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설교,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선포는 설교의 신학적 규정이고 설득은 연설로서의 설교의 실행적 성격입니다!

 

선포로서의 설교

설교를 설교답게 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진단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강단을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지적되어 온 것들을 나열하자면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설교를 위한 신학교육의 문제점, 과도하게 많은 설교 횟수 그리고 회중들의 기복적인 기대와 요구 등은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할 요소들입니다만, 설교가 결국 설교자 개인의 작업임을 염두에 둔다면 설교자의 문제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지적 사항입니다.

우선 설교자가 가진 통찰력과 일반 지식, 사상의 깊이와 식견의 문제, 다양한 본문에 대한 단일한 설교 형식, 회중과 동떨어진 주제의 편향성 등을 들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설교에 대한 설교자의 시각입니다.

흔히들 설교를 가리켜 ‘선포’라고 합니다. 설교를 선포라 하는 것은 설교에 대한 일종의 신학적인 개념 정립입니다. 선포란 위로부터 밑으로의 일직성, 수직성, 일방성을 띠고 있으며 타협이나 절충, 양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엄격성과 배타성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 자체가 선포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논쟁을 통해 혹은 타협을 통해 도달되는 해답이겠습니까?

선포 앞에서는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받든지 말든지,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만 가능합니다. 결국 일직성이고 일방성입니다. 그리고 신앙고백과 절대자 앞에서의 항복만이 이 일방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관’이 됩니다.

이리 보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설교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 구원과 주의 재림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선포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설교는 타협과 양보가 아닌 결단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득으로서의 설교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일종의 ‘연설’이라는 설교의 실행적 성격입니다. 연설에서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청중을 연설자의 주장 속으로 끌어들이고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목표에 이르기 위해 연설자는 모든 기법을 동원해 청중을 설득하려 합니다. 소위 설득을 통해 청중을 연설자의 주장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연설의 실제적인 주안점입니다. 설교가 ‘기독교적 연설’일진대, 그렇다면 이런 일반 연설의 주안점이 설교에도 적용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설교를 듣는 회중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마는, 그럼에도 우리는 설교를 듣는 청중의 평균치를 ‘세례받은 자’로 상정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졌다는 것이고 따라서 신 존재 증명부터 시작해야 할 이유는 당연히 없겠지요. 그렇다면 신앙이라는 공동의 토대 위에 선 회중을 설교자는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으로 설득해 가야 합니다.

설득으로서의 설교! 그렇습니다. 물론 설교는 그 궁극이 그리고 다루는 성경 내용이 결국 선포입니다마는, 그 선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회중들에게 행해지는 어쩔 수 없는 연설이 또한 설교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설교에서 제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지켜가야 바람직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주일 낮 예배 설교에 30분이 소요된다고 칩시다. 그것을 줄여 보십시오. 5분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좀더 줄이면 1분도 되겠지요. 아니 극단적으로 줄이면 단 한 문장으로도 가능합니다. 이것을 설교의 명제라 합니다. 결국 이야기할 핵심 내용이 5분으로 축약된다 할 때 그 나머지 25분의 기능이라는 것은 회중들이 이 핵심 내용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도록, 이해가 되도록, 동의가 되도록, 전달이 되도록 ‘설득’해 나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두 개념의 혼동

우리 설교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선포라는 설교에 대한 신학적 개념 정립이 연설로서의 설교라는 설교의 실행적 성격을 대신해 설교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문장 하나하나가 선포요, 단락단락이 서로 연결되기보다는 독립적인 선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의 진행이 회중이 함께 숙고할 수 있는 대화로 흐르기보다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일방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물론 설교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 성격상 신앙고백 위에 선 회중들에게 잘 어울리는 선포입니다마는 적어도 그 진행에서만큼은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설득’이어야 합니다. 선포는 한 설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성경 말씀만으로도 이미 선포의 성격을 간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인가 인간의 말인가?

이에 못지않게 지적되어야 할 강단의 문제점은 과연 우리 설교가 설교자의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설교는 그 다루는 재료가 성서인가 아니면 설교자의 관심과 상황인가에 따라 성서적 설교와 주제적 설교로 나눕니다. 성서적 설교가 설교의 핵심 주제와 메시지 그리고 설교의 전개를 철저히 성경본문에 의지하고 지배받는다면, 주제설교에서의 성경본문은 설교를 위한 실마리 정도만 제공하게 되고 설교의 주안점은 다루려는 주제와 보편적인 이슈 그리고 설교자의 관심과 상황이 차지하게 됩니다. 주제설교는 중세시대의 ‘세르모’(sermo)로부터 시작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교리를 가르치는 형식으로서의 ‘교리적 주제설교’가 주종을 이루었다가, 오늘날에는 변화하는 시대가 토해내는 다양한 이슈들을 기독교적 정신과 시각에서 조명하고 그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한편 제목설교라는 것은 설교를 실행해 나가는 방법론과 관계된 전문어입니다. 가령 설교제목을 설정하고 그 제목에 의거해 설교의 내용을 전개시켜 나간다면 우리는 이것을 제목설교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제목설교는 성서적 설교와 주제적 설교 모두에 다 가능한 설교의 형식입니다. 따라서 설교가 제목설교라 해서 문제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강단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으로 걸어놓고 대부분 설교자의 생각으로 그 내용을 채워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설교들이 성경과는 별 상관이 없는 ‘설교자의 설교’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 본문을 설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본문을 통해 우리와 이야기하시겠다는 하나님과 우리의 대화 통로입니다. 이런 통로를 개설해 놓았으면 말씀의 중계자요 전달자인 설교자가 이 통로에 집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닙니까?

만일 ‘자기 생각’ 위주의 설교로 진행한다면 그 설교는 ‘신적 권위’를 보증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설교가 신적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은 본문에 충실한 설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위한 필요충분의 조건입니다. 단순히 설교에서 성경을 본문으로 하는 전통 때문에 본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를 진정한 설교자로 만들어 주는 다양한 기능을 제공해 줍니다.

성경의 기능

설교에서 본문이란 우리로 표준적 기능, 권위적 기능, 창조적 기능 그리고 동질성 확인의 기능을 보증해 줍니다. 표준적 기능이란 기독교신앙의 척도로서의 성서 기능을 의미합니다.

딤(Diem)은 1939년 발표한 그의 글에서 “설교란 본래 그 어떤 경우든 그 형태와 내용상 성서주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성서의 표준적 기능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칼 바르트 역시 이와 비슷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극단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나는 뭔가 말할 필요가 없고 단지 뭔가를 따라 말하기만 하면 된다. 만일 하나님이 홀로 설교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신다면 그 어떤 주제들이 그 사이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따라서 설교자의 설교는 타의적인 입술 운동과 같다.”

권위적 기능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회중의 기대와 설교자가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의 출처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토(Gert Otto)는 “한 성서 본문의 언명과 증언의 능력은 나에게 용기를 주고 회중에게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부여한다”고 주장합니다.

창조적 기능이란 성서가 가지는 시공간적인 조건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즉, 전혀 낯선 시공간에서 쓰여진 성서이지만 그 제약을 뚫고 ‘오늘 여기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지침을 마련해 준다는 면에서 항상 살아 있는 창조적 능력을 소유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질성 확인의 기능이란 성서가 회중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주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회중들이란 성서가 하나님 말씀이며 이것이 인간 삶의 형성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적어도 이론적으로 동의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동의의 토대로서의 성경이 곧 성도들의 회중 됨을 확인시켜 주며 동질성의 토대가 됩니다.

따라서 성서의 이런 기능을 알았다면 설교자는 어서 빨리 본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의 설교를 듣는 설교 회중이 ‘성서적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한다면 ‘성서적 설교’로 교육하지 못한 우리 설교자들에게 상당 부분 책임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종교개혁적인 정신에서 설교자는 ‘말씀 속으로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즉 회중들을 대표해서 그리고 대신해서 말씀과 씨름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영의 양식을 준비하도록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인간 편에서의 설교자의 이해라면, 하나님 편에서는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이 부른 자가 설교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해 주도록 그리고 자신의 양무리를 먹이도록 뽑힘을 받은 자가 설교자입니다.

그리 보면 설교자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말씀해 놓으신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하나님의 기대와 회중의 기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 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창틀인 성경 본문을 제쳐놓고 어디 가서 하나님과 회중의 통로를 개설한단 말입니까?

회중들에게 전달되는 설교,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되려면 설교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추출된 메시지로 승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