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메시지]

‘국민화합’ 토대, 교회가 쌓아가자

2001.01.02, 16:15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맹인이 예수를 만나 치유함을 받고 보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이 맹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국민 화합과 저해요인,그리고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자들은 맹인이 눈을 뜬 기적을 보면서 엉뚱한 질문을 던졌습니다.“선생님,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자신의 죄 때문입니까,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제자들의 이런 질문은 맹인의 불행 원인이 무엇이며 어디서 온 것이냐는 의문의 표현입니다.이런 질문은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되풀이돼온 물음입니다.

과연 누구의 죄일까요? 우리 속담에 “잘되면 제 탓이요 안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습니다.이 속담의 뜻은 일이 술술 풀려서 마음먹은대로 잘되면 내가 잘한 탓이요,일이 잘 안되면 남의 탓으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심사를 빗댄 속담일 겁니다.하기야 이런 ‘전가의 심리’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의 명을 어긴 문책을 받았을 때 이미 아담은 하와에게,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습니다.그러므로 이런 책임 전가의 심리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국민은 언제부턴가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위안을 구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그래서 얼마나 빨리 그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느냐 하는 순발력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마땅한 속죄양이 없을 때는 법적 뒷받침이나 제도미비에 그 책임을 돌리기도 합니다.이와 같이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잘못이나 현실의 어려움을 어떤 외부의 원인에 돌림으로서 문제 해결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 각자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현실의 벅찬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는 노력과 용기가 부족하다는 데 있습니다.무슨 일이 잘못됐을 때 이것은 당신의 탓도 제도나 기구의 탓만이 아니라 나도 책임을 져야 할 사람 중의 하나라는 책임감을 느낄 때 국민화합은 이뤄집니다.모든 국민이 누구의 죄냐라는 물음만 던지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면 국민화합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보겠습니다.“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다.다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 맹인을 통해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예수님은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또한 그 해답을 과거에서 찾으려 하시지도 않았습니다.그는 현실적인 논리로 맹인의 불행을 있는 그대로 보았습니다.

소경이 지금 정신적으로,육제적으로 깊은 고난에 처해있는데 이런 불행한 사람을 앞에 놓고 그것이 누구의 죄냐고 따지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다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이 불행에서 맹인을 구해낼 수 있을까가 그의 관심의 초점이요 급선무였습니다.

그러면 국민의 화합을 위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그것은 눈먼 자가 있으면 그를 어둠에서 건져내 빛을 보게 해주고 불행을 덜어주는 일입니다.오늘의 현실은 사건의 해결을 바라고 있지 폭로나 심판만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현대인은 이런 요청을 거부함으로 불화와 원한이 풀리지 않고 쌓여만 갑니다.

우리 국민으로서는 각자가 과거와 오늘의 현장을 어떻게 비판하고 해석하든 그것은 자유입니다.그러나 우리는 모두 싫든 좋든 같은 배를 타고 가는 한 배의 선객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위기를 벗어나 내일의 항해를 더 보람있게 하려는 희망에서 건설적인 일체감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이것만이 교회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그렇지 않고 교회마저 냉소적이고 방관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화합된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오늘과 같은 현실에서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역할은 사회 통합에 있습니다.날로 급증하는 사회의 갈등과 이익 충돌을 종교적인 믿음과 사랑 그리고 화해의 정신으로 조정해 국민화합을 이루는 역할이 새해에 모든 것에 우선 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