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께서 구원하심을 보라

(출애굽기 14:10~16)


문호 톨스토이의 글에 인간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뒤에서 추격해오는 호랑이를 피해 도망치다가 어느 절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절벽에 뻗어 있는 '칡넝쿨'을 잡고 뛰어내려 벼랑에 매달림으로 호랑이의 추격을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밑을 내려다 보니 그 밑은 깊은 웅덩이고 거기에는 큰 뱀이 입을 벌리고 자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나그네가 다시 위를 쳐다보니 자기가 간신히 붙잡고 매달려 있는 칡넝쿨을 흰 쥐와 까만 쥐가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이 흰 쥐는 낮, 까만쥐는 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생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의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노예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한 지 얼마 안 가서 부딪친 첫 시련은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은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현대 말로 표현한다면 '극한 상황'에 부딪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순간 저들의 마음속에 넘쳐 흘렀던 해방의 기쁨이나 자유의 노래소리는 사라져 버리고 대신 자신들의 무기력 함과 지도자 모세에 대한 원망 등으로 분노의 얼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안고 있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는 "출구가 없는 시대"라 표현했지만 이런 한계상황의 길목에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실존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도자 모세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높이 들고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첫째는 "두려워 말라", 둘째는 "가만히 서서", 셋째는 "구원을 보라"였습니다.

첫번 메시지는 "두려워 말라" 였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무서운 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극한 상황을 만났을 때 삶에 대한 용기와 의욕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낙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고 고통스러운 40년의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백성이었습니다. 바다를 육지처럼 건넌 기적을 위시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기적,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인 기적,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시게 하신 기적을 볼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한 그들은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놀라운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탈출한 일세대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40년을 배회하다가 목전에 보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문명세계에 사는 현대인도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일단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두려움이 앞서고 겁을 먹고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두려움 때문에 희망을 잃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문둥병, 폐병 같은 것이었으나 지금은 암이나 에이즈 같은 병을 가장 두려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정신적인 병은 위기상황에 처할 때 먼저 겁을 먹고 두려워 절망하는 병입니다. 그러기에 흑사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오천 명이라면 흑사병이 두려워서 죽는 사람은 오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고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높은 인격이나 반석 같은 믿음을 언제 어떻게 측정할 수 있습니까? 평상시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상황에 직면했을 때, 시련이 태풍처럼 몰아칠 때,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그의 품격과 믿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저는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가끔 시련에 부딪칠 때 두려움이 앞서고 삶의 용기를 잃고 방황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앞서간 위인들의 발자취를 생각하면서 용기를 되찾곤 했습니다.

한때 온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은 불치의 간질병 소유자였습니다. '실락원'을 저술한 '밀톤'은 헬라의 위대한 '호머'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음악의 성인으로 알려진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동안 찌르는 가시를 몸에 갖고 살았습니다. 20세기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헬렌 켈러'여사는 듣지도 보지도 말도 못하는 삼중고의 불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운명에 도전하며 가능성의 문을 열어 인류에게 소망의 빛이 될 수 있었을까요?

패자와 승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똑같은 위기상황에서 두려움 없이 싸워 이긴 자는 승자요, 두려워 무릎을 꿇은 자는 패자입니다. 고난의 날이 왔을 때 절망이 골목길에 왔을 때 오히려 신앙은 빛을 발하게 합니다.

두번째 모세의 메시지는 "가만히 서서" 입니다.

여기 "가만히 서라"는 말은 '조용하라', '침착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흔히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그만 이성을 잃고 쉽게 감정의 노예가 되어 흥분해 버립니다. 헝크러진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침착해야 합니다. 흥분하고 덤비면 그것이 풀리기는 커녕 더 엉켜지고 맙니다. 한문에 '동중정'(動中靜)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란한 환경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고요함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성경 본문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뒤에는 원수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극한 상황에서 동요하는 군중을 향해 모세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라"고 외쳤습니다. 모세의 두번째 메시지는 '동중정'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 같은 난세에는 우리에게도 이런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여론에 밀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굳건한 의지와 철학에 따라 백성을 이끄는 '동중정'(動中靜)의 지도자가 아쉽습니다. 우리는 위기상황에 직면할수록 침착하게 사는 삶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 분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남북이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고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환경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떤 변화에도 동요하지 말고 침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험한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으니 그러므로 지혜는 뱀과 같이 순결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고 타일렀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할수록 침착하게 자기 주변을 정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박해의 제일인자였던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극적으로 기독교로 전환한 후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아라비야 광야로 내려가 3년간 소명에 대한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에게 이 기간은 "조용히 서는 기간"이었습니다. "가만히 서서 자기의 주변을 정리하는 시간은 결코 무의미한 낭비가 아니라 동중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틈도 없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자주 한적한 곳을 찾아 조용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감람산을 찾은 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조용하게 정신적 무장을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정신적인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조용히 서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은 조용히 명상하고 사색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모두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서서'라는 모세의 두번째 메시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무기력은 '가만히 서는', 즉 기도하는 시간을 상실한데서 오는 비극입니다.

세번째 모세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브라함 링컨'은 어떤 극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출애굽기 14:13절 말씀을 읽고 감격스러운 어조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그는 나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하실 것이다. 고로 나는 가만히 서서 그의 구원을 보리라"고 외쳤습니다. 인간의 소망이 다 끝나버린 극한 상황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새 소망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새 가능성은 인간의 절망 위에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누구나 일생을 살다보면 벗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런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더 심한 위기를 맞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그런 위기를 모면하려고 기도하기보다는 그런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위기 속에서 "주님의 구원하심을 보라"는 것이 세번째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위기를 당했을 때 방관하시지 않으시고 드디어 바다를 육지처럼 가르시고 그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에 예민하신 분이십니다.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응답이 더딜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필요합니다. 바다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절망입니다.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런 캄캄한 밤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희망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태양이 하루 종일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밤에는 세상이 온통 캄캄해져서 태양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딘가에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은 허무합니다.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합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암담한 세상입니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죄악이 깊은 밤에도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믿습니다. 그 아침을 믿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밤은 밤으로 끝나지 않고 밤은 반드시 아침을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밤은 곧 아침으로 연결됩니다. 극한 상황이라고 하는 시간은 다시 새로움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 인생의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침,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인생의 깊은 밤과 하나님의 구원의 아침이 현시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점점 어두어지는 세대에 살면서 저 아침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지나치게 매이지 맙시다. 그것은 다 지나가 버립니다. 미래에 삽시다. 약속을 바라보고 삽시다. 우리가 아직은 어둠의 깊은 현실 속에 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벽을 깨우며 밤을 낮같이 살아갑시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 밑에 숨은 많은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도 생사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죽지 않고 살아서 역사적인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제2차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 있는 어떤 집 지하실 벽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음을 믿었다.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사랑이 존재함을 믿었다. 나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믿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능력을 믿는 그 믿음 위에 하나님은 언제나 새 기적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고로 우리는 바다가 육지로 변하는 기적의 축복을 오늘과 같은 캄캄한 상황 속에서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뒤에서는 애굽 군대와 같은 악의 세력이 추격해 오고, 앞에는 건널 수 없는 바다가 길을 막고 있어도 바다를 갈라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살아갑시다. 바울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일생을 살았기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