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신학의 전통에서 본

한국의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

한국기독교학회 제40차 정기학술대회(2011.10.22) 발표

 

 

(최인식 발제 /이신건 논찬)

 

  

I.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볼 때 그리 길지 않은 기독교선교 역사 가운데서도 교회성장, 목회, 해외선교, 신학교육, 사회참여, 구제사업 등 제 분야에서 세계 교회가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있다. 뿐만 아니라 신학의 발전에 있어서도 서구교회의 교리와 신학이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교회에 전수되었지만, 한국교회는 이를 창조적으로 재형성하여 한국 사회와 교회를 위한 신학을 추구해 왔다. 즉, 한국의 신학은 백성들이 겪어온 전쟁과 가난, 독재와 부정, 경제성장과 사회갈등과 같은 다양한 시련을 외면하지 않고 각 교단의 신학적 전통에 따라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다양한 교단에 속해 있음으로써 자신의 신학과 목회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감리교와 성결교의 신학적 주요 흐름을 요점적으로 정리코자 한다. 그리고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이 웨슬리신학의 전통 안에서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신학적 차원이 무엇인지를 밝힐 것이다. 또한 두 신학의 전통이 21세기에는 예수영성을 회복하는 길에 참여할 때 높은 신학적 성취가 있음을 주장코자 한다.

 

II. 한국의 감리교와 웨슬리신학

한국 감리교회는 1930년 12월 2일에 제1회 총회를 열어 “교리적 선언”을 제정하였다. 한국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 제2편 헌법 전문은 미국 감리교회를 통해 존 웨슬리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고 밝힌다.1) 이처럼 웨슬리의 정신에 기초하여 세워진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적 방향은 제1회 총회 당시 전권위원회 회장인 웰취 감독이 제시한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조선적 교회라는 3대 원칙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2) ‘진정한 기독교회’란 모든 표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며, ‘진정한 감리교회’란 웨슬리 전통에 서있으며, 그리고 ‘조선적 교회’란 한국에 토착화된 교회를 의미한다.3)

한국 감리교회는 설립 취지의 3대 원칙에 걸맞게 세계 감리교회가 감리교신학의 4대 원천으로 명명한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을 수용하였고, 그 위에 복음의 토양이 되는 한국적 종교와 정신적 상황을 첨가하였다. 그러므로 “감리교신학은 성서, 전통, 체험, 이성 그리고 한국의 종교적 상황과의 상호관계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가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4)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감리교신학은 웨슬리신학뿐만 아니라 한국이란 새로운 상황에 지속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토착화신학이라는 두 신학적 축을 가지고 있다.5)

 

A. 웨슬리신학으로서의 한국 감리교신학

교리와 장정.에 따르면, “감리교신학이란 직접적으로 감리교회의 조직자인 웨슬리의 신학과 감리교회의 종교강령, 교리, 즉 웨슬리의 설교집, 일기, 저서, 찬송가, 그리고 그 이외에 감리교의 이름에 얽힌 신앙과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다.6) 특히 1930년에 감리교 교리의 골자를 처음으로 천명한 “교리적 선언”에 나타난 서문과 8개 조항은 미국 감리교에서는 한국신조(Korean Creed)로 불리는데, 감리교의 교리 발전에 초석이 되어왔다. 선언문의 집필자에 대해서는 명확치는 않으나 웰치 감독, 정경옥 교수 및 양주삼 감독이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

문제는 이 선언이 ‘얼마나 웨슬리적이냐’는 것인데, 이에 대해 두 가지 대립된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감리교 조직신학자 이정배는 그 선언문에는 웨슬리의 신학과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교리적 선언 속에는 “삼위일체, 십자가 사건, 부활 증언 그리고 성서 권위와 같은 전승된 교리들과 신앙, 의인 등의 종교개혁의 원리들, 회심과 성화, 성령에 의한 구원의 경험적 확증과 같은 웨슬리적 특성들이 함께 삽입되어 있다”8)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교리적 선언은 “당시의 미국감리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너무나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교리라고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웨슬리 전통의 메도디스트 신앙이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9)는 입장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에 따라 감리교는 1997년에 새로운 8개 조항의 “한국 감리교회의 신앙고백”을 내놓기에 이른다.

한국 감리교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이러한 상반된 입장에도 불구하고 1930년의 교리적 선언은 역사적으로 감리교의 신학적 방향과 지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혹 교리적 선언의 8개 조항이 소위 복음적 내용을 다 담아내기에 미흡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교리적 선언의 서문에서 “그리스도교회의 근본적 원리가 시대를 따라 여러 가지 형식으로 교회의 역사적 신조에 표명되었고 웨슬리 목사의 <24개 교리>와 <설교집>과 <신약주석>에해석되었다. 이 복음적 신앙은 우리의 기업이요, 영광스러운 소유이다.”고 웨슬리신학의 전통에 서 있음을 명확히 선언해 놓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감리교의 회원이 되는 기준은 교리나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것인 바, 이와 같은 것은 “웨슬리 선생이 연합속회 총칙에 요구한 바”와 같다는 교리적 선언의 주장은 충분히 웨슬리적인 것으로 판단된다.10)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현재까지 형성되어 온 감리교신학의 특징을 감리교 조직신학자 김영선은 6가지로 정리한다. 감리교신학은 1)철저히 성서적이다. 2) 성령의 내적 증거인 초월적 경험을 강조한다. 3) 구속의 은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만인구원을 강조한다. 4) 성화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를 믿는다. 5) 복음운동의 현장에서 형성된 신학으로 복음적이며 실제적이 다. 6) 기독교의 여러 전통의 장점을 받아들인 창의적 종합이다. 7)관용정신을 가진 에큐메니컬 신학이다.11) 한국교회사가 민경배는 이러한 감리교의 신학적 특색에 대해서 장로교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장로교는 1912년 총회가 독립하기는 했으나 독자적 신앙고백과 경전 및 정체의 부재라는 애로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감리교는 한국 교회의 신앙이 미국 교회의 역사적인 필연성과 전혀 무관한 사실을 들어 선교부에서 완전 독립된 한국적 감리교의 형성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사의 신기원이 여기 높이 솟아난 것이다.”12)

한국 감리교가 웨슬리의 전통 가운데서도 특별히 이어가고자 시도했던 것은 웨슬리가 일생을 두고 가르치고 실천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성화를 한국적 상황에서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개인적 성화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성화이다. 사회적 성화는 기독교 사회 윤리적 차원에서, 개인적 성화는 부흥회나 신자들 개개인의 영성생활의 차원에서 강조되어 왔으나,13)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개인적 성화보다는 사회적 성화에 보다 더 큰 비중이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에는 초기 한국 감리교회가 채택한 16개조 “사회신경”(1930)이 있었다. 이것은 웨슬리의 사회성화 사상을 실천하는 기초가 되었다.14)

“사회신경”은 모두 1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바, 하나님의 창조와 생태계의 보존, 가정과 성 및 인구 정책, 개인의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노동과 분배 정의, 복지 사회 건설, 인간화와 도덕성 회복, 생명 공학과 의료 윤리,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정의 사회 실현, 평화적 통일, 그리고 전쟁 억제와 세계 평화에 대한 감리교회의 사회적 실천 강령이다. 이러한 강령은 웨슬리가 강조한 사회적 성화에 대한 실천적 의지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김홍기에 따르면,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는 성육신적 요소로서 세속성으로부터 분리된 성별의 힘을 갖고 세속을 찾아가는 성육신의 참여 곧, 사랑의 적극적 행위를 세상 속에서 실천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15)이기 때문이다.

 

B. 토착화신학으로서의 한국 감리교신학

한국 감리교신학의 지침은 웨슬리의 4대 규범인 성서, 전통, 경험, 이성에 ‘토착문화’가 더해져 모두 5가지로 되어 있다.16) 이는 1930년 12월 한국에서 남감리교회와 북감리교회가 통합될 때 진정한 한국교회를 추구하겠다는 정신과 부합되는 내용이다. 한국 감리교신학은 이처럼 진정한 한국교회가 되도록 한국문화를 중시하는 토착화신학의 수립을 교회 창립 시부터 요청받고 있다.17) 토착화신학은 예배, 신조, 영성, 선교와 같은 전 신앙생활에서 복음이 한국인들의 문화와 심성에 뿌리내려 열매 맺게 하는 것이며, 한국 종교문화를 선험성(주체성)으로 하여 기독교 복음을 해석하는 작업이다.18) 이러한 신학적 작업은 초기의 탁사 최병헌(1858-1927)으로부터 시작하여 정경옥,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그리고 이정배 등에 이르기까지 웨슬리의 성화신학과 더불어 한국 감리교신학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감리교신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정경옥은 한국 문화와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일반계시의 중요성과 의미를 발견하고 양자의 관계성에 주목하였으며, ‘시대화’와 ‘향토화’를 역설하면서 토착화신학의 이론을 제공하였다.19) 성(誠)의 신학을 전개한 윤성범, 풍류신학을 논한 유동식, 종교신학의 장을 본격적으로 연 변선환이 한국의 민족적 주체성에 기반한 신학방법론의 장을 열었다면, 그 후의 신학자들은 민족적 주체성에 기초한 신학방법론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제문제에대한 반성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토착화신학은 웨슬리신학의 주장과 내용 자체를 주된 신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정배는 이들이 웨슬리신학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음을 역설한다. 즉, 토착화신학에 나타나는 주체적 경험에의 강조, 기독교의 사회적 종교로서의 책임감, 또한 타종교를 대하는 에큐메니컬 정신 등이 웨슬리의 정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20)

이제 3세대 신학자들은 토착화신학이 그동안 견지해 왔던 “민족” 개념을 극복하고자 한다. 한국적 신학이 나아갈 방향은 토착화를 실현하면서도 세계화를 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정배는 혈연적, 폐쇄적 민족주의와 서구 담론에 의한 탈민족주의 양자를 수정보완하는 차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를 제안한다. 이는 ‘열린 민족주의’이며, 서구중심적 민족주의도 아니고 자기중심적 종교적 민족주의도 아니다. 이는 민족개념을 유지하면서 탈민족의 담론을 아우르고자 하는 것이다.21) 세계 개방적인 이러한 토착화신학의 담론은 18세기 웨슬리가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친 선교적 비전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III. 한국의 성결교와 웨슬리신학

한국 내에서 성결교신학을 공식적으로 함께 말할 수 있는 교단이 많이 있겠지만 “웨슬리안” 전통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데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및 나사렛성결교회이며, 이들은 한국성결교회연합회 회원 교단으로 깊은 연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외에도 오순절 계통과 구세군과 같은 교단도 직간접적으로 성결교신학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중복음에 대한 강조점과 해석의 다양성을 전제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주요 교리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메소디스트 운동은 미국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쳐 미국 감리교회를 형성하였고, 대교단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감리교내의 성결운동은 약화되는데, 이때 다시 18세기에 일어났던 웨슬리의 성결운동을 회복하려는 자들이 감리교회 안에서 나타나 활동하기 시작했다. 1867년에 전국성결연합회(The National Camp Meeting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가 결성됨으로써 감리교 내의 성결운동은 본격화되었으며, 이들의 영향력은 감리교를 넘어 미국 전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미국의 감리교회는 이처럼 확산되어 가는 성결운동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22) 성결단체들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했으나, 성결파 신자들은 계속 성결운동을 위한 집회를 가짐으로써 감리교 당국에 의해 추방당하는 결과로까지 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출현한 교단이 나사렛교회(The Church of Nazarene)와 만국성결교회(International Holiness Church)이다.23)

미국의 전국성결연합회는 19세기 중엽의 감리교회가 부르주아화 하고, 관료화하고, 예배의 생명력이 상실되고 있고, 신학교육은 영적 체험보다는 지식 습득이 우선시되고 있고, 교회의 문화는 세속화되고, 신학은 예일대학을 중심으로는 하는 진보적인, 소위 ‘뉴헤이븐(New Haven) 신학’을 수용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성결운동의 역사적 필연성을 확인하였다.24) 그들은 이러한 비판적 의식 가운데서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특히 뉴헤이븐 신학이 인간의 도덕적인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원죄를 부정함으로써 죄를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로만 보고 인간의 부패성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판하였고, 대신에 온전한 성화는 인간의 부패성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다니엘 웨돈(Daniel D. Whedon)을 비롯한 미감리교의 진보적인 학자들은 성화를 내면의 변화가 아니라 외적인 도덕률의 준수 혹은 사회적 책임으로 보면서 전국성결연합회의 이러한 비판과 주장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신학이라 일축했다. “성화는 우리의 내적 본성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내부에 있는 죄에 대한 경향성들에 대해 제어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구성하는 것은 제거(removal)가 아니라 억제(repression)”25)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으로 나가는 새로운 감리교신학에 대해 19세기 후반의 성결운동은 1885년 시카고에서 열린 제1회 성결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원리선언>을 통해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온전한 성화는 다음의 세 요소를 포함한다. 먼저 육욕적인 마음의 철저한 소멸, 즉 죄의 선천적 원리의 전적인 제거, 둘째로 심령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교통 ··· 셋째로 성령의 내주하심이다.”26) 이들 신학의 차별적 특징은 성결을 중생과 구분하여 성령세례를 통한 성결의 은혜 체험을 강조한 것이다.

다른 한편, 영국의 플리머스 형제단 출신의 존 달비(John N. Darby)가 정립한 세대주의적 전천년 사상은 19세기 후반 영국국교회 내에서 개혁파 성향의 목회자 중심으로 일어난 성결운동인 케직운동(Keswick Movement)과 영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주의 재림이 촉진된다는 긴박한 종말론적 기대와 성령세례를 통해 복음 전파의 능력이 획득된다는 신앙이 하나가 되어 강력한 선교의 열정과 동력이 발생하였다. 미국에서는 무디(D. L. Moody)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케직운동과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만나게 되었고, 그 가운데 케직운동에서 강조되고 있었던 신유와 전천년설은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들 중에 특히 리스(Seth C. Rees)는 1897년에 오하이오주 신시네티를 중심으로 성결운동을 전개한 감리교회 목사 마틴 냅(Martin W. Knapp)과 함께 만국성결연맹 및 기도동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을 결성했다. 이들은 감리교 전통에서 강조해 오던 중생과 성결 위에 새로이 신유와 전천년설적 재림 사상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이슈들이 하나의 통합적인 체계로 이해된 것이 바로 사중복음이다. 그러므로 사중복음은 아카데미적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반성되어 나온 신학적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만국성결교회는 <하나님의 성서학원>을 통해서 사중복음을 전수하였는데, 그 가운데 찰스 카우만과 길보른이 이곳에서 훈련받고 일본 선교사로 파송 받아 <동양선교회>를 창립하였다. 이 동양선교회를 통해서 사중복음은 교단을 초월하여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한국성결교회는 바로 이 <동양선교회>의 <동경성서학원>으로부터 훈련받은 한국인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고명우라는 의사의 추천으로 1905년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한 김상준과 정빈은 만국성결교회가 주창하는 신학적 입장을 전수받아 한국에 웨슬리안 성결운동을 전개하는 기수들이 되었으며, 이들이 1907년 귀국하여 세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 오늘날의 한국성결교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한국성결교회는 16세기의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강조한 종교개혁신학과 이에 근거하여 18세기에 이신성화(以信聖化)를 주창한 웨슬리신학의 전통 위에 19세기 성결운동을 통해 강조된 신유와 재림의 교리를 통합적으로 수용하는 신학적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전통 위에 성결교회는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신학(The Protestant Evangelical Theology of Wesleyan Fourfold Gospel)”이라고 정립하였다.

 

A. 웨슬리안 신학으로서의 한국 성결교신학

한국 성결교회는 자신의 신학을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신학”이라 천명한다. 여기에서 ‘개신교 복음주의’는 신학 범주로서 종교개혁의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신학을 수행함을 의미하며, ‘웨슬리안’이란 웨슬리가 실천한 신학방법과 원리를 따르는 것이며, ‘사중복음’이란 신학이 궁극적으로 전개해야 할 내용으로서의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성결교회의 신앙개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는 내용과 같다.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의 신앙개조는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노 말매암아 나타내심과 요한 웨슬네의 성서해석의 근본적 교리와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주강생 일천구백이십오년에 공포하야 성서학원과 모든 교회와 사도들의게 가라쳐 영구하도록 직히는 신경(信經)으로 하나니라.”27) 특히 성결교회 최초의 헌법이 성결교신학의 토대를 “오직 옛날 웨슬레씨와 감리회의 초시대 성도들이 주창하던 교리”에 둔다고 천명한 것은 웨슬리신학이 성결교신학의 기원이 됨을 선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결교신학이 감리교의 웨슬리신학에서 주목한 것 중 첫 번째는 성서와 경험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신앙의 모든 것은 성서에 근거해야 하며, 성서의 진리는 체험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경험의 시금석이며, 경험은 성서의 진리를 확증해 준다. 그러므로 성결교신학은 웨슬리와 같이 복음적 회심 체험과 성서적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 성서의 사상을 신학적으로 논증하거나 교리화하는 일보다는 체험하고 증거하는 일에 우선성을 둔다. 백 년이 넘은 성결교회가자신의 고유한 교리문답서나 교리신학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점은 성서와 경험이면 성서의 진리를 밝히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성결교회는 웨슬리가 성서와 경험을 강조한 것 못지않게 전통과 이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서의 진리를 강조하고 동시에 경험적 신앙의 삶을 추구했을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교회의 전통과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비판 기능을 견뎌내야 할뿐만 아니라 전통과 이성을 통해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 개인의 체험적 확신을 바탕으로 전도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실천의 책임을 다하는 때 온전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되기 때문이다.

성결교회는 기본적으로 웨슬리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득의(以信得義) 신학에 머물지 않고 이 신성화(以信聖化)의 교리를 재발견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신자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값비싼 은총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28) 특히 웨슬리가 중생과 온전한 성화를 구별한 점과 중생뿐만 아니라 온전한 성화도 순간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현재의 삶에서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 적극 동의한다. 그러므로 분명히 성결교회의 성결론/성화론은 철저하게 웨슬리로부터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29)

그런데 성화의 과정에서 성결교회가 중시하는 성령세례에 대해서 웨슬리는 성결교회와 같은 정도로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성결교회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웨슬리가 당시 자신의 후계자로까지 지명했던 존 플레처(John Fletcher)가 발전시킨 성령세례관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30) 반면에, 성결교회는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입장인데, 이러한 점은 성결론의 기원을 웨슬리에게 두면서도 그와 다른 측면이 성결교신학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성결교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18세기 영국의 웨슬리로부터 기원하되 19세기 미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신앙개조를 근간으로 해서 한국의 성결교회가 발전시켜 나가는 신학이다. 특히 성결론의 관점에서 볼 때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핵심은 교리적 차원에서는 세 가지, 즉 중생과 성령세례는 구분되며, 성결은 성령세례이며, 그리고 죄성은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령세례와 관련해서는 역사적으로 검토해 볼 때, 팔머(Phoebe Palmer)의 영향이 크다. 미국 이민 2세 감리교인이었던 팔머는 웨슬리와 플레처의 성결론을 결합하여, 중생한 신자는 모든 것을 제단(祭壇) 되신 그리스도 위에 내려놓음으로써 성령세례에 의해 순간적으로 성결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31) 이것은 웨슬리가 영국 상황에서 유보하고 있던 성령세례를 플레처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웨슬리안 신학’이란 웨슬리신학의 핵심적 원리를 지키면서 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개방적인신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웨슬리신학의 원리들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미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웨슬리신학의 중요 원리를 지키면서 발전시켜나가려 했던 실례로 평가된다. 즉 한편으로는 미국 감리교회의 신학이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강조하면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향에 대해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세례로써 인간의 죄성이 제거되어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낙관적 은총론을 전개한 것이다.

 

B. 사중복음신학으로서의 한국 성결교신학

일본에서 동양선교회와 동경성서학원을 설립한 카우만과 길보른은 “웨슬리가 가르친 중생과 성결의 도리”와 함께 “신유와 재림도 힘써 가르치며 세계선교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1913년에 조직된 만국성결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선교사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중생, 성결, 신유와 재림의 사중복음을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김상준은 .사중교리.를, 이명직은 .기독교의 사대복음., .신학대강., .그리스도교의 대강령., .신약전서사경보감.을 통하여 사중복음을 통한 웨슬리안 성결운동을 한국 땅에 전개했다.

이와 같이 사중복음은 교회 현장에서의 단순한 전도표제를 넘어서 신약성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신학적 “규범”으로까지 확대 발전될 수 있는 주제임에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32) 여기에서 사중복음이 신학적 규범이라 주장될 수 있는 근거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이란 모든 인류에게 들려져야할 보편적 가치로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인류 역사 위에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알아듣기 쉬운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33) 이러한 사중복음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만 그 본래의 신학적 의의가 확보될 수 있다.

특히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사중복음에는 신적 우위성과 우선성이 확인된다. 성결교신학의 교의학적 기반이 되는 사중복음은 삼위일체 신학의 틀에서 바로 이해될 수 있기때문에 신 중심적이라 할 수 있으며, 취급하는 모든 신학적 주제들은 성서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어서 사중복음은 성서적 특성을 지니며, 목회와 선교 현장에서 체험되어야 할 내용으로서 실천적이며, 초대교회 이후 성서에 기초한 신학의 전통을 자유롭게 수렴함에 있어서 통전적이며, 현대의 사상과 제 문화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변증하고 선포할 때 언제나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또한 사중복음은 개인적/실존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사중복음이 신학적으로 관계될 때 전면에 대두되는 것은 ‘나’와 ‘공동체’의 문제다. 사중복음에서 ‘나’의 문제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영성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나만의 절대적이며 배타적인 관계 가운데 있는 구원의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 또한 사중복음은 ‘이웃과 나’와의 공동체적 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나’의 문제가 창조주와 나의 문제였다면, ‘공동체’의 문제는 창조물과 나의 문제로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 자연, 문화, 민족, 종교 등, 내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자체이다. 이처럼 사중복음은 크게 영성신학과 공동체신학의 틀로써 그 신학적 의의가 전개될 수 있다. 사중복음적 영성신학과 공동체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이들 간의 상호연대가 깨어지면 사중복음신학의 고유한 사명은 감당키 어렵게 된다. 사중복음신학이 전개하는 중생, 성결, 신유, 및 재림의 신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중생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참된 생명의 탄생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도 생명의 역사요, 그리스도를 보내심도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요, 성령을 보내심도 만물을 생명 가운데 충만케 하기 위함이다. 죄악과 거짓으로 죽음의 세력이 역사하는 현실에서 중생의 복음은 진실로 생명의 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영혼은 중생의 복음을 믿음으로 참된 생명의 인생을 출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공동체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는 특권과 동시에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중생의 신학은 오늘의 세계와 역사에 생명의 문화를 창조하기 위하여 생명의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을 감당해야 한다.

성결은 성령세례로 이루어지는 참된 사랑의 탄생이다. 성결론의 핵심은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과 인격의 완성에 있다. 성결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개인의 인격에 임재함이며, 그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거룩한 영은 개인만이 아니라 성도의 공동체에도 현재적으로 임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움과 분열의 세력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성결의 복음은 진실로 ‘사랑의 신학’을 가능케 한다. 성결의 은혜야 말로 성서 전체가 기다리는 성령의 진정한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결의 신학은 오늘의 실존 가운데 사랑의 문화를 창조하는 사랑의 신학을 전개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신유는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회복의 역사이다. 이 회복의 역사는 병든 몸의 고침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질병에 의해 파괴된 모든 현실에 대한 구원과 회복을 포함한다. 생명을 지닌 모든 정신적, 문화적, 역사적, 육체적 존재는 언젠가는 쇠약해지고, 깨어지고, 소멸한다. 오늘날 실존하는 모든 자연, 문화, 역사, 인류,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 이러한 때 신유의 복음은 이 세계의 고통을 하나님의 손으로 치유하는 '회복의 신학'을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신유의 신학은 파괴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생태계 가운데 회복의 문화를 창조하는 회복의 신학을 전개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재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의로 심판하시기 위해 피조물의 역사에 다시 오시는 사건이다. 이 땅 가운데 진리로 주장되어온 모든 학설, 이론, 종교, 윤리, 가치, 세계관 등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통해 그 빛 가운데서 진실과 거짓으로 나뉘는 공의로운 심판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진리의 이름으로 포장되었던 모든 위선들이 드러날 것이며, 불의로 인해 박해를 받았던 모든 자들의 의가 만천하에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로써 진정한 세계평화와 역사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재림의 복음에 기초하여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모든 분야에 '공의의 신학'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재림의 신학은 불의의 힘이 세력을 더하고 있는 오늘의 역사 가운데 공의의 문화를 창조하는 공의의 신학을 전개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34)

 

이와 같은 사중복음신학은 기존의 어떤 교리적 체계 안에 개념으로만 정의되는 것을 거부하고 체험적인 자리에까지 나아가 온전한 구원을 일으키는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사중복음신학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 넷이 아니라 하나요, 하나의 몸 안에서 유기적으로 생명, 사랑, 회복, 공의의 능력을 발휘하는 복음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중복음신학은 특별히 재림의 빛 아래서 종말론적인 선교의 긴급성을 유지함으로써 성결의 은혜를 사모하는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데 그 역사적-신학적 사명이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밝힌 중생의 진리와 18세기 웨슬리의 성결과 19세기 웨슬리안 성결운동을 통해 세워진 신유와 재림의 통전적 진리에 입각하여 세계교회와 인류에게 온전한 구원의 복음을 밝히는 사명이 성결교신학에 위탁된 것이다.

 

IV. 한국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의 사명

한국의 감리교와 성결교는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말할 때 언제나 존 웨슬리의 삶과 사상에 역사적 기원을 두는 데 이의가 없다. 그러므로 웨슬리신학 안에서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은 둘이 아니요 언제나 하나이다. 역사적으로도 한국에서 감리교의 웨슬리 신학자들과 성결교의 웨슬리 신학자들은 웨슬리신학을 발전시키는 일에 늘 공조해 왔다. 앞으로도 웨슬리신학이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신학으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웨슬리신학의 참된 본질을 더욱 선명히 밝혀야 할 사명이 있다.

다른 한편, 감리교는 토착화신학을 그리고 성결교는 사중복음신학을 발전시켜 가고 있는데, 각 교단은 이 역시 웨슬리신학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감리교는 웨슬리신학과 토착화신학을, 성결교는 웨슬리신학과 사중복음신학을 유기적 일체로써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토착화신학과 사중복음신학을 통해서 종교개혁자들과 웨슬리가 추구하고자 했던 복음의 참된 능력을 한국 교회가 깨닫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A. 웨슬리신학

한국교회에 인식된 감리교의 웨슬리신학은 주로 “사회”의 성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성화(Sanctification)”의 신학이고, 성결교의 웨슬리신학은 주로 “개인”의 성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성결(Holiness)”의 신학이다.35) 성결교는 성결의 복음을 전하고 또한 경험하는 것을 교단의 존재 이유로 알았기에 교회의 이름도 성결교회라 이름을 붙일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중생의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이라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통해 성결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액면적으로는 감리교의 성화신학과 성결교의 성결신학은 그 방법이나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회적 성화와 인격적 성결이란 본질적으로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서로가 상보적이지 않으면 웨슬리가 추구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적합한 성화 내지는 성결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가장 시급한 웨슬리신학의 당면과제는 인격적 성결과 사회적 성화의 사상을 유기적 관계로써 이해하고 또한 삶의 현장에서 실현해 나가도록 하는 길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웨슬리의 신학적 사고에 서방교회와 더불어 그리스 동방교회 역시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과, 또한 그의 신학에서 영혼의 구원과 신앙만이 아니라 선행 역시 중대한 주제였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신앙 자체만을 위하여 교리화될 수 없고, 윤리적 행위와 상관적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던 웨슬리의 통합적 관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36) 웨슬리의 이와 같은 에큐메니컬 영성 안에서 성결교의 성결신학과 감리교의 성화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실현하는 양 날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결의 복음 자체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곧 개인적(personal)인 동시에 수평선적인 면, 곧 사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37) 개인적 성결과 사회적 성화는 동시에 완성을 향해 나가는 것이지, 하나의 완성 이후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국의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는 웨슬리신학의 양 날개이다.

 

B. 토착화신학

한국의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해 비상해야 할 양 날개라면, 양쪽의 신학 역사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대로,38) 감리교신학은 진보적인 왼쪽 날개요, 성결교신학은 보수적인 오른쪽 날개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좌우의 성향에 따라 성결교신학은 웨슬리의 성결신학과 미국 만국성결교회의 성결운동이 강조한 교리인 사중복음을 신학적으로 심화시켜 온 반면, 감리교신학은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와 에큐메니컬 정신과 이성을 중시하는 전통 위에 서 서 1930년에 발표한 “교리적 선언”에 나타난 대로 “한국적” 교회를 위한 토착화신학을 지속적으로 구축해 오고 있다.

현대의 감리교 토착화신학이 “한국 종교문화를 선험성(주체성)으로 하여 기독교 복음을 해석하는 작업”39)으로 발전되기까지에는 초창기(1884-1930)부터 이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과 연구들이 있어온 역사가 있다. 그 특징은 “변증적”이었으며, “선교적”이었다. 선교 초기 조선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사상이 기독교의 전래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한국에 먼저 토착화된 주류 종교들과 비교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포괄적인 성취론의 입장”에서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를 변증함으로써 기독교의 정체성을 내외적으로 알리는 것이 토착화신학의 사명이었다. 이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과 민족과 세계의 구원의 길로 믿고 받아들인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유 · 불 · 선 등 타종교의 약점과 한계가 복음에 의해 보완되고 완성되었(다)”는 신념 위에서 기독교변증신학이 시작되었다.40)

토착화신학은 이후 시대와 인물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해 오면서 대별하여 탁사 최병헌의 기독교변증신학, 유동식과 윤성범의 종교대화신학, 및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신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탁사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와 평가는 매우 다양한데, 이는 토착화신학 자체에 대한 개념이 아직도 형성 중에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41) 아무튼 이러한 토착화신학에 대하여 감리교 교회사가 성백걸은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하나는 “주체적이고 한국적인 신학수립에 기여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이며, 다른 하나는 토착화신학에 문제점이 있다는 분석이다. 그문제점이란 “이런 토착화 신학의 작업과 언어가 신학교 안에 갇힌 신학자만의 언어로서 끝나고 교회현장과 민족현실 속으로 흘러가지 못해서 실제로 한국감리교회의 신학적인 체질을 형성하는 데는 별 효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42)

그러나 토착화신학의 목회적 혹은 교회적 효용성에 관련한 이러한 비판적 평가는 성급한 기대감에 대한 반영인 것으로 보인다. 토착화신학의 과제는 말이 상징하는 바대로 서구교회에서 만들어진 교리와 신학이라는 비료를 사용하기보다 좀 더디지만 자신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 신학적 자생력을 키우려는 공정(工程)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동안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근대 서구사상 및 서구신학으로 그릇된 편견으로 바라보게 된 한국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가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복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여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다. 아울러 이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주로 조직신학이나 종교 문화신학적 접근이 있어 왔는데, 이제부터는 성서학과 교회사적 연구와 더불어 실천신학도 참여해서 토착화신학의 통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간학문적 노력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복음 신앙은 초자연적 은총의 사건이지만, 이 은총의 신앙적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위한 에너지로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사유의 틀과 문화적 코드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토착화신학의 변함없는 과제가 여기에 있다. 우선은 한국의 종교 문화를 토양으로 하여 복음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는 여기에만 결코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마디로 다문화, 다민족, 다종교의 현실을 동시에 또한 어디에서든지 경험하는 지구촌 시대에 모두가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특정 민족 중심의 신학을 넘어서는 “열린 민족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다.43) 그러나 소수민족에 대한 지배적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의 우월감이 잔존해 있는 한 이 역시도 단계적으로 극복되어야 과제로 보인다.

 

C. 사중복음신학

감리교의 토착화신학이 1960년대부터 교단의 경계를 넘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반면, 성결교의 사중복음신학은 성결교가 한국 땅에 들어온 지 100년이 지난 이 천 년대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게 시작된 것은 그동안 웨슬리신학의 그늘 아래서 사중복음은 전도나 설교를 위한 신앙과 선포의 내용으로서의 “전도표제”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직시한 성결교 교회사가 정상운은 성결교회가 “웨슬리신학의 편중에서부터 벗어나 웨슬리신학과 함께 마찬가지로 사중복음을 전도표제가 아닌 성결교회의 교리적 유산으로 인식하고 웨슬리신학과 사중복음 양자의 균형 잡힌 신학교육을 시행해야 한다”44)고 정당하게 지적한 바 있다. 성결교 신약학자 이상훈 역시 일찍이 “사중복음은 심각한 신학”이며 그 자체가 “당당한 신학”이며, “사중복음의 강조가 전도관의 로방전도가 아니라, 이 반복적 강조 위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탄생하여 그 교리적 이해 위에 특징적 교회가 서 있(게)”45)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중복음의 신학적 의미 탐구와 해석학적 작업은 보다 일찍 되어져야 했다. 이제 한 발자국씩 나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성결교 조직신학자 성기호가 사중복음을 중생에 의한 영의 구원, 성결에 의한 혼의 구원, 신유에 의한 육의 구원, 그리고 재림에 의한 완전한 구원으로 구원론의 관점에서 새롭게 전개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46) 이를 성결교 조직신학작 김성영은 “완전한 구원으로서의 사중복음론” 또는 “철저한 구원론적 사중복음론”47)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중복음의 신학화 작업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교단 창립 백주년을 기념한 신학연구(2002-2007)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성결교신학은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신학으로 정립되었고, 그 정신이 “창립 100주년 신학선언문”에 담겨 반포되었다. 여기에서 선언문은 “성결교회가 창립된 이래 힘차게 선포해 온 ‘사중복음’은 성결교회의 ‘전도표제’요, 성서적 교리이며, 성서 해석의 신학적 원리인 동시에, 영성신학과 공동체신학을 위한 복음의 대주제”라고 밝힌 후 “성결교회는 이제 21세기의 교회가 처해 있는 다종교와 탈종교적 문화 속에서 웨슬리안 사중복음의 신학적 가치를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세계 교회와 세계 신학계에 기여하는 성결교회신학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선언하고 있다.48)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더 사중복음의 정신을 필요한 때를 맞이한 영적 위기의 시점에 와 있다. 성결교신학의 시대적 사명이 여기에 있다. 즉 사중복음이 태어난 당시의 교회사적 상황을 직시하여49) 사중복음의 정신을 바로 정립함으로써 한국교회를 향해 빛을 비추는 것이다. 바로 그 사중복음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선언이 무엇보다도 만국성결교회 매뉴얼에 잘 나타나 있다.50) 그 핵심적 정신은 교회갱신적이며, 사도적이며, 종말론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중복음의 정신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필요한 것은 언젠가부터 한국교회가 교조주의와 교권주의로 무장된 교회주의(ecclesiasticism)에 사로잡혀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적 본질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중복음은 성서적이며 사도적이며 종말론적인 교회를 회복코자 하는 교회갱신적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성결교신학은 웨슬리신학과 더불어 사중복음적 정신으로 태어난 성결교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현 시대를 향해 교회갱신을 위한 사도적이며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해야 할 사명을 지니는 것이다.

 

V. 맺는 말 : 예수영성의 길

한국에 칼빈 전통의 장로교신학과 웨슬리 전통의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이 각각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지도 이미 한 세기를 넘어섰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웨슬리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감리교의 사회성화신학과 토착화신학, 성결교의 성령세례/성결 신학과 사중복음신학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사회성화신학과 성령세례신학, 토착화신학과 사중복음신학은 각각 한 쌍을 이루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와 있음을확인하였다. 이는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가 성서에 근거해 교회의 전통과 삶의 현실, 하나님의 전적 은총과 인간의 책임적 응답, 사회적 성화와 개인적 성결, 합리적 이성과 신비적 경험의

복음적 균형을 유지했던 신학적 유산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웨슬리신학은 교리적으로 닫혀 있는 배타적인 신학이 아니라, 현장의 중심에 서서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신학이다. “웨슬리적 경건주의적 복음주의”51)가 한국교회 부흥의 신학적 기초가 되 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웨슬리 전통에 서 있는 감리교와 성결교는 과거의 신학적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21세기 지구촌 시대의 한국교회와 모든 세계교회를 위한 신학을 창조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은 양 날개가 되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좌우로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52)을 이루어가야 한다. 이때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 없는 성령세례/성결의 체험은 종교적 광신주의에 불과하며,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이 아닌 복음의 토착화는 종교적 문화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성령세례의 경험이 사회적 성화로 이어지고, 사중복음이 가감 없이 토착화 된다면 그때 우리는 지구촌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둘이 아니요 하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을 향한 내적 거룩함의 성결과 이웃을 향한 외적 거룩함의 사회적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나뉠 수 없는 하나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끝으로,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은 초교파적으로 한국교회의 영적 부흥을 선도했던 감리교 이용도(1901-1933)의 “예수영성”과 성결교 이성봉(1900-1965)의 “임마누엘 영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화/성결신학, 토착화신학, 및 사중복음신학이 1세기 예수 영성의 불꽃을 21세기 한국 땅에 다시 붙여 놓는 것(마태 3:11)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는 가장 커다란 신학적 공로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의 많은 교회를 영적으로 깨어나게 한 이용도와 이성봉의 영성운동은 18세기 영국의 웨슬리와 19세기 미국 만국성결교회의 성결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영성운동이 회복될 때 “진정한 한국적 교회”나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삶”은 참된 결실을 보게 될 것이며, 뿐만 아니라 21세기 지구생태환경의 회복과 같은 사회적 성화의 실천을 위한 대로(大路)가 닦일 것이다.

 

1)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1996년), 34-36 참조.
2) 교리와 장정, 제1장 전권위원회 제1절.
3) 심광섭, “한국 감리교회 선교신학에 관한 연구”, 세계의 신학. 33(1996, 겨울): 193f.
4) 이정배, “감리교 교육과정을 위한 신학적 기초” .신학과 세계. 40(2000, 봄), 68.
5) 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1884-1992(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1994), 145-152.
 이러한 두 신학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초기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한 아펜젤러, 스크랜튼, 및 존슨의 사상에 대해서 유동식은 “체험적 복음주의”, “땅에서 이루어진 하늘나라”, “구원의 완성인 영생에 대한 확신”으로 정리하고 있다.
6) 김영선, 존 웨슬리와 감리교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  
7)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록(서울: 총리원교육국, 1931), 29. 1930년 12월 2일 오전 10시에 협성신학교에서 기독교한국감리회 제1회로 소집된 총회에서 웰취(Herbert Welch) 감독이 한국교회 신학자의 협조를 얻어서 기초했던 교리적 선언에 대하여 제3일 째인 12월 4일에 축조심의했다. 그리고 다음날 니콜슨(T. Nicolson) 감독의 사회로 “성신의 잉태와 십자가 보혈의 속죄와 부활 승천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조항을 삽입하자는 장시간의 논의가 있었으나 부결되고 최종적으로 8개 조항만 결의를 보게 되었다.
8) 이정배, “한국교회와 웨슬리정신과 신학”, 기독교타임즈(2002. 2. 21) (www.kmctimes.com/ news/articleView.html?idxno=11269).
9) 김진두, 웨슬리와 우리의 교리: 초기 메도디스트 교리 연구(서울: kmc, 2009 개정판), 424.
10) “한국 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1930), 웨슬리와 우리의 교리: 초기 메도디스트 교리 연구. 부록, 423.
11) 김영선, 존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29-34.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30.
12)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419; 유동식, 앞의 책, 517쪽에서 재인용.
13) 개인적 성화신학은 한국 교회의 토착적 신비적 영성 운동가로서 자리한 시무언 이용도의 삶과 사상 가운데서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탄생 100주년을 기해 이용도는 한국 교회사상 최고의 영성 운동가로서, 민족 독립의 문제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애국자로서, 서구 기독교에 의해 강요된 오리엔탈리즘을 벗겨 낸 토착적 한국적 신학자로서 그리고 가부장적 기독교를 모성적으로 재구성한 여성 신학자로서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이정배, “한국교회와 웨슬리 정신과 신학”).
14) 기독교대한감리회교리와 장정. 제 2장 제4절.
15) 김홍기, “존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와 희년사상”, 존 웨슬리의 역사신학적 조명. 김홍기 외 3인공저(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995), 302.
16)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교리와 장정 제 2절.
17) ‘토착화’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된 곳은 .기독교 사상. 1961년 12월호에 실린 장병일의 “단군 신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 창조 설화의 토착화 소고”라는 글에서였다. 그의 스승인 감리교신학교의 교수 유동식은 토착화의 개념을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적 과제”(감신학보, 1962. 10월)라는 글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논문이 토착화 신학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18) 변선환아키브, 동서신학연구소, 제3세대 토착화신학(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0), 285-287.
19) 김영명, 정경옥 한국 감리교 신학의 개척자(서울: 출판사 살림, 2008), 100.
20) 이정배, “한국교회와 웨슬리 정신과 신학”.
21) 제3세대 토착화신학., 268-270. 문화적 민족주의의 지향점은 1) 시민 개인의 사적 가치와 궁극적 공동체성의 통합을 지향하며, 민주적 가치를 기본전제로 한다. 2) 소수자 내지 약자의 보호를 지향한다. 3) 도덕적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4) 전통과 근대성을 대립이나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정배, 한국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80-82.
22) 남부기독교대변자(Southern Christian Avocative).의 편집인이던 컥클랜드(W. D. Kirkland)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무책임하게 만든 연합회는 많은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 앞에 그들이 유일하고 대표적인 성결 옹호자로서 등장하는 것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894년의 남감리교회 총회시 헤이굳(Atticus G. Haygood) 감독이 당시의 성결운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 관점은 다음과 같다. “우리 가운데 성결을 표어로 내세우는 집단이 생겨났다. ··· 종교적인 경험은 마치 두 단계, 즉 저주로부터 평화의 첫 단계와, 기독자의 완전의 두 단계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우리는 그 형제들의 신실성과 열심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열정적인 설교와 거룩한 삶으로부터 우리 교회가 유익을 얻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성결의 경험, 실천 그리고 옹호를 독점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한 그들의 설교와 방법을 개탄하며, 그들 자신을 다른 교역자들과 신자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또한 개탄한다.”[Journal, General Conference, M. E. Church, South (1894), 25-26; 성결교회신학연구위원회, 성결교회신학(서울: 기독교대한성결교회출판부, 2007), 132쪽에서 재인용].
23) 만국성결교회는 후에 웨슬리안 감리교회(The Wesleyan Methodist Church)와 연합하여 웨슬리안교회(The Wesleyan Church)가 되었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문헌소개는 다음을 참고하라. 성결교회신학, 99.
24) 박명수, “19세기 후반의 웨슬레안 성결운동과 감리교회”, 활천(1995. 4): 94ff. “대교파들이 점점 사업적인 방법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부요한 사람들에 의해서 지배되며, 예배는 점점 형식화되고, 성직자와 성가대원들이 화려한 가운을 자랑하고, 의자와 방석이 점점 푹신하게 될 때,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교회에서 소외되는 것을 느꼈고, 사람들은 체험의 종교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1880년경부터 시작해서 19세기의 말에 이르기까지 소위 성결의 문제가 특별히 여러 감리교회 내에서 야기되었다.”[William Warren Sweet, The Story of Religion in America, 2nd ed. rev. , New York: Harper & Brothers, 1953, 252; Sweet, Methodism in American History, rev. ed. (New York: Abingdon Press, 1953), 341-45].
25) Daniel D. Whedon, “Quarterly Book-Review,” Methodist Quarterly Review (1874), 492. 성결교회신학, 131쪽에서 재인용.
26) S. B. Shaw(ed), Echoes of the General Holiness Assembly(Chicago: S. B. Shaw, 1901), 29-30, 성결교회신학, 131쪽에서 재인용.
27) 이명직,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성결교회약사(경성: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성결교회 이사회, 1929), 10.
28)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207-08.
29) 김성원, 웨슬리안 성결신학(서울: 물가에심은나무, 2011), 28ff.
30) Chang Hoon Park, “The Theology of John Wesley as Checks to Antinomianism,” (Drew Univ. Ph.D. Diss., 2002), Chap. 5.
31) Phoebe Palmer, Way of Holiness (New York: Palmer & Hughes, 1867), 65. 135-36.
32) 이상훈, “이명직 박사의 성서이해와 해석(II)”, 활천, 402 (1983): 50-53; 성결교회신학, 39.
33) 성결교회신학, 57.
34) 성결교회신학, 58f.
35) 한영태, 그리스도인의 성결(서울: 성광문화사, 1995); 삼위일체와 성결(서울: 성광문화사, 1992).
36) 이후정, “존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 웨슬리와 감리교신학(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999), 17.
37) 조종남, 웨슬리의 갱신운동과 한국교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19.
38) 성백걸,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와 신학”,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한국웨슬리신학회 편(서울: 감리교신학대학학교출판부, 1999), 281. 285. 한국의 감리교는 교역자 양성을 위해 이미 1910년에 신학을 가르치는 감리교협성 “신학교(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였고, 미국의 밴더빌트(Vanderbilt)와 예일(Yale)에서 신학을 전공한 양주삼, 협성신학교장 하디, 개렛(Garret)과 노스웨스턴(North Western)에서 신학을 전공한 정경옥 등은 이미 1930년 전후해서 “신앙에서는 보수신학에서는 자유주의 입장”으로 성서 연구에 역사비평학을 받아들이는 진보적 전통을 수립하였다. 반면에 성결교신학은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수용한 미국 감리교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학문적 이성에 의한 신학 활동보다는 영적 경험에 기초한 복음 전파와 영혼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성결교는 1911년에 경성 “성서학원(Bible Institute)”을 세운 후, 1940년에 가서야 경성신학교란 이름을 붙였지만 그 교과내용은 성서학원과 큰 차이가 없었다가 미국 에모리(Emory)에서 웨슬리신학을 전공한 조종남 박사가 1968년 서울신학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한 후 신학적 훈련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비평방법을 적극적으로 소화하여 신학훈련 과정에 도입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부터라 할 수 있다.
39) .제3세대 토착화신학, 변선환 아키브 동서신학연구소 편(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0), 285-287.
40) 성백걸, 앞의 글, 278.
41) 탁사 최병헌 목사의 생애와 신학, 아펜젤러 · 최병헌 목사 탄생 1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편 (서울: 정동삼문출판사, 2008). 이정배는 “종교간 대화의 시각에서 본 다산과 탁사”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적 평가를 내린다: “기독교의 모형변이 자체가 시도되는 현실에서 탁사의 종교변증론은 더 이상 타당치 않다”(145). “성령으로 인한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삼위일체론과 같은 정통교리로서 전혀 이질적인 유교적 신념체계를 설득하는 탁사의 변증은 무모했다”(163).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의 강조는 탁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적 재림론(천년왕국설)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현실과의 치열한 만남을 원했으나 자기모순에 빠져 반대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166). 심광섭도 “탁사 최병헌의 비교종교론적 기독교 토착화신학”이라는 글에서 “그(탁사)는 유학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엄정한 탐구를 통해 기독교 신앙 체험과 그리스도 사건을 유교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전도를 위해 교리를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입장에서 비교하여 타종교 교리의 약점을 드러내고, 그 위에 기독교 교리를 보충하거나 덧붙인다는 한계를 노출한다”(234). “신앙의 내용(fides quae) 면에서 볼 때 그의 신앙 이해는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된 비교종교론적 케리그마(Kerygma) 신학이라는 평가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탁사의 신학은 비교종교론적 변증신학이 아니라 비교종교론적 케리그마 신학으로서 토착화신학이다.”(247). 이와 같은 평가들에 대해 이세형은 “성산명경에 나타난 탁사 최병헌의 기독교변증신학과 현대 신학의 과제”라는 글에서 “최병헌의 신앙 이해가 토착적인가라는 비판적 질문으로 최병헌의 한계를 지적하였던 심광섭의 평가는 기독교 선교 초기의 변증신학자와 현재의 토착신학적 입장이라는 시대적 차이 때문에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203)고 보다 적극적으로 보기를 주장한다. 이세형은 감리교 교회사가 이덕주와 함께 오히려 “성산명경에 암시된 대로 최병헌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기초한 영적 사건을 한국적 다종교의 토양에서 신학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토착화신학이라 할 수 있다”(206)고 주장한다(참조: 이덕주, “초기 한국 교회 토착신학 영성ㅡ최병헌과 정경옥의 신학과 영성을 중심으로”, 신학과 세계, 제53호, 여름호, 202).
42) 상동.
43) 이정배, 한국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80-82.
44) 정상운, 성결교회와 역사연구(V)(서울: 한국복음문서간행회, 2004), 42.
45) 이상훈, “사중복음은 심각한 신학이다”, 서울신학대학보, 71 (1986); 성결교회신학, 39.
46) 성기호, “새천년 ‘성결’ 신학의 역할과 전망”, 성결한 신앙과 신학, 은천 성기호 박사 60회 생신기념문집 편찬위원회 편(서울: 성광문화사, 2000), 32ff.
47) 김성영, “은천 성기호 박사의 사중복음론의 특징”, 앞의 책, 79.
48)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창립 100주년 신학선언문”, 성결교회신학, 1221. 1223.
49) 박명수, “19세기 후반의 웨슬레안 성결운동과 감리교회”, 활천(1995. 4): 94ff.
50) Manual of 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 (Cincinnati, Ohio: God's Revivalist Press, 1914), 5f. 사중복음을 강조하게 되었던 이유와 목적에 대해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첫째, 성결운동 가운데 신유와 재림과 세계 복음화와 같은 성서의 건전한 교리들(blessed Bible doctrines)을99 제거하려는 교회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을 참되게 지키고, 전 세계에 참되게 전파하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 둘째, “타락한 교회주의(decadent ecclesiasticism)”와 프로테스탄티즘을 약화시키는 “버겁고 복잡한 교회주의(cumbersome ecclesiasticism)”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 셋째, 사도들의 실천과 방법과 능력을 최대한 계승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넷째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앙과 실천의 규칙으로 삼아 최고의 리더인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51) 김홍기, 감리교회사: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웨슬리에서 아펜젤러까지(1725-1885)(서울: kmc, 2003), 493.

52) 존 웨슬리, 기독자의 완전에 대한 해설, 조종남 역(서울: 한국복음문서간행회, 1996), 55.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