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潔敎會神學 序論

최인식

신학에서 서론(프롤레고메나)은 그 자체로서 매우 중요한 학문적 성격을 지닌다. 본 서론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6년째 접어든 <성신연프로젝트 2002-2007>이 성결교회신학의 총론, 역사신학, 성서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윤리신학, 교육신학 및 여성신학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성결교회신학 정립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논증하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던지는 학문적 물음에 대한 성결교회신학의 대답을 시도했다. 그리고 성결교회신학의 학문적 성격을 특히 인식론적 측면에서 밝히고자 했다. 한 마디로, 본 서론의 주제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성결교회신학 정립 가능한가?”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에 대한 넘치는 확신이 있다. 이제 그것이 왜 가능할 수 있는지를 본 성결교회신학 서론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시하는 것이다.

 모더니즘과 성결교회

김상준과 정빈이 일본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에 의해 억압받고 있던 조선 땅에 1907년에 다시 돌아와 사중복음을 전한 것은 이 백성을 사랑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 할 것이다. 이미 세계 교회가 교회사적으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흥운동이 평양에서 시작된 시점이 바로 1907년이기도 하다.1) 이 때에 한국성결교회의 주춧돌이 놓여진 것이다. 복음이 능력으로 전해지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태어난다. 거시적으로 볼 때, 한국의 성결교회는 세계 곳곳에 일어났던 웨슬리안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의 열매라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성결교회는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도록 견실히 자라왔다.

성결교회가 지나온 100년은 사회 문화적으로는 서구로부터 시작된 모더니즘(modernism)의 강력한 사조가 전세계 모든 삶의 영역을 강타했던 한 세기이기도 했다. 모더니즘에 기초한 현대문명은 이성에 대한 낙관적 세계관을 가지고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으나, 다시 이를 기초해 일어난 군사제국주의와 거대 자본주의로 인하여 인류는 철저히 비인간화를 경험해야 했으며, 생태계는 무차별적인 전쟁과 남용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전 유럽에서 행해진 홀로코스트가 그것이며,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에 의한 무고한 생명과 자연의 희생이 그것이며, 그 이전에 일본제국주의가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해 위안부로 삼은 일들이나 생체실험 등과 같이 한국인과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헤아릴 수 없는 만행이 또한 그것이다. 그리고 세계 강대국 간의 냉전체제 하에서 한(韓)민족이 남북으로 나뉘어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야 했던 일이며, 북에서는 공산독재 정권이 그리고 남에서는 군사독재 정권이 민족의 생존과 인권을 수탈하는 야만적 지배 역시 모더니즘의 반신적 이성의 횡포였다.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은 서구교회도 강타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크게 손상시켰다. 그 결과 신학은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라는 극단의 길 가운데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한 세기였다.2) 성결운동은 이러한 신학사조의 차원에서 볼 때, 모더니즘에 서서 기독교를 재해석하고 재정의하고자 했던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을 강력히 거부하였고, 또한 모더니즘을 기독교에 대한 파괴적인 도전으로 인식하여 신학을 모더니즘 이전(premodernism)의 교회 전통에 묶어 놓고자 하는 신학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와도 거리를 두었다. 그 대신에, 성결운동은 성서적 계시사건을 원형 그대로 20세기 현대의 삶 속에서 경험하기를 갈구했던 초자연적 체험의 신학을 추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결운동의 지평에 서 있는 웨슬리안들에게서는 근본주의 진영에서 비일비재했던 교리논쟁을 찾기 힘들며, 자유주의에서 발견되는 교리의 다양한 재생산적 결과물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성결운동은 성서가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는 복음의 능력, 성령에 의한 거룩한 변화의 삶을 추구하는 데 모든 힘을 모았다.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하자면, 성결운동과 이에 의해서 태어난 성결교회는 성서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성령의 초자연적 변화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19-20세기 모더니즘의 도전에 대항한 것이다.

 

현대 성결교회의 모습과 반성

성결교회는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가운데 100년을 지내오면서 세속적 자유주의를 피하고, 형식적 전통주의를 경계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 왔다. 이를 위한 강력한 목회적 · 신학적 무기는 바로 다름 아닌 ‘사중복음’이었다. 사중복음은 전도와 목회의 현장에서 그리고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성결교회가 성서를 해석하여 이해하며 복음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구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소중히 지켜야 할 규범이었다. 그리하여 장로교회 하면 ‘예정’을 생각하고, 루터교회 하면 의례 ‘이신득의’를 생각하듯이, ‘사중복음’을 말하지 않고서는 성결교회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사중복음은 성결교회의 간성(干城)으로 지켜져 왔다. 그중에 ‘성결’의 가르침과 체험은 성결교회로 하여금 이 땅에 존재해야 할 분명한 이유와 사명을 확인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전통들의 많은 경우가 그렇듯이, 사중복음의 전통도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처음의 활력을 잃고 현대에는 더 이상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러나 값이 나가기에 골동품과 같은 존재로 ‘모셔놓기만 하는’ 처지에 떨어졌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것은 성결교회의 내적 성숙의 면에서나, 외적 성장의 면에서나 초기의 모습과 같은 거룩한 삶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수준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결교회는 초기 성도들이 대항하여 왔던 인본주의에 물들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폐쇄적인 전통주의와 교권주의로 경도되어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적시에 그리고 바르게 통찰하지 못함으로써 현대 문화 가운데 복음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있게 진단해야 한다.3)

 

성결교회신학 정립의 시대적 요구

성결교회가 지니는 이와 같은 오늘의 문제의식은 비단 근래에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지상의 모든 교회는 본질적으로 “모호성(ambiguity)” 가운데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4) 성결교회가 이 땅 위에 출발하면서부터 또한 그와 같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관점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태도이다. 초기의 성결교회는 저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자세로 대응했는지를 물으며, 그와 같이 현대의 성결교회는 오늘의 당면 과제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리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 보다 정당한 접근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제를 신학적으로 다루는 일이 역사적 교회 공동체의 사명 중 하나이며, 이를 위해 교회는 신학자들의 참여를 요청하는 법이다.

이에 부응하여 서울신학대학교는 2002년도에 <성결교회신학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성결교회의 신학 정립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우선 대학 내의 신학교수들을 중심으로 연구위원들이 선정되었고, 교단의 <신학교육정책위원회>와의 연대를 통해 연구 인프라가 구축되었으며, 또한 성신연 프로젝트가 2003년도에 출범한 <교단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의 교육분과의 예산사업으로 설정되었다. 이로써 명실공히 ‘교회와 신학’이 하나가 되어 100년 역사 동안 성결교회가 남겨놓은 역사적-신학적 유산을 찾아내고 정리하여 통전적인 성결교회신학을 정립(定立)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신연은 연구에 착수하면서 당 프로젝트의 목적과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5)

1.성결교회 창립 100주년을 앞 둔 시점에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성결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며, 새롭게 다가오는 미래의 선교적 사명을 능동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성결교회의 신학을 통전적으로 정립하고자 함이 본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1.성결교회의 목회와 신학교육, 그리고 제 선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에 입각하여 이루어져야 할 현실적 요청이 강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전적으로 제시할 만한 성결교회의 신학에 대한 개념과 틀이 명확하지 않다는 현실 인식이 본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된 한 배경이다.

1.급변하는 사회 문화 변동 속에서 성결교회가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을 선포하며 변증함으로써 시대적 사명을 보다 적극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성결교회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공동체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인식 형성이 본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된 한 배경이다.

성결교회신학을 이처럼 ‘통전(通典)’적으로 정립한다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성결교회 100년 역사에 나타난 다양한 역사적 유산들을 신학적 차원에서 조명함으로써 성결교회신학이라는 하나의 거대담론(metanarrative)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성결교회신학’이라는 큰 틀 아래에 성결교회의 역사신학, 성서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윤리신학, 교육신학, 및 여성신학이라는 여러 개별 관점들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드러난 신학적 이슈들의 신학적 연계성을 확립한다. 둘째는 이러한 통합적 연구란 몇몇의 탁월한 특정 신학자들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성결교회의 제 구성원, 특히 신학적 훈련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의 공적인 참여를 통해 공동체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통전적이라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 책임연구위원들이 분과별 워크숍과 포럼들을 통해 구체화한 연구결과들을 5년간 다섯 차례에 걸친 <성신연종합세미나>를 통해 계속적으로 평가하고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보완하여 공동체적으로 공감되는 신학을 구현해내는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쳐 온 것이다.6)

이러한 성결교회신학 정립은 다시 교단의 교리와 신앙고백을 깊이 있게 다루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교단신학의 정립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면에서 실제적인 유익을 줄 수 있다:

1. 성결교회의 신학적, 교리적, 신앙고백적 자아성(identity)을 확립한다.

2. 성결교회의 신앙적, 신학적 유산을 정리 보존한다.

3.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의 기초를 구축한다.

4. 교회 신자들의 교육을 위한 기초를 마련한다.

5. 목회, 선교, 및 신앙생활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한다.

6. 성서의 해석학적 작업이 교단의 신학적 전통 안에서 가능토록 한다.

7. 세계 교회와의 초교파적 연합 활동의 근거가 된다.

8. 이단에 대처하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9. 효율적인 선교, 전도, 교회성장을 도모하는 데 필요하다.

10. 새로운 신학에 대한 평가와 수용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공한다.7)

교회사적으로 볼 때, 교회 공동체적으로 교리 및 신조의 확정이나 신앙고백문 채택 등의 일은 있어왔어도, ‘신학’의 정립이라는 방대한 과제를 수행해 온 예는 찾기 힘들다. 그러한 면에서 ‘성결교회신학’의 정립이라는 우리의 시도가 지니는 신학사적 가치는 적어도 그 형식의 새로움이라는 차원에서 의미 있게 평가되어야 하며, 더 나가서 이와 같은 공동체적 신학연구 행위를 통해 교단내적 통합과 성숙을 도모해야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의(意義)를 지속적으로 살려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신학연구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가칭 ‘성결교회신학연구소’와 같은 기관을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설립하면, 현대 교회가 직면해 있거나 장차 부딪히게 될 신학적 문제들을 깊이 다루어 성결교회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에까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8)

 

포스트모더니즘과 성결교회신학의 거대담론 문제

성결교회신학 정립의 필요성과 그 의의가 이처럼 분명할지라도 21세기 문화의 흐름은 이러한 거대담론(巨大談論) 형성 자체에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사조(思潮)라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앞으로 드러나게 될 성결교회신학이 역사적 유산 자료 이상의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즉 오늘의 동시대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대답, 혹은 그 가능성을 주는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현대의 주류 사조인 소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과 대면해야 한다. 이것은 이전의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한 총체적 비판으로부터 나온 사상이기 때문에, 접근하는 각도에 따라 이에 대한 정의나 평가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더니즘에 기초한 과거의 제 가치와 규범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비판의 대상에 기독교도 예외일 수 없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적극적으로 보고자 하는 부류와 부정적으로 보는 두 부류로 나뉜다.9) 그러나 모두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피해갈 수 없는 “하나의 시대정신(a Zeitgeist)”로서,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a worldview)”으로서10) 이미 21세기 교회와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성결교회신학이라는 거대담론을 형성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보다 강력히 거부하는 공격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이성에 기초한 단일한 진리체계의 종말”을 선고하면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11)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모든 진리는 역사를 지니며, 말의 의미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콘텍스트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순전한(naked)” 진리, 즉 고정 불변의 진리를 파악하여 우리와 같은 하나의 통전적인 성결교회신학을 정립하려는 일은 시대착오적 모더니즘의 산물일 뿐, 더 이상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소통될 수 없는 일이다.12) 또한 존 밀뱅크(John Milbank)의 포스트모더니즘 이해에 근거해 볼 때도 “인간의 모든 ‘진리들’이란 단지 ‘가정들’이거나 기존의 어의적 합의로부터 끌어낸 것에 불과하다.”13) 진리주장은 “개별적인 이야기들(particular narratives)” 안에서만 가능할 뿐이지 통전적인 거대담론(master narratives)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성결교회신학과 같은 거대담론(metanarrative)을 말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다. 불가능하지 않다! 거대담론의 종말을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또 다른 거대담론을 재진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대담론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 대신에 오히려 “거대담론의 불가피성(inescapability of metanarratives)”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장해야 할 점은, 거부되어야 할 것은 거대담론 자체가 아니라, 세속적 이성에 의한 거대담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세속적 이성에 의하지 않은 “하나의 또 다른(an-other)” 거대담론의 출현이 강력히 요청된다. 그러므로 거대담론의 불가능성은 모더니즘을 지탱하고 있는 세속적 이성, 즉 하나님 없이 작용하는 이성에 의한 거대담론에 해당되는 것이지,14) 모든 거대담론이 불가능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거대담론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는 오히려 기독교 신학이라는 거대담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거대담론이 상실되어 통전성을 잃게 된 현대문명 사회를 치유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세속적 거대담론의 종말이 선언된 현대적 상황에서 신학적 거대담론이야말로 인류를 위한 “최선의 이야기(the best story)”로 들려질 수 있다.15)

 

성결교회신학의 기초주의와 명제주의 극복 문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결교회는 자신의 모습을 통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신학적 거대담론을 “최선의 이야기”로 교회와 인류를 향해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가 아직 한 가지 더 남아 있다. 즉, 우리가 정립하고자 하는 성결교회신학의 역사적 자료들 대부분이 모더니즘의 시대적 사조 가운데 형성된 것들로서 오늘날 우리가 극복해야 할 기초주의(基礎主義, foundationalism)라는 인식론적 지반 위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16)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은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라 불리는 근대의 계몽주의로부터 태어났다. 그 시조를 데카르트(R. Descartes)로 보는 것이며, 그 인식론이 바로 기초주의이다. 이 기초주의란 바른 지식은 이성(理性)에 기초해 있는 것이어야 하며, 하나의 지식은 반드시 또 다른 하나의 지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최초의 기초(first principle, bedrock)를 전제하는 것이며, 이를 불변의 진리로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초주의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신학을 인간의 종교적 “경험(experience)”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 온 것이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다. 이들이 경험을 신학의 기초로 삼는 이유는, 인간이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종교 경험을 하고 있으며, 또한 모든 교의(dogma)란 종교적 경험 없이는 진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슐라이어마허(Fr. Schleiermacher) 이후 자유주의 신학은 크게 두 차원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Christian Faith) 일반의 보편성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체험이 근거되어야 할 불변의 종교적, 도덕적 기초인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17)

이처럼 모더니즘의 기초주의에 입각하여 “경험”을 신학적 기초로 삼은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라면, “성서”를 신학의 기초로 택한 것이 보수주의 신학이다. 이들이 성서를 택한 것은 인간 이성의 보편성을 담지할 수 있는 최종적 기초가 바로 성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신학적 명제들(propositions)이 성서로부터 연역(演繹)되어 교회가 지켜야 하는 불변의 교의들로 자리 잡는 명제주의(命題主義, propositionalism)가 보수주의 신학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서 언어의 축자영감설 내지는 성서무오설 등의 주장들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와 동시에 한계가 모더니즘의 기초주의라는 인식론적 전제하에서 이해할 때 보다 명확해진다.

이처럼 지난 한 세기 동안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했던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모더니즘의 도전에 모더니즘의 방식으로 대답하는 가운데 형성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모더니즘이 근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에서 모더니즘의 기초주의라는 인식론에 기초해 있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보수주의 신학 또한 설 자리가 더 이상 없는 형편이다. 이러한 도전과 위기의 때에 “성서”를 신학의 제1원리와 기초로 두고 있으며, 그 위에 “경험”을 신학의 한 원리와 방법으로 발전시켜 온 성결교회의 역사적 유산들이 과연 모더니즘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적 21세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신학적으로 유의미하게 정립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성결교회 신학을 교회 공동체적 차원에서 정립하려는 우리의 일차적 목표는 과거의 역사적 유산을 발굴하여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가 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유산들이 새로운 시대에 어떻게 창조적 에너지로 활용될 수 있을지, 앞의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그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과제는 비단 성결교회신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21세기 신학 전반이 해결해야 할 과제임과 동시에 도전이다. 현대의 신학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도전과 동시에 기회로 보면서 각양의 대안을 마련하기에 비상이다. 1989년도에 나온『포스트모던 신학의 다양성』과,18) 1995년도의『포스트모던 신학: 종교적 다양성의 도전』,19) 그리고 2003년도에 보다 종합적으로 나온『포스트모던 신학』20)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대해 여러 가지 방향의 신학적 대안이 모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주목할 연구는 조지 린드백(George Lindbeck)과 한스 프라이(Hans Frei)에 의해 대표되는 후기 자유주의 신학(postliberal theology)이라 불리는 “문화-언어 론”적 방법과 캐빈 반후저(Kevin J. Vanhoozer)의 “정경-언어론”적 방법이다. 이외에도 이들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존 밀뱅크(John Milbank)가 주도하는 철저 정통주의 신학(Radical Orthodoxy theology)이 있으나, 성결교회신학의 기초주의와 명제주의 극복을 위해 린드백과 반후저의 탈기초주의(postfundamentalism) 대안을 적극적으로 살펴본다.

린드백은 모더니즘의 기초주의 인식론에 근거한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을 넘어서기 위해 보수주의의 ‘지적 명제주의(cognitive propositionalism)’와 자유주의의 ‘경험적 표현주의(experiential expressivism)’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즉, 기독교 교리의 실제적인 기능은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대로 상징적 표현도 아니며, 보수주의 신학이 말하는 것 같이 진리주장도 아니다. 반면, 이러한 비판과 함께 그가 특별히 역점을 두었던 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뿌리내리고 있는 ‘경험’의 기초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에서의 종교적 근거는 인간의 내적 경험이다. 내적 경험으로부터 종교가 가능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의 내적 경험은 언어와 개념화 이전의 선험적 실재라는 특성을 지닌다.21) 이와 달리 린드백에 의하면, 종교는 내적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는 외적 말씀(verbum externum)”이다.22) 그러므로 린드백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문화-언어 이론(cultural-linguistic theory)’은 외적 말씀을 표현하는 언어와 문화에 주목한다. 교회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는 신앙을 사회적으로 매개하는 그물(web)이다.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교리란 “공동체의 언어, 태도 및 행동을 규정하는 권위 있는 규율들”이다.23) 이 “규율 이론(rule theory)”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명제들의 특정한 공리적 특징을 주목하게 한다.24) 이처럼 ‘종교’를 이루게 하는 언어, 교리, 의례, 행동양식 등과 같은 객관적인 요소들이 다양한 종교경험을 향한 열정을 일으킨다.25) 다시 말해서, 시, 음악, 예술, 의식과 같은 종교의 미학적 상징적 차원은 단순한 외적 치장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없어서는 종교를 경험할 수 없는, 더 나가서는 신학을 이야기할 수 없는 중요한 매체(媒體)라는 사실이 린드백의 연구를 통해서 부각되었다.

성결교회가 과거 100년간 전해오는 역사적 유산의 중요한 것들도 ‘경험’에 기초한다. 그 경험은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하듯이, 종교의 ‘기초’가 되는 ‘안으로부터 오는’ 이상주의적 경험이 아니다. 오히려 성결교회신학이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가운데 말해야 하는 경험은 린드백이 밝히고자 했던 것처럼 성결교인의 자아 정체성을 드러내는 성결교회의 경건훈련, 언어, 개념, 교리, 헌법, 예배의식, 간증, 전도, 부흥회, 교회음악, 기독교교육 등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는, 즉 ‘밖으로부터 오는’ 경험이다.

이처럼 린드백의 문화-언어론적 대안은 종교생활의 외적 규율들에 주목함으로써 모더니즘의 내적 경험주의를 넘어설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 성서에 대한 관심이 교회생활의 패턴들에 대한 강조로 인해 약화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반후저(Kevin J. Vanhoozer)의 지적은 정당하다.26) 이에 반후저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신학을 ‘정경적-언어적 방법(canonical-linguistic approach)’을 통해 성서의 우선성이 의문시 된 린드백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성결교회신학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성결교회는 비록 경험을 강조하는 웨슬리안 전통에 서 있지만, 이 전통에서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경험보다도 성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성서를 강조했던 보수주의 신학은 모더니즘의 기초주의에 입각해 성서의 절대성을 주장하기 위해 성서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성서의 문자를 절대화하는 성서 기초주의는 더 이상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신학적 인식론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성결교회신학은 성서를 신학의 ‘기초’로 여겨왔으며, 성서로부터 교리적 ‘명제’들을 취해 왔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마당에서 성결교회신학은 성서 기초주의와 교리 명제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바르게 낼 수 있는가?

이에 우리는 반후저의 정경적-언어적 방법 가운데 제시되고 있는 “지도(map)”론이 성서 기초주의 또는 교리 명제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적 대안으로 수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성서 또는 교리적 명제들을 지도(地圖)와 같은 것으로 볼 것을 제안하며, 지도와 상대되는 ‘문서(script)’ 개념을 대비한다: 성서를 문서의 차원에서 볼 때는 성서에 연출되고 있는 신적 드라마(theo-drama)의 통일성이 상실되지만, 지도로 볼 때 성서의 다양성이 약화되지 않는다. 문서는 말하고 행동하기 위한 것이지만, 지도는 걸으며 따르기 위한 것이다. 신학에서 성서의 역할은 해석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드라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고, 그 도(道)를 따르는 자들이 되도록 함이다. 그러나 지도들은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길을 문자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 지도란 해석해야 하는 프레임워크(framework)이지, 근본 사실들에 대한 기초가 아니다. 보편적이며 모든 목적을 다 드러내는 지도란 없다. 그리고 지도란 제작자의 관심이나 편견만큼 주관적이다. 건축물과 달리 지도는 기초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성서라는 지도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것이다.27)

성결교회신학이 성서를 이처럼 지도라는 메타포(metaphor)로 볼 때, 성서 기초주의라는 모더니즘적 인식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특히 성결교회는 성서를 이해할 때, 모형론적(typological) 해석 방법을 사용해 왔는데, 이러한 해석학적 전통은 나름대로의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기초주의나 명제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방법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결교회의 역사적 유산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성결교회신학은 ‘기독교 진리의 확실한 이성적 기초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던 모더니즘에 대해, ‘경험’ 또는 ‘성서’가 기독교의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확실한 기초라고 대답했던 근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신학의 기초주의로부터 벗어나면서도 경험과 성서를 성결교회신학의 중요한 기초로 다룰 수 있는 길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성결교회신학의 기초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성결교회신학의 기초는 온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성서의 신적 권위를 수호하고자 하는 것도 복음 때문이오,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도 그것이 복음을 전해온 역사적 유산이기 때문이오, 인간의 이성을 활용하는 것도 복음을 세상의 문화 가운데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함이오, 경험을 강조하는 것도 복음의 능력을 맛보아 더 큰 확신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결교회신학은 명실공히 ‘복음주의’ 신학이다!

성결교회는 이러한 복음 이해의 변질을 막고, 성서가 증언하는 그대로의 온전한 복음을 주창한다는 차원에서, 성결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순복음(純福音, Full Gospel)”이라 불러졌으며, 이 복음을 다시 내용적으로 깨닫고 전하며 삶 가운데 적용하기 위하여 “사중복음”, 즉 중생의 복음, 성결의 복음, 신유의 복음, 재림의 복음을 성결교회의 전통으로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사중복음의 전통을 떠나서 ‘성결교회’의 신학을 말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중복음은 한국성결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말해주는 표지요, 정체성 그 자체”이며, “사중복음을 강조하는 것이 성결교회가 다른 교단과 구별되는 차이점”이기 때문이다.28) 그러므로 성결교회의 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사중복음신학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성결교회는 이러한 출발선에서부터 사중복음신학을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신학으로 보다 깊이 있고 폭넓게 발전시켜 나가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다.

신학적 인식론(epistemology)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어진 것이오, 이 복음을 들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성결교회신학이 사중복음의 신학이라면, 성결교회신학은 은총과 신앙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결교회신학의 인식론은 은총의 차원에서 성서에 기초하며, 또한 신앙의 차원에서 경험에 기초한다.29) 은총과 신앙에 입각하여 성서와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성결교회신학의 인식론은 모더니즘의 이성적 기초주의에 입각해 경험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던 자유주의 신학과, 성서를 신학의 기초로 삼았던 보수주의 신학의 기초주의(foundationalism)적 인식론과 다름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 : 첫째로, 자유주의 신학의 기초인 경험은 인간 내면에 주어진 종교적 선험성(a priori)으로서 이를 계시의 원천으로 여기는 반면에, 성결교회신학의 기초인 경험은 은총에 의해 주어진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기 때문에 경험에 대한 양자의 신학적 개념은 서로 다르다. 둘째로, 보수주의 신학은 성서가 드러내려는 계시적 실체를 인간의 언어-인식적 기능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문자 자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신적 실재를 피조적 차원으로 폄하하고, 역으로 매개적 문자를 신적 차원으로 우상화하는 반면에, 성결교회신학은 성서를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중복음을 향해 가도록 보여주는 “지도(地圖)”와 같은 모형(模型)으로 보는 점에서 서로가 다르다. 이처럼 사중복음에 기초한 성결교회신학은 기초주의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을 충분히 통과하면서도 성서와 경험을 신학적 초석으로 확고하게 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맺는 말 : 전통의 비판과 승계

성결교회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결교회’라는 공동체가 보존해 오고 있는 전통, 곧 역사적 유산을 오늘의 성결교회가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분석, 종합, 평가하여 학문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전통이란 교회 공동체가 겪어 왔던 ‘경험들의 집합’으로서 오늘의 공동체가 겪고 있는 경험과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 대립하거나 단절될 수도 있다. 즉, 전통으로 계승되는 경험들과 더 이상 전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들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경험들의 취사선택을 위한 교회의 기준이나 지침이 적용된다. 성결교회의 경우, 성결운동을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 대륙으로 퍼져나가게 했던 동양선교회의 가르침을 받아왔으며, 그리고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은 이들을 배출 해 낸 만국성결교회의 가르침을 전수하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정신이 “본질적인 것에는 통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 모든 것에는 사랑”이라는 웨슬리안적 모토(motto)이다.30)

이러한 모토는 한국성결교회가 명시적으로 사용한 예를 찾기가 어려우나, 그러한 정신은 공동체 안에서 실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이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서로부터 나오지, 전통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여,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찾아지는 것이지, 인간의 신앙 ‘경험’으로부터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것이 성결교회신학이 뿌리내리고 있는 종교개혁적 개신교 복음주의와 웨슬리 신학과 웨슬리안 성결운동이 견지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성결교회신학의 자료들이 되고 있는 성결교회의 역사적 유산인 성결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의 빛, 즉 성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coram Deo)’ 나와야 한다. 그리할 때 자유주의 신학이 빠졌던 ‘경험’ 기초주의나 보수주의 신학이 떨어졌던 ‘성서’ 기초주의와 ‘교리’ 명제주의로부터 성결교회신학은 온전히 자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에게서 본다. 그는 당시 ‘경험’을 모든 지식의 기초로 삼았던 경험주의의 본 고장에서 오히려 ‘성서’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할 수 있었던 자유를 누렸으며,31) 영국교회의 보수주의 신학 가운데서도 오히려 ‘경험’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고, 경험으로써 성서의 진리를 확증하는 데까지 나갔다.32) 또한, 기독교의 ‘전통’을 불신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도33) 성서해석과 신학 연구를 위해 전통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전통으로부터 배움을 추구하였다.34)

성결교회신학을 정립함에 있어서도 성결교회의 전통을 비롯하여 그 이전의 주요 전통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전통은 그것이 형성된 시대의 문화와 사상에 영향 받고 제한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비판될 수 있다. 웨슬리도 자신이 존경하는 초기 교부들에게서 “많은 오류와 많은 취약점, 그리고 잘못된 결론이 많은 것”을 지적하였으며,35) 영국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수정해야 할 부분은 과감히 고치기도 하였다.36) 그와 마찬가지로 성결교회신학의 정립도 전통의 수용과 비판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친다. 이와 같이 성서로부터 시작하여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그리고 웨슬리로부터 만국성결교회를 거쳐 창립 100년 역사의 성결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 전통의 다양한 신학적 유산들을 비판적으로 승계하여 정립된 성결교회신학은 명실공(名實共)히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 신학임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는 성결교회신학이 성서와 성서적 경험의 가치를 드러내는 전통들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자연스럽게 드러난 결론이다.


각주


1) Peter Lundell and Elaine Pettit, When God Bursts In: Revival Then and Now(Kansas City: Beacon Hill Press, 2005), 39. 53. Jonathan Goforth, 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Elkhart, Ind.: Bethel Publishing, n. d.), 8.

2) George A.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 (Louiville/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84), 16. 린드백은 ‘자유주의’나 ‘근본주의’라는 대중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유사한 개념으로서 교회의 교리(doctrines)을 강조하는 코그니티브 타입(cognitive type)과 교회의 경험을 중시하는 타입(experiential-expressive type)으로 크게 나누고, 이 양자를 종합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로마 가톨릭 타입으로 구분한다.

3) Steven B. Bevans, <상황화 신학> 최형근 역(서울: 죠이선교회, 2002), 68-72쪽을 참고하라. 베반스는 상황화 신학을 발전시킬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요소”로서 “문화적 정체성, 사회변화, 그리고 대중 종교성” 등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김인경이 말한 상황화의 특징들 가운데 “시대 개방성(Situational - Open Ended)”의 확보를 통해서 비로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In-Gyeong Kim Lundell, Bridging the Gaps: Contextualization among Korean Nazarene Churches in America(New York: Peter Lang, 1995), 34: “We must not confuse canon with theology, but reform our theology to approach the Truth for continued relevance in every changing context. Therefore, open-endedness is necessary for propagating the Gospel to every generation, every age, and every individual in history.”(이탤릭체는 필자의 강조).

4)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3(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3), 162f. 165.

5) 신학과 교수회의(2002. 5. 31) 의견을 수렴하여 성결교회신학연구위원회에서 확정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다시 ‘신학교육정책연구위원회/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신학연구위원회 연석회의’ (2002. 7. 9; 구장회 장세만 최세걸 이혜천 전준기 송철호, 최종진 목창균 전성용 김희성 박명수 정인교 최인식)에 보고 되었다.

6) 성신연프로젝트는 2002년도에 출범하여, 제1차 성신연종합세미나를 2003년도에 시작, 제2차를 2004년도, 제3차와 제4차를 2005년도에 공청회 형식으로 진행하였으며, 제5차를 2006년도 <성결교회신학>의 출판 전 마지막 종합세미나로 열었다.

7) 이정근, “성결교단 교리·신앙고백 정립의 필요성,” <미주성결교회 성신연세미나, 2006년 1월 9일 미주성결신학대학교>.

8)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신학연구위원회(성신연)의 ‘성신연프로젝트 2002-2007’을 통해서 파악된 교단 내의 신학관련 박사학위 소지자만 해도 해외에 거주하는 자들을 포함하여 300명에 육박할 만큼 신학연구의 저변활동층이 두터워졌다. 교단은 이러한 무형의 지적 자원이 적시에 활용될 수 있는 정책을 100주년 기념으로 추진한다면,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사업이 될 것이다.

9) Myron B. Penner, “Christianity and the Postmodern Turn: Some Preliminary Considerations,” in Christianity and the Postmodern Turn: Six Views, ed. by Myron B. Penner(Grand Rapids: Brazos Press, 2005), 14.

10) Myron B. Penner, ibid., 17.

11) John Milbank, “‘Postmodern Critical Augustinianism’: A Short Summa in Forty Two Responses to Unasked Question,” Modern Theology 7(1991): 225. “The end of modernity, which is not accomplished, yet continued to arrive, means the end of a single system of truth based on universal reasons.”; recited in Gavin Hyman, The Predicament of Postmodern Theology: Radical Orthodoxy or Nihilist Textualism? (Louiville/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27.

12) Gavin Hyman, The Predicament of Postmodern Theology, 27.

13) John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Beyond Secular Reason(Oxford: Basil Blackwell, 1990), 242: “All our 'truths' are only 'assumptions' or takings up from previous linguistic arrangements.”

14) 모더니즘이나 이를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거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속적 이성에 의해 자신을 지탱하는 한, 궁극에 가서는 허무주의(nihilism)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세속적 이성에 의한 거대담론의 결과는 가공할 만한 파괴적 허무주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끊임없이 거대담론의 불가능성, 즉 완결된 진리체계를 부정하고 나서는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거대담론들이, 예를 들어 그것이 세속적 이성, 과학적 진리, 계몽주의적 휴머니즘 등의 어떠한 모습을 지녔든지 간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무주의의 다양한 변신(masked 혹은 disguised)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학적 담론은 이들과 대치되는 국면을 피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은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가운데 강력한 허무주의가 있음을 보기에 허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을 재비판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차이(difference)’를 조화롭게 껴안을 수 있는 보편성(universalism)이란 불가능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체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다양한 담론들끼리 폭력적으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폭력의 수사학(rhetoric of violence)을 말할 뿐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인류구원이라는 거대담론의 보편성을 전제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차이’는 경쟁이나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포섭과 조화의 대상이다(Gavin Hyman, The Predicament of Postmodern Theology, 27).

15) Gavin Hyman, The Predicament of Postmodern Theology, 28. 이와 같은 이해는 John Milbank의 신학적 변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16) Stanley J. Grenz and John R. Franke,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28. 이외에도 기초주의 비판과 그에 대한 신학적 대안을 논한 다음의 문헌들을 참고하라: Stanley Hauerwas, Nancey Murph, and Mark Nation(eds.), Theology Without Foundations: Religious Practice and the Future of Theological Truth(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John E. Thiel, Nonfoundationalism(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4); J. Wenzel van Huyssteen, Essays in Postfoundationalist Theology(Grand Rapids: Wm. B. Eerdmans); Nancy Murphy, Beyond Liberalism and Fundamentalism: How Modern and Postmodern Philosophy Set the Theological Agenda(Valley Forge, Penn: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6) 등.

17) Grenz and Franke, Beyond Foundationalism, 34.

18) David Ray Griffin, William A. Beardslee, and Joe Holland(eds.), Varieties of Postmodern Theology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9): (1) deconstructive or eliminative(Mark C. Taylor, Carl Raschke, Charles Winquist), (2) constructive or revisionary (David Ray Griffin), (3) liberationalist (Harvey Cox, Cornel West), (4) conservative or restorationalist(John Paul II).

19) Terrence W. Tilley, Postmodern Theologies: The Challenge of Religious Diversity(Maryknoll, NY: Orbis, 1995): (1) constructive(David Ray Griffin, David Tracy), (2) a/theological dissolutions(Thomas Altizer, Mark C. Taylor), (3) postliberal(George Lindbeck), (4) communal praxis(Gustavo Gutierrez, James W. McClendon).

20) Kevin J. Vanhoozer, The Cambridge Companion to Postmodern Theology(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1) Anglo-American postmodernity: a theology of communal practice, (2) postliberal theology, (3) postmetaphysical theology, (4) Deconstructive theology, (5) reconstructive theology, (6) feminist theology, (7) radical theology.

21) George A.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 (Loui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84), 35

22)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34.

23)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18: “The function of church doctrines that becomes most prominent in this respective is their use ... as communally authoritative rules of discourse, attitude, and action.”(필자의 강조)

24) George Hunsinger, “Postliberal Theology,” in Kevin J. Vanhoozer, The Cambridge Companion to Postmodern Theology(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0.

25)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39.

26) Kevin J. Vanhoozer, The Drama of Doctrine: A Canonical Linguistic Approach to Christian Theology (Loui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5), 294. 그는 또한 린드백의 방법이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근대의 강조를 넘어설 수 있었으나, 개인의 신앙을 교회생활이라는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자유주의의 경험주의(experiential-expressivist)를 교회주의(ecclesial expressivism)으로 전환한 것이 아닌지 묻고 있다.

27) Vanhoozer, The Drama of Doctrine, 295-97.

28) 목창균, “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적 유산과 과제,” <21세기와 서울신학대학교: 서울신대 개교 90주년기념 학술 논문집>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 역사연구소 편(부천: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2002), 231.

29) 이와 같이 성서와 경험 위에 신학을 세우는 것은 존 웨슬리 신학의 전통에서 찾아 볼 수 있다(참조: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59.

30) Manual of 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 and Churches (1905), MOTTO: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31) Donal A. Thorsen, The Wesleyan Quadrilateral: Scripture, Tradition, Reason, and Experience as a Model of Evangelical Theology(Indianapolis: Light and Life Communications, 1997), 127: John Wesley, “I allow no other rule, whether of faith or practice, than the Holy Scriptures.”(“To James Hervey,” 20 March 1739, Letters, Telford edition, 8:192).

32) John Wesley, Wesley's Standard Sermons, vol. 1, ed. and annotated by Edwin H. Sugden, 3rd ed.(Epworth and Allenson, 1954), 32.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 75이하 재인용. 이때 웨슬리의 교리 형성에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경험은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영적 감각이 아니라 삶을 통해 얻어진 “지혜”였다(Randy L. Maddox, Responsible Grace: John Wesley's Practical Theolog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46).

33) Geral R. Cragg, Reason and Authority in the Eighteenth Century(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4), 2. recited Thorsen, The Wesleyan Quadrilateral, 151.

34) Thorsen, The Wesleyan Quadrilateral, 154.

35) John Wesley, “To Dr. Conyers Middleton,” 4 January 1749, III.11, Letters(Telford edition), 2:387. recited from Thorsen, The Wesleyan Quadrilateral, 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