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스(Jay Adams)에게 배웁시다

 

 설교는 성경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회중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공리

흔히 ‘설교’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일정한 성경의 본문이고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물론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생각이 자리잡게 되기까지는 종교개혁의 유명한 설교이론가였던 멜랑히톤(Melanchthon)의 그 유명한 설교의 공리 “해석과 적용”(Explicatio et Applicatio)이 적지 않은 작용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즉 먼저 본문에 대한 철저한 해석이 앞서야 하고 그 다음 이것을 회중에 적절하게 적용시켜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설교들이 설교의 초반과 중반 부분을 거의 본문을 해설하는 데 할애하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이어서 회중에 대한 적용이 설교의 끝나갈 시점 정도에 등장합니다.

문제는 설교가 본문에 대한 설명에 치중하는 동안 회중은 관찰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관찰이라는 것은 나하고 대상 사이를 떼어놓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관찰하는 동안 관찰자는 결코 그 사안에 포함되지 않고, 따라서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 되는 겁니다.

또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런 식으로, 먼저 해설하고 그 다음에 적용하는 식으로 되어 있질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나 존 칼빈의 설교를 보면 해석과 적용은 순서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시적인 개념입니다. 즉 회중을 직접 본문에 도입하는 형식으로 설교를 전개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설교 일반에는 무엇인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설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

우리가 이 장의 제목을 ‘아담스에게 배우자’고 붙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말이 진리는 아닐지라도 설교의 핵심에 가장 정확히 다가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명제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설교는 성경에 대해(about)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부터(from) 회중에 대해(about)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설교가 곧 대화라는 이해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는 복음의 성격, 설교가 지금 여기서의 하나님의 말걸음이라는 이해가 이런 주장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대화로서의 설교! 그렇다면 당연히 대화의 파트너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말하자면 설교란 하나님이 회중에게 말을 거는 행위입니다. 설교자는 그 중간에 서서 이 대화를 중재하고 매개하는 통로가 되는 셈이고요. 그래서 설교는 비록 본문의 관점에 서서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인 대화의 상대는 본문이 아니라 회중입니다. 본문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창틀입니다. 그 창틀을 통해 즉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겁니다.

이와 동일한 견해는 독일계열의 설교학자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분명한 입장을 보이는 학자가 에른스트 랑게(Ernst Lange)인데 그의 설교이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설교란 회중과 함께하는 일종의 기독교적인 연설인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회중들의 생각 비전 신앙 경험 삶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성경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카톨릭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에 관한 정보(Information about God)로 이해하여 말씀 자체의 정보적 기능에만 치중한 채 그것의 지금 여기서의 생명력을 간과하였다면, 개신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성경의 차원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그것이 쓰여졌던 그 당시의 회중들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그것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담스는 이것을 좀더 세분해서 강연과 설교라는 구도로 설명하면서 우리 설교가 강연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합니다.

 

 

강 연

설 교

주안점

강연의 주제

설교의 목표

파트너

강연의 주제를 위한 문헌

설교의 회중

시제

그때 거기서

지금 여기서

인칭

3인칭 관찰자 시점

2인칭/1인칭 복수

지향점

지적 정보의 전달

知情意에 입각한 회중의 변화


강연이 아닌 설교를!

위의 표를 좀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강연에서 언제나 주안점을 이루는 것은 무엇을 강연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분명하고 뚜렷한 강연의 주제야말로 청중을 끌어모으는 일차적인 요인입니다. 이에 반해 개개의 설교에서 설교자가 주목할 것은 일차적으로 이 설교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물론 이 말이 설교에 있어서 주제가 부실하게 취급되어도 된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어느 연설이든 주제의 부각은 필수적인 요인입니다. 설교에서 설교자의 목표가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히 주제와 메시지를 포괄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설교의 목표는 - 그것이 성서적 설교인 한 - 언제나 본문에 대한 충분한 연구 뒤에 마지막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설교자가 설교계획에 따라 대강적인 설교의 방향은 미리 정할 수 있겠지요. 가령 우리 회중들의 상태를 볼 때 이번 달에는 신앙의 강화쪽에 설교의 주안점을 두어야겠다고 판단했다면 그 방향에 맞는 본문의 설정까지는 가능한 일이고 또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개개 설교의 보다 접근된 목표는 본문에 대한 연구 뒤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이런 본문연구 없이 설교자가 미리 자신의 생각으로 설교의 대강적인 진행과 내용을 결정해 놓고 시작한다면 이런 설교는 엄밀히 말해 성서적 설교가 될 수는 없는 일종의 주제 설교가 되는 겁니다. 설교자의 관심과 의도가 본문을 앞서가는 설교 혹은 본문으로 침묵하게 하는 설교 혹은 본문의 내용이 부차적이 되는 설교 말입니다.

성서적 설교란 성경본문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설교입니다. 성서적 설교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설교를 하자는 이야기이고 이런 맥락에서 ‘본문연구 → 주제 및 목표의 설정’이라는 도식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철칙입니다.


2) 강연에 있어 파트너는 엄밀히 말해 강연을 위해 집중해야 하는 주제와 그 주제를 위한 문헌입니다. 가령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계시이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고 합시다. 강연자는 당연히 갈라디아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때 양심적인 강연자라면 자신의 연구결과를 회중의 입장을 고려하여 바꾸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연구든 찬반의 양론은 따르기 마련인데 연구하는 과정에서 회중들의 눈치를 살피며 ‘흰색’으로 나온 결론을 ‘검은 색’으로 바꾼다면 그것은 진정한 학자의 자세는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엄밀히 말해 강연자에게는 회중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설교는 전혀 다릅니다. 만일 갈라디아서 1:1-10을 본문으로 설교한다면 당연히 설교자는 일차적으로 본문에 집중하겠지요 그러나 설교자는 본문으로부터 메시지를 포착해 이것을 오늘의 회중에게 적절하게 전달 및 해석해 넣어주게 되고 이를 통해 회중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즉 많은 성경내용 중에서 본문으로 정한 설교본문을 통해 회중의 ‘목회적 상황’에 말을 거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본문은 설교자가 회중에게 도달하는 일종의 통로이자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는 원천입니다. 당연히 설교에 있어 본문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회중에게 다가서는 통로이고 회중과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의 소재요 메시지의 출처인 것입니다.

3) 시제의 문제에 있어 강연은 그때 거기서를 문제삼습니다. 가령 사도바울이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그때)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거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이었고 그를 대적했던 무리들의 정체와 주장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문제삼습니다.

이에 반해 설교는 그때 거기서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지금 여기서를 문제삼습니다. 지금 여기서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들이 설교를 듣는 자들이지 그 옛날의 바울이 상대해야 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설교자의 상대는 아닙니다.

4) 강연에 있어 인칭의 문제는 당연히 3인칭일 수밖에 없습니다. 3인칭이란 말하자면 내 이야기도 아니고 네 이야기도 아닌 제3자의 이야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기본적으로 대화입니다. 대화는 그 특성상 2인칭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2인칭은 곧 너와 나의 대화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너의 이야기로 대화를 끌고 가기 마련입니다. 다만 칼빈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설교자 역시 말씀의 통로이자 동시에 설교의 회중입니다. 이런 면에서 1인칭 복수인 ‘우리’라는 주어 역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5) 강연에서 회중들이 바라는 것은 지적인 정보입니다. 즉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회중들이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아는 지적인 충족 그 자체로 이미 강연의 목적은 완성이 되었다 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설교는 좀 복잡합니다. 일찍이 기독교 설교학의 원조로 꼽히는 어거스틴은 그의 『기독교 교의에 관하여』라는 저서에서 설교가 “가르치고” “기쁘게 하고” “영향을 주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지정의(知情意)에 입각한 설교를 의미합니다. 즉 설교는 지적(知的)으로 들을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정적(情的)인 터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의지의 결단을 불러와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들에게 끝까지 남아 있는 숙제입니다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변화는 일어나고 있으며 그 변화를 이끄는 것은 설교자가 아닌 성령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조급할 이유도 낙심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는 회중이 교회를 떠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단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지정의(知情意)에 입각한 설교, 이것이 설교의 궁극적인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