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설교에 한 주제만! 나머지는 설득입니다

 

설교는 궁극적으로 선포이지만 그 과정은 설득이어야 합니다!

‘한 주제’라는 원칙

설교는 성경본문을 근거로 한 ‘기독교적 연설’입니다. 흔히 훌륭한 연설이라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복잡하지 않은 단순 명료함, 주제의 확실한 부각, 자연스런 전달 그리고 깊이 있는 내용과 감동을 불러일으킴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회중이 설교에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이 모든 요소가 적절하게 갖추어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변화’라는 것은 교회를 떠나면서 구체화되는 것이지만 그에 앞서 선행되는 ‘은혜’라는 것은 설교를 다 들은 뒤에 오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설교가 진행되는 순간 순간에도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설교가 끝난 뒤 뒤따르는 은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설교의 전체적인 구성과 전달이 성공적인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설교 중간중간에 오는 은혜를 이야기할 때에는 설교의 부분적인 내용이 지적인 충족과 정적인 터치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명심하여야 할 것은 설교를 듣는다는 것이 무슨 암기력 테스트처럼 전체를 암기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설교가 끝난 뒤에 도무지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이것은 매우 실망스런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국민일보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방금 들은 설교의 내용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0% 가량이 설교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강단에서 얼마나 자주 이러한 실망스런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삶의 변화는 고사하고 설교내용마저 한 시간도 채 못되어 기억하지 못하는 이 기막힌 실정 앞에 우리 설교자들이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되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지적될 수 있는 원인으로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설교의 일차적인 철칙에 소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설교에 한 주제만! 이것은 모든 연설의 철칙이자 동시에 모든 설교의 철칙인데 이것이 많은 설교에서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교 내용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기 위해서는 설교의 주제가 분명해야 하고 이 주제를 중심으로 설교가 초지일관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토어슨(Lester Thorssen)과 베어드(A.C. Baird)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연설이란 명확하게 정의되고 쉽게 한정된 논제나 목적을 갖는 것이 전제된다. 즉 이 논제는 진실된 것 하나를 분명하게 지각하는 데 장애가 되는 부수적 논제들로부터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 전개의 특징은 연설의 내용들을 풀어가면서 그 논제를 쉽고도 완전하게 발견하는 데 있다.”

밀러(Donald G. Miller)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설교 한편이든 하나의 주 아이디어를 가져야 한다. 요점 소대지들은 거대한 사상의 부분들이 되어야 한다... 모든 설교는 한 테마를 가져야 하고 그 테마는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성경의 부분적 테마가 되어야 한다.”

데이비스(H. Grady Davis)도 『하나님 말씀의 석의』(Expounding God’s Word)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잘 준비된 설교는 한 핵심적인 사상의 구현이요 발전이며 완전한 진술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다 동일한 맥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신발, 선풍기, 일기, 전화기, 연필 등과 같은 일상적인 단어 10개를 학생들에게 불러준 다음 기억력을 테스트해 보니 통상 7-8개까지 맞추더군요. 그런데 형이상학적 개념적인 단어들, 가령 폄하, 궁구, 실존, 역설 등 10여 개를 실험해 보니 불과 3-4개가 평균적인 암기 숫자였습니다.

물론 많은 설교자들이 한 설교에서 한 주제라는 원칙에서 출발한다고 항변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마는, 그럼에도 전달의 문제를 가져오는 것은 설교중간에 주제를 펼쳐나가는 데 논리적인 조직에 문제가 있든지 너무 복잡하여 회중이 설교 주제의 끈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이 한 주제에서 시작하지만 설교가 진행되면서 5-7개의 대지로 가지를 치게 됩니다. 설교자로서는 한 주제 아래의 대지라고 이야기하겠지만 막상 듣는 회중의 입장에서는 주제라는 숲은 잘 보이지 않은 채 나무라는 대지만 무성하게 보임으로서 복잡한 설교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노트를 들고 필기하지 않는 다음에야 뉘라서 이렇게 무수한 대지들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왜 우리의 설교가 꼭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제왕처럼 다수의 대지를 거느리는 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합니까? 회중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꺼번에 많은 것을 주려다 보니 그리된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설교자가 많이 주려는 분량에 대해 회중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차라리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많이도 필요없습니다. 그저 하나라도 좋으니 분명하고도 감동 깊게만 전해 주십시오!”

성경은 둘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설교에서 한 주제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은 우리 설교자에게 주어진 숙명입니다. 아니 만일 우리가 성경의 한 본문을 바탕으로 설교하는 것이 설교의 기본 적인 룰이라면 우리는 운명적으로 그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성경본문을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소위 ‘의미의 단일성’입니다. 가령 1-10절까지를 본문으로 정했다면 바로 그 단위가 하나의 의미로 나누어진다는 뜻입니다. 의미가 단일하다는 이야기는 곧 그 본문이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이 하나의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설교자가 많은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포사이드(P.T. Forsyth)가 주장한 것처럼 설교자에게 성경은 지고(至高, the superme)입니다. 그 최고의 권위인 성경이 한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제쳐두고 우리의 다양한 창작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의외로 우리 설교는 이런 넌센스가 마치 상식처럼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회중이 성경을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막상 그것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행해지면 무슨 말인지 감을 잡지 못하게 됩니다. 막상 성경의 기사가 설교로 선포되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 이것이 설교자의 전문가적인 기술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장 바람직한 설교는 2-30분의 설교라 하더라도 2-3분으로 요약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좀더 바람직한 설교는 1분으로, 다시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1년을 넘게 끌어오는 연속극도 알고 보면 단 몇 줄로 그 줄거리가 요약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설교자가 성경본문이 말하는 그 한 가지 - 물론 이 말이 그 본문은 언제나 그것만을 이야기한다는 기계적인 도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설교’를 위해 설교자가 본문과 씨름할 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그 한가지’를 의미합니다 -에 충실해야 합니다.

설교의 주제를 설정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주제는 성경본문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② 설교자는 그 주제에 대해 정통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③ 주제는 2-30분 내에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④ 주제는 회중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회중과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회중이 성경본문을 대할 때 어떤 면에서 이것이 내 이야기이고 거기 나오는 인물이 곧 나인가를 연결시켜 주어야 합니다. 본문과 회중 이 두 축을 연결시키는 제3의 거점이 바로 설교의 주제 즉 해석된 핵심 아이디어인 것입니다.

한 주제를 향한 설득작업으로서의 설교!

그러면 한편의 설교가 2-30분이라 할 때 그 나머지의 시간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언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말한다는 궁극적인 설교내용으로 볼 때 설교는 선포일 수밖에 없지만 설교실행의 측면에서 보면 한 주제를 회중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과정입니다. 모든 연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연설자의 주장에 회중이 동조하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설득은 단 하나의 핵심적인 사안을 회중의 반대와 의심 그리고 다른 견해를 하나하나 무마해가며 차근차근 접근해 갈 때 가능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아는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단언하고 명령하듯 다가서서는 다 큰(?) 성년들의 마음으로부터 진정 어린 항복을 받아낼 수는 없습니다.

‘A는 B이어야 한다’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는 식으로 설교자가 미리 결론을 다 내놓고 회중에게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방식으로는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일방적인 고지요 통보요 명령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훈계할 때에도 그 아이가 수긍하도록 이치를 따져가며 타이르기 마련이고, 당회에서 안건을 통과시킬 때에도 당회원들이 납득이 가도록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습니까?

설교에서의 설득이라는 것도 이런 일반론에서 멀지 않습니다. 따라서 회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디자이너 내지는 프로듀서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회중이 무리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주제에 접근해 들어갈 것인지에 관해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물론 대지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겠지요. 대지는 말하자면 지붕을 받치는 기둥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설교의 몇 가지 줄기는 눈에 띄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대지가 마치 무슨 하나의 독립된 또 하나의 주제식으로 아니면 그 대지 하나만으로도 또 하나의 설교가 되는 듯한 그런 인상으로 설교를 몰고 가지 말자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언제든지 설교는 단 하나의 주제하에 이 대지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반복적으로 체크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설교자는 회중로 지금 설교가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명쾌하게 짚어가도록 안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십시오! 이미 성경본문이 운명적으로 여러분을 그렇게 옭아매고 있습니다.

대개 설교의 핵심 주제는 서론의 끝 부분 즉 서론이 끝나고 본론에 들어가기 직전에 언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설교가 시작되자마자 핵심주제를 발표하게 되면 회중이 아직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서론을 통해 회중을 집중시켜 놓은 뒤 이를 언급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중간중간에 이 개념을 몇 차례 다시 언급함으로 회중로 확인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나의 주제를 어떻게 하면 회중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일방적인 선포방식으로부터 설득방식으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