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요한복음 9:1-7)


눈먼 자의 불행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맹인들만 모이는 삼각지에 위치한 맹인교회에서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 모인 맹인들의 대부분이 나면서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별로 없고 중도에 어떤 사고로 인해서 실명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새삼 느낀 것은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많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에 비할 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이 맹인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으니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캄캄한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 해와 달이 어떤 모양의 물체인지 나무는 어떻게 생겼으며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들어서 상상할 뿐입니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본문에 기록된 날 때부터의 맹인의 답답한 처지와 한번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요. 요사이 우리 주변에는 대학입시에 실패했다고, 또는 공부하는 것이 싫어서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스스로 끊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어른들 중에서도 실직을 하고 다른 직장을 찾지 못해 고민하다가 삶을 포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결심을 했으리요마는 죽을 용기를 가지고 한번쯤은 이 날때부터 앞을 못보고 일생을 살고 있는 소경의 처지를 잠시라도 생각했더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사는 동안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할 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당하는 그 고난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독한 고통이라 해도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다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득을 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그 고난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면 그 고난은 의미 없는 고난이요 절망스러운 고통일 뿐입니다. 어떤 고난이든 그것은 삶의 의미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경중을 달아볼 수는 없습니다. 철인 플라톤의 말과 같이 내 손가락 하나가 아프면 온몸이 아픈 것입니다. 다만 적은 고난이건 큰 고난이건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내가 고난을 당할 때 또 하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그 고난이 나의 미래와 어떤 관련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은 내가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해도 그 고난을 통해서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그것은 견딜 만한 고난입니다. 우리 나라에 "젊어서의 고난을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소망을 보여준다면 그런 고난은 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하는 고난을 임산부의 고통에다 비유하셨습니다. 아기 밴 여인은 열 달 동안 고생을 합니다. 또 해산의 수고가 여간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임산부의 고통은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값진 고통입니다. 고로 임산부의 고통을 축하하는 사람은 많아도 임산부의 고통을 동정하거나 불쌍히 여겨 위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해산의 수고는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 중의 태아가 장차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인물이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나면서부터 소경인 이 맹인의 고난은 아무런 의미도 소망도 없는 고난입니다. 치유의 보장도 없습니다. 우리 말에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명분 있는 고난을 말합니다. 한때 우리 나라 독립투사들은 굶으며 살아도, 한지에서 밤을 지새면서도 옥중에서 신음하고 재산, 가족, 생명까지 희생하면서도 묵묵히 온갖 고초를 이겨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의 경우는 명분이나 소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당하는 고난도 아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고통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일을 위해 참아야 할 시련도 아닙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니 죽을 때까지 소경으로 살아야 할 운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질문

9:2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제자들의 질문 속에는 '인과응보'라는 유대적인 사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의 관념 속에는 "모든 고난은 죄 때문이다." 즉 고난의 원인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신학적으로 생각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로 사망이 인간에게 왔다는 바울의 교리가 됐고, 어거스틴, 칼빈 등 여러 개혁신학자들에 의해서 계승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롬 5:12)고 설명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이나 재난이 죄의 결과라는 유대적인 보응 사상에서 내놓은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내포된 대답은 인생의 모든 불행도 질병도 죽음도 모두 죄 때문이라는 유대 사람들의 교리나 신앙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는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현실적인 논리로 맹인의 불행을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죄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가볍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받는 고난은 의로운 고난으로 취급하기가 쉽습니다. 죄를 짓고 수갑을 차면서도 자기 죄를 미화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이 불행한 사람을 돕기 위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면 예수는 제자들을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행한 맹인을 앞에 놓고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그 불행의 원인을 캐물었을 때 소경의 감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고로 예수는 그 원인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안하시고 좀더 높은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보았습니다.

3절에 보면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철학적인 난제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았습니다. 마귀의 장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 보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불행이 아니라 그 뒤에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구원의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인간의 차원에서 볼 때는 심히 불행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인간의 어떤 불행 때문에 중단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첫째 시각입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이 불행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으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죄, 부모의 죄 모두 과거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철저하게 이 맹인의 불행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이 불행의 원인을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찾으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10년후건, 20년 후건 하나님의 계획하시는 구원의 경륜과 역사를 오늘의 이 사건 속에서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다 그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원인은 언제나 과거적인 원인과 미래적인 원인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령 교도소에서 징역을 사는 사람은 과거에 지은 죄 때문입니다. 이는 고생의 원인이 과거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 입시를 위해 고생하는 학생들은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고로 이 고생의 원인은 미래적입니다. 오늘의 불행은 신앙적인 세계관에서 본다면 과거적 의미보다는 미래적 의미가 더 클 수도 있습니다. 마치 바벨론 왕궁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나 애굽에 팔려간 요셉의 경우를 보면 오늘의 불행이 미래의 성공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관에서 오늘의 불행을 볼 때 바울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롬 8:28).

세번째로 예수님은 이 사건을 새로운 창조적 기회로 생각하셨습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깊이 생각해보면 인간의 모든 불행한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숨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나간 역사에서 일어났던 작고 큰 엄청난 전쟁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왜 공산주의가 지난 100년 동안이나 세계를 지배하고 인류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셨는지, 왜 지난 53년의 긴 세월을 남북분단 상태에서 서로 대립하도록 내버려두셨는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먼 훗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해 필요했던 일로 그 비밀이 벗겨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저 함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소화하고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는 때가 언제입니까? 인간의 잘못된 가치관이 완전히 부정되는 순간에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십니다.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실 때 맹인이 그 명령에 순종하였더니 날 때부터 눈먼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이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순간에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습니다. 이때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나타나는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