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는 회중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회중은 어제의 그들이 아닙니다. 회중을 알지 못하고 설교하는 것은 또 하나의 직무유기입니다!

어제의 회중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선교사들이나 일세대 사역자들이 상대해야 했던 회중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대조되는 분들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신식교육도 받지 못했고 외국 문물이라는 것도 처음 접했으며, 유교적인 관습에 익숙한 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교육방식도 철저히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가 주로 교리적인 내용에 치중하였고, 설교방식 역시 일방적인 주입식 방식을 택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특히 이런 일방성을 띤 설교, 위에서 밑으로의 설교는 초기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당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는데, 그 이유는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인 호블란드가 이야기하듯, 지적 수준이 낮고 단순한 회중들에게는 이야기할 핵심을 앞에 두고 차분히 풀어 설명하는 게 효과적인 전달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성직자의 권위에 대한 강조는 이런 일방적 하향식 전달을 더욱 용이하게 했습니다.

오늘의 회중

하지만 현재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회중은 어제의 그런 회중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선교 초기의 정보 전달적 단계를 넘어선 상태입니다. 또한 ‘다원주의’라는 전문용어가 말해주듯 오늘의 회중은 절대 규범이 무너지고 도전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처럼 무조건적인 하향식 전달이 먹혀들어가질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설교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말씀과의 씨름뿐 아니라 회중에 대한 파악입니다.

설교가 회중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말씀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인데 그가 이해하는 설교의 합회중성이란 사람들의 기대를 총족시켜주는 것과는 그 개념 이해가 전혀 다릅니다. 그의 주장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이해 위에서 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이며 이것을 위해 온전히 봉사하는 것이 바로 설교의 합회중성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설교의 합회중성을 내용으로나 형식으로나, 인간 실존에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인간성, 죄성, 유한성에 적합하고 부합하는 그 어떤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설교의 합회중성이란 회중의 삶의 상황이나 학력 정도 인지능력정도, 그들 실존의 크고 작은 사건들, 선악간의 모든 시도들이 자연스런 회중의 사고에 해당되어야 하며 회중 구조를 분석함으로 하나의 법칙을 찾아내고 기준을 제정하고, 이 법을 복음과 대치시키고 또 이것을 말씀과 연결시키는 그런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과 인간으로부터 온 것을 종합시키는 것이 설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설교가 이렇게 된다면 바르트는 회중의 첫번째 질문, 즉 인류적, 사회적, 정치적 가능성들이 우선적인 질문이 될 것이고 그로부터 설교가 정지되고, 그리 되어서는 안될 설교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바르트와 동일한 신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투르나이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교의 합회중성을 이해합니다. 즉, 설교자가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는 설교를 해서는 안되며, 교회에서의 핵심 사안은 인간이 타인에 부응해가는 것이 아닌 모든 인간적인 것에서 등을 돌려 하나님에게 향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는 설교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그리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 울려퍼져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설교는 이 하나님과 구원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로 언제나 수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이런 완벽한 복음 앞에 서 있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 회중입니다. 복음의 완전함과 회중의 불완전함! 이 긴장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가? 연약한 인간이 설교 시간에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문제를 설교자가 간과해버린다면 과연 효과적인 설교의 전달이 가능할까요? 회중 자신들의 수용 필터는 자신들과 관계 있는 것을 다룰 때 활짝 열려지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원론적 신학적인 내용으로 일관하는 일방적인 선포로서의 설교가 이런 회중의 수용 필터를 활짝 열어 젖혀 왔단 말입니까?

말씀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원론적인 설교이해는 설교의 내용을 규정하는 데에는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회중의 연약성을 간과해버렸다는 큰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말씀의 신학에 기초한 설교가 회중을 모으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설교 역시 원론적인 차원만으로 충족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용이 아무리 정확하고 맞다 하더라도 효과적인 전달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회중을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이야기는 설교의 전달방식 이전에 설교의 내용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강단에서 즐겨 사용되어온 설교 주제들은 주로 죄, 구원, 은혜, 영생 등과 같은 관념적 교리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주제들은 신앙의 기초를 닦아주고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회중들의 직접적인 삶과는 유리되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회중들의 수용 필터는 자기 이야기를 할 때 그리고 관심사항에 활짝 열리기 마련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 동안 전달되지 않는 설교는 이런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마틴 쉬안(Martin Schian)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줍니다. 그는 그의 논문인 “설교의 과제”에서 “예배란 상호 교환적인 형태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축제적인 현재화”라는 이해 위에서 설교가 일차적으로 듣는 회중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바르트나 말씀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구원이 설교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반대하면서 구원받음은 모든 설교의 전제가 됨이 마땅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설교자가 말하는 모든 것을 연결지우는 토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설교는 삶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 짐을 내려놓도록 해야 하는 한편,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율법적 종교가 아닌)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쉬안은 회중들이 갖고 오는 요구가 매우 다양함을 직시하면서 그들을 단지 구원만을 요구하는 자로 보는 궁극적 시각에 설교가 매여 있음을 경계합니다. 즉, 설교자는 회중 심령의 부조리와 모순 극복을 향한 열망도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쉬안 역시 인간 이해에서 바르트와 비슷한 견해를 강조하지만 그러나 신학적인 죄인으로서보다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삶의 실존적 존재라는 데 더 강조점을 둡니다. 따라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설교가 이런 회중의 불완전함을 완전으로 이끄는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당연히 설교는 자기 회중을 위해 편성되기 마련이다. 물론 영원하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신 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인간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다. 인간에 따라 하나님의 방법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교자 역시 이 방법을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쉬안의 이러한 견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설교의 기본적인 토대를 복음과 구원에 놓고 그 위에서 회중의 문제를 적극 설교 속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설교의 회중 고려는 모든 설교자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설교자의 과제입니다.

문제는 상술한 것처럼 설교자가 떠안아야 하는 회중은 너무나도 다양하다는 사실입니다. 각 회중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상황도 그들의 문제도 각기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회중을 향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설교가 회중의 개체성과 집합적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쉬안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힙니다:

“우리 회중은 개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개인은 전체의 부분이다. 동시에 그 개인은 그 어떤 전체 자체이기도 하다. 설교자는 어떤 개개인에게 영향을 끼침에 있어 그 개개인을 전체로서 받아들이는 방법 외에는 없다. 설교자는 당연히 이 개체가 연합하여 이루어지는 전체로서의 회중을 연구해야 한다. 회중을 인도하고 위로하려면 그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심리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심리적인 설교가 필요하다”.

쉬안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설교가 회중을 고려하고 그들을 향한 설교가 되려면 우리는 말씀에 대한 이해와 연구 못지않게 회중에 대한 동일한 비중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즉 설교는 설교자의 입장으로 볼 때는 설교자 개인대 복수로서의 회중이지만, 회중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설교자와 자신의 일대일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양면적 관계에서 당연히 회중 개인의 기대는 100% 충족될 수 없습니다. 설교자 역시 이런 개체적인 사안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목회적 관찰

따라서 여기서 나오는 것이 소위 ‘목회적인 관찰’입니다. 즉 회중 개개인에 대한 관찰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한 목회적 관찰이 설교 속으로 수용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설교의 합회중성이 일차적으로 회중 자신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목회적인 관찰을 통해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설교자가 규정하여 채워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들의 상황이 갖는 성격을 규명하여 그것을 복음적으로 해석하고 복음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전자의 의미 일방으로만 설교가 흐른다면 그 설교자는 설교가 갖는 신적 차원을 상실한 채 인간의 말과 거짓된 기쁨을 충족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이치만이나 아트킨, 팔레츠 등의 ‘인간행위의 선택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존의 태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참여하고 선택적으로 인식하며 선택적으로 저장하고 선택적으로 회상한다고 합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선택적 참여’란 ‘선택적 노출’이라고도 하는데 청중 스스로가 좋아하는 연설만을 골라 듣게 되는 경향을 말합니다. 청중은 연설을 들을 기회가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듣는 게 아니고 자신이 좋아하는 연사의 연설이나 자신의 태도에 부합하는 연설만을 선택적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선택적 해석이라고도 불리우는 ‘선택적 인식’은 주어진 메시지를 청중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일단 참여하여 연설을 듣는다 하더라도 청중은 연설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내용만을 골라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선택적 저장’과 ‘선택적 회상’이란 자신이 좋아하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기억 속에 저장하고 회상해내는 경향을 가리킵니다. 즉, 청중은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자신의 태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쉽게 흘러버리고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필요한 것만을 골라 기억합니다. 이와 같이 청중이란 설교든 일반 연설이든 그들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설교와 연설의 내용을 해석하고 기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가 회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골라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어서는 안되고, 또 설교에서의 회중 이해가 그런 의미와는 관계없는 것입니다마는 분명한 것은 회중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거나 가르치려든다면 언제나 설교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회중이 듣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균열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