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목사의 생애: 해방 이전까지

한국성결교회연합회 학술대회 강연
(2002년
10월 28일, 성결대학교)

 최인식


그의 생애를 조명하기 위한 1차 자료는 그가 주필이나 이사장으로서 '활천'에 게재한 글들이다. 우리는 그의 말에 따라 그를 이해하고자 한다. 외부의 강압에 의해 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출판된 그의 글을 통해 그의 진면목으로 볼 수 없다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해지고 만다. 출판된 글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글이며, 그의 삶이며, 그의 한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1921년 회개 운동까지 : <활천> "은혜기"를 중심으로

이명직은 1890년 12월 2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아가 출세에 비상한 공업을 이루어 이름이 후세에 썩지 않게 되는 인물이 되든지"를 꿈꾸고 있었던 그에게 새로운 전환기가 찾아왔는데 '복음'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청년회학관(YMCA)에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중 "매일 복음의 강화를 듣는 중 예수를 믿는 것을 찬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08년 홀연히 일본으로 떠났고 꿈 하나를 가지고 일본에 도착했지만,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그를 받아 줄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었다. 근 1년을 "진실한 모양으로 출석"하였고, 즐기던 술과 담배도 끊고, 심지어 "아침저녁으로" 기도생활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고향의 부모님으로부터 귀국하기를 바라는 편지를 받았고 일본에 머무르고 싶던 그는 "피궁(避窮)삼아" 동경성서학원을 소개받고 입학했다. 다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이미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있었던 이명헌이 1년 반 후에 입학한 것은 새로운 계기였다. 이명헌이 종종 들려주었던 간증은 그가 보다 철저히 은혜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마침내 성령의 음성을 듣고, 회개 자복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명직의 중생 경험이었다.

22세에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이명직은 귀국해서 전도사가 되었고, 25세 되던 1914년에는 목사가 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2년 뒤 27세 되던 1916년 가을에 이 목사는 경성성서학원 교사로 임명된다. 사실 이 즈음의 시절은 그에게 영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때였다.

성결이 자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는 (독립운동)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서 스스로 사상가나 애국자나 지사인 체 가장하여 활동하는 것을 우선 시 했던 사실, 근 1개월 동안 동반하여 활동한 여전도사와의 심령적 탈선관계가 그를 힘들게 했다.

1921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어 이 목사에게 돌연히 영적 감화가 임했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 회개와 영적 부흥의 순간은 한 번 있다가 사라지지 않고 성서학원 전교생에게, 그리고 선교회, 더 나아가서 전국 교회에 놀라운 축복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영적 대각성과 부흥은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넣어 주는 긍정적 계기가 되었지만, 반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점들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성결교회에 반지성적 성향이 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학문에 대해 배타성을 보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신앙적이 된다고 하는 왜곡된 세계관이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민족의 독립 문제를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종말론적" 내세 지향의, 그래서 더욱 "탈민족적" 태도를 취하게끔 하였다.

2. 1945년 해방 전까지의 모습: <활천> 주필 시절을 중심으로


1921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맡았던 공직을 살펴보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왕성하게 성결교회와 신학교육을 위해서 활동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성결교회의 주요 직책을 근 20여 년 동안 맡아오면서 그가 보여준 여러 모습들을, 그가 '활천' 주간으로 썼던 시국과 관계되는 그 당시의 글들을 중심으로 심층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일본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삶

조선이 일본에게 합병이 되고 나라를 빼앗긴 일련의 역사적 현실에 대해서 이명직은 어떠한 비애나 자책감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라 잃은 조선의 입장에서보다는 조선을 무력으로 차지한 일본제국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 위치에서 조선의 합병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한다. 이명직은 마태복음 21장 33-41절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를 통해서 일본의 조선 합병을 마치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이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아 다른 농부에게 세(貰)로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에 대한 조선인이 취해야 할 태도는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일본의 모든 정책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더 이상 남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일본"이다. 이명직은 두 가지 자신의 정체성, 즉 황국신민의 한 일원이라는 것과 기독교인이라는 것 사이에 어떠한 충돌도 일으키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2) 전도를 위해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지고지상의 명령은 한 마디로 "전도"였다. 그것을 수행함이 곧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명직은 전도를 단지 기독교적 사명에 충실한 것으로만 생각지 않았다. 전도에 대한 그의 투철한 신념은 곧 국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황기 2600년 기념식을 축하하는 글에서까지 "황기 2600년을 당하여 세워야 할 기념주(記念柱)는 전도할 일이오, 남겨놓아야 할 자취는 전도할 일이다"고 역설한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며, 동시에 보국 행위이기 때문이다.

3) 예수처럼, 바울처럼

민족주의라는 것은 이명직에게 수용 불가한 길이다. 이명직은 현실을 처음부터 철저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즉 신 중심적으로 보고자 한다. 이러한 신중심적 탈민족주의 역사관은 그의 성서 이해로부터 출발하며 예수와 바울의 생애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돌리라"라는 내용을 "정치 방면으로는 냉정하고 로마 정치에 순응하시는 의사와 태도를 표하신 까닭"이라고 해석했다.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시국에 더욱 자숙 자제하여 순응하여 생활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렇게 함이 "의롭게 사는 것"이라 가르치고 행동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사도 바울의 사상과 태도를 중시한다. 바울이 "황실에 대하여도 극히 존엄한 사상과 경애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로마 황제 폐하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권한 것"(딤전1:2)으로 보아 알 수 있으며, "로마 황제 폐하께 직접 재판을 받겠다 한 것"(행29:11)은 로마의 법률을 "공평하다고 시인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바울은 국가의 조직 제도와 정부에 대하여 절대의 신임과 복종과 의무를 다하였다"는 말이며 이러한 자세야말로 조선 민족이 일제에 합병된 상황하에서 선택해야 하는 "성서적" 입장이었다고 확신하였다. 이명직의 소위 "친일"은 정치적 선택 이전에, "성서적"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3. 이명직을 넘어서, 이명직과 함께

시대가 인물을 낳고, 역사가 인물을 만든다. 그러나 인물을 판단하는 자는 하나님이다. 이명직 목사에 대한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의 평자들은 그가 성결교회의 큰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사표(師表)로서 그를 보다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데는 주저하는 모습이 보인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명직 이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점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그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교단을 위한 불가피한 친일론이다. 여기에는 그의 친일적 삶이란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며, 교단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이명직 변호가 강하게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명직의 어떤 점을 비판하거나 변호하기에 앞서 그 자신이 진정 어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신념의 근거는 무엇이었는지 그의 입장에 철저히 서서 물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명직은 종교와 국가, 교회와 사회 등의 관계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산 것 같지 않다. 적어도 일제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오히려 둘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이명직 독해에 근거할 때, 이명직의 한계는 신앙이나 용기의 부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통찰해서 그에 대해 성서적으로 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 신학의 한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신학의 한계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함이 지나쳐 "신학" 자체의 순기능적 차원을 놓친 것에 있다고 보인다. 그의 극단적인 신학적 배타주의로 인해 성서적 메시지를 현대적 상황에 예언자적으로 정당히 연결짓는 신학적 노력 내지는 신학적 통찰력이 근본에서 차단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19세에 일본에 건너간 명직이 성서학원에서 특공대처럼 받은 전도 훈련 내용은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사고의 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때 단 2년 동안 몸에 익힌 기독교 이해의 틀을 가지고 종횡무진 변화를 거듭했던 당시의 제국주의적 상황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판단하여 성서의 메시지를 정당히 제시한다는 것은 실로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명직 목사의 생애를 고찰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신학적 배타주의의 '이명직을 넘어서' 참으로 복음적인 복음주의 신학, 곧 '살리는 신학, 열린 신학'으로서의 '성결교회의 신학'을 함으로써 우리의 신학이 교회를 바르게 섬기며 동시에 교회가 시대의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사명은 이명직 목사가 평생을 두고 강조한 체험적 사중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이명직과 함께' 재림을 소망하며 이 땅위에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하나의 성결교회'를 섬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