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은 기본입니다.

 

철저한 주석으로부터 설교는 풍부한 자양분을 얻습니다!


설교에서 주석은 생명입니다! 성서신학적인 입장에서 주석이란 성경의 저자가 이야기하려 했던 것, 즉 ‘그때 거기서’ 구체적인 대상에게 말하고자 했던 의미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려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 중요성은 설교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오늘의 회중에게 전해지는 메시지가 본문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면 그 본문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인 전제일 수밖에 없지요. 이 작업이 제대로 되어야 성경의 초월적인 적용과 오늘을 향한 메시지가 온전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서신학이 말하는 주석이 설교를 위한 기본적인 작업이지만 그러나 설교의 필요충분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주석이 본문 이해에 상당한 공헌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석을 통해 본문이 말하려는 것을 100%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소위 역사-비평적 성서 연구방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점을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제물러 같은 사람은 성경도 다른 책들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생각해서 성경 역시 역사적인 연구 방법으로 해부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찾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인 전제로 기록된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전제를 인정하지 않으니 나올 것이 없을 수밖에요.

섣부르면 아니함만 못합니다!

주석적 작업이 설교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주석이 곧 설교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더욱이 신앙고백적인 기초가 전제되지 않은 채 가정과 상상력에 바탕한 ‘학문적인 주석’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설교와 관련해 주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번역이라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차피 성경은 원어로부터 다른 언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물론 원어로 성경을 볼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요. 그러나 이것 역시 적지 않은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칫 자신이 조금 알고 있는 원어 실력을 갖고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함으로 오역(Eigesis)이라는 더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중요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절대시하지는 마십시오.

원어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서 보이는 문제점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이 사역한 내용을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보다 우위에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 중에 자연스레 표출이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우리말 성경은 처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이런 식으로 설교해 나간다면 회중은 은연중 우리 성경에 대해 불신감을 가질게 분명합니다. 정말 조심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교를 위한 주석의 효용성

자, 다시 본래의 주제로 가 봅시다. 본문에 대한 주석적 작업의 도움이 필수적이면서도 학문적인 주석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면 실제 설교를 위한 주석적 작업의 주된 내용은 어떤 것으로 간추릴 수 있을까요?

첫째는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무엇보다도 번역된 말들은 원래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뉘앙스까지는 실어 나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번역된 언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잡아내는 것부터 설교는 시작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낫고 나서 예수님을 수종들었다는 기사가 마태복음 8:15 이하에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서 헬라어 동사 ‘디에코네이’를 ‘수종들었다’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생각에는 예수께서 그 집에 계시는 동안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 형태입니다. 즉 그냥 일회적으로 예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병고침을 받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 2:11 이하에 나오는 게바에 대한 바울의 책망도 원어와 우리 성경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게바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다는 기사는 우리말대로 하면 그것이 일회성이었다는 느낌이 강한데, 원어로 보면 미완료입니다. 즉 지금까지 게바는 여러 번 이방인들과 식사를 해왔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번역된 우리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 볼까요? 마가복음 1:5을 보면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두 구절 모두 ‘요단강에서’입니다. 그런데 원어로 보면 전혀 다릅니다. 5절은 전치사 ‘엔’(in)을 썼는데 반해 9절은 ‘에이스’(into)를 쓰고 있습니다. 전자는 그저 발을 담근다는 의미라면 후자는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단어의 의미를 좀더 접근해서 보게 되면 본문의 의미를 좀더 깊이 있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단어의 연구를 위해서는 그 단어의 용례와 시제 일차적 의미와 부차적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풍부한 배경 자료를 주석은 제공해 줍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1장에는 그 유명한 바벨탑 기사가 나옵니다. 거기 기록된 지명 가운데 시날 평지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흘러내리는 하류지역 즉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입니다. 이 지역에는 구약시대에는 앗수르 제국과 바빌로니아 제국이 자리잡았고 오늘날에는 이라크가 있습니다. 이곳은 바둑판 같은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가령 바그다드로부터 우르(Ur)까지 400km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전평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이 지역은 강 하류지역이기 때문에 매년 홍수에 의한 토사 침전현상으로 인해 진흙이 쌓인 비옥한 땅입니다. 바로 이 지역이 인류 최고 문명 중 하나인 수메르(Sumer) 문명을 배태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진흙 벽돌의 제작은 인류 문명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으며 본문에 나오는 역청(Bitumen)이라는 것 역시 오늘의 시멘트에 해당하는 것으로 진흙 사이에 좋은 접착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단어같이 보이는 진흙벽돌과 역청은 새로운 건축 소재를 의미하는 것이고 새로운 문명 창조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쌓고자 했던 것이 성인데 히브리어로는 ‘이르’라 합니다. 이것은 ‘성, 도성, 도시’를 뜻합니다. 이 말은 도시를 세운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대’(臺)라는 말이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믹달’인 이것은 탑(塔)을 지칭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건축술이 얼마나 발달되었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는 계단형으로 된 ‘지구라트’(Ziggurate)라 불리우는 높은 탑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르’에 남아 있는 것으로 주전 2천년 전에 건축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를 위에서 조감하면 전면의 길이가 60m 측면이 45m에 이르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구조물로, 현재 21m의 높이 부분까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바벨탑의 모형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정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경사적인 자료뿐 아니라 주석은 당시 사용되던 용어의 용례를 밝혀줌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창세기 11: 4에 “우리 이름을 내자!”라는 구절을 예로 들어봅시다. 흔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이름대신 인간의 이름을 날려보자! 인간의 명성을 떨쳐 보자!”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 원어로는 “우리가 우리 이름을 스스로 짓자”(Let us make a name for ourselves)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름을 짓는다는 말은 작명한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들이 스스로 작명하겠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둘 사이의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의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기록(창 2:18-19)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이름을 지어주고 지음받는 관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 인간에게 이름을 지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시날 평지에서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그 스스로 이름을 짓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곧 창세기 11장은 실패한 인간의 역사를 지적하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창세기 12장에서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2절)는 약속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름을 크게 지어주겠다는 말씀은 11장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늠케 하는 언급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 주석은 본문이 놓인 위치를 문맥과 관련하여 자리매김해 줌으로 본문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게 해 줄 뿐 아니라 저자의 집필 경향성 및 신학적인 입장을 파악하게 해줍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1장에는 바울의 독특한 논쟁적 어법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서신들과는 대조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가 쓰고 있는 내용들은 거의가 바울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되받아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또 2: 11 이하에 나오는 게바에게 면박을 준 내용 역시 문맥으로 보면 생략해도 되는 내용이지만 바울 자신의 사도권 주장과 관련해 의도적으로 집어넣고 있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주석적인 지식은 이런 내용을 통해 본문의 내용 파악을 좀더 용이하게 해 줍니다.

이처럼 주석은 본문을 좀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줍니다. 말하자면 설교에서 주석 작업이란 설교의 메시지를 추출해 내기 위해 본문을 더 깊게 그리고 풍성하게 읽기 위한 전초 작업입니다.

주석은 설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합니다. 주석은 설교가 아니고 설교의 메시지를 추출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풍성하게 읽는 전초작업입니다. 그것을 기초로 ‘지금 여기’의 메시지를 추출하는 설교는 고정된 사건과 문자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복음의 살아 있는 소리’(viva vox evangelli)를 기대하며 경청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작업입니다.

그러기에 설교란 경청의 작업이고 말하기 전에 듣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이러한 경청의 작업은 피를 말리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모든 설교자가 항상 성공적인 경청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설사 경청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설교자의 진지한 노력을 통해 주석상의 새로운 정보만이라도 회중에게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설교에 대한 회중의 피로와 식상함은 상당 부분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