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사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세상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좇아 갈 것인가, 아니면 이 시대를 주도하면서 변화시킬 것인가? 이같은 물음은 특히 시대의 전환기에는 첨예하게 교회에 제기되어 왔다. 수렵시대, 농경시대, 산업시대를 거쳐 바야흐로 '정보화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과연 교회는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정보화 시대에서의 자기 정체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소위 21세기의 '멀티미디어 시대' 혹은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는 교회는 이에 대하여 분명한 이정표를 세워야 하는 실로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신학적 판단과 신앙적 결단의 정당성 여하에 따라 오는 한 세대의 선교 향방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강의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정보화 사회'를 규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보화 사회를 철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이고, 마지막 셋째는 정보화 사회를 신학적 차원에서 평가하는 일이다.

I. "정보화"와 정보화 사회

우리는 '정보 사회' 또는 '정보화 사회'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한 쓰고 있다. 대체로 양자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나, 논의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정보화'란 용어로 통일한다.

정보화란 말은 다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정의내리기가 어렵지만, 일반적으로는 컴퓨터나 통신 단말기가 일상생활이나 사회의 각 분야에 적용되어 사용되는 현상을 지칭한다. 이같은 기존의 정보화 개념이 지니는 문제점에는 황두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 정보화의 결과로 나타난 정보기기의 사용확산이라는 표면적 현상으로만 정보화를 파악할 뿐, 정보화의 원인과 결과를 혼돈하거나 양자를 동일시하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둘째, 정보화는 정보 기술이나 컴퓨터 기술의 실용화가 가능하거나 이를 수용할 경제 사회적인 구조가 준비된 나라, 즉 산업사회가 성숙한 국가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저개발국에서는 정보화가 발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렵다든가 시기 상조라는 주장이 나온다. 셋째, 정보화를 정보 기술이나 통신 기술이 발전된 이후에야 나타나는 현상이라 파악함으로써 정보화는 20세기 후반에야 나타난 불연속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후기 산업 사회의 특성은 정보화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게 함으로써 다가오는 정보화 사회의 모습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황두현이 경제학자의 측면에서 바라 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다음과 같은 정의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소비활동이나 생산활동에서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생산이나 소비에 관한 행동 정보(소프트웨어)를 도구나 기계(하드웨어)에 이전시키어 인간의 노동을 도구나 기계에 분담시키는 현상이다." 이 정의의 장점은 기존의 개념이 지니는 한계를 분명히 보여 준다는 것이다. 특히 정보화는 인류가 행동을 효율적으로 하려는 욕구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정보화 현상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갑자기 돌출된 사회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 생활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 있어 온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 진다. 이로부터 인류의 지나 온 시대를 특정한 정보화의 여러 단계들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다시 말하면, 지식이 하드웨어로 전환됨으로써 정보화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이 얼마나 하드웨어화 되었는가의 정도에 따라 정보화의 단계가 구별된다.

 

<표1>정보화단계및특징

구 분

수동적

정보화

기계적

정보화

단순 컴퓨터

정보화

컴퓨터 통신

정보화

지 능

정보화

기간

17C까지

18C - 20C 초

1946-1965

1965-1980

1980이후

기초기술

자 연

에너지기술

전자기술

전자, 통신기술

전자, 통신, 정보

주요기기

도 구

증기기관 전기기관

컴퓨터(1,2세대)

컴퓨터(3,4세대) 정보통신기기

컴퓨터(5세대) 정보통신기기


대체되는 인간노동

단순육체노동

단순육체노동 기능육체노동

단순육체노동

기능육체노동

단순정신노동

단순육체노동 기능육체노동 단순정신노동 기능정신노동

단순육체노동 기능육체노동 단순정신노동 기능정신노동 전문정신노동


탈기능화


-

생산부문일부

생산부문

관리부문일부

생산부문

관리부문

전문부문일부

생산부문

관리부문

전문부문

정보화 적응분야

수렵, 농경 1차 산업

제조생산

2차 산업

제조, 관리

2차 및 3차 일부

제조, 관리

1, 2, 3차 전산업

관리, 경영, 통제, 전산업, 전사회

대표되는 노동자

힘있는 자

단순노동자

기능노동자

화이트칼라

전문가, 관리자 S/W개발자

전문기술자

전문지식인

주요사회

간접자본

도로, 水利

도로, 전력

도로, 전력, 통신

정보통신망

기술교육

고도정보망

교육

 


현대의 정보화 사회를 외형적으로 규정짓는 것들에는 온라인 시스템, 컨트롤 시스템, 데이타베이스 매니지먼트, 부가가치 통신망(VAN: Value Added Network), 서비스 통합 디지털망(ISDN: Intelligence Services Digital Network), 인터넷 등등이다. 이러한 것은 적어도 소위 산업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요인들이다.

이러한 사회적 통합 체계들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이론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의 어원은 '자동제어장치, 방파제, 예방의학' 등을 의미하는 키버네티케(kybernetike)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이 이론의 창시자인 비이너(N. Wiener)에 따르면 이는 한 마디로 "동물과 기계에 있어서의 제어와 통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기체와 기계체를 통합하려는 사상이다.

이에 따라서 유기체인 생물과 기계체인 컴퓨터를 통합함으로써 인간의 지식을 하드웨어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이와같은 현실은 기존의 기계문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술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즉, 산업화 시대의 기계 문명은 물질과 정신을 이분법으로 나눔으로써 가능한 것이었으나, 정보화 시대의 정보 혹은 지식 문명은 그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 컴퓨터에 입력되면서 획기적인 정보화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사고활동의 상당한 부분을 컴퓨터가 대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진행되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지식'이 '정보'로 인식되면서 오늘에 와서는 과거에 누렸던 '영원한 진리'라든가, '절대 유일의 법칙'으로서의 지식이란 개념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보란 과거의 지식처럼 시공간적인 불변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이고 시간적인 연속적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정보화 시대의 지식이란 보편적으로 과학자들의 의견의 일치를 통하여 형성된 '일시적인 정보처리 장치'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오기까지 기존의 이론과 실험을 자신있게 전개할 수 있는 틀로 보면 된다.

정보의 개념을 보다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물질 및 에너지의 형식에 의존하고 있는 '표현'과 정신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는 '의미'의 복합체인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보화가 어떠한 측면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이루어 지고 있는지 아는 것은 현대 정보화 개념 규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김용정의 이해에 따르면, 현대의 정보화는 주로 '물질적 에너지의 형식'에 관계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의 정보화 사회란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배제한 물질적이고 자동 기계적인 면만을 중요시하는 사회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고 우려를 표한다.

정보화는 '게슈탈트(Geschtalt)의 변화'의 한 현상이다. 우리는 이 변화의 현상을 하나의 도표<표2>를 통해서 정리함으로써 정보화 사회에 대한 보다 총체적인 개념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II. 정보화 사회에 대한 철학적 이해

이제 우리는 '지능 정보화'로 특징지워지는 '21세기 시스템' 고도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인간이 지니는 문제를 다루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정보화 사회란 과연 인간의 삶과는 어떠한 관련성에서 파악되어야 하는가? 끊임없이 새로이 갱신되는 최첨단 기술에 의해 재조정되는 사회는 인간 생활에 중립적이기만 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기계에, 정신 노동을 컴퓨터에 이전시킨 만큼 인간의 삶은 도구와 기술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구, 기술, 특히 오늘날의 정보 기술이란 결코 중립적 이기(利器)가 아니며, 또한 객관적인 시장성만으로 계산될 수 없다. 오늘날의 고도 정보화 현상은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인간의 사고방식과 일상생활에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의미를 생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기술이란 인간 주체성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존재 조건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발달해 왔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형태까지 띠고 인간의 실천적 삶을 통해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철학적 접근을 통하여 정보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난 후에야 정보화 사회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정당히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기술문명에 대하여는 크게 두 방향, 즉 실증주의적 접근과 맑스주의적 접근에 의하여 평가되어 왔다. 이들의 견해를 근거로 하여 정보화 사회에 대한 기본적 고찰을 시도해 본 후, 그 특징과 이해의 한계점들을 살펴 본다.

기술 문명에 대한 실증주의적 입장은 진화론적 계몽주의에 입각하여 기술을 파악한다. 여기에서는 기술에 내재한 권력의 부정적 문제는 간과되고, 물질적 풍요와 인간 해방의 논리에 따라 정보화 사회가 이상적으로 전개된다. 반면에 맑스주의적 입장은 기술의 문제를 변증법적 계몽주의에 입각하여 인간성과 사회구조간의 괴리를 낳게 한 기술의 현상적 역기능과 권력기제를 비판한다.

존 네이스빗, 앨빈 토플러, 다니엘 벨 등은 기술 발달이 사회 발전과 인류 복지를 도모한다는 가정에서 정보화 사회론을 전개한다. 여기에는 진화론적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 발달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인간을 궁핍과 노역에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는 이상을 그들의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컴퓨터, 위성통신, VAN, ISDN 등의 뉴미디어는 경제 및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사로 등장된다. 무엇보다도 정보 기술은 높은 부가가치 자원을 창출하여 경제적 번영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기술에 의한 인간해방도 말해진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탈대중화로 인한 권력의 분산화 및 문화의 자율성으로 인한 권력 분립적 민주주의가 예견된다. 또한, 정보 기술의 발전이 탈산업화를 진작시킴으로써 자연 보존에도 일익을 감당할 것이라 전망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계몽주의에 입각한 비판이론에서는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 준다. 한 마디로 기술 문명의 정치, 경제적 역기능이 강조된다. 정보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정보의 상업화가 진행되고 정보의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나타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이 한층 심화된다는 비평을 제기한다. 특히 비판의 촛점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기술이란 인간을 그의 본성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노동 과정을 노동의 본래 의미인 인간의 창의성으로부터 결별케 하는 사회 조건을 조성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맑스주의적 비판이론을 근거로 정보기술 발달에 따른 계급의 지배현상 분석이 가능해 진다. 즉, 기계로 인한 노동력의 부차적 가치차이를 통해서 생산 및 사무의 전산화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대량의 실업 현상과 노동의 단순화가 초래된다는 분석이다. 이와 반면에 중산층의 증가로 인하여 부르주아 문화가 대중문화로 소비되면서 계급갈등이 중화된 현상이 나타나며, 노동계급의 활동 공간이 해체되는 탈노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상 진화론적 입장과 비판론적 분석을 통해서 정보화 사회가 지니는 양면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실증주의나 맑스주의가 갖는 구조주의적 인식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소위 '탈구조주의'(Post-Structualism)적 담론을 형성한 미셸 푸코의 기술 이해에 입각해서 인간과 정보화 사회 사이의 관계성을 밝혀 본다.

탈구조주의적 관점에 볼 때, 맑스주의는 복잡한 권력 현상의 한 측면만 논하는 권력 비판의 한계가 지적된다. 다시 말해서, 비판이론만으로써는 복잡다양한 사회 현상을 정당히 기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술에 내재해 있는 권력의 측면을 단지 계급 갈등의 맥락에서만 파악함으로써 기술의 '생성적 권력'(positve power)은 보지 못하고 '억압적 권력'(negative power)만 문제시 하기 때문이다.

푸코를 위시한 포스트 구조주의적 접근에서는 거시적으로 구조적 권력을 분석코자 않고, 미시적으로 실천적 권력을 기술한다. 맑스주의나 실증주의에서 시도하듯이, '보편적 모델'이나 '일반 이론'(Grand Theory)을 세우는 것을 거부한다. 포스트 구조주의의 신념에 의하면, 말단까지 확산된 권력이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담론(discourse)을 통해서 생생하게 퍼져 나가기 때문에, 담론을 통해서 인간의 일상적 실천을 통해 유형화되는 기술의 힘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술 문명에 대한 푸코의 견해를 정리함으로써 정보화 사회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의 측면에 접근해 본다. 우선, 푸코는 억압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현대 기술문명이 변증법의 최후 단계에서 사회 체계를 변혁시키는 동인이 될 것이라는 등의 미래에 대한 어떠한 기대나 전망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나 하버마스의 변증법적 계몽주의나 진화론적 계몽주의에서와 같이, 기술 문명을 사회 발전의 시간적 연속성이나 모순 관계로 파악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현대 기술문명이 얼마나 인간을 통제하며, 교도하고,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들고 있는가를 지적한다. 푸코에 따르면,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과 복종의 기준을 따르면서 자신을 훈련하는데, 이런 지식과 기술에 따라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고 순종적 신체가 형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술문명 사회내에서의 인간은 결코 주체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푸코의 확신이다: "개개인은 보여질 뿐이며, 볼 수 없다. 개인은 정보의 대상일 뿐이며, 결코 의사 소통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기술사회 인간에 대한 푸코의 이러한 이해는 그가 벤담의 건축 모형인 '판옵티콘'(Panopticon)을 인용하여 묘사한 감옥의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밝혀 진다.

이 폐쇄되고 분할된 공간은, 그 안에 갇힌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사방에서 감시되고, 모든 일이 빠짐없이 기록되며, 중앙 통제부와 말단부가 끊임없이 기록 작업을 통해 연결되고, 부단한 위계 질서로 권력은 분할없이 행사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개인은 살아있는 자, 병든 자, 죽은 자 등으로 끊임없이 정립되고, 관찰되고, 분류되면서 이 모든 활동이 통제의 긴밀한 모델을 구축해 간다.

그에 의하면, 기술의 발달은 권력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으며, 개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증진시키지도 못한다. 오히려 개인을 분리시키고 말단화 한다. 지배층의 사람들은 더욱 증진된 감시 능력을 갖게되고 일반 사람들은 감시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분리 감금된다는 매우 비관적 이해에 도달한다.

이러한 푸코의 판옵티콘적 기술 사회에 대한 이해의 틀은 오늘날 고도 정보화 사회에도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특히 컴퓨터 통신망을 통한 프라이버시 침해의 문제, 총체적 감시체제에 대한 사례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십 세기 후반에 오면 데이터베이스로 '슈퍼 판옵티콘' 구축이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 또한 나오고 있다. 이는 판옵티콘의 진보된 형태인데, 즉 벽과 창문, 망루나 감시자가 없는 감시체제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슈퍼 판옵티콘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감시체제라는 것이다. 이미 개인은 자신의 모든 증명서를 데이터 베이스화 했기 때문이다.

III. 정보화 사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사명을 확인해 왔는가? 분명 교회는 세계와 관계없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독자적인 신앙과 고백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명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그가 속한 사회의 특성이나 제약 등은 교회의 신앙적 행위에 영향을 미쳐 왔기 때문에 언제나 신학적인 성찰이 요청되었다. 특히 문명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는 상황속에서는 이전의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기술될 수 없는 복잡 다양한 이론과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교회와 사회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정보화 사회에 대한 기술 사회학적 및 철학적 특성들을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가진 것 자체는 교회가 정보화 사회에 대한 바른 관계 정립의 첫 단계에 불과할 것이다. 교회는 실증주의자들처럼 정보화 사회를 긍정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변증법적 비판 이론가들처럼 정보화 사회의 역기능을 비판하며 거부해야 할 것인가? 교회가 결단하는 근거와 기준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이와같은 질문에 보편적인 대답을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한 순환론에 떨어질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우리는 앞에서 고찰한 정보화 사회의 몇 가지 특성들을, 특히 정보화 사회 자체가 지니는 인간의 노동, 지식, 자동화에 의한 테크노피아 및 감시 체제 등의 문제를 성서적 관점에서 평가함으로써 정보화 사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A. 인간의 노동 문제

고도 정보화 사회에서의 '노동'이란 개념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난다. 정보화가 인간의 노동을 도구에 전이시키는 현상이라고 할 때, 노동과 도구의 관계가 바르게 규명되어야 한다. 우선,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도구를 개발하여 사용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해에 있어서 도구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와같은 면에서 볼 때, 오늘날 정보화 사회가 고도로 집적된 기술 도구를 개발하고 사용한다는 것 자체는 석기시대에 인류가 돌칼을 만들어 사용하던 것과 하등 차이가 날 것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은 일의 효용성을 위해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면서도, 도구에 지배받고 있는 현실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이중적 태도가 고도의 정보화가 실현될 수록 현저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지능 정보화 시대에까지 도달한 현대는 인간의 단순 육체노동과 기능 육체노동 뿐만 아니라, 단순 정신노동 및 기능 정신노동까지도 기계적 도구에 이양되었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 정신노동까지도 인간이 아닌 도구가 처리하고 결정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인간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첨단의 기계와 더불어 인간은 더욱 복잡한 일을 끊임없이 해야 된다. 그러므로 기술 개발은 노동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할지라도 노동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게는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성서는 '일'의 양면성을 지적한다. 인간의 노동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발생한 인간의 숙명적 멍에라는 점과, 이와 반면에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사역의 한 역할이라는 점이다. 일에 대한 이같은 성서적 이해를 통해서 교회는 정보화 사회에서의 노동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하에서의 노동이란 인간 해방의 목표로만 인식될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 진다. 비록 현대인이 전문 정신노동까지도 최첨단의 컴퓨터에 대체할 수 있는 지능 정보화를 실현시킨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들은 노동 그 자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복잡한 매카니즘의 네트워크에 종속되고 마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된 가운데에서의 노동이란 창조적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일은 거기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할 멍에도 아니며, 인간이 숙명적으로 지고 가야할 형벌도 아니다. 오히려 노동 자체가 건강한 삶의 한 양식이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현상적으로 보여 주는 시금석이요, 태도이기도 하다. 정보화 사회에서도 여전히 단순 육체노동이 필요할 것이고, 반면에 전문 정신노동까지도 컴퓨터로 대체하는 등 다양한 노동 계층이 형성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

실증주의자들의 정보화 사회론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그 마스터 플랜이 하나님의 창조적 의지와 상관성이 있을 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청지기'적 사명자들이 나타남으로써만 실제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비판론자들이 경계하는 기술문명의 역기능 때문에 정보화 사회의 이상향은 더욱 인간 억압의 체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B. 지식이 지배하는 사회

19세기가 군사 항해혁명에 의한 '위세의 게임' 시대였고, 20세기는 산업혁명을 기조로 하여 '부의 게임' 시대였다면, 21세기의 정보화 사회는 정보혁명을 통한 '지식의 게임' 시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컴퓨터와 통신에 의한 정보처리 기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또 다른 것 가운데,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아는 것 뿐만 아니라, 지식을 체계적으로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응용하거나 새롭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앎을 벽화로, 기호와 상징으로 그리거나, 문자로 기록해 왔다. 인류가 지닌 이러한 내용들은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고, 컴퓨터가 등장함에 따라 지식의 축적과 공급은 천문학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능 정보화 사회에서는 축적된 정보만 가지고서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단위 첨단 연구소들을 세워 최신의 지식을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있게 되었다. 이제 지식은 인격의 도야나 특정한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통과의례적인 수단이 아니라, 지식 자체가 개인이나 공동체의 존립 여부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자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는 사유 재산권보다는 오히려 정보권을 더욱 중요한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가히 '정보 전쟁' 한 가운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식 위주의 이와같은 정보화 사회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성서는 이미 지식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점, 그리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세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지식을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여기는 현대 정보화 사회를 향하여 매우 중요한 신학적 관점을 제시하는 근거가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무관하게 추구하는 현대의 지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지식의 실체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오늘의 지식은 데이터 베이스화할 가치가 있는가에 따라 그 전달 및 효용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교회가 2천년 동안 전승해 온 지식이 현대 사회를 향하여 얼마나 정보화의 가치가 있는지 의문시 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볼 때, 지식은 크게 자연에 의한 것과 은총에 의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연적 지식의 추구는 이성으로써, 은총에 의한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얻어 진다. 이 양자는 본질적으로 대립적이거나 서로 상관이 없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를 마감하고 소위 근대주의가 태동되면서 이성과 신앙은 함께 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그에 따라 자연적 지식은 교회 밖의 과학자들의 몫으로, 계시는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교회 안의 성직자들만이 다루는 것으로 영역화 되었다.

따라서 현대 정보화 사회가 추구하는 지식은 철저히 교회 밖의 영역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되는 정보에는 오직 자연적 지식이 주종을 이룰 뿐, 교회가 제공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지식의 게임'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부재의 자연 과학적 지식이란 결국 타자를 하나님이 창조한 유기적 통일체의 한 성원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와 이용의 대상으로 도구화하는 반창조적 특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근대정신의 최종적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 21세기의 정보화 사회는 지식의 뿌리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예수 탄생 당시, 헤롯 대왕이 하나님의 지식을 외면하고 자기의 판단대로 처리함으로써 그의 칼날이 수많은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목을 쳤던 비극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난 세기에 권력과 부면 삶의 질이 나아질 줄 오해했던 것처럼, 지식만이 오는 세대의 삶을 풍요하게 해 줄 것으로 여긴다면 그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파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지식은 핸들도 브레이크도 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C. 테크노피아의 환상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시대가 다가 오고 있다. 이때 자동화의 정도로 정보화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장 자동화(FA), 사무실 자동화(OA)로부터 이제는 가정 자동화(HA)까지 삶의 전영역이 자동화되어 가는 정보화 사회를 경험한다. 자신이 처한 곳이면 어디서든지 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일들을 처리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인간이 꿈꾸어 오던 지상낙원의 밑그림이 제시되었다고도 할 만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온라인에 올려 놓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주문한 것들이 전자적으로 디자인되고, 생산되고, 배달되고, 결재된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테크노피아(Technopia)의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면, 정보화가 구축하는 이같이 자동화된 세계가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정보화 사회의 궁극적 이상이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자동화된 사회를 이루는 것이냐는 것이다. 모든 활동이 자동화되면 인간의 노고는 현저히 줄게 되며, 그에 따른 만족과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의 단계를 테크노피아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인간의 궁극적 희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제시한다. 성서의 역사는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려 온 기나 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밝힌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세계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지배하는 세계다.

인간이 자신의 지식을 하드웨어화 함으로써 자동화를 이룰 수 있었으나, 기계적 자동화가 총체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될 때에는 인간도 조직망의 일부로 편입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서 테크노피아는 객관성의 극대화를 위하여 인간 주체성의 희생을 요구함으로써 돌아가는 기계론적 합리주의의 세계라 볼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현실을 거부한다. 곧 네이스빗의 말로 하면, "하이터치"를 열망한다. 이것은 역으로 현대 정보화 사회가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반인간적 역기능의 표현이다. 정보화 사회가 테크노피아를 향해서만 질주한다면 이에 대한 사회적인 반작용은 더욱 원시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서구 각국에서 초월적인 명상, 요가, 및 불교적 선수행자들이 대거 일어나는 것은 정보화 사회가 지니는 한계를 예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도심 곳곳에 무속(巫俗)이 자리잡고 신흥종교가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단순한 유행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시대적 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의와 평화와 기쁨을 목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정보화에 의한 테크노피아는 끊임없이 유사종교를 배태할 뿐, 삶의 궁극적 해방과 구원을 약속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테크노피아는 물신(物神)이어서, 생령(生靈)으로서의 인간에게 요구되는 영적 생명을 주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생명의 수여자인 성령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화 사회가 물신주의적 자동화 세계에 대한 신화적 선전을 그치지 않는다면, 유사종교적 하이터치의 거센 바람이 대중의 영적 진공 상태를 급속히 채움으로 인하여 인간의 삶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총체적인 파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요10:10)이기 때문이다.

D. 감시와 종속의 네트워크

푸코가 '판옵티콘'을 비유로써 기술한 현대인의 실상에 대한 고발은 과연 지나친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그는 기술이 지니는 '억압적 권력'의 측면만 보고 비판한 맑스주의적 입장의 한계를 직시했다. 그리고 '생성적 권력'의 차원도 있음을 밝히려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이론이 오늘날 여러 각도에서 원용될 때 오히려 기술이 지니는 부정적 힘이 더욱 총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현실이다.

오늘날처럼 조직화된 사회가 통제력을 상실한다면, 그 때의 혼란과 무질서란 상상하기도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정보화 사회가 이미 형성된 조직체를 확고히 유지하고 돌발적으로나 의도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파괴적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정보망을 적절히 활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정보망을 통제하는 계층이 형성되기 마련인데, 이 정보 통제계층을 통제할 수 있는 구조가 약할 때에는 정보화 사회의 구성원들은 프라이버시 침해에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다. 물론 '프라이버시' 개념도 정보화 시대에 합리적으로 새로이 규정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해결키 어려운 과제는 컴퓨터 통신망에 의한 통제가 민주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사회 구성원의 참여에 의해서 감시 체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정보화 사회의 한 단면을 통해서 구약 시대의 율법 공동체의 현대적 재현을 본다. 이스라엘은 자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율법 수행의 의무를 서약한다. 어디까지나 자의적 결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참여다. 누구든지 율법 공동체에 속해 있게 되면 사생활 깊은 곳까지 타인에 의하여 감시의 대상이 됨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그에 속한 개개인의 삶 전체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율법을 어기게 되어 감시망에 걸리게 되면 율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현대 정보화 사회를 가리켜 하나의 거대한 '슈퍼 판옵티콘'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컴퓨터망 속의 보이지 않는 율법의 중앙관제탑에 의하여 모든 자들은 자발적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자구책으로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인간에게 거짓과 탐욕에 의한 범죄의 가능성이 없다면 이같은 율법적 판옵티콘의 존재도 무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출현한 은혜의 공동체는 기존의 율법 공동체와 외형적으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현저히 다른 모습임을 성서는 보여 준다. 즉,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공개한다. 그러나 다른 점은, 중앙 감시탑의 통제주체가 율법이 아닌 성령이라는 것이며, 구성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감시의 벽이 허물어져 사라지고 영적 교제로 커뮤니케이션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의 통제 역시 타율적이 아닌, 사랑과 진리에 의한 가르침으로 이루어졌음도 알 수 있다.

정보화 사회가 율법적 감시체제와 같은 자발적 참여에 의한 정보 네트워크 공동체라면, 그 안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 교회는 성령의 해방 공동체로서 그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누룩과 같은 존재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정보화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면서도 모든 통제와 감시의 체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정보화 사회에서 통제되는 정보란 결국 상대적 가치에 속한 것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롬8:33)이라는 확신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 하느니라"(고전2:15)는 믿음을 갖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정보화 사회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로 하는 어떠한 통제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영적 자유의 삶을 계속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정보화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결국 자본가의 독점 이윤의 실현을 가속화 한다는 차원에 대한 논의를 하지 못하고 강의를 맺게 되었다. 특히 제국주의적 질서하에서 제3세계 국가들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으로 말미암아 강대국에 더욱 깊이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로 보건데, 정보화는 과거의 지배 질서를 영속화하는 수단이 될 가능성이 짙다. 달리 말해서 제3세계와 선진국간의 소위 "등가교환의 원리" 같은 것은 결코 "정의"롭고 "평등"한 질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보화 사회를 위한 국제질서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천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독립적인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본 강의를 통해서 정보화 사회의 구조와 특성을 살펴 본 후, 정보화 사회에 대한 철학적 평가를 분석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인간은 역사이래 정보화를 통해 도구를 만들어 노동을 도구에 대체시켜 왔다. 그러므로 정보화는 인류 역사의 전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지식을 하드웨어화하는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인하여 새로운 기술 문명의 제 단계를 거쳐, 오늘날은 컴퓨터와 통신에 의한 정보처리 기술에 힘입어 고도의 지능 정보화 사회에 접어 들었다.

2. 현대의 정보화 사회를 지탱하는 에너지 자원은 '지식'이며, 이는 서비스 통합 디지털망(ISDN)과 사이버 스페이스 등과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란 이름으로 서버와 클라이언트간 유통 시스템을 형성한다. 이 때는 멀티미디어, 그룹웨어, 가상현실(VR), 및 인공지능(AI) 등의 컴퓨터와 통신에 관련된 정보화 산업이 주종을 이루게 될 것이다.

3. 사회는 전분야에 걸친 자동화를 통하여 테크노피아를 이루게 되지만, 그만큼 철저히 정보 네트워크에 종속된다. 실증주의와 비판 철학이 각기 다른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정보 기술사회는 양면성(ambiguity)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정보화 사회는 인간 해방과 인간 억압이라는 양면적 특성을 강하게 실현시키는 사회라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이와같은 논의에 입각하여 정보화란 사회 현상을 신학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현대의 정보화 사회는 근대주의의 최대 산물로서 영적인 지식은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배제하고 이성(ratio)을 통해서 분석 가능한 자연적 지식만을 철저히 추구한 결과다. 따라서 자연과 은총의 조화(consonant)를 깨고 태어난 정보화 사회란 신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정보화 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하에서만 인간의 본질과 실존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무시되거나 왜곡되어 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이 자연 일체를 지식적으로 대상화 할 때 대상화 될 수 없는 존재 자체마져도 망각하게 되는 "인간의 고향 상실"이 곧 "세계의 운명"이 된 것이다.

정보화 사회는 이성주의에 입각하여 지식과 기술의 레일로 인간이 요구하는(demand) 것들을 끊임없이 날라다 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긍정과 회개(metanoia)가 없는 한, 정보화 사회는 그 이전의 어느 사회보다도 영적으로 기갈된 시대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하여 '궁극 이전의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적 유사종교(類似宗敎; Quasi-Religion)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황폐화 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화 시대의 교회는 그들이 잊고 있거나 거부하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지식의 근본이 무엇인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영적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러한 변화된 세계관을 갖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가르쳐"야 한다(마28:20). 그리하여 현대적 율법의 판옵티콘에서 보이지 않게 감시당하는 그들에게 성령이 통제하는 은총의 판옵티콘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