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과 선교



   1. 들어가는 말: 조직신학과 선교



선교의 문제를 독립된 학문방법을 가지고 다루고자 하는 선교학은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1910년 에딘버러 선교협의회 이후 세계교회협의회의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WME)'로 성장하면서, 그리고 1974년 로잔대회 이후 복음주의 선교협의회가 강하게 부상하면서 선교학은 다루어야 할 많은 과제들을 떠맡게 되었다.


선교학이 세계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선교의 문제를 어느 정도,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지향하면서 체계적으로 다룰 것인지 분명히 선을 긋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로 보인다. 때로는 선교대회에서 드러난 교회의 신학적 당면 과제들을 분류하여 모아놓은 선교 보고서 이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교"를 독립된 연구의 "차원"으로 삼아, 교회와 신학이 관심 갖는 주제들을 선교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판단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는 한, 선교학은 신학 학과내에서 분명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풀어나가는 길 중의 하나로서 기존의 신학 방법 및 원리들과의 대화는 가장 생산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신학의 제 학문들이 그렇듯이 서로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고유한 사상들을 나누는 것은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거의 필수적인 사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선교"를 조직신학적 지평에서 음미하여 선교 사상에 대한 논의의 폭을 확대하는 것은 양 학문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조직신학의 전통에서 선교라는 주제를 독립적으로 다루어 신학적 원리로 삼은 예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관심은 교회론을 다룰 때 가끔 부분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신학의 논의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틀 가운데 하나가 '메시지와 상황'이다. 조직신학은 신앙의 메시지 자체를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신학의 원리를 세우고자 하는 교의학적 방법과, 메시지의 대상인 상황을 고려함으로써 메시지와 상황간의 바른 관계를 세우고자 하는 변증학적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조직신학의 방법론들에 입각하여 우리는 선교에 대한 문제를 크게 두 각도에 조명할 것이다. 첫째는 교의학적 관점으로서 선교 사상을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의 보내심과 보냄 받음의 구조를 통해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행위임을 밝힌다. 둘째는 변증학적 관점으로서 복음이 만나는 상황인 문화와 종교가 복음과의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되는지를 신학적으로 밝힌다. 복음과 문화, 복음과 (타)종교라는 이 두 주제는 기독교 선교를 조직신학적으로 고찰할 때 주변의 여러 학문과 대화해야 하는 간학문적 방법과 원리를 필요로 하는 분야이어서 정당히 다루기가 매우 힘든 분야에 속한다.



2. 선교 : 조직신학적 정의

 

선교는 주지하다시피, 하나의 부분적 개념이 아니고 총괄성을 띤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정의'를 내릴 때 선교의 본래적 의미가 드러나기보다는 그 정의로 인하여 더욱 혼란을 겪게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선교에 대하여 내려진 정의를 개괄한 칼 뮬러의 정리에 따르면, 선교는 신앙의 확장, 하나님 나라의 확장, 이방인의 회심, 교회 설립, 경계선 넘어가기, 선포자의 봉사 등으로 이해되었다고 하는데, 그 관점의 폭이 매우 넓게 퍼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선교에 대한 정의는 세계교회협의회가 주도하는 에큐메니칼적인 이해와 복음주의 교회들의 이해에 따라 크게 두 방향으로 양분된다. 한편이 선교를 세계를 향한 섬김(diakonia)으로 본다면, 다른 한편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복음선포(kerygma)로 이해한다. 이들은 "봉사" 혹은 "전도"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에큐메니칼적인 선교는 "상황"을, 복음주의적 이해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구원을 이해한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는 그것이 어떤 대립성을 띠든지 크게 문제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적어도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선교는 성서적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으며, 현장에서 수많은 교회들에 의하여 다년간 적용되어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단순화 시켜서 말한다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론적인 틀로써 하나님을 말하는 성서적-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야웨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이 "누구"인지, 그들은 피조물에 대하여 "무엇"을 의도하고 행동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없이 기독교 신학을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조직신학은 이러한 내용을 보다 세분화된 신학원리들을 가지고 다각도로 밝히고자 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결국에 그 모든 노력의 결실로 "하나님"에 대한 비밀을 벗어내는 데 기여해야 한다.


조직신학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verbum Dei)"을 학문적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계시"다. 조직신학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계시했는지를 체계적으로 묻는다. 보편적인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연으로, 그리고 신앙으로만 이해되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 있음을 논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조직신학의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이것이 조직신학을 신학의 이론적 분야로 분류하는 중요한 이유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그 동안 신학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것을 "말씀"으로 이해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천지 창조도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도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신학의 틀 자체가 "말씀의 신학"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심을 통해서만 아니라, 자신의 사자(使者)들을 보냄으로써도 자신을 계시한다는 사실이 소홀히 취급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통한 자기 계시다! 주의를 요할 것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미시오 데이"를 에큐메니칼의 주된 선교 이념이나 혹은 파당적 슬로건쯤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큐메니즘의 선교는 세상을 향한 실천적 행위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짝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관점에서 이해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미시오 크리스티(missio Christi)"와 "미시오 스피리티(missio Spiriti)"와 더불어 삼위일체론적 차원에서 고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계시를 말씀과 동시에 선교라는 하나님의 사건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한 이해를 제시한다면,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선교 그 자체는 "보냄(Sendung)"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보내는 사건이 없었다면, 말씀은 매우 공허한 울림에 불과한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으며, 마침내 승천한 그리스도를 다시 세상에 보내심으로 세상을 향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보냄의 사건 없이 세계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보냄의 사건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교회란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자들의 무리로 이해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낸 것같이, 성령도 제자들을 땅끝까지 보내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조직신학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선교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한 방법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와 성령을 보내신 사건을 통해서 선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이 확증된다. 선교는 세상을 향한 계속적인 보냄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보내고, 그리스도와 성령이 교회를 세상에 끊임없이 보내는 것이 선교다. 그러므로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계시의 행위로서 그 목적은 피조계 전체의 구원이며,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 그들을 다시 세계에 보내는 일이다.

  


3. 선교에 대한 교의학적(Dogmatic) 이해

조직신학은 일반적으로 크게 종교철학, 교의학, 변증학의 원리들을 통해 신학의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학문으로 자리잡아 왔다. 종교철학은 독립적인 분과로 이해되고 있기도 하지만, 자연신학이 교회신학과의 긴장 관계로 인하여 신학의 범주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써 변형을 가져온 학문분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세 원리들 중에서 조직신학을 말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교의학이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고백을 전제해야 하는 신앙의 신학원리이다. 일반적으로 조직신학을 소개하는 입문서는 교의학의 틀을 따라 신앙의 항목들이 소개된다. 우리는 그 중에서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에 기초하여 선교의 문제를 고찰할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선교, 그리스도의 선교 및 성령의 선교를 말한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없이 교회의 선교는 없으며, 이것은 역으로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를 따라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3-1. 하나님과 선교: missio Dei


선교는 하나님이 자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을 세계에 보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나님이 보내는 일이지, 사람이 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라는 의미다. 선교의 주체인 하나님은 누구인가? 세계를 향한 그의 사역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아는 만큼 선교에 대한 물음들 - 왜,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디서부터 - 에 대하여 정당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 받침대다. 그러니 너희가 어떻게 내가 살 집을 짓겠으며, 어느 곳에다가 나를 쉬게 하겠느냐?' 주님의 말씀이시다.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며,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사66:1). 하나님이 하는 일은 어떠한가? 그는 "손을 펴시어서, 살아있는 피조물의 온갖 소원을 만족스럽게 이루어" 주시는 분이다(시144:6). 뿐만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그 모든 일은 의롭다. 주님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신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구원해 주신다"(시144:17-19).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도록 품고 계신 분이다(행17:28). 만물의 출현과 생명과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롬11:36). 요약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며(계4:11), 구원자(엡1:5-9)이며, 심판자(계15:3-4)로서 자신을 세계에 계시하고 있다. 이를 다시 줄여, 하나님은 세계의 통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세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세상에 보낼 자를 선택하는데 자신의 통치권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사6:8). 하나님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레미야, 이사야 등 자신의 마음에 합당한 자들을 선택하여 보내신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것은 하나님 자신이 부르시는 일이 없이는 누구든지 스스로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선교의 주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보내지 않은 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성서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인 바울도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도 곧 보냄을 받은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골1:1). 이러한 바울 자신의 고백에 앞서서, 하나님이 바울을 부를 때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그릇"(행9:15)이라고 선택해 놓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처럼 택한 자들을 세상에 보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 행위다. 따라서 선교를 통해서 기대될 수 있는 것은 세계에 하나님이 더욱 분명히 알려지는 것이다. 특히 그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즉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무엇인지 알려짐으로써 피조물이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어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선교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는 의의다. 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이미 고찰한 대로, '하나님은 창조하신다. 하나님은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선교는 바로 이 사실들이 보냄을 받은 자들을 통하여 세상 한 가운데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정점에 위치하는 것은 바로 "아들"을 보내신 사건이다. 이것은 자신을 알리는 가장 분명한,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사건이다.



3-2. 그리스도와 선교: missio Christi


그리스도는 보내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냄을 받은 자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님과 본질상 하나이면서도 "아버지"의 보내심에 따라 세상에 오신 자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세상에 인간으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철저히 자신을 인간들과 일치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주장할 수 있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예수의 행동 저변에는 언제나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는 의식이 늘 가득 차 있었다. 요한복음 3장부터 20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장에 걸쳐 이러한 사상이 나타난다. 특히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요4:34)라는 말씀에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일과 그 목적이 세상의 구원에 있음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자들을 택하여 보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제자들을 부르고 또한 그들을 세상에 보내는 일을 하셨다. 여기에서도 선교의 주체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요15:16). 그리스도는 이처럼 택한 자들을 세상으로 보낸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요17:18).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에서 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뜻을 펴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등 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심으로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아들임을 알리려 하셨다. 그것은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23)라고 한 예수의 마지막 기도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 준 것은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완전히 계시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활동의 정점에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이심이 알려지게 되자, 그는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하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선고하였다. 제자들 중 베드로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 항의했을 때,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 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 하면서, 그의 항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그후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세 번씩이나 예고함으로써 죽음과 부활이 중요한 사역임을 밝히셨다.


신약의 모든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정점으로 그의 전기를 구성하였고, 그 외의 신약의 저자들 역시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의 중심으로 받아들였다. 그 중에 바울 사도는 이 점을 의식적으로 교회에 알리고 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밖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고전2:2).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전15:14).


그렇다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아들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신학적 의의는 무엇인가? 요약하여,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유효하다는 사실과,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입증되었다는 점이다. 즉, 하나로 연결된 이 두 사건은 율법의 공의와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곧 사랑이 인류에게 계시된 사건으로서 그 신학적 의의는 절대성을 지닌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를 기초로 하여 "율법과 복음"이라는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는 신학원리를 형성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며, 이것은 율법을 이룰 수 없는 인간에게 다함이 없는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며, 이것은 곧 율법의 모든 저주들로부터 해방이요, 참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피조물을 향한 구원의 원천이 되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고, 아들이 그 선교적 사명을 "다 이룸"으로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부족함 없이 계시하게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과 부활, 그리고 역사의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의 약속은 불변의 복음이 되었고, 누구든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문이 열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온 인류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와 같은 신앙의 새로운 세계에 참여토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신다.



3-3. 성령과 선교: missio Spiriti


하나님이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 사건은(요14:26) 하나님의 선교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에 속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삼위일체 신학원리에서 그 위상이 적극적으로 정립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부분이 바로 성령론이다. 특히 서방 교회에서 성령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보내졌다는 "필리오케"론을 주장함으로써 성령은 아버지로부터만 보내졌음을 견지하고 있던 동방교회와의 신학적 이견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적 관점이 정당하게 적용된다면, 이 문제는 균형 잡힌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성령과 아들과의 관계는 동방교회가 염려하듯이 종속 관계가 아니고, 하비 콕스가 정당히 밝힌 것처럼 "조화로운(consonant)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유지하면서도 창조와 역사 속에서도 활동하는 보편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오순절에 비로소 보내진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의 역사 이래로 성부, 성자와 동역을 하고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그의 전 사역에 걸쳐 함께 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떠한 분인가? 성부 하나님이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고, 성령을 보냄은 무엇을 위함인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냄의 목적이 그러했듯이, 성령이 보냄을 받은 목적 역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 피조물을 향한 정의로운 통치와 사랑의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경험케 하는 일이 성령의 일이다. 이를 요약하면 피조물의 구원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성령은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믿도록 역사한다. 성령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을 수 없다. 그만큼 성령의 사역은 구원의 일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신득의(以信得義)를 이루게 하는 분이 성령이다. 또한 이신득의를 이룬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케 하는 성화 내지는 성결의 삶을 살게 하는 분 역시 성령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살리는 분이요(고후3:6), 자유케 하는 분(고후3:17)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렇게 백성들의 개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주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분이다. 성령은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허락하여 서로를 섬기도록 하며(고전12:4-11),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든다(엡4:3). 성령은 믿음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불러 한 성령으로 어떠한 차별도 없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한다(고전12:12-30). 이러한 일들을 이루게 함이 하나님이 성령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들이다.


그러나 성령의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성령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지만, 동시에 보내는 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땅끝까지 보낸다(행1:8). 성령은 그리스도에게도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세상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며, 자유와 해방과 은혜의 해를 선포케 한다(눅4:18-19). 성령은 사도시대에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고(행10:19), 안디옥 교회의 바울과 바나바를 유럽으로 보내었다.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행13:4). 이처럼 성령은 기름 부은 종들을 보내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역케 하며, 흑암과 억압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왕성케 함으로써(행6:7)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도록 한다.


지금까지 선교를 미시오 데이, 미시오 크리스티, 미시오 스피리티라는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구체적으로 세상을 향해 교회를 보냄으로써 현실화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인 "교회(ecclesia)"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가 맺은 열매다. 그러므로 교회는 천사들도 부러워할 정도의 값진 존재다. 복음을 들은 백성들이 모인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 자들이요, 동시에 세상에 다시 보냄 받은 존재다.


이들의 사명은 세상이 복음을 듣도록 하여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믿음으로 동참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프락시스'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향한 용서를 선언하나,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에 대하여 심판을 고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에 부름 받은 교회는 세상의 문화와 종교를 만난다. 교회는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피조물, 모든 문화, 모든 종교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과연 보냄 받은 교회가 복음을 문화와 종교와의 어떤 관계로 이해함으로써 복음의 고유한 기능이 정당히 발휘되도록 할 것인가?



4. 선교에 대한 변증학적(apologetic) 이해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복음이 문화와 종교와 만나는 일은 최우선의 과제에 속한다. 복음과 문화, 복음과 종교는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긴히 요구되는 선교의 주제이며, 동시에 조직신학이 긴급히 다루어야 할 과제다. 왜냐하면 문화는 인간의 삶 전반을 규정하는 현실이고, 종교는 삶의 가치와 목적 및 제 문화의 양식을 규정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교의학적 관점에서 선교 사상을 고찰했다. 교의학이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묻는 분야라면, 변증학(Apologetics)은 교의학적 내용들이 선교의 상황에서 대면할 수밖에 없는 도전들에 대하여 체계적인 대답을 시도하는 조직신학의 또 다른 분야로 이해할 수 있다. 교의학은 학문적 전제로서 신앙적 "고백(confessio)"을 요구하였다면, 변증학은 "대화(dialog)"의 방법이 긍정되어야 한다. 여기서 대화라는 것은 객관적 관찰자로 끝까지 남아서 상황을 보고하는 것만이 아니다. 변증학적 대화는 신앙의 실존적 참여를 요구한다. 즉, 문화나 종교 등에 대하여 인류학자나 종교학자의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의 고백을 실존적 삶의 맥락에서 적용하고자 하는 신학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함을 말한다.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선교의 문제를 문화 및 종교와 관련시킴으로써 변증학적인 선교 이해를 현대적 관점에서 전개하고자 한다.



4-1. 복음과 문화 - 현대교회의 선교적 과제


'복음과 문화'는 현대 교회가 신학적으로 다루어야 할 가장 포괄적인 주제에 속한다. 지금까지 양자의 관계성은 극한의 대립이나 동일화 혹은 혼합의 제 양상을 띠고 있다. 오늘날 세계를 향한 교회의 선교가 분명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도 복음과 문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의 결핍과 무관하지 않다. 이로 인하여 세계 교회의 내적 연합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복음과 문화 각자가 지닌 고유한 역할마저도 모호해짐으로써 교회 본래의 정체성 상실까지도 초래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교회는 시대마다 정립하고 넘어가야 할 신학적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해왔다. 초대교회는 복음과 율법의 문제로, 중세교회는 계시와 이성, 근대교회는 진화와 창조라는 문제를 중요한 신학적 과제로 다루어야했다면, 현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복음과 문화의 문제다.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온 인류로 하여금 그리스도 신앙을 통하여 각자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하는 양자의 조화를 추구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인류 '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에 기초하여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정당히 정립하는 것이 시급히 요청된다.


복음과 반문화


인간을 포함한 자연이란 무기적, 유기적, 및 정신적 생명의 총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므로 자연의 모든 생명 활동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골1:16). 특히 자연의 정신적 차원에 속하는 생명체인 인간에게는 다른 차원의 생명과는 달리 언어와 기술이 주어졌다. 언어는 모든 자연과 초자연의 제 현실들을 개념화하며, 기술은 언어로 개념화된 정신을 현실로 구체화한다. 여기에서 문화가 태어난다. 따라서 문화란 언어와 기술로 자연의 질서와 현상을 설명하고 그 질서에 따라 재구성하는 인간 본성(nature)의 행위다. 인간 외의 생물은 주어진 자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인간만은 정신의 활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문화의 역사다. 그 방향은 인간 정신의 흐름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 때 정신 활동이 자연의 질서를 거슬리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반문화(反文化)' 행위라 한다. 그래서 인류의 문화사(文化史)는 문화와 반문화의 역사가 된다.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응용하고 발전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정신적 생명에게 주어진 특권이요, 동시에 의무이다. 인간의 정신적 행위가 문화적인가, 반문화적인가 하는 문제는 그 결과가 얼마나 자연과 적극적인 조화의 관계를 갖는 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러한 점은 자연 현상을 직접 파악하려는 과학 기술에만이 아니라, 예술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 가치 창조와 관련된 모든 문화에 적용된다. 이들이 '문화적'이기 위해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자연의 생태를 창조의 로고스에 따라 유지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문화적'이 된다.


문화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역사란 인간에 의한 문화와 반문화의 대립 과정임이 성서의 관점에서도 긍정되어야 한다. 성서에 따르면, 반문화는 하나님이 기초해 놓은 생명의 법을 인간이 범함으로써 시작된다. 그것을 '죄'라 하며(요일3:4), 그 결과는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자연과의 부조화를 만들어 내는 반문화는 결국 죽음의 문화다. 인류가 역사 이래로 겪고 있는 기아 질병 전쟁 차별 억압 폭력 등에 의한 고통은 대부분 반문화의 산물이다. 즉, 자연의 질서에 거슬리는 인간의 정신활동이 강화됨으로써 빚어진 반문화의 유산이다. 이처럼 인간의 반문화적 행위로 인하여 자연의 모든 피조물은 깊은 "신음"하에 있으며, 반문화의 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롬8:20.22). 이것이 복음과 문화의 관계가 이야기되어야 할 상황이다. 여기에서 복음은 문화뿐만 아니라 인류의 반문화에도 주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복음과 문화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반생명, 반자연, 반문화의 모든 힘에 대항하여 죽음의 모든 세력들에 눌려있는 생명과 자연과 문화를 해방하는 말씀이요 능력이다(롬1:16). 성서는 이 복음이 나사렛 예수의 성육신 죽음 부활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예수 안에서 구원의 힘과 희망을 경험한 교회는 예수를 인류의 '메시아'로 선포한다. 이 소식은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이 되며, 또한 그 믿음은 능력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감은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운명의 사슬로부터의 단절이요, 범법 이전의 순간으로 거듭남이요, 조건 없이 새롭게 출발하는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가 자신의 절대성에 대한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승인을 기다리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모든 종교와 문화의 자기 긍정의 거짓됨에 대한 폭로요 심판이다. 그러므로 자기부정을 통해 죽음을 이겨낸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절대적 능력과 진실함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증거가 된다.


교회는 이러한 복음을 크게 두 면으로 이해한다. 하나는, 복음이란 초자연적인 실체로서 현실 너머에서부터 신비적으로 다가오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적 실재에 기초하고 있으며, 교회는 이를 객관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복음의 의의는 죄인 된 개별 영혼들이 회심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하는 데 있다. 이때 복음은 죄로 인한 개인의 실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다른 하나는, 복음이란 자연적인 실체로서 현실 안에서 윤리적 결단을 일으키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인격적 실재에 기초하고 있으며, 교회는 이를 모범으로 하여 제자도를 실천해야 한다. 복음의 의의는 공동체의 정치적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역사의 현장에 구현하는 데 있다. 이때 복음은 공동체의 윤리적 실천을 위한 힘을 제공해 준다.


현대교회는 이러한 복음 이해의 서로 다른 전통을 복음 자체에 대한 대립적 인식의 결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다양한 문화 또는 반문화에 대한 복음의 깊이와 역동성으로 이해한다. 복음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이해'는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단면적인 복음 이해만을 절대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주적인 복음을 특정한 경험으로 제한해버리는 '반문화적' 행위가 될 것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당하도록 세상에 보냄 받은 공동체다. 오늘날 인류는 반생명 반자연 반문화의 급류에 휘말려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위협 하에 있는데, 이러한 지구적 위기에 대한 최후의 희망은 '복음'이라는 것이 모든 교회의 일관된 확신이다. 그러나 교회는 '반문화'에 도전받고 있는 인류 '문화' 가운데 해방과 희망의 복음을 얼마나 바로 선포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교회가 문화에 대하여 바른 태도를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적어도 네 가지 면이 비판적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교회는 자신의 신학적 문화론을 합당하게 형성하지 못하고, 이원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문화 이해에 편승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교회와 세상은 존재론적으로 다른 두 세계로 오해되고 있다. 이에 비약하여 교회는 복음이 지배하는 곳이며, 세상은 문화가 지배하는 곳으로 설정함으로써 실제로 중요한 '문화'와 '반문화'의 구별은 근본적으로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둘째, 교회는 인류학의 전근대적 문화론(문화 진화론과 문화 전파주의 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서구 중심적 문화관으로 무장하여 비서구권의 다양한 문화들을 야만시하고 서구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에 비약하여 서구적인 것은 복음과 친화적이며, 비서구적인 것은 복음과는 적대적인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셋째, 교회는 문화에 대한 복음의 비판적이며 창조적인 힘을 통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군국주의와 맘몬(자본)주의와 같은 반문화적 힘들을 비호함으로써 복음의 능력에 기초하여 반문화적 세력들과 싸워야 할 당위성과 힘을 잃고 있다.


넷째, 교회는 신학적 문화 원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새로운 경험까지도 옛 형식으로 표현될 것을 강요받는 '형식주의'의 늪에서 문화적 창조성이 억압당하고 있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태도를 바로 잡기 위해서 복음과 문화의 신학적 모델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성과 은총(Natur und Gnade)'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취한 종교개혁적 태도로부터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신학적 원리를 발전시킬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중세교회와 근세교회의 태도를 지양하는 것이다. 먼저, 본성과 은총이란 완전히 구분되어 있어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기에 양자간의 갈등이 없다는 원리를 종교개혁적 신학은 거부한다. 이와 반면에 본성과 은총의 구분을 완전히 폐하여, 본성 자체가 계시가 됨으로써 신학 전반이 이성이 지배하는 신학원리도 거부한다. 이러한 원리들에 반하여, 우리는 종교개혁적 전통에 따라 이성을 통한 인간의 신인식(神認識)의 가능성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모호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계시의 빛에 의해서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는 원리를 취한다.


이러한 종교개혁적 신학원리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도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다. 문화는 인간 본성의 활동이며, 복음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는 복음과 독립적인 자율성을 갖지만, 인간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모호성을 지니므로 복음의 빛에 의해서 조명될 때 문화는 온전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왕국(Kirchentum)"이나 문화적 자율성만이 지배하는 "문화국가(Kulturstaat)"와 같은 이상은 종교개혁 정신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복음은 문화에 대하여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첫째, 복음은 속성상 자연(無)과 인위(有)간의 대립과 투쟁의 관계 하에 있는 문화의 이중성을 드러내며, 극복한다. 복음은 모든 대립을 무력화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한편, 문화의 모호성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문화를 창조하는 인간의 실존이 자연적 '본질'과, 이를 거부하는 인위적 '비본질'의 양요소들이 공존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롬7:15-25). 그러므로 특정한 문화에 대한 가치 부여는 언제나 가변적이다. 이러한 문화를 절대의 이름으로 성역화하는 것은 문화를 거슬려 반문화를 촉진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문화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복음은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반문화에 대항하게 하며, 문화의 모호성을 노출시킨다.


둘째, 복음은 반문화로 이끄는 비본질을 폭로하며, 인간에게 문화창조의 힘을 부여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기 때문에, 복음을 듣는 인간은 자신의 반문화적 불의를 고백하고 회개에 이르든지, 아니면 복음을 거부하게 된다. 복음을 듣고 회개한 개인과 공동체는 자신의 자유와 책임 하에 이루어 놓은 문화와, 전통적으로 수용했던 문화내의 비본질적 요소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에게 속해 있는 문화를 보다 철저하게 수호하려 한다. 복음은 특히 '종교문화'의 절대화를 거부하는 모든 자들에게 창조적 힘을 제공한다. 복음은 모든 종교의 우상숭배적 자기 주장의 허위를 드러내며 비판한다. 따라서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종교문화들 사이의 창조적 만남은 언제나 열려있다. 오직 우상숭배자들에게만 그 만남은 거부될 뿐이다. 복음은 교회가 우상숭배를 거절하는 모든 문화와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셋째, 복음은 문화가 기초하고 있는 자연법과 도덕법을 긍정하며, 이의 완성을 지향한다. 복음은 창조에 근거한 자연법과 인간의 양심에 근거한 도덕법을 존중하며, 이에 따른 인류의 보편적 문화를 긍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법들을 이탈하면서 문화의 특수성이란 미명하에 창조 질서의 보편성을 위협하는 반문화와 대결함으로써 인류 문화의 완성을 추구한다. 복음은 문화의 비본질적인 요소에 대하여 본질적인 것이 지배하도록 창조적 힘을 부여한다. 복음의 능력에 따라 문화의 본질적인 것이 실현되는 것은 성령의 현존과 더불어 가능하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parousia)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21세기에 들어서서 세계교회 가운데 복음에 대하여 주도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기존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면서, 복음과 문화에 대한 바른 관계 정립을 계속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복음이 지니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과 자유케 하는 힘을 억압하는 파당적인 신학의 고립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절대의 이름으로 복음을 사유화(私有化)하는 것으로서, 복음이 대항해야 하는 반문화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4-2. 복음과 종교- 타종교인과 만남: 문화적 차원


오늘날 타종교인과 만남을 거론하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될 수 없다. 기독교는 오래된 종교들 사이에서 태어나서 불가피하게 타종교적 문화 한 가운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나와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거와 오늘날은 그 만남에 있어서 양상이 다르다. 어쨌든 2000년대에는 기독교가 세계인구 60억 가운데 20억, 모슬렘을 비롯한 타종교가 약 30억이 될 전망이다. 30억의 인류를 향해 가서 만나지 않으면 21세기 선교는 없다. 또한, 다가오는 21세기 고도정보화 사회의 구조가 이미 쌍방향 내지는 다중방향적 멀티미디어 혁명 위에 세워짐으로써 새 시대의 인류는 문화간, 지역간, 민족간, 및 종교간의 대화적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기독교는 타종교에 대하여 보수적인 입장에 있든, 진보적 태도를 취하든지 간에 타종교에 대한 자세는 여전히 미온적이며,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분명한 자세를 표명하는 것 자체가 터부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다. 이제 종교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왜냐하면, 특정 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종교가 표현하고 있는 집단적 문화를 함께 나누는 자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종교인을 개인의 신앙 고백적 차원으로 보기 이전에 문화적 지평에서 이해함으로써 타종교인과의 만남을 나와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사는 '이웃'과 만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의 확대가 요청된다. 이러한 일은 타종교인들을 여전히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풍토에서 더욱 긴급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 선교는 종교를 기조로 해서 문화적 삶을 영위하는 세계 절반의 타종교인들 30억을 향하여 복음의 정신과 능력을 실현시키는 위대한 사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복음이 지니는 '자기부정'의 정신과 그를 통해 나타나는 '사랑'의 능력을 타종교인들을 향하여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대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타종교와의 대화'에 대한 두 흐름


20세기에 제기되었고, 21세기에 풀어야 할 교회의 선교 과제는 타종교인과의 만남에 대한 복음적 태도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타종교에 대한 관점은 크게 두 신학적 흐름에 의해서 주도되어 왔다. 복음주의 신학의 고전적 선교론과 에큐메니칼 신학의 '새로운 선교'론이다.


'새로운 선교'관은 무엇보다도 세계교회협의회의 '세계선교와 복음화위원회(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가 1972년 12월 27일에 개최한 방콕 대회에 잘 표명되어 있다다. 여기에서 복음선포와 대화는 서로 유기적인 선교행위로 유지되어야 함이 강조되었다. "선교가 긴급한 선포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대화의 영 안에서 수행됨을 우리는 기쁨으로 확신한다." 전통적인 기독론도 확실히 견지되고 있다. 선교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우리의 출발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확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그의 의(義)" 또한 강조되고 있다.


한 편,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한 신학적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전통적인 명제로부터 탈피하여, 하나님의 구원 은총이 세계역사 속에서도 일어난다는 전제를 수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전제하에 타종교와의 대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반면에, 고전적 선교관하에서 주도된 로잔대회는 복음선포를 선교의 가장 중요한 행위로 보는 가운데서도 타종교와의 대화의 필요성을 소극적이나마 인정해 가고 있다. 대화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방콕대회나 로잔언약 모두 타종교와의 대화를 말하고 있지만, 대화의 신학을 제시하기에는 극히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개종 일변도의 전도를 선교의 중심축으로 여겨왔던 복음주의 신학도 적어도 '대화의 불가피성'을 피력하고 있는 상황까지 왔다. 이제 21세기 기독교 선교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과제인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타종교인과의 대화 목적

우리는 먼저 20세기 대화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21세기의 과제는 '타종교'가 아니라 '타종교인'이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왜 '타종교와의 대화(Dialogue with Other Religions)'에서 '타종교인과의 대화(Dialogue with Neighbor of Other Religion)'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가? 선교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은 타종교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종교가 사람을 위해 있기 때문에, 대화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난 3, 40년간의 대화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보다도 '종교'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짐으로써 '타종교인'과의 대화가 아니라, '타종교'와의 대화로 일관되어 왔음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타종교와의 대화에는 상징적으로 한 두 타종교인들을 초빙해 놓고, 대부분 기독교 계열의 종교학자나 신학자들이 자리를 차지하여 자신들이 공부한 타종교에 '관한' 지적 단편들에 대하여 타종교인들로부터 피상적인 검증을 받는 일들이 주가 되어 온 인상을 벗을 수 없다. 우리는 그 동안 타종교와의 대화를 말하면서 얼마나 타종교인들을 만났으며, 또한 그들과의 계속적인 대화의 관계를 이루어가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타종교'와의 대화는 사람과 만나지 않고 책이나 전파매체와 강의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타종교와의 대화'는 종교를 전문으로 다루는 학자들 중심으로 다양한 방법론에 기초하여 기독교와 타종교를 비교하고 서로 빗대어 적극적인 면들을 발견하여 종교적 진리를 나누고자 한 것이었다.


그 결과 타종교에 대한 종교신학적 이해는 깊어졌지만, 그런 만큼 종교신학이 밀고 나간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이에 맞선 전통적 교회는 서로를 적대적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타종교인들을 만나야 할 교회의 눈에 '타종교와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타협'과 '혼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제2 천년대의 마지막 종교재판이 기독교 선교 100년 된 이 땅에서 이루어졌고, 이제는 '대화'란 말조차도 멀리하려는 억눌린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화를 주도하는 자들이나 교회 모두가 만나야 할 타종교인은 만남과 대화의 현장에서 거의 소외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면, 왜 타종교인과 대화를 하려는가? 우선, 대화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점부터 밝혀본다. 첫째, 타종교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과 동등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인정해주거나 확인하고자 함이 대화의 목적이 아니다. 이러한 의도는 에큐메니칼의 '새로운 선교'에 기초한 대화론자들에게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유일성'이 의문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파기되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나의 개인적 견해로는, '타종교와의 대화'에 기초한 종교다원주의 논의는 앞으로 변선환 교수가 시도했던 "타종교의 신학" 이상으로 진전될 가능성이 없다. 그만큼 변선환의 타종교의 신학은 다원주의 시대의 최대의 문제를 학문탐구의 자유와 용기를 가지고 철저하게 던진 '말걸음의 신학'이라 나는 평한다. 그것은 대답을 주기 위한 신학이 되기보다는,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문제의 신학'이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신학적 대답을 다각도로 제시해야 할 때다. 적어도 과거 2천년간의 종교적 다원사회 가운데서 기독교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올 수 있었던 힘은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신앙고백을 확실하게 견지한 것 가운데서 나왔다. 천하에 예수 이름 외에 다른 구원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다. '오직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 없이는 복음을 위한 '순교의 정신'이나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는 증인의 삶'도, '오늘의 구원'을 향한 '새로운 선교'에 대한 실천적 삶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오직 예수'라는 유일신앙적 고백은 구약성서의 '오직 야웨' 신앙에 대한 신약적 고백이며, 사도들의 '증언'이다. 사도적 전통이 '오직 예수'의 신앙을 주장하게 한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가 사도적 고백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복음선포가 대화의 목적이 아니다. 복음주의의 고전적 선교에 기초한 대화가 취하는 다음과 같은 극단적 자세를 극복해야 한다: "대화에서 우리는 선언할 수 있다. 우리들은 또한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성서를 낭독해주며 영화를 보여주고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며 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치며 . . .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대화는 바로 이들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은 대화를 한가지 방법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맥가브란 식의 대화는 이미 대화가 아니다.


대화와 복음선포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대화는 선교의 한 방법일 뿐, 결코 복음선포로서의 전도를 대신할 수 없다. 예수의 이름을 땅 끝까지 증언하는 일이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로 주어졌다. 이 일을 주도하는 방법은 선포이지 '대화'가 아니다. 선포하는 자를 '증인'(마르투스)이라 한다. 선포는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다. 듣는 자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믿는 바를 전하는 것이 선포다. 이러한 선포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대화가 복음증거를 위한 또 하나의 대안이 되면, 결국 대화의 목표는 '개종'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대화의 원리'를 처음부터 벗어나는 일이 된다. 복음은 오직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전달된다는 성서적 원칙에 바로 서고, 전도를 위한 방편으로 대화가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태도는 복음주의자들내에서도 거부되고 있다.


그러면 '타종교인'과 대화를 해야하는 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타종교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 대화를 해야 한다. 이것은 타종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 대화 보다 더 좋은 길은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서로가 지니고 있는 왜곡된 '이미지'가 있으면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둘째, 타종교인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화를 해야 한다. 타종교의 가르침과 윤리 및 세계관의 특징과 차이점을 바로 알 때, 불필요한 긴장을 없앨 수 있으며, 사회적 차원에서 연대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를 바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타종교인에 대하여 복음을 선포하면 되지, 왜 어려운 대화를 통해 타종교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관계'를 갖고자 하는가? 그 이유는 타종교인들은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방인이기 전에 우리의 '이웃'이라는 점 때문이다. 선포나 전도는 한 번으로 끝나고 말 수 있지만,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한 두 번의 만남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인은 다름 아닌 같은 삶의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웃이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그들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타종교인에 대하여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선교의 중요한 한 축이다.


21세기의 '선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신의 신조를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1세기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같이 살았던 바울이 21세기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전9:20-22). 불교인에게는 불자(佛子)처럼, 유교인에게는 유인(孺人)처럼, 즉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세계관과 신앙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여 복음의 정신과 능력으로 대화하려는 자들이 곧 오늘의 '선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므로 타종교는 더 이상 대화의 장애물이 아니다.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구체적 표현이며, 문화의 세속화(profanization)를 거부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삶을 나누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종교적 대화를 통해 각자가 신앙하고 있는 진리를 경험적 - 간증적 -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기존의 '타종교와의 대화'

'타종교와의 대화', 아니 '대화'란 말만 꺼내도 그것은 '종교다원주의를 위한 시도가 아닌가'라고 의심받는 것이 오늘날 대화의 현주소다. 일반적으로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배타주의는 전근대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나 취하는 것으로, 그리고 포괄주의 역시 아직도 껍질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자세로 폄하되어 모두가 종교다원주의에 비해 열등한 입장으로 취급받아 온 것이 그 동안의 일반적 경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종교에 대한 논의를 일반적으로 크게 배타주의, 포괄주의, 및 종교다원주의로 구분할 때, 이 모든 경우들은 각기 개념적으로나마 대화에 참여하되, 다만 대화에 접근한 목적들이 다를 뿐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0세기에 이슈가 된 기존의 '타종교와의 대화'는 대화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노력은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본말이 전도되기는 했지만, '타종교와의 대화'는 근본적으로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20세기 이전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타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대화를 위한 많은 지혜를 축적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21세기에는 '대화의 원리'에 따른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충실하게 실현해야 할 것이다.

학문적 영역에서 '종교'에 대한 이해는 그 동안 종교학적 접근, 종교철학적 접근, 종교신학적 접근, 및 기독교 신학적 접근 등 네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 각개의 학문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종교'는 다양한 관점에서 파악되어 왔다. 그런데 종교들에 대한 이해가 엇갈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네 분야에 각각 속해 있는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동시에 '대화'의 마당에 나왔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의 경우, 대화의 주된 관심은 계시론과 기독론에 입각하여 규범적으로 구원의 '유일성'은 기독교에서만 가능함을 밝혀보려는 것이었다. 반면에 종교신학자들은 종교학자나 종교철학자들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기독론적 규범은 보편적이지 못하므로 각 종교가 공통으로 지니는 신중심 내지는 구원 중심의 규범을 가지고 접근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전통과는 다른 규범을 가지고 종교간의 대화를 이루어나감으로써 구원의 '다원성'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적 종교 이해를 통해서 사고와 삶의 다양성을 거부하며 이단시하는 배타적인 기독교 신학을 개방해 보려는 종교개혁적 동기가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오늘날까지 '타종교와의 대화'의 장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는 문제는 구원에 대하여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가 '연속적'인지, 아니면 '불연속적'인 것인지를 규명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면 배타주의자로, 그리고 구원의 연속성과 동일성을 주장하면 포괄주의자 또는 종교다원주의자로 분류가 되고 있다. 20세기를 뒤로 보내면서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이 정도 이상 진전시킬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나온 종교간 대화의 모습을 돌이켜 볼 때, 무엇보다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종교'를 학문적이며 이론적 형식의 틀에서 객관화시켜 이해하거나, 비교하여 우열을 가늠하려고 했지, 정작 중요한 삶의 차원은 간과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타종교인'과의 '대화'가 21세기 선교의 대주제가 되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타종교인과의 대화'에 대한 불안



종래의 대화 자세로써는 타종교와의 대화는커녕, 기독교 내의 제 신학들간의 대화조차도 불가능하게 될 수밖에 없다. 정작 이루어야 할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이차적으로 밀려나가고, 원색적인 파당적 신학 이론만이 독백으로 나타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단에의 공포로 인하여 기독교 신학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학문적 대화마저도 경색되어버리고 만다면, 중세 가톨릭 시대처럼 신율의 이름으로 자율을 억압하는 타율의 '암흑시대'로 변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타종교와의 대화가 만족할 수 없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는가? 거기에는 대화에 대한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게 세 가지로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타종교인과의 대화에 임하는 일을 불안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화란 자체가 자신을 상대와 동등한 입장으로 놓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이 결국 복음을 상대화할 기재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둘째, 대화의 과정 가운데 서로의 사상들이 오고가면서 신앙 내용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혼합주의로 물들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대화가 소극적으로 되고있다.


셋째, 타종교에 대한 신앙을 사단의 권세하에서 이루어지는 우상숭배로 의심하기 때문이다.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불안해 할 수 있는 원인은 결국 타종교인이 믿는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 나의 신앙 대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판단에 있다. '근본적으로 신앙의 출발점부터 다른데, 어떻게 대화가 가능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나오는 것이다.


에큐메니칼의 '새로운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은총이 세계 역사 가운데서도 일어난다는 신학적 대전제를 가지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이상과 같은 불안 요인들을 극복할 수 있는 성서적, 신학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은 어렵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특히 '고전적 선교'를 견지하고 있는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간의 대화란 오히려 배척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타종교와의 대화 이전에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이 복음주의자와 힘을 모아 21세기 "통전적 선교(integral mission)"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대화에 대한 불안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


앞으로 '대화의 원리'에서 밝혀지게 되겠지만, 이처럼 타종교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우상숭배자' 등으로 각인되는 한, 대화는 그 만큼 어려워진다. 즉, 타인과의 개방적인 관계를 유지할지라도, 타인의 종교가 우상숭배라는 판단이 앞설 때 대화는 독백으로 맴돌게 되는 것이다. 특히 복음주의자들의 눈에 타종교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톨릭까지도 우상종교로 보이는 사태가 적지 않기 때문에, 타종교와의 만남과 대화는 불가능하게 된다.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위한 신학적 기초

 

과연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의심스러운 것이며, 불안한 것인가? 거기에는 마땅한 대화의 신학적 기초가 없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21세기 미래신학은 제시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앞에서 제기했던 문제에 대하여 기초적인 관점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전제할 수 있는 것은, 성서는 타종교인과의 대화란 불가피한 것이며, 오히려 능동적으로 감당해야 할 선교적 임무라고 본다는 것이다.


첫째,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복음전파의 지상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순종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모든 신앙과 모든 시대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복음에 내재해 있는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조건 없는 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제외시키는 것은 결국 복음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 편, 예수는 성령이 우리 모두를 진리로 이끌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또한 성서적 이해의 진리는 "명제적(propositional)인 것이 아니고,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불가피한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신앙의 순수성을 흐리게 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하는 발판이 된다.


셋째, 우상숭배는 종교적 영역에 한정되는 행위가 아니다. 궁극 이전의 것을 절대화하는 모든 행위가 곧 우상숭배다. 모든 종교적 행위는, 그것이 비록 사이비 종교라고 할지라도 '궁극적인 것'에 참여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혹은 영적 행위다. 종교철학적 차원에서 볼 때 모든 종교의 교리와 의례에는 그러한 '궁극적 실재'를 담아내는 상징들이 있기 때문에, 상징들을 통한 종교간의 유비가 가능하다. 우상숭배는 바로 종교적 상징들을 절대화함으로써 궁극적 실재를 유한한 실존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행위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언제든지 우상숭배에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종교인들과는 처음부터 '대화'는 불가능하다. 개인이 이미 절대자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소유한 신'은 참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포하여 깨닫도록 촉구하는 길 외에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대화적 만남을 갖기 전에 판단할 수 없다.


타종교인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너드 스위들러에 의하면 대화란 "사고의 한 방법"이요, 어떤 행위 이전에,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다.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사고행위 자체의 절대성 또는 신앙의 절대성이 지양된다. 절대자에 대한 인식과 신앙은 가능하다. 그렇다고 그러한 인식행위나 신앙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절대성을 믿는 일은 가능하다. 그러나 절대자를 믿는 나의 신앙적 행위 자체는 또 다른 실재를 절대자로 믿는 타종교인의 신앙적 행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나의 신앙 행위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결국 독선이 되어버린다. 예수의 경우, 자신이 타인에 의하여 절대적 존재로 인정받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자의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한 바가 없었다. 오히려 자기부정적 십자가의 길을 갔던 예수의 삶은 오늘날 타종교와 관련한 기독교의 절대성 논의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것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신앙이나 인식행위 자체를 절대화했던 삶에서 돌이키는 새로운 삶의 자세로부터 시작된다. 진리의 전체성을 깨닫는 '나'는 그 전체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깨달은 진리의 전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적일 수 있지만, 절대적인 하나님을 믿는 나의 신앙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나 이외에 타자가 있고, 그래서 비교해야 되는 상대적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서 타인의 신앙행위를 판단할 수 없다. 또한 타종교인의 신앙의 '궁극적 대상들'이 과연 참된 존재인가를 묻기 전에, 오히려 자신이 믿는 절대자의 뜻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물어야 한다.



5. 맺는 말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류와 피조물을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보존하시며, 의로 심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 행위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근거한 자기 보냄이다. 선교의 근본 정신이 여기에 있다. 선교는 타자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보내는 자가 보냄을 받는 것이다. 보내는 자와 보냄 받는 자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리고 보냄 받은 자는 피조물에 자신을 일치시킨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아니고서는 선교는 없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의 프락시스(praxis)다!


이와 같은 선교 이해의 맥락에서 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에 아들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리는 소식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복음이 주는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영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알게 해 준다.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역사한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보냄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말씀과 더불어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를 확신하는데 이르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교회를 보내신다. 그리고 문화와 종교와 대면하게 한다. 복음은 문화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문화와 대립한다. 반문화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보전의 원리를 거슬러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는 데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문화는 자연적이며, 윤리적이어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회복을 촉구함으로써 비도덕적이며 자연 파괴적인 반문화에 대항하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드러낸다. 이처럼 인류의 타락과 끊임없는 범죄로 인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히 수많은 종교들과 만남은 보냄 받은 교회가 세상에서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선교적 과제다. 오늘날 기독교 이외의 타종교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는 크게 도전 받고 있다. 타종교인들을 만나지 않고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복음 선포와 대화를 위해서 긴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헌신적인 선포가 중요하지만, 동시에 헌신적인 대화 역시 중요한 사항이다. 대화 그 자체가 보냄 받은 교회의 중요한 사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적 관점에서 대화의 신학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종교적 타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적 자기 정체성의 확인을 촉진한다.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조건 없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실제화 한다. 이미 우상숭배적 타율의 지배하에 있는 종교인들과의 대화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에게는 예언자적 공의의 메시지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화는 언제나 대결의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조직신학은 그동안 선교의 문제를 자신의 학문적 원리에 입각해서 충분하게 고찰하지 못했다. 여기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교를 교의학적으로, 복음을 문화와 종교라는 상황에 변증학적으로 고찰하였다. 앞으로 조직신학은 이외에도 종말론, 교회론, 인간론 등 조직신학의 제 원리에 입각하여 더욱 깊고 폭넓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