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의 하나님을 그리며

 

최인식 박사(베를린 신대)

 

1.

나는 강원도 삼척에서 1956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기억은 없다. 시간만 나면 매년 대나무가 풍성한 그곳을 들리기는 하지만, 정작 나를 지배하고 있는 곳은 다른 데 있다. 푸른 동해바다와 설악산의 치마바위를 양옆으로 낀 작은 어촌 마을 '아야진'이다. 이곳에서 꿈꾸는 듯한 의식의 세계에서 자연의 미(美)를 그리며 자랐기 때문이다. 눈 덮힌 솔 나무를 크레파스로 그리고, 부서지는 검푸른 파도를 껴안는 '청간정'을 화폭에 담던 어린아이의 마음은 도회로 간 뒤 지금까지도 모든 사유의 밑그림이 되고 있다.

외가(外家) 쪽에는 한시(漢詩)에 정통한 외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삼척의 두타문학회를 이끌어 오신 시인 외삼촌이 계시다. 그들 거의는 불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친가(親家) 쪽으로는 돌아가시기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유교를 신봉해 오신 할아버지가 계셨다. 이와는 달리 뵌 적이 없는 할머니는 일찍부터 선교사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손들은 거의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가문의 장손이라 하여 나는 서울로 유학을 온 후, 할아버지의 특별 관리의 대상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사람이 공자의 말씀을 따라 살기만 하면 그로써 족하다는 것이었다. 나의 이름 중 '어질' 인(仁) 자도 할아버지의 그런 생각의 반영이었다.

"아침에 이불도 개지 못하고 나가는 놈이 누굴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단 말이냐?" 나에 대한 불만은 늘 그러했다.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시하지는 않았지만, 예수 믿는다는 자식들의 모습이 성에 안차하셨다.

 

2.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죄와 벌]을 통해 만난 도스토예브스키는 지금도 내게는 중요한 사람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처음으로 '사고'하는 계기가 그로 인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알버트 슈바이쳐의 삶이 나에게 준 충격파 역시 결코 작지 않다. 그의 예술과 신학 그리고 사랑의 실천은 내가 지금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그림이다. 청소년기에 만난 이들을 통해서 신앙의 고뇌와 미를 알기 시작하였다. 신학에 입문하고 나서 비로소 슈바이쳐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신학자였음을 알았다. 그의 신학함의 태도는 "한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자세로 탐구한 그의 '예수 연구'를 학부 졸업논문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정당성에 관한 물음>의 원자료로 삼았다.

폴 틸리히는 나의 신학 여정에 가장 오랜 시간 동반자로 남아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학부 3학년 때 컨콜디아 서점에서 우연히 알게 된 [Love, Power, and Justice]라는 소책자였다. "아,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구나!" 그는 신학하는 방법에 전혀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곧 바로 그의 주저인 [Systematic Theology]를 읽게 된 것이 신학을 보다 학문적으로 탐구하도록 한 시발점이 되었다.

         

도스토예브스키, 슈바이쳐, 틸리히는 젊은 시절의 스승이었다.

 

3.

서울신학대학은 내가 틸리히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영역에 보다 비중을 두었는데, 그것은 '아시아 선교'였다. 많은 선교 지도자들이 와서 신학생들의 헌신을 촉구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당시 서클 가운데 '아파트 전도대'의 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때에 내가 겪은 '개인전도'에 대한 체험은 지금까지도 매우 의미 있는 경험으로서 나의 신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매주 마다 10 내지 13명의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과, 나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해야 했고, 그 결과 겪었던 안타까움과 기쁨의 체험 등은 현장과 신학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임을 몸으로 배울 수 있었던 산 교육이었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나에게 틸리히는 어려운 인물이었다. 신앙의 실존적 문제를 깊이 다루었던 그의 사상을 혼자 이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도의 체험은 새로운 일이었다.

돌이켜 볼 때, 당시 '성결교회의 신학'은 적어도 내게는 '전도의 신학' 내지는 '전도를 위한 신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전도 없는 신학은 공허한 이론일 뿐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많은 신학 논문과 연구서를 집필하더라도, 정작 전도에 게으른 나의 생활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정당히 평가받겠냐는 것이다. 때로는 논문 한편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에 깊은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이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한 영혼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구원하는 일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 때는 더욱 그렇다. 이런 반성이 늘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성결교회의 복음 전도적 전통이 나에게 끼친 지대한 영향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학부 4년 간에 무결정적으로 체득한 '성결교회의 신학' 곧 '전도 신학'이 졸업 후 나로 하여금 '무녀도(巫女島)'와 '방축도'라는 낙도에 맨손으로 복음을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도록 한 힘이었을 것이다. 특히 무녀도 교회개척 선교는 지나온 나의 삶을 재조정하여 거칠게 밀려오는 미래의 영적 사역을 준비케 한 혹독한 훈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생명을 살리거나 태어나게 하는 일에는 반드시 해산의 진통이 따를 때만 가능한 엄연한 현실임을 몸으로 터득한 현장이 바로 무녀도였다.


4.

복음 전도의 일선에 있던 내가 독일로 유학을 간 것은 언뜻 볼 때 의외의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도의 신학' 다음에 오는 아주 자연스러운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신앙 생활의 성숙을 위해서는 보다 폭넓은 신학적 사고가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인간구원으로부터 시작하고 거기에 집중한 성결교회 전도신학의 전통을 새 시대에 '산 전통'으로 동력화하여 시대적 정신에 대하여 창조적이며 예언자적인 대화를 이루어나가야 할 과제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요한 웨슬레가 신학했던 태도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성서와 경험, 신앙과 이성을 '창조적 종합'의 차원에서 조화전개적으로 사용했던 점이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세계의 현실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원만한 신학방법은 신학의 질곡(桎梏)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나는 마땅히 성결교회의 신학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보다 힘있는 학문적 결실을 거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웨슬레의 신학 태도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5.

나의 학문적 관심은 세부적으로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한국신학사상을 발굴하여 학문적으로 다듬어 소개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다석 유영모, 이용도, 함석헌 제씨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나, 성결교회사를 비롯하여 한국교회사에 나타나는 주요 인물들의 신학적 의의를 밝히는 것이 나의 중요한 소임으로 다가오고 있다. 둘째는 폴 틸리히의 신학을 바르게 소개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그의 주저들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함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지나가는 20세기 신학의 유산을 바로 파악하는 일은 실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셋째는 문화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일이다. 특히 종교문화, 다원주의 정신문화, 멀티미디어 대중문화를 신학적으로 바르게 접근하는 것이다. 최근에 나에게 새로운 연구분야가 된 뉴미디어는 현대문화신학을 논하는 데에 요청되는 중요한 테마로 부각되고 있다.

현대인에게 비취어진 하나님의 이미지는 깨어진 거울로 우리의 얼굴을 보듯 그 본 모습을 찾기 어려워진 지가 오래다. 이제 신학은 본래적인 주제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회귀의 길은 간단치 않은 것 같다. 전통적 교의학으로 각인된 하나님을 다시 그리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방식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상은 다름이 없되, 우리의 인식론이 달라졌다. 세계는 선형적 세계 이해를 탈피해서 비선형적 프랙탈(fractal)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원근법적 스토리나 메타퍼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압축재현적이며 홀로그램적인 전방위적 체험으로까지 나가야 한다. '새 부대'를 마련해야 '새 술'을 담아낼 수 있다면,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의 '미(美)'를 그려낼 수 있는 신학은 어떠한 '부대'일 것인가. 지금도 '미'의 하나님을 그리기 위하여 붓을 빨아 새로운 색을 찾아 칠해본다. 우리 모두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 . !!
 

 

     

 

교문화, 다원주의 정신문화, 멀티미디어 대중문화를 신학적으로 바르게 접근하는 것은 나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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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의 신학적 관심은 독일어로 출판된 학위논문 {도와 하나님: 노자와 틸리히를 중심으로}(Frankfurt. a. M./Paris/New York: Peter Lang, 1991)과 국내에서 연구한 논문들을 묶어 출판한 다원주의 시대의 교회와 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96년 초판/ 98년 개정증보판); 미래교회와 미래신학(대한기독교서회, 1997); 서양종교철학(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 1998) 등에 단편적으로나마 표현되고 있다. 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道可道면, 非常道이요. 名可名이면, 非常名이라. 말로 이름함으로 진리를 어찌 드러내랴! 또한 爲學日益이요, 爲道日損이라. 학문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해야 하지만, 날마다 가진 것을 덜어내고 덜어내어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을 때까지 해야 진리를 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날마다 지식에 지식을 더하기만 하고 있으니. . .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