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시대의 선교적 상황 


들어가는 말

과거 선교현장에서 거의 예외 없이 볼 수 있었던 현상중의 하나는 한글공부였다. 대(對)사회적으로는 문맹퇴치라는 이름으로 수행되었지만, 선교적인 차원에서는 복음전달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 확보라는 중요한 기초공사였다. 한국 선교 초창기에 각 지방마다 활발히 이루어진 '사경회' 또는 '부흥회'! 여기에서 은혜 받은 성도들은 성서공회를 통해서 보급된 <성경전서>를 통해서 견실히 성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도리어 '선교한국'의 교회로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의 발달된 인쇄문화와 더불어 신속한 성경 공급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19세기 후반의 이야기라면, 20세기 후반의 선교적 상황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전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인쇄매체로부터 전자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21세기를 접어들면서 더욱 현저히 나타나 소위 '멀티미디어 시대'를 이룩할 것이며, 이것은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정보화 시대'의 진입을 알리는 것이다. 교회는 새로 도래하는 이러한 선교적 상황을 정면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 현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없이 정당한 선교정책의 수립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정보화 시대에 지배적인 인간의 가치관 문제를 기점으로 선교적 상황의 한 츠면을 고찰해 볼 것이다.

교회의 관심은 인간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인류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한 모델인가? 이제 사람들은 '멀티미디어 PC'앞에 앉아 있으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은 시대에 살면서, 수많은 미래의 청사진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 대중문화를 주도할 멀티미디어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우리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기 이전에 사회는 이미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대립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언제든지 그래왔기 때문에 성급히 우리가 어느 한 편에 서야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멀티미디어가 몰고 올 새로운 가치관을 얼마나 바르게 전망하면서, 이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여하히 대응해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적어도 세 가지 반응을 보여왔다. 적응, 거부, 변혁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새로운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특정시대를 결정하는 동력 그 자체는 결국 보는 자가 인간에 대한 어떤 전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멀티미디어는 분명히 21세기 삶의 양식을 결정하는 막강한 대중매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또한 '멀티미디어'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관심의 궁극적 이유가 무엇이냐는 문제만 남는다. 멀티미디어 시대를 선도하기 위함인가? 변화하는 새 시대에 재빨리 적응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멀티미디어 시대의 도래를 저지하기 위함인가?

세계는 소위 "무한 경쟁시대"를 맞이하여 정보전쟁을 치루는 듯한 인상이다. 우리나라도 정보고속도로를 구축하기 위하여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되는 정책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여기에 공동체의 사활이 달려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긴박감이 돌고 있다. 세계 구석 구석을 뒤져서 필요한 정보를 찾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이다.

이러한 때에 교회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 무엇을 밝혀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멀티미디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함도, 빨리 적응하는 것도, 반대로 지지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관심 가져야 할 본질적인 사항이 아니다. 다만 교회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살아야 하는 '인간'을 문제 삼을 뿐이다.

멀티미디어 시대 가치관의 세 차원 : 기술·대중·정보

오늘날 사람들이 다가오는 시대를 '멀티미디어'로써 규정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시대의 현상을 기술의 변화라는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미쳐 온 영향력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인간과 교회에 대하여 바르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에 우리들은 멀티미디어 시대에 나타날 가치관 문제에 대한 지평만을 개괄적으로 짚어 보는 것으로 제한해야 할 것 같다. 그런 다음에야 멀티미디어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관 아래에서 정당한 인간 이해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주제들인 하느님, 창조, 성서, 계시, 죄, 구원, 종말 등등의 내용에 대한 새로운 검토를 요구하고 나설 것이다. 따라서 멀티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가치관은 전통적인 신학 이론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존재한다.

멀티미디어 시대를 지배할 가치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세 가지 차원에서는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멀티미디어라는 하이테크에 의한 기술적 가치의 우위성이다. 고도의 기술 보유가 인간의 궁극적 평가기준으로 자리잡는 경우다.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보다 바르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둘째, 멀티미디어에 의한 대중적 가치의 우위성이다. 대중성이 없는 것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버린다. 대중성이란 더 이상 저급한 것도, 그렇다고 월등한 수준의 것도 아닌 문화의 자리 자체가 된다.

셋째, 멀티미디어는 고도의 정보화를 낳게 되며, 그에 따라 정보의 유무가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경우다. 바로 이 정보화의 주역은 컴퓨터와 멀티미디어인 바, 이는 인간의 좌뇌와 우뇌 기능을 종합적으로 확장시킴으로 가능케 된다.


Ⅰ 호모 파베르와 '하느님의 형상'(Imago Dei)


멀티미디어 시대는 하이테크를 소유한 자가 사회를 이끌게 되어 있다. 따라서 가치의 중요한 한 척도는 어느 정도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가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사회적 신분보장, 보수 및 제반 대우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인간과 테크놀로지와는 어떠한 상관성이 있는가?

오래 전부터 인간을 가리켜 '도구를 만드는 자'란 의미에서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 칭해 왔다.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에피메테우스가 피조물들에게 각각의 적합한 능력을 부여해 주었는데,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이에 프로메테우스는 아테네와 헤파에스투스로부터 기술적 재능과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불은 인간에게 모든 기술을 가르치는 선생이며, 세상을 헤쳐나가는 훌륭한 방법이지" - 에스킬로스의 비극에서 한 프로메테우스의 말이다.

호모 파베르는 테크네(techne)를 통해서 '환경'(Umwelt)으로서의 자연을, 기술적으로 컨트롤 가능한 '피지스'(physis)로서의 자연으로 변형시키면서 인간 자신도 변형시켜 왔다. 그리고 인류의 경제적 결핍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기술이기 때문에, 마르크스 같은 이는 기술이야말로 유토피아에 이르는 왕도라는 믿음을 견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까지도 인류는 "테크놀로지의 무제한적인 지배는 풍요의 기초"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사실, 기술에 대한 이와 같은 믿음은 현대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힘일 뿐만 아니라, 멀티미디어 시대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 시대는 결국 고도의 기술사회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인간은 더욱 더 기술의 힘에 의존하는 "호모 파베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지배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선 자크 엘룰같은 이들은, 기술이 결국 인간을 지배하고야 말 것임을 경고한다. 기술을 사회의 지배원리로 떠받드는 것이야말로 현대의 이단이라는 것이다. 어벝든 "테크니컬 애니멀"(technical animal)이 된 인간의 모습에서는 "하느님의 형상"이란 적극적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 지는 것은 아닐까?

'에피스테메'와 '테크네'

근대 정신은 물자체에 대한 본체론적 진리인식인 에피스테메보다, 감각에 의하여 직관된 현상론적 인식으로서의 테크네에 우위성을 두었다. 이렇게 근대가 테크네에 우위성을 둔 것은 '절대적 존재의 독재'를 막기 위한 인식론적 해방의 과정이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권위의 근거가 새롭게 설정된 바, 존재의 근거였던 신으로부터 인식의 주체인 인간 자신으로 권위의 중심이 이동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의 정통주의 신앙과 신학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세속주의가 전개되었다. 수도원 생활과 결혼 생활에 하등의 차별이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세상의 직업이 곧 신의 소명으로 이해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람이 주체이고 목적이자, 전부가 되는 세계관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인간이 감각을 통해서 사물을 직관하는 경험적 인식이 엄밀한 사실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객관성의 근거가 불분명해진 것이다. 과학도 하나의 신념일 뿐이라는 자각하에서, 중요한 문제는 '객관성'이 아니라 '진실성'이 문제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기술 자체에 대한 새로운 반성의 지평이 열리기 시작했다. 즉, 기술은 단순히 수단만이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의 하나라는 것이다. 기술과 존재는 상관적이다. 다시 말해서, 기술은 존재를 드러내며, 존재는 기술이 존재 자신을 드러내도록 요청한다. "드러내야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테크네와 에피스테메는 존재를 드러내는 순환관계적 차원이지, 우선순위의 차원이 아닌 것이다.

에피스테메와 무관한 테크네는 모든 자연을 도구화시켜 버리고 말 것이다. 테크네가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존재를 존재되게 하는 창조주와 관련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본체론적인 진리 인식으로서의 에피스테메란 엄격히 말해서 신학적 차원이기 때문이다.

결국 멀티미디어가 하이테크를 요구할수록 인간은 더욱 더 존재의 근거인 창조주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멀티미디어 사회는 존재의 기반이 침하되는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Ⅱ 대중적 가치의 등장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대중'이 지니는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진다. 삶의 총체적 양식을 '문화'로 칭할 때, '대중문화'를 말하지 않고서는 삶을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이전까지 대중문화란 질적으로 저급한 것이거나, 문화의 차원에서 논하기조차 꺼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시대의 대중문화는 이와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것은 멀티미디어로 말미암아 각양의 문화적 계층간의 경계선이 무너져 무제한적인 상호교류(interaction)가 가능해지지 때문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대중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네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는 대중의 주체성 극대화다. 소수 엘리트 사상과 권력 및 자본에 의존해 왔던 중앙집권적인 사회가 서서히 해체되면서, 일반 대중의 잠재력이 폭발적으로 사회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전자 대화, 전자 게시판, 전자 우편, 전자 동호회 등의 전자통신을 통하여 대중은 자신들의 고유한 정보를 나눔으로써 사회를 움직이는 여론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이전 사회에서는 이러한 대중의 주체성은 소수의 의식 있는 엘리트에 의하여서만 의식화되었고, 이론적으로 무장되었다.

둘째는 대중의 자율성 극대화다. 대중은 멀티미디어 환경에서 소극적인 소비자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산에 참여한다. 이전 사회에서는 이러한 대중의 자율성은 소수 특권층에 한정된 것이었다. 타율을 가하려는 권력은 더 이상 멀티미디어 환경 내에 거미줄같이 연결되어 있는 미디어 망을 차단할 수 없다.

셋째는 대중의 개별성 극대화다. 대중은 개별자들의 이익추구를 위해서 연대를 필요로 할 뿐, 인류의 공동선을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연대에는 소극적으로 된다. 달리 말하여, 여기에서는 이익사회로서의 게젤샤프트(Gesellschaft)는 극대화되지만, 인간 공동체로서의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는 극소화된다. 이전과는 달리 손쉽게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대중의 임시성 극대화다. 사람들 간의 만남은 지극히 임시적으로 되어 간다. 깊은 인격적 만남을 회피한다. 타인과의 총체적 연관관계를 갖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오직 기능적, 필연적 관계하에서 부분적으로만 만날 뿐이다. 더욱이 멀티미디어가 제공하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만남에서 전인격적 만남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토플러는 이와 같은 미래인간의 모습을 "조립인간"으로 표현한다.

네오-게젤샤프트의 출현 : 이익집단들의 지구적 연합

멀티미디어는 마침내 대중을 인류의 보편적 문화형성자로 이끌어 내고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대중사회, 민주사회를 만드는 견인차의 역할을 멀티미디어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중사회는 한 문화권을 넘어서 이제는 문화간의 경계선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그래서 마침내 "지구촌"(Global Village) 시대를 형성한다.

멀티미디어로 인하여 대중의 사회적 의미는 매우 능동성을 띠게 되었다. 대중의 주체성, 자율성, 개별성, 임시성 추구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더욱 극대화될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가치는 이익집단들의 지구적 연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시대의 대중이란 일대일 인격으로 만남이 가능한 공동체가 아니다. 다만 사회적 기능인으로서 만나는 단일화된 거대 이익집단일 가능성이 많다. 문화·경제 제국주으를 꿈꾸고 있는 미국이 NII를 거쳐 GII(Global Information Infrastructure)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멀티미디어를 통해 지국적 '네오 게젤샤프트'(Neo-Gesellschaft)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이익 추구와 자기만족을 위한 개별자들의 집합에서는 끊임없는 과대경쟁에 따른 긴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아담 공동체에서는, 한 사람이 범죄하면 전체가 그 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하는 게마인샤프트였다. 비유하자면, 병력적이 아니라 직렬적 관계로 맺어진 유기적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기적 공동체인 게마인샤프트를 이루지 못하는 거대 이익집단으로서의 대중은 '호모 페카토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멀티미디어의 '테크네'는 인간의 무한정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하이데거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드러내야 드러난다". 이것은 역으로, 존재가 기술을 요청하니, 마침내 기술이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이 악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지닌 한, 테크네의 방향은 욕망의 수단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인가? 이것이 기술의 숙명인가?

유사(類似)현실 속의 대중적 '가면문화'

인류의 기술 가운데서도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것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기술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전자매체의 등장은 인류의 전(全)문화구조, 사상구조 및 종교와 신학의 구조까지 변화시키고 있을 정도다. 전자(電子)에 의한 멀티미디어 환경은 새로운 기술개발에 힘입어 더욱 완벽한 현실을 이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왜 이토록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구축하고자 하는지 그 배경을 비판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창조주를 등진 후, 인간끼리도 배타적으로 시공간의 거리를 두고 살아오고 있다. 그후의 커뮤니케이션은 나눔과 공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몫을 얻어내기 위한 행위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 서로가 확실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매체가 필요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구두'로도 가능했지만, 불완전했다. 그래서 '문서'화함으로써 확실성이 보장되었으나, 먼 거리에까지도 빨리 주고받는 일이 필요하자 '전자'우편까지 등장하여 지구내의 어떠한 곳에서도 실시간에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현실을 맞고 있다. 이제는 당사간에 '멀티미디어'를 통하여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자신의 몫을 나누어 갖는 일이 가능해 졌다.

그렇다면 멀티미디어는 인간의 지극히 이기적 사리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술적 총아인가? 우리는 멀티미디어를 직접 대놓고 그렇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간 행위의 뿌리인 그 동기에 있어서까지 자기 의(義), 자기 유익, 자기 자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있는가? 결국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 인간 본질의 어떠한 부분도 새롭게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사람들이 보다 세련된 옷을 찾아 자신을 가꾸듯이, 고도의 기술문명으로써 인간간의 부딪힘과 만남의 깊이를 대치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멀티미디어의 기술적 목표는, 인간이 직접 만나지 않고서도 마치 직접 만난 것처럼 생동감을 얻을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얻어진 유사(類似)현실이 멀티미디어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인격의 깊이를 가지고 직접 대중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인간은, 신기술로 이루어진 유사현실 속에서만큼은 인격적 교류라는 부담 없이 자유롭게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가면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Ⅲ 멀티미디어 시대는 고도 정보화 사회


인류의 20세기 전반기까지 기술은 인간의 팔과 다리의 기능을 확장하는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로 들어오면서 기술은 귀와 눈과 두뇌의 기능을 확대하는 것(extention)으로 집중개발되고 있다. 전자는 자동차, 후자는 컴퓨터가 그 대표적 예이다. 이것은 달리 산업사회와 전자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인류는 바야흐로 전자시대 신기술의 총아로 멀티미디어를 지목하고 있다. 멀티미디어가 대중의 수요에 깊이 파고든 소위 멀티미디어 시대라는 것은, 한마디로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완전히 진입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 때에는 사회적 가치로서 자본보다 정보가 더 큰 비중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정보화 시대는 다니엘 벨에 의하면 "정보와 지식이 사회적·경제적 교환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로서 서비스 산업사회, 전문 기술직 종사자의 지배적 현상, 지식사회의 대두, 기술의 자기 유지적 경향, 이론적 집중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앨빈 토플러는 이 정보화 시대를 "제3의 물결"이라 부르는데, 탈 대량화 현상에 따른 전 분야의 다양성이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 때에는 산업사회의 특징인 규격화, 동시화, 중앙집권화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것으로 예측한다.

멀티미디어라는 커뮤니케이션 신기술이 뒷받침하는 고도 정보화 사회의 구축이라는 인류의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낙관적으로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낙관론은 정보화 사회의 분권성, 평등성, 다양성을 근거로 일반 대중의 폭넓은 정치·경제·문화 영역의 참여가 가능해진 차원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반면에, 멀티미디어에 대한 비관론은 신기술을 장악한 소수집단에 의해서 정보가 조정(manupulation)되어 새로운 권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낙관적 입장을 비판한다. 그러나 아무리 타당한 주장이라도 대안이 없는 비판은 이론으로 머무를 뿐이다.

멀티미디어를 축으로 하는 전자시대에는 무엇보다도 정보교환 방법 자체가 이전과는 회기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특히 종이와 문자매체가 주요한 수단이었던 때와는 달리, 문자뿐만 아니라 그림, 정지화상, 동화상, 음성까지 하나의 시스템에서 실시간에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미디어 혁명은 곧바로 정보혁명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므로, 21세기는 멀티미디어를 통해서 들어 온 수많은 데이터를 정보화 할 수 있는 능력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컴퓨터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출입문'

이 미디어 혁명과 정보혁명을 일으킨 주역이 바로 컴퓨터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 사회에서도 컴퓨터는 혁명동지로서 영예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컴퓨터가 처리하는 데이터와 정보의 양이나 그 속도 및 저장과 관리의 능력은 이미 현대인 모두가 경험하고 있듯이 가히 천문학적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에 사는 인류는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만능에 도전하는 컴퓨터에 의해서 모든 것이 컨트롤되고 있는 사회를 자연 환경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컴퓨터를 만들고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컴퓨터가 지정해 놓은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는 자의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농부가 하늘이 주는 기후와 계절에 맞추어 농사를 짓듯이 말이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정전이 된 서울을 생각해 보라. 전철, 사무실, 공장, 각 가정의 모든 가전제품 및 모든 상업행위 뿐만 아니라 정신적 행위까지 '올 스톱'이 될 것이다. 전기가 이처럼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힘인 것처럼, 컴퓨터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근원적 상황'(Grundsituation)을 제공한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컴퓨터로 열리고, 컴퓨터로 닫히는 사회다.

좌뇌(左腦)기능 우선의 가치관 : 컴퓨터식 사고

이처럼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획기적인 기술의 발전을 보여 주고 있는 컴퓨터이지만, 결국 인간 두뇌의 작용을 기술적으로 확장하는 도구일 뿐이다. 특히 인간의 좌뇌 기능을 극대화시킨 것이 컴퓨터라 이해할 수 있다.

좌뇌는 시각, 언어, 논리, 수학, 직선, 연속, 조정, 지성, 지배, 현실, 양, 능동, 분석, 순차성 등과 관련된 기능을 담당한다. 반면에 우뇌는 촉각, 청각, 총체성, 예술, 상징, 동시성, 정서, 직관, 침묵, 영성, 질, 수동, 종합, 추상성을 파악한다. 마샬 맥루언은 서양인에게 있어서 보다 지배적인 사고는 좌뇌 기능에 의한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서구의 발전된 과학과 기술은 수 천 년간이나 지배해 온 서구인의 시각적이며 논리적 사고와 양적 이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페니키아로부터 연원해서 헬라인에 의하여 체계화되기 시작한 시각공간은 단일 형태, 계속성을 그 특징으로 지닌다. 신경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군주적 사고방식 역시 좌뇌에 의하여 지배되는 감각활동에 기인한다.

멀티미디어 환경의 주축이 컴퓨터라고 한다면, 멀티미디어 시대에서는 좌뇌 우위의 사고에 의하여 삶의 모든 가치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환경에 대한 수용은 개념(concept)적이며, '눈'을 통한 인식의 극대화를 이루면서 환경을 조정한다. 그러므로 조정 가능한 인식의 틀을 벗어나 있는 것들은 "자연"이며, 그것은 곧 "카오스"(chaos)와 같은 것으로 처리한다. 이 때의 가치관은 철저히 유클리드(Euclide)적이며 기계론적이다. 창문 밖의 모든 것, 즉 자신이 조정할 수 없는 세계는 "와일드"(wild)한 것이다.

서구 2500년간의 문명발달사를 돌이켜 볼 때, 문명화의 본질은 유클리드적 컨트롤의 가속화였으며, 중앙집중주의(centralism)의 성장이라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컴퓨터 기술은 바로 이와 같은 좌뇌 지배적인 가치체계에 우선을 두어온 서구문명의 열매다.

"수족관 시대"의 도래: 우뇌기능과 신경조직이 확대된 세계 멀티미디어 시대는 컴퓨터 없이 실현 불가능하지만, 컴퓨터의 좌뇌적 가치체계만을 가지고서는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멀티미디어는 문자와 언어의 세계를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감각활동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좌뇌기능을 극대화한 것이라면, 멀티미디어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인간의 우뇌기능과 신경조직을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뇌적 사고는 장소에 제한 받지 않는 동시성을 우선으로 한다. 맥루언에 따르면, 미래의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모든 것을 집합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이 될 것인 바, 비디오와 연계된 기술이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비디오 연계 기술의 쌍방향성은 멀티미디어 세대의 가치관을 우뇌중심적 사고에 의하여 형성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이 때에는 사용자가 생산자가 되면서 동시에 소비자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우뇌 지배의 사고는 중앙집권적 체계를 해체시키려 든다. 알파벳과 글쓰기의 발전은 힘과 자원을 집중화해 왔다. 문헌이란 중앙집권화 된 관료사회의 좌뇌적 전략물로서 오늘날까지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프린트에 근거한 에토스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이르러서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다중 전달체계'(multi-carrier telecommunication)에 의하여 더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게 된다. '인터액티브 이성'(interactive satellites)이나 무수한 '마이크로웨이브 유니트'(microwave units)를 통해서 국가간의 장벽도 간단히 넘나들면서 대량의 정보를 유출시킨다.

바야흐로 21세기 멀티미디어 사회의 인류는 이처럼 "수족관"(Aquarium)과 같은 세계를 경험하면서 살 것이다. 이 때에 인류를 지배하는 가치는 '통시성'(diachronism)이 아니라, '동시성'(synchronism)이다. 수족관 안에서는 직선적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 뒤 좌우나 선후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동시적이며, 총체적이다.

이처럼 기계적 세계로부터 전자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은 유클리드 공간으로부터 아인슈타인의 공간으로의 전환과 같다. 이 때, 환경에 대한 인식은 '컨셉트'(concept)가 아니라, '퍼셉트'(percept)식이다. 인간의 시각, 청각, 촉각, 후각(미각) 모든 감각을 통한 총체적 파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는 서양보다는 동양의 전통에서 쉽게 발견된다. 서양인은 대체로 특정한 견해에 입각해서 자신의 권위체계를 확립코자 한다. 초기 플라톤 사상은 헬라의 부족의식(tribalism)의 동양적 편견을 파괴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좌뇌적 사고를 철저히 밀고 나간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은 심리적이며 사회적인 모든 상황에 즉각적으로 적응하는 능력, 또는 그러한 자세를 지닌다. 그들은 삶을 다양한 감각의 평형상태로 보지, 어떤 우열의 순위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맺는 말


정보화 시대의 주된 선교적 상황은 지난 선교 초창기 때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옛 그릇으로 새 시대의 인간은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교회가 대중의 한글 교육을 통해서 선교의 의사전달 매체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은 "문맹"이 아닌 "컴맹"퇴치를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뭏튼, 급속히 변화되어 가는 시대를 놓치지 않고 읽어감으로써 보다 능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선교전략이 수립되도록 해야 한다.

존 네이스비트가 '하이테크' 시대일수록 '하이터치', 곧 "함께 있으려는 욕구"가 강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한 것은 정당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중요한 점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그의 '하이터치'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가면문화'에서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네오-게젤샤프트에 들어선 대중은 이미 '인격적'으로 함께 있는 것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멀티미디어를 통해서 현실과 방불한 '유사현실'을 창조하여, 마치 인격적 만남을 갖는 듯한 가면문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네이스비트가 "나이트클럽의 홀"이나 "영화관"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을 예로 들었지만, 그 대중들은 "함께 있으려는 욕구"를 드러낸 것뿐이지, 결코 그 가운데서 인격적인 만남을 창조코자 하는 용기나 의지는 없는 대중이란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대중은 더 이상 인격적 연합으로서의 공동체는 아닌, 자기 충족적 개별자들의 이익집단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고도의 테크놀로지, 대중화, 정보화라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가치관 아래에서 끊임없이 컴퓨터식 사고를 해야하는 "테크니컬 애니멀"로 적응시켜 가고 있다. 라오쯔(老子) 오래전에 '도'(道)가 사라지면 '덕'(德)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고, 더 내려가 '덕'이나 '의'가 부재하면 그 대신에 '예'(禮)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고 당시 도가 부재한 상황을 비판한 바 있다. 이처럼, 현대 21세기에 들어갈 세대들 역시 신의 계시를 제거하는 탈신성화의 현대적 흐름 속에서 신의 현존을 대신하는 완벽한 기술사회를 창조하여 거기에서 인류의 안식을 취하려고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그러한 사회의 밑그림쯤 될 것이다.

기술사회 건설 이면에는 '신 없이도 완벽한 사회'를 추구할 수 있다는 메마르고 외로운 인간의 투쟁의지가 깔려 있다. 이러한 인류를 향하여 교회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주는 존재이어야 한다. 멀티미디어 사회가 줄 수 없는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포스트 멀티미디어 시대가 오기도 전에 교회당은 텅텅 비는 날이 올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일이다. 성령이 주는 생명력은 멀티미디어 시대를 지배하는 제가치를 넘어 '호모 페카토르'로서의 인간을 참된 인격으로서의 '하느님 형상'으로 변화시키며, 뿐만 아니라 유사(類似)인격적 가면문화의 네오-게젤샤프트를 참된 인격의 코이노니아가 살아 있는 '하느님 나라'로서의 게마인샤프트 공동체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