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공간과 신학

 

 

1. 사이버 공간의 신적 모사와 사이버 은총

제니퍼 콥은 과정신학의 하나님 이해와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진화론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사이버 공간의 신학적 전개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녀에게 사이버 공간은 미디어로서 창조적이며, 주체적이고, 관계적이며, 비선형적이며, 또한 디지털의 수학적 지반을 "초월"한다. 이러한 사이버 공간의 특성 때문에 전통적인 신학방법으로써는 사이버 공간의 세계를 다룰 수 없다. 그 이유는 거기에서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도구를 만들지만, 역으로 도구가 인간을 재형성하는 한, 서로가 함께 진화해 가는 춤을 추고 있다는 관점에서 사이버 공간은 과학적, 물질적 세계관의 지배hegemony에 대하여 도전한다. 그리고 과학과 종교간의 화해를 도출해 낸다. 여기에서부터 사이버 신학은 비로소 시작된다. 즉, 사이버 신학은 영성이 기술을 껴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껴안음의 가능성은 우주 모든 곳에 편재해서 활동하고 있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은 연결하는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 창조의 힘과 본질은 원자atom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재들에 존재해 있어 하나로 연결된 전체를 이루게 한다. 그래서 샤르뎅이 생각한 것과 같이, 물질과 정신은 두 개의 분리된 실체들이 아니라 하나의 두 측면일 뿐이며, 물질은 결국 정신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이버 공간은 과학과 정신, 자연과 인공의 현실간의 화해를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콥에 의하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간 상호작용interaction의 자리가 곧 우주적 힘을 경험할 수 있는 신성의 자리sacred locus다. 이로써 사이버 공간이 은총의 매체임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사이버 공간은 모든 이원적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오메가 포인트, 곧 신에게로 나아가게 한다. 사이버 공간은 개별적이며 사회적인 홀론holon[보다 큰 전체 중의 하나의 전체]을 창조한다. 뿐만 아니라, 영적 진보를 위한 다음 단계로 이동해 나가는데 필요한 도구를 개발한다. 그리고 거대한 역동적 세계를 향하여 언제나 열려있는 창문이다.

제니퍼 콥의 이러한 사이버 공간은 한 마디로 영과 육, 인간과 기계가 통전적으로 수렴되어 마침내 모든 이원적 대립자들이 하나로 진화된 정신계로 진입케 하는 미디어로서의 장場locus이다. 비유하자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기 위해 진흙을 이겨 사람의 모습을 빚고서 코에다 생기生氣를 불어넣던 작업장과 같다. 콥의 사이버 공간은 그런 면에서 신적 창조행위의 모사模寫simulacrum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과 비슷한 유형을 라이프니츠에게서 발견한다.

라이프니츠는 컴퓨터로 매개되는 원격소통을 위한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전자언어'를 고안한 근대의 플라톤주의자다. 그의 전자언어는 신의 전지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에 필적할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신적 지성을 모사했다. 이는 '한 번에 모든 것'이라는 동시발생적인 신적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적 지성의 모사가 가능한 것은,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에 따르면, 모든 단자들이 극도로 고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현실적인 우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즉, 전통적으로 신으로 인식되던 중앙의 무한단자의 시스템 운영에 의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로써 컴퓨터는 기계적으로 중앙 시스템 운영을 통해서 '한 번에 모든' 정보를 처리하는 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신적 지성과 같은 유형의 시스템을 구상했던 것이 마침내 컴퓨터라는 형태로 출현하였다면, 콥은 사이버 공간 안에서 모든 대립적 실체들이 하나의 '홀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신성한 매트릭스를 보고 있다. 영과 육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정이 오히려 지나쳐 영 안에 육이 녹아져내려 신지神智주의와 플라톤주의의 재현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콥의 주장은 기계와 기술 자체마저도 혐오하고 배격하는 자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요청하는데 충격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2. 사이버네틱스와 신학적 인간

사이버 공간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보다 정당히 접근하기 위하여 인간과 기계의 존재론적 동일성을 설정함으로써 인공두뇌학으로까지 전개하고 있는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먼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오늘날 전세계적인 흐름이 되고 있는 정보화 물결은 바로 사이버네틱스의 원리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컴퓨터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이 문제가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그동안 신학의 분야에서 등한히 넘어갔던 인간의 예측불가능성과 우발성, 또한 엔트로피에 의해 소멸되는 운명적 존재에 대한 이해를 보다 새로운 지평에서 조명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애매하게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적 한계성들을 넘으려는 동기를 가지고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학문분야에까지 이른 것이다.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고백은 '살아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서술이다. 이 신앙 때문에 세계는 창조론에 입각하여 신과 상관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 신의 세계 창조는 '우발적'이 아니라, '신의 섭리攝理divine economy'에 의한 것이다. 성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그러므로, 세계의 '우발성'을 전제하고 이를 수학적 정보를 통해서 극복해보고자 하는 것은 세계를 단편적으로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엔트로피에 대해서도 그렇다. 인간은 자신의 죄성罪性으로 인해 이미 엔트로피를 근본적으로 막을 힘이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일은 고高엔트로피로 가는 것을 최대로 피하는 것이며, 동시에 창조주의 구원을 희망 중에 기다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이버네틱스는 신과 등진 세계에서 지금까지 인간의 지혜가 이룬 최고의 산물이다. 반反엔트로피적 사고에 기초한 사이버네틱스야말로 인간이기에 감행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사이버네틱스의 세계에는 양면성이 있다. 뒤에서도 다시 논제로 부각되겠지만, 인간과 세계를 이원화시켜 왔던 세계관이 사이버네틱스에서 극복되어 인간과 기계간의 정보교환이 한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그 한 측면이다. 반면에 사이버네틱스의 다른 한 측면은 그로 인하여 인간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이버네틱스의 원리에 지배받는 인간은 더 이상 의인도 죄인도 아닌, 오직 수학적 정보만이 교환됨으로써 존재하는 전자 기계적 존재로 이해된다. 인간의 정체성이 해체됨으로써 극복되는 사이버네틱스의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인간 정체성의 해체는 교환되는 정보에 의미론적 차원이 상실됨으로부터 시작된다. 정보라는 것은 "지식의 한 단위로서 그 자체로는 의미의 흔적만을 가지는 것"이며, 의미 있는 맥락을 전제할 뿐 그 맥락을 전달하거나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의 부재는 곧 언어의 불필요를 웅변한다. 이는 다시 사고함이 없이도 존재가 가능한 인간을 설정한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의 망각"이다. 인간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이미 "의미 망각"에 빠져 살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사이버네틱 인간의 출연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마이클 하임에 의하면, "인포매니아는 우리의 의미처리 능력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하며, 그 결과 "지식의 저편에 있는 지혜를 잃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또다시 기술이 지니는 양면성에 접한다. 사유에 대한 하이데거의 구분에 따를 때, 기술은 우리로 하여금 "계산적 사유"를 강화시키는 반면에, "명상적 사유"에 대해서는 전혀 무력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수학적 정보처리에만 유력한 기술문명 가운데 있는 인간의 사유행위는 의미추구보다는 정보처리 사업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사이버네틱스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이버 공간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시대에, 정보의 탈의미 현상에 대항하여 의미의 재창조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언어와 시, 상징과 신화가 삶의 현실에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탈신성脫神性의 시대에 주객의 일치를 실현코자 하는 것은 결국 탈인성脫人性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명상적 사유가 가능한 자연적 삶의 원리를 사이버 공간의 체험과 더불어 보다 충분하게 적용해야 한다. 인류 대부분이 존재의 '무의미성Sinnlosigkeit'을 경험하고 있는 틈을 타서 머지않아 황금만능주의에 버금가는 정보만능주의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인간으로부터 '의미'를 담보로 하는 사이버네틱스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의미의 근거"인 하나님을 분열된 자아와 세계 안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이버네틱스는 고高엔트로피Entropie로 나가는 세계를 최대한대로 억제하려는 책임적 인간에게 '의미' 있는 세계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3. 사이버 공간의 상징성과 신학적 현실

왜 인간은 사이버 공간을 만들어 경험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하는가? 실제적 현실을 넘어서 사이버의 현실을 추구하려는 다양한 동기들을 파악할 때 비로소 사이버 공간에 대한 보다 적절한 신학적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있어서 자본주의는 사이버 공간의 출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량생산으로 인한 소비시장의 포화와 물질에 의한 단순 욕구들이 충족됨으로써 기존의 시장과 소비형태에 더 의존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사이버 공간은 세계경제에 하나의 탁월한 대안으로 등장했다는 관찰이다. 그 길은 소쉬르나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기호이론에 근거한 것으로서 기호의 의미란 기호간의 상호 변별적 차이에 의해서 무한히 다양하게 창출된다는 원리를 생산과 소비활동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이제 사이버 문화권에서의 소비형태는 실물 그 자체가 아니라 실물을 상징하는 기호의 선택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인간은 사이버네틱스의 원리가 지배되는 공간에서 정보교환 과정 중에 발생하는 의미상실을 변별적인 기호의 선택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의미가 탈색된 수학적 정보교환의 시대에 사이버 공간은 기호 가운데 상업적으로 주입된 의미가 가장 효과적으로 유통되는 곳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학적 정보를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재구성되어 나온 멀티미디어적 실재는 물리적 실재를 압도하는 과잉현실hyper-reality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상현실로 눈앞에 다가선다. 보들리야르의 표현에 의하면, '모사模寫의 원리가 실재의 원리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실재의 원리를 압도하는 가상현실은 신학적 지평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신학에서 '궁극적 실재'는 적어도 현존재의 실재와 구별된다. 이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Gott existiert nicht"이다. 궁극적인 실재로서의 신은 결코 존재자의 어떠한 유형으로도 말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과 바울의 증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실재의 근본이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요1:3, 롬11:36).

그러한 면에서,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 이외의 모든 실재들은 그것이 물리적 실재였든, 아니면 가상적 실재였든 근본적으로 유한성과 모호성 가운데 있다. 그것은 피조된 실재의 운명의 특성이다. 물리적 세계의 실재관에서 보면 사이버의 실재는 가상적이지만, 비실재적이거나 환영幻影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 세계를 수학적으로 환산해서 이룬 정보에 의해서 철저히 재구성함으로써 신체적 경험에서보다 '증가된 실재감'을 드러낸다. 다만 문제는 신체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실재라는 것이다. 오히려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험할 수 없는 실재들을 경험하는 세계가 사이버 공간이다.

물리적 현실을 실재개념의 기준으로 설정하면, 그 외의 모든 현실은 가상적 현실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물리적 현실과 그 안에서의 경험에 대하여 사색하고, 표현하고, 전달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실재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그려낼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것들까지 상상하여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만화, 소설, 시, 연극, 영화, 등의 세계는 그것이 현실을 기반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이 아닌 이상 가상적 현실이다. 때로는 이러한 것들에 깊이 빠지기도 한다. 증명사진이나 자연물 등에 자신의 감정과 의식이 몰입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사이버 공간이 주는 가상현실이라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이전의 표현 매체들이 주었던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상상력과 그 사실감의 정도가 압도적이라는 데 있다.

오늘날 새로 출현한 사이버 공간의 가상현실에 대하여 비관적 견해를 제출하는 경우, 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지적된다: 주체의 해체, 타자의 실종, 윤리적 무중력 상태, 무의식적 환상의 투사에 따른 나르시스적 퇴행, 환각과 현실의 혼재에 따른 반성과 감동 및 배려의 부재 내지는 추방, 자기만족과 자폐에 의한 외적 대상에 대한 거부, 상호의존과 책임적 관계성 상실, 공동체의 기만성과 공동체성 자체가 휘발될 가능성, 욕망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정신병적 환경, 익명성과 철수가능성 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설에 깊이 몰입하는 경우와 사이버 공간의 경우를 비교할 때, 차이점은 소설과 같은 표현매체에 그와 같은 부정적 사항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 사이버 공간에서보다 덜 강렬하게 드러난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이버 공간에 대하여 적절한 신학적 윤리관이 모색되어야 할 일이지, 사이버의 가상현실 자체를 의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상공간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증대된 사실감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산물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4. 사이버 공간의 탈신체성과 몸의 신학적 의미

우리가 인간과 기계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성찰할 때,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기술은 이미 인간의 "운명", 즉 인간 "실존의 한 양태"라는 하이데거의 통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고 또한 인쇄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글은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일 뿐 아니라, 오히려 삶의 구성적 요소로서 인간의 사고나 행동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운명'적 존재가 되었다. 그에 따라 글은 인간의 삶을 지시하고 정의하는 세력으로까지 그 존재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오늘날 컴퓨터 기술 역시 "우리의 사고 처리에 너무나 유연하고 융통성 있게 들어맞"는 삶의 구성적 요소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존재로 그 위치가 분명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기계, 즉 인간과 컴퓨터가 대립적이지 않고 오히려 구성적 상호관계에 있는 현실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이미 앞에서도 논의가 되었지만, 결국 신학의 일차적 주제가 기계보다는 인간에 있는 이상, 사이버 공간상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시킬 수 있는 지에 대한 점으로 신학적 관심은 모아질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여, 사이버 공간 자체의 존재에 대한 '존재적ontic' 탐구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이 나타날 때 '그 배경을 이루고있는 배경을 다루는 우리의 존재론적ontological 이해'를 창조론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점은 하이데거나 마셜 맥루언 모두가 동일한 의견을 제출하고 있듯이, "기술이 실재를 정의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내용이나 사물들을 드러내는 보이지 않는 배경으로 작용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이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이 분명해져야 한다.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기계의 존재적 특성과 존재론적 의미는 제작의 주체인 인간에 의하여 설정되지만, 기계에 의하여 인간의 실재가 규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만물의 존재성과 존재론적 의미는 창조자인 하나님에 의하여 설정되지만, 피조물에 의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존재론적 의미가 규정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다. 거기에는 존재론적 의미의 제한과 왜곡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글이 인간에 대하여 그래왔듯이, 컴퓨터 역시 인간 실재의 의미를 규정해 나가고 있다. 인간이 사이버네틱스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환경 가운데서 의미를 추구하는 명상적 사유행위가 무력화되는 동안, 즉 인간이 컴퓨터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컴퓨터는 인간 사고영역 안에 들어와서 인간의 실재성을 새롭게 구성한다. 그리하여 컴퓨터 통신과 가상현실에 의한 사이버 공간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장도 사로잡는" 에로스까지 경험케 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의 세계와 인간 사이의 에로스적 관계는 이미 플라톤주의Platonism 안에 잠재해 있던 가능성의 현실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이버 공간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 정신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이데아들이 바깥으로 투사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플라톤의 '형상form'이 사이버 공간 안에서 '정보inFORMation'로 전환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이버 공간에서는 정보가 곧 실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과정과 유사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물리적 실재로 전환됨으로써 창조세계가 드러났듯이, 인간정신의 순수개념이 수학적 정보로 바뀌어짐으로써 가상공간의 세계가 출현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靈으로서 물리적 실재를 보게 되었고, 인간은 물리적 몸을 지닌 자로서 비물리적 실재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깊이 다루어야 할 주제는 앞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사이버 공간에서의 인간의 '탈신체성'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도 다른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양면성이 있다. 마치 영이신 하나님이 물리적 피조세계에 육을 지니고 들어왔듯이, 역으로 신체를 지닌 인간이 정신에 의한 개념적 공간으로 탈신체화해서 인간 의식만의 몰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신체에 의하여 불확실하고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개념의 세계를 증가된 현실감을 가지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상적 현실 경험이기 때문에 현실감이 증대될수록 정신과 신체간의 소외는 더욱 가중되는 문제에 직면한다. 신체의 자동적 소외뿐만 아니라, 신체에 대하여 영지주의나 플라톤주의 및 마니교적인 경멸을 불러일으켜 육체를 "감옥"으로까지 여길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신체는 단지 선택사항에 지나지 않게 된다.

창조론에서 볼 때, '하나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영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찾고자 할 때도 인간의 신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육과 영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론의 관점에서 볼 때, 깁슨의 [뉴로맨서]를 새로운 각도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주인공 케이스와는 달리, 컴퓨터보다는 음악을 더 좋아하고, 계산보다는 직관적인 충성심을 더 선호하는 종교적인 부락집단인 '자이온 사람들Zionites'의 등장은 신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설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스는 자이온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 . 자이온 사람들은 말을 할 때 반드시 상대방의 손을 만지거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케이스는 그것이 싫었다. . .

"해봐." (사이버스페이스 데크의 전극들을 뽑으면서) 케이스가 말했다.

자이온 사람 에어롤은 밴드를 받아서 머리에 감았다. 케이스가 전극을 조정해주었다. 에어롤은 눈을 감는다. 케이스는 작동 스위치를 두드렸다. 에어롤이 몸을 떨었다. 케이스는 즉시 원래대로 되돌려주었다.

"뭐가 보였어, 친구?"

"바빌론." 에어롤은 슬픈 듯이 답하고 나서 전극을 케이스에게 건네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복도를 달려나갔다.

사이버 공간의 인간에게 탈신체성은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실재의 양면성 내지는 영과 육의 통합적 이해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여기에 사이버 공간의 신학적 한계가 노정되어 있다. 남은 신학적 과제는 사이버 공간의 케이스가 에어롤을 이해하고, 에어롤이 케이스가 경험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사회에서도 어려움을 느끼는데, 앞으로 다가오는 사이버 문명 아래에서는 더욱 더 에어롤의 세계를 삶의 환경으로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사이버 문화에서 인간의 신체성이 단지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 온전한 실재 경험을 위한 필수사항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일 역시 신학이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술과 철학은 사이버 공간에서 발생하는 탈신체성에 대응할 만한 대안과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신학은 이미 가현설적 예수 이해의 오류와 기만을 파악하고 예수의 신체성을 강조해 오고 있다. 예수는 여자의 몸에서 나셨고, 몸의 아픔을 경험했고,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 그리고 다시 몸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자의 부활도 몸의 부활을 말하고 있으며, 구원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전인적 차원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