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언어적·비언어적 요소

 

인조된 설교로부터의 탈피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회중 역시 인조된 성도가 되기 쉽습니다!

 

한국 강단의 설교를 살려야 한다는 소박한(?) 취지로 시작한 이 글이 어느 덧 2년의 시간을 잡아먹고 말았다. 아직 해야 할 말이 적지 않지만, 지금까지 고민해온 것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빈사상태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항상 마지막에는 아쉬움이 남는 법이고 마지막 정열을 쏟아 부어야 하는 책임감도 느끼기 마련인데 필자는 지난 호에 이어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하는 것으로 그리고 설교자가 꼭 지켜야 할 부분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고자 한다.

 

★ 설교의 언어적 측면

한국강단의 많은 설교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조된 억양과 지나치게 허스키한 음성이다. 설교단 밑에서 말할 때와 위에서 말할 때 너무나도 다르다. 특히 한 설교 중에도 일반적인 설명 부분과 예화 부분이 목소리의 톤이나 억양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말씀을 설명할 때는 공식적인 연설자 냄새가 나다가 예화 부분에서는 강단 밑의 본래 목소리로 돌아오더란 말이다. 아마도 그들의 의식 속에 설교라는 거룩한 연설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다른 근엄함 내지는 공식적인 냄새가 뿜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큰 착각이다. 설교자는 다음 사항을 명심하여야 한다:

1) 설교에서는 자연스러움과 일종의 자유가 느껴져야 한다. 거룩한 목소리가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설교자만의 생각이다. 바람직한 것은 설교단 아래와 위의 음성이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초성에 강한 액센트를 두는 설교자들이 많은데 이런 경우 거의 예외 없이 종성이 약해지고 끝이 밑으로 처지게 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또 너무 감정적인 면을 살리려는 나머지 설교의 억양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기복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자칫 변사적인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

2)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문장을 구사할 때 리듬을 타는 경우이다. 마치 바다물결이 일정한 리듬을 타고 파고를 형성하는 것처럼 설교의 억양 진행이 위에서 밑으로 밑에서 위로 마치 물결과 리듬을 타듯 일정하게 반복되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일종의 변사식 설교진행이라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런 리듬 속에 설교자가 전하려는 중요한 내용이 함께 묻혀 버린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회중 역시 그 리듬 속에서 정작 중요한 내용을 그냥 흘러 넘겨 버리게 된다.

3) 설교를 웅변과 혼동한다든지 정치판의 유세연설과 혼동해서 그런 톤으로 진행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방식은 딱딱한 정보만을 전달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설교에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설교에서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감성의 자극과 터치가 필수적인데 연설체로서는 그런 목적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발음에 문제가 있는 경우라면, 즉 목소리가 안으로 먹어들어가든지 입안에서 공명이 안으로 감기는 경우라면, 연필을 앞치아에 물고 연습하든지 바둑돌이나 조약돌 등을 물고 말하는 연습을 해 보라. 혀에 상당한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단어라도 입에서 우물거리는 식으로 발음할 수 없게 된다.

4) 또한 목소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거의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목소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허스키한 탁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설교자들의 열정적인 기도생활이 빚은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 나라 교인들은 이런 음성을 ‘은혜 충만한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단전에서부터 나오는 목소리야말로 설교자의 음성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5) 설교의 일반적인 빠르기는 시대의 변화와 그 보조를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늘날 사회의 기본적인 구도를 특징짓는 것 가운데 하나가 스피드이니만큼, 설교 또한 ‘늘어져서는’ 곤란하다. 그렇다고 ‘심장의 박동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일관하는 것 역시 피해야 한다. 듣기만 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반쪽 짜리 커뮤니케이션이 될 것이다.

6) 설교의 내용과 설교언어는 일치해야 한다. 즉 내용에 따른 변화의 문제이다. 가령 예수께서 피 같은 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그 장면은 간절함이 설교자의 음성을 통해 회중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말고의 귀를 내리치는 베드로의 과격한 행동을 묘사할 때에는 그 과격함을 언어로 실어 날라야 한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다니면서 다윗이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장면에서는 애절함과 안타까움이 배어 나와야 하고 물매를 들고 나오는 다윗을 맞는 골리앗을 묘사할 때에는 거만함과 냉소가 회중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이런 내용과 전달의 일치는 말의 빠르기와 음조 크기 등이 고루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다음에 나오는 표를 통해 스스로의 설교를 체크해 보라:

 

★ 설교자의 체크리스트-언어적인 면

인위적인 음성을 내고 있지 않은가?/입에 힘이 들어감으로 S발음이 강한 음으로 나오지 않는가?/설교진행시 일종의 변사식 리듬을 타지 않는가?/발음을 빨리함으로 단어의 종성 부분이 불명확해지지는 않는가?/문장에서 문장으로 넘어갈 때 입술을 떼는 소리나 입맛 다시는 소리가 나지 않는가?/마이크의 음량을 회중에게 맞추는가 설교자에게 맞추는가?/’에-’ ‘아-’ 등 불필요한 언어습관은 없는가?/설교가 구어체인가 문어체인가?/설교에 형이상학적 추상적 관념적 단어가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는가?/설교에 신학적 전문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가?/설교의 표현이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설교의 문장을 가급적 짧게 하고 있는가?/반복 부연 열거 등의 기법을 잘 사용하는가?/’믿습니까’ ‘-할 줄로 믿습니다’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가?/목소리를 목에서 내고 있는가?/원고의 지배를 받는가, 아니면 원고를 지배하는가?

 

★ 설교의 비언어적 요소

설교의 비언어적 요소 또한 고려사항이다. 회중은 설교를 들을 뿐 아니라 보기 때문이다. ‘본다’는 시각적 요소가 ‘듣는다’라는 청각적 요소의 효과를 배가시키기도 하고 저하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막중한 것이다. 물론 회중의 성격에 따라 설교자에게 기대하는 신체동작 역시 매우 다양하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회는 점잖고 엄숙한 말과 동작으로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반대의 경우 극적이고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회중은 설교자가 활기 있고 적극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바란다.

아테네 최고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효과적인 대중 연설의 세 가지 덕목을 “동작! 동작! 동작!”으로 주장한 것이나 “신체언어가 말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관객의 잠재의식에다 직접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적인 말보다도 신체언어가 더 깊은 효과를 낸다”는 한스 반 데르 기스트(Hans Van Der Geest)의 언급은 설교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설교자는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비언어적 요소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1) 제스처. 원래 제스처라는 것은 설교자가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가시적인 몸짓을 통해 보강시켜주는 동시에 설교의 내용의 구상화를 통해 강조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제스처는 습관적인 몸동작과 확연히 구분되는 일종의 몸을 통한 설교언어이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은 습관으로서의 몸짓과 내용전달의 보조수단으로서의 제스처를 제대로 구분해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습관적 몸짓이 몸에 배인 나머지 ‘산만한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2) 설교자의 시선은 반드시 회중과의 시선접촉을 유지해야 한다. 설교자는 상대의 눈동자를 쳐다보기보다는 눈꺼풀 밑 부분을 쳐다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소위 착시현상을 이용하는 것인데 내가 눈꺼풀을 쳐다보고 있을 때에도 상대방은 여전히 자신의 눈을 쳐다보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원리를 설교에 사용할 필요가 있다. 설교에서는 어느 한 사람을 주목해서 눈을 맞추려 하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훑어가며, 즉 앉아 있는 회중을 3-4개의 줄을 한 단위로 해서 시선이 훑어가며 지나쳐도 회중은 자신을 쳐다보는 것으로 착시(錯視)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접촉은 설교자가 의식적으로 훈련할 때에만 효과를 볼 수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회중을 앞에 두고도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을 해가면서 설교하는 것은 대화의 기본을 망각한 행위이다.


설교자의 자가 체크리스트-비인어적인 면

설교자의 시선이 회중이 아닌 창문이나 벽을 보고 설교하지 않는가?/강조할 때 발뒤꿈치를 습관적으로 들지 않는가?/몸을 지나치게 흔들지 않는가?/제스처가 습관적인 몸동작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설교하지 않는가?/한쪽 어깨가 지나치게 올라가 있지 않은가?/강단을 잡은 자세로 설교를 계속하지 않는가?/지나치게 눈을 깜박이지 않는가?/제스처로 주먹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가?/강대상을 자주 두드리거나 치지 않는가?/석고상처럼 설교 자세가 무변화로 일관하지 않는가?/입술을 핥는 습관은 없는가?/얼굴 표정이 설교 내용과 일치하는가?/설교시간을 제대로 지키려 노력하는가?

 

다시 강조할 이야기들

1. 설교는 들을 거리가 있어야 하며 내용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주석은 참조는 하되 그것이 해답이라고는 생각지 말라! 설교는 분명한 한 가지 해석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

2. 모방은 OK, 표절은 사절. 모범적인 설교자를 선정하라. 그리고 집중적으로 연구하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설교를 그대로 들고 올라가지는 말라. 부도덕하다.

3. 말을 거는 설교를 하라. 설교의 방향을 성서 속의 주인공으로부터 시작하지 말고 그 주인공이 연루된 문제를 초점으로 회중으로부터 시작하라.

4. 회화적인 설교를 하라. 회중이 설교를 들으면서 머리 속으로 그림이 그려질 수 있어야 한다.

5. 설득적인 설교를 하라. 어디서부터 주제를 시작할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부터 주제를 이끌어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6. 진부한 종교 색채를 제거하라. 예를 들어 구원 구세주 영생 죄인 등의 단어들은 이미 익숙한 단어이고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개념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단어지만, 이것은 회중의 귀에 들리기만 할 뿐 심정을 움직이는 데는 이미 상당 부분 식상해진 상태이다. 따라서 이를 탈피할 수 있는 언어 선택이 중요하다

7. 설교의 영적 차원을 소중히 하라. 설교자는 우선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 그리고 성령의 협동작업을 간절히 바라는 것, 이것이 설교의 시작이어야 하고 진행이어야 하고 종결이어야 한다. 설교자가 먼저 은혜받지 못했는데 무슨 은혜가 가능하며, 설교자가 감격이 없는데 무슨 감격을 기대한단 말인가? 성령 없는 설교, 영적 힘이 느껴지지 않는 설교는 귀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생명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설교가 기독교적 연설임을 상기한다면

연설을 위한 수사학적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설교의 기본 단계

연설로서의 설교를 결정짓는 요소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론적인 측면을 다루는 신학, 형식적인 측면을 다루는 언어학, 개인적인 차원이 연계된 심리학, 그리고 각각의 설교에 쓰여지게 되는 각종 자료의 차원이 그것이다.

설교란 언제나 복음의 빛 아래서의 이야기이어야 하기 때문에 신학적 사고 없이는 불가능하다. 설교란 언제나 언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학은 설교를 위해 귀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설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반신적(反神的) 심리학이 아닌 인간에 대한 진지함으로 접근하는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일차 자료인 성경 이외에 설교자의 논지를 뒷받침해줄 자료의 확보가 중요하다. 이런 요소들을 바탕으로 하는 설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1단계: 들려짐 - 사신인 설교는 전달되어야 한다. 즉 회중은 설교를 통해 설교자가 알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정확한 언어의 사용, 명확성, 고저장단, 적절한 강조 등이 필요하다.

2단계: 이해함 - 사신은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논리성, 분명한 목적, 일목요연한 정렬, 순서가 문제가 된다.

3단계: 확신함 - 사신은 수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자 자신이 문제가 되는데 이는 곧 즉 그의 능력, 인격, 설득력, 영력 모범으로서의 인상 등을 말한다.

4단계: 실천함 - 설교는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 방법제시와 실현가능성이 핵심이다.


이런 사항들은 타고난 재능만으로 되지 않는다. 물론 설교자에게 천부적 재능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사실이자만 그러나 엄밀히 말해 설교에서의 재능이란 훈련된 후천적 재능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연설로서의 설교의 삼대 요건인 명확성, 예술적인 정교함, 관심과 흥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선천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계발시키고 교육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고 또 이 위에 경험이 덧붙여져야 한다. 즉 ‘재능계발 - 교육 - 경험’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동시에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필수적인 것이 수사학이다.

 

수사학의 내용

어거스틴 이래 수사학은 설교의 효과적인 진행과 성공적인 전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법으로 널리 인정받아왔지만 고대세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수사학이 필요했다. 첫째는 고대세계에서 철학 등 교육에서 필요로 했던 정보제공을 위주로 하는 ‘도체레’(Docere)가 그것으로, 듣는 사람의 생각을 말하는 자의 그것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두번째는 대중 연설과 축제연설을 뜻하는 ‘델렉따레’(Delectare)로, 일상 사회생활의 용어를 사용해 토론이나 정보전달적인 어법이 아닌 친근한 분위기에서 행해지는 대화적 기법의 연설이었다. 셋째는 그리고 정치담화에서 행해지던 ‘모베레’(Movere)로, 이것은 타인을 선동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등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연설들은 그 자체로 가르치고(docere) 기쁘게 하고(delectare) 그리고 의지를 변화시키는(movere)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설교에서는 이런 성격들을 그대로 설교 속에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연설은 타고난 재능보다는 유명한 연설가들의 연설을 모방하고 특정한 규칙을 숙달하며 그리고 훈련을 통해 획득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리고 이 연설에서는 흥미나 호기심 자극, 핵심에 대한 명확한 묘사, 분명한 근거, 구체적 실례 그리고 실천을 위한 호소를 핵심적인 요소로 강조하면서 이것을 위해 다음과 같은 5가지 기준을 제시해왔다: ① 창안(iventio: 청중이 관심을 둘 만한 주제 찾기) ② 배열(dispositio: 창출한 메시지를 일정한 순서에 따라 논리적으로 배열하기) ③ 형식(elocutio: 언어형식의 명료성) ④ 기억(memoria: 전달된 메시지를 좀더 효과적으로 기억되게 하기) ⑤ 전달(pronuntiatio: 일정한 물리적 형식을 갖추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으로 자연스러움이 생명력).

물론 수사학적 기법이 지나쳐서 설교가 수사학의 시녀로 전락했던 중세의 폐단을 우려한 나머지 마르틴 루터 같은 개혁가들은 설교에서의 수사학의 사용을 금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조처가 영구불변한 효용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강조하는 수사학이 중세의 그것처럼 복잡하고 기교가 내용을 앞지르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수사학이란 그 본질적인 관심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으며 말하는 자의 의도를 듣는 자들에게 명확하게 전달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듣는 자로 하여금 내 견해에 동의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를 궁구(窮究)하는 기법이다. 디트리히 뢰슬러(Dietrich Rossler)가 주장한 것처럼 설교가 “기독교적 연설”이라면 설교 역시 연설이 가지는 일반적인 지향점 즉 설교자의 주장을 회중에게 설득시킨다는 사실에서 자유할 수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고 복음 사역을 위해 신학교육기관이 세워지고 거기서 교육받은 목사님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훈련을 착실하게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설교를 위한 언어적 훈련으로서의 수사학적 훈련 즉 말하는 훈련을 받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말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또 그것의 추출을 위해 훈련받는 것에서부터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말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구 교회 설교의 전통을 보면 지금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설교자들은 하나같이 소위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말하는 기술로서의 수사학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으며, 당연히 설교가 가지는 연설로서의 차원을 꿰뚫고 있었다. 또 서구의 교육에서 이 말하는 기술로서의 수사학은 가장 기본적인 교과목으로 오랜 동안 자리잡아왔다.

 

설교의 구체적 훈련

설교란 일종의 연설이고 그것을 이루는 것은 언어적 요소와 비언어적 요소이다. 언어의 운용이라는 것은 결국 빠르기, 크기(목소리), 높이(음), 길이, 쉬기 그리고 힘주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맺고 끊음, 압축과 이완 등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설교는 이런 언어의 운용과 관련된 요소들을 적절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한 문장 안에서 너무 지나치게 변화를 자주 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여러 요소들은 작게는 한 단어의 처리에서부터 좀더 확장하면 한 문장의 운용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 문단의 운용에까지 적용이 된다.

1) 우선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기법으로 반복과 부연법이 있다. 하나의 단어나 문장을 강조하기 위해 해당부분에 강세를 주어 반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사랑,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반드시 부연과 반복을 통해 강조할 필요가 있다. 회중은 결코 설교원고를 들고 다시 반복해서 설교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2) 두 번째는 설교진행에서 일정한 부분을 압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자가 강조하려는 부분 앞 혹은 뒤의 한 단락 정도를 처리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설교의 진행에 변화를 줌으로 말하려는 부분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대개 이런 휘몰이법에서는 평상시보다 1.5-2배의 빠르기로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다. 그리고 이런 휘몰이법을 사용한 다음 문장은 극히 대조적으로 그 속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3) 점층법을 설교에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맥락을 점차 그 의미를 고조시켜 나가는 방식으로 부연법이나 강조와 비슷한 맥락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때는 정도의 심화 내지는 범위와 대상의 확대(축소) 등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와 자기 자신이 불협화음을 내기 마련입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의 관계에도 불협화음이 납니다. 자연과 상황 그 어느 것과도 화목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는 자기와 하나님의 관계에도 불협화음이 납니다.”

4) 정상적인 설교를 일시 중단하는 휴지(Pause)의 기법이다. 갑자기 진행하다가 중지한다든지, 회중에게 질문을 던져놓고 중지한다든지, 다같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를 서술한 뒤 중지하는 기법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이 휴지 기법은 설교의 흐름을 3초 내지 5초 동안 끊음으로 회중의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나아가 설교가 대화라고 했을 때 회중을 설교자가 전하려는 사안 속으로 흡입해 들여, 같이 해답을 위해 생각하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 설교에서 대략 2-4회 정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문을 보자: 산다는 것은 종종 뭐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가운데 엄청난 기쁨을 누려본 분들이 계실 겁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그런데 그 기쁨이 도대체 얼마나 오래 가던가요? ...(5초) 하룻밤만 자고 나면 그 기쁨도 그저 덤덤해집니다. 엄청난 슬픔 때문에 잠 못 이룬 적이 왜 없겠어요? 그런데 어떻든가요? 그 슬픔도 시간이 가니까 사그라지지 않던가요. ...(5초) 인생이란 게 결국 그런 것이거든요.”

5) 기계적인 적용을 할 필요는 없지만 필요에 따라 문장 혹은 문단을 처리하는 음성의 높이에 변화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통상적인 음높이가 1단계에서 최고 10단계까지로 구분된다 할 때 절정을 나타내는 것은 8-10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설교의 진행은 통상 말하는 높이에 해당하는 5-6정도일 것이다.

이런 사항을 염두에 두고 통상적인 진행보다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느껴질 때에는 설교원고에 음높이에 대한 표시를 해두어야 한다. 설교원고는 설교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문처럼 여러 기호들의 장치로 치장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절정 부분을 고음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 심각한 이야기는 목소리를 낮추기 마련인데 다행히 요즘은 마이크로폰이 발달했기 때문에 설교에서도 절정의 처리를 오히려 낮은 톤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설교가 수사학의 시녀일 필요는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수사학과 원수질 이유 또한 없다. 오히려 적절한 수사학적 기법의 활용은 효과적인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