 교회와 한국 교회는 설교의 진행이나 인상지움 그리고 결과에 있어 대략적인 유사성은 인정한다 할지라도 동일하게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화적 토양 멘탈리티 교육의 방식 수용의 방식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차이를 전제로 좀더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면에서 우리 설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설교란 시대를 초월하는 성경이라는 불변성을 모토로 하지만 동시에 회중이라는 가변성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전통적 설교가 일방성을 전제로 한다면 오늘의 회중의 특징은 그런 일방성을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자극하지 않는 테마에 대해서는 수용의 필터를 열지 않는다. 동시에 오늘의 회중은 지금까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해 온 설교자의 권위에 대해서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목회자인 설교자의 입지가 위협(?)당하고 임지를 잃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속출하는 것은 교회 환경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 설교가 보여온 일방성이 형식적으로는 설교의 형태와 관련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설교자의 자기 인식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음이 드러난다. 즉 전통적 설교에 익숙한 설교자들은 대개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대언자’ ‘하나님의 전령’으로 이해한다. 대언자나 전령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 자체로 일방적인 통보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듣는 회중은 일체의 이의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능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더욱이 한국의 강단은 여전히 유교적 분위기와 맞물려 이런 권위적이고 지시적인 경향이 그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많은 설교자들이 말씀과의 진지한 씨름으로부터 추출한 메시지를 설교의 전달 축으로 삼기보다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분리된 신분’을 축으로 삼고 이를 토대로 ‘설교 아닌 설교’로 설교의 존엄성과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설교들을 분석해 보면 설교 본문을 잡아 놓고도 막상 대지의 전개는 본문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본문들로부터 구성하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설교의 본문이란 그 설교에서 설교자와 회중이 대화를 나누는 통로요 터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곳을 기웃거리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성경 본문은 스스로 할 이야기가 많이 있는 ‘묻혀진 금광’임에도 측량한 흔적이나 곡괭이를 들이댄 자국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채 말이다.

이렇게 구성된 설교의 대지들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자가 말씀을 압도하는 것이요 설교자가 말하는 것이지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회중을 대신해서 ‘말씀 속으로 파송받은 자’로서의 설교자라는 종교개혁적 설교자 상에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