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시대와 영상설교

 

매체의 변화에 민감하되 매체자체가 메시지일 수 없음을 인지한다면 여전히 설교자가 문제이다!

 

 

메시지 전달 효과를 높이려는 역사적 노력들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매체 변화가 설교에 미친 가장 큰 변화는 설교가 듣는 설교에서 동영상을 이용한 ‘보는 설교’로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설교는 주로 구연에 의존한 단순/단선방식이 주종을 이루어왔고, 이는 하나의 고정된 틀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설교의 역사를 보면 이런 구연설교를 보완 내지는 다양화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어 왔다.

가령 말씀의 의미를 삼중적으로 정리하면서 언어가 가지는 최상적 가치를 주장한 마르틴 루터도 설교의 전달효과를 높이기 위해 가상대화법을 설교에 즐겨 도입한 것이라든지, 그림설교(Bildpredigt)가 보여주는 것처럼 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 명화들을 직접 설교단에 올려 그것을 설교에 이용함으로 시각적 효과를 거두려는 시도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의 강단에서 있어왔다.

우리 한국의 경우, 설교 중에 직접 가위를 들고 회중의 상투를 잘랐던 김익두 목사라든지, 명심도라는 연속 그림과 천로역정을 그림으로 그려 설교에 이용했던 이성봉 목사를 들 수 있다. 한편 이미 100년 전부터 프랑크푸르트 화란 장로교회에서 설교자 2인을 내세워 인터뷰식 대화설교를 설교의 형식으로 고착시킨 것은 구연설교의 틀에 변화를 주려는 또다른 시도라 할 수 있다. 어린이 설교에서 오래 전부터 애용되고 있는 시청각 설교나 융판설교 등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구연설교라는 고정된 틀을 인정했지만 그 시대에 인간들의 문명이 만들어 내고 또 응용할 수 있었던 각종 소재를 적극적으로 설교에 도입하는 데 있어서도 열린 자세를 가져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언어라는 것 자체는 루터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훌륭한 최선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 최선의 것을 통해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하더라도 말씀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말씀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있어 구연이라는 형식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도구임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 그 자체’가 궁극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그 자체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불변의 원칙을 고수하려 한다면 이미 우리는 또 다른 문자주의와 언어에 대한 맹신이라는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멀티미디어의 다양한 매체를 설교에 접목시키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상설교의 정의와 실태

영상설교란 무엇인가? 사실 이 새로운 장르는 학문적 연구 이전에 현장에서 임상적 시도가 앞선 경우이기 때문에 여전히 학문적인 연구가 요청되는 분야이다. 대체로 영상설교란 영상 매체를 설교에 도입하여 설교의 시각화 및 입체화를 도모함으로 메시지 전달의 효과를 높이려는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영상 설교는 동영상을 설교에 적극 도입하여 기존의 청각적 전달의 차원에서 시각적 전달로 상승시키려는 시도이다. 즉 설교의 도입부나 갈등 부분까지를 동화상을 이용해 처리한 다음 나머지 부분을 설교자가 이어간다든지 아니면 설교자가 도입한 부분을 동화상을 통해 위기를 고조시키고 다시 설교자가 이어간다든지 하는 방식을 통해 설교의 입체적 전달을 시도하는 것이다.

영상설교는 현재까지의 과학의 발전 양태와 보조를 맞춘 것으로 이런 추세라면 향후 설교의 양상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누구도 쉽게 예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가상 체험이 보편화되는 시기가 온다면 설교의 내용에서 다루어지는 많은 내용들을 회중이 가상적으로 체험하며 설교에 임하는 시대가 열리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교회는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이다. 가령 스크린을 이용하여 설교자의 모습을 비추어준다든지 성경 본문과 설교의 핵심 내용을 영상문자로 처리한다든지 하는 정도가 대부분이며, 설교의 내용과 관련된 동화상을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로부터 발췌하여 설교와 연결하는 방식 등을 시도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또 청각적인 면에서는 오디오 기기를 이용하여 설교내용과 관련된 소리나 음악을 내보냄으로 설교의 내용전달에 대한 효과를 높이려는 시도 역시 특수 목적의 프로그램식 예배가 아닌 다음에는 거의 시도되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설교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로 인한 대중적 인식의 부족, 또한 설교와 매체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한 목회자들의 거부감 그리고 재정적인 문제 등이다. 그러나 시간이 걸린다 하여도 영상 설교는 전체 문화의 패러다임에 비추어 볼 때 한번은 넘어서야 하는 과제임에 틀림없다. 특히 시청각적 체험적 차원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전통적인 설교 방식에 안주할 수 없다. 오늘날 부흥하는 청소년부의 경우 대다수가 영상설교 형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영상설교의 역기능

그러나 역기능도 있다.

첫째 미디어 자체가 가지는 흡인력과 메시지가 주는 힘 사이의 구별의 문제이다. 환원하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에 감동되는 것과 메시지 내용 때문에 감동되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동화상을 설교에 접맥시키는 것은 설교자의 말이라는 일차원과 시청각적 동화상이라는 3차원의 결합이다. 회중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1차원적인 구연보다는 3차원적인 동화상이 훨씬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이럴 경우 과연 회중의 인상에 각인되는 것은 1차원보다는 3차원적인 수단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설교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교의 맥락에 맞는 동화상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에서 사용되는 동화상들은 거의가 상업적인 필름의 일부에서 발췌된 것들이다. 이 말은 설교자가 전하려고 하는 성서의 메시지만이 아니라 그 메시지의 보조수단으로 사용되는 동화상 자체에도 준비된 메시지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전자가 성서적 복음적인 내용이고 그 동기 자체도 그 범주에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철저히 세속적 상업적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상반된 메시지가 회중에게 주어진다 할 때 - 비록 동화상의 메시지가 갖는 상업적 성격이나 세속적 성격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를 담고 만들어진 것이다 - 과연 어떤 메시지가 회중에게 더 어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비록 설교자는 자신의 메시지의 보조수단으로 설교의 맥락을 고려해 선별한 것이지만, 그리고 동화상으로부터 받는 메시지의 본래 의도는 숨겨져 있는 것이지만 전달이라는 차원에서 3차원의 보조자료가 우위를 점한다고 할 때 이 문제는 심각히 고려되어야 한다.

만일 설교자가 동화상을 설교 전반부에 배치하였다면 그것이 끝난 후 이어지는 구연으로서의 1차원은 이미 전달방식이 복합성에서 단순성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과연 설교자는 회중이 동화상을 통해 받았던 인상을 그대로 유지시켜야 하고 나아가 설교 본래의 메시지로 동화상이 주는 인상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더 큰 책임을 떠 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요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설교의 전달을 위해 도입한 동화상은 설교의 메시지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미디어의 사용은 설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해칠 수 있는 흉기의 기능으로 오용될 수 있다.

둘째 같은 맥락에서 화상을 통해 다양한 화면을 설교에 띄워줄 경우 과연 이것이 설교의 집중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가의 문제도 고려되어야 한다. 더더욱 설교내용에 따라 수시로 동화상을 띠울 경우 회중은 설교자와의 시선접촉보다는 화면과의 접촉에 몰두하게 되고, 따라서 설교자를 중심한 회중과 설교자의 대화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설교자의 멘트와 동화상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 회중은 화면에 집중하게 되기 마련인데 동화상의 약점은 회중의 생각을 정지시킨다는 데 있다. 마치 라디오는 들으면서도 생각이 가능한데 TV시청은 모든 생각을 정지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지엽적이긴 하지만 동화상 띄우기를 생략한 채 설교 중 오직 설교자만을 화상에 비출 경우에도 - 이것은 예배실이 넓은 경우에 주로 해당이 되겠지만 - 또 다른 부담을 설교자는 짊어져야 한다. 즉 확대된 화면을 통해 온 회중은 설교자의 세세한 변화를 감지하게 되기에 따라서 설교자의 표정관리나 단상에서의 처신 그리고 설교내용에 따른 표정의 수반에 이르기까지 설교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자기 관리와 훈련을 요청받게 되는 것이다.


넷째 설교에 동원되는 뉴미디어가 본래 미디어 즉 성경을 넘어서서 그 내용을 왜곡 내지는 과장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즉 성경에 실린 내용을 전달하는 보조수단으로 기능해야 하는 매체들이 성서의 상황과 메시지를 이미지화함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관을 자극하고 그것을 통해 전달효과를 극대화시킨다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서 왜곡된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위험성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다섯째 다매체를 설교에 접합시킬 경우 예배가 갖는 거룩한 분위기가 훼손될 수 있다는 문제도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매체의 사용이 수용자 중심이라는 현대의 상업적 발상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 즉 회중을 우선적으로 배려함으로써 예배와 설교의 거룩한 분위기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배가 갖는 축제적 성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기쁨을 드러내는 축제와 매체에 의존한 '종교적 쇼'와 같은 인상을 풍길 수 있는 축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섯째 현실적인 문제 역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 설교가 가진 것과 같은 의도의 순수성과 내용의 복음성을 견지하는 동화상 자료의 제작이 시급한데, 이는 어느 한 교회가 감당할 수 없다. 범 교단적, 초교파적 공동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또 이런 모든 것이 해결됐다 해도 이를 교회현장에서 실천에 옮기는 데는 적지 않은 예산상의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고, 적어도 한국 교회의 70% 이상은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리하면 매체에 대한 인식과 활용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설교의 전부를 좌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시대를 초월해 설교의 중심에 있는 것은 설교자이다. 설교의 메시지는 새로운 매체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서와 씨름하는 설교자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새로운 환경에 의해 변화된 회중을 상대해야 하는 설교자는 이전보다 더 큰 책임 앞에 직면하게 되었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