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불멸의 성경과 교회 개혁



 

Ⅰ. 불멸의 말씀 성경


  기독교를 바로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기본이 있다. 하나는 교회요 또 하나는 성경이다. 사실상 이 두 가지 기본을 분리하고서는 기독교를 설명할 수 없다. 교회가 없으면 성경이 없고 성경이 없으면 교회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기독교회사를 읽으면 이 양자는 늘 병행하지 않고 중세기의 로마 가톨릭은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과 구원을 위하여 성경보다 교회를 우월한 자리에 두었다. 반면에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보다도 성경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과 권위로 삼고 구원의 근원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 성경은 Protestant(기독교)의 경전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갖게되었다.

 

  ⅰ. 성경의 권위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한다. 구약은 율법과 예언의 책이며 예수 이전의 기록이다. 신약은 예수의 언행록과 제자들의 신앙고백의 기록이다. 구약은 신약의 기초요 신약은 구약의 성취이다. 성경은 현재 단편을 합해서 약 1,400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성경은 양적으로는 신약과 구약을 합해서 한권, 장수로는 1,189장, 절수로는 31,173절, 단어로는 773,692 단어이며(영문) 자(字)로는 3,066,490자의 방대한 책이다.

  이 성경은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계시록에 이르러 끝났다. 창세기는 천지창조의 기록이며 계시록은 천지완성의 기록이다.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니 이전의 하늘과 땅은 이미 지나갔고 바다도 있을 수가 없다”고 하는 말씀으로 끝났다. 영원에서 시작하여 영원에서 끝난 것이다.

  성경처럼 위대한 글은 이 세상에 또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개 민족사나 세계사가 아니라 우주사다. 우주가 성립된 유래와 그 목적과 그 종국을 기록한 책이 성경이다. 고로 이 책은 물거품같이 나타났다가 물거품같이 사라지거나 혹은 무에서 나왔다가 무로 돌아가는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목적 밑에서 시작되었고 그 목적이 완성될 때 끝나는 글이다. 성경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물로서 인생을 취급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영원히 남을 세계 유일의 글이다.

  영국의 은행가이며 대자연학자인 「죤라북구」씨는 세계적인 대저서 100종을 골라가지고 그 중에 제일위에 성경을 놓았다.

  그러면 왜 이렇게 성경이 위대한 글인가? 그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많은 책들은 모두 사람의 말들이요 세상에서 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을 계시하는 책이다. 성경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의 뜻을 분별할 수가 있다.

  이 모든 것 위에 성경이 위대한 이유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쓴 글이기 때문이다. 고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고 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인가? 첫째로 성서는 낡은 책이면서도 항상 새로운 내용을 가진 글이다. 성경이 가닥이 많은 현대인의 모든 문제에 만족한 해답을 줄 수 없는 맛적은 글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읽지 않으면 안 될 글이 성경이다. 성경은 다른 책과 같이 흥미있는 글은 아니다. 그러나 깊은 뜻을 가진 글이다. 그러므로 씹으면 씹을수록 새 맛이 나는 글이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① 하나는 성경이 역사적인 글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세계사가 이루어져 나가는데 몇 번씩 그 방향을 돌려놓는데 힘이 되었다. 로마제국에서 그랬고, 중세기 종교개혁에서 그랬고, 현대교회에서 그랬다. 헬라의 향락주의와 로마의 권력주의가 합하여 이룩한 로마의 문화는 극도로 인류를 타락시켰다. 대낮에 연극장에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짐승을 싸움에 붙여 그 물고 찢고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로마국민을 땅 밑에서 자라난 카타콤 종교의 성경이 아니면 건질 수가 없었다.

  또 16세기 종교개혁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아야한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가 에르후르트 사원에서 라틴어 성경을 연구할 때에 전 구라파 사람들에게 새로운 빛을 주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광명은 구라파에 있어서 정치, 경제, 공업, 상업, 미술, 문학, 교육 등 전 분야를 새롭게 부활시켰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로마제국에서 수행한 도덕적 종교적 대개혁을 제외하고는 16세기에 있어서와 같이 구라파 사람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은 개혁은 없었다.

  이와 같이 조그마한 성경 책 가운데는 개인은 물론 국가와 인류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도 남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이 역사상 인류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한 것은 한번이나 두 번이 아니다.

  18세기에 있어서 영국을 근본적으로 개혁한 것도 역시 「웨슬리( John Wesley, 1703.6.17~1791.3.2)」형제 외 몇몇 학생들이 옥스퍼드대학에서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경 연구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결코 ‘메도디스트 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부패한 영국사회를 개혁하고 도탄에 빠져있는 그 민족을 오늘의 일등국민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 세계제일차대전을 치른 후 맥 빠진 세대에 간신히 부르짖고 나온 것이 이른바 위기신학이니 변증신학이니 하는 것이다. 이 사상 역시 역사가 지나가는 길 위에 한줄기 빛이 된 것은 이들의 신앙이 루터나 바울의 신앙이며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 성경주의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② 성경이 낡은 글이면서도 항상 새로운 내용을 가지는 두 번째 이유는 성경은 인생의 글인 까닭이다.

  성경이 역사를 두고두고 건져오는 이유는 그것이 인생의 근본문제를 다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근본문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죄와 구원’의 문제다. 한마디로 성경은 죄와 구원문제를 다루는 글이다.

  1,60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서 지위와 지식과 환경이 다른 저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의 내용은 오직 하나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목적은 하나뿐이니 곧 인생의 근본문제인 죄와 구원에 관한 것이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하고 철학이 넓어지며 깊어지고 문명이 진보된다 할지라도 죄 문제와 구원문제를 해결해줄 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이외에 없다. 그러므로 영국의 한 시인이며 소설가인 「월터」는 임종 시에 그의 사위에게 “나를 위하여 책을 읽으라”고 말했다. 그 때 사위가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책은 하나 밖에 없으니 곧 성경책이다”라고 대답했다. 또 아프리카의 한 추장이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을 방문하고 떠날 때 “영국이 오늘의 번영을 이루게 된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여왕은 그것은 곧 “성경책”이라고 대답했다.

  

  ③ 성경이 낡은 글이면서도 항상 새로운 내용을 가지는 세 번째 이유는 성경은 영원한 글이기 때문이다.


  긴 역사를 통해서 시대마다 성경처럼 핍박을 받은 책은 없다. 학자의 손으로 제왕의 손으로 교권의 손으로 실로 무수한 조소와 박해를 받아왔다. 「데오클레티아누수」가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을 때에 모든 성경책들은 거의 다 불태워버렸고, 수 만 명의 기독교 신자들은 학살을 당했다. 그리고 박해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박해받은 성경책 위에 “기독교의 이름은 이제 다 없어지고 말았다”라는 말을 써서 비석에 새겨 세웠다.

  그러나 몇 해되지 않아서 마치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세상에 인생이 다시 번창하게 되듯이 성경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그 후 기원 325년에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74.2.27~337.5.22)」대제가 즉위할 때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고 성경은 진리의 확실한 재판관으로 서게 되었다.

  종교개혁 당시에 천주교에서는 열심히 성경 번역을 저지하였으며, 수 만권의 성경책을 불사르고 성서 읽는 사람을 정죄하여 화형에 처했다. 그뿐 아니라 17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 「볼테르(Franois-Marie Arouet Voltaire, 1694.11.21~1778.5.30)」와 같은 사람은 호언하기를 “금후 100년 이내에 기독교는 전멸할 것이며 성경은 고고학자들의 한 참고품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가 1778년에 죽고 25년이 지나 1804년에는 그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영국에 성서공회가 창립되었고 수년 후에 스위스 제네바에도 창립되었다. 「볼테르」의 저택은 성서창고가 되었으며 특히 그가 무신론 서적을 인쇄하던 활판기는 그가 죽은 후 성경을 인쇄하는데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시대마다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책은 세계성서공회연합회는 2000년 12월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6,500여개의 언어 중에서 성경이 번역된 수가 총 2,403개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 중에서 성경전서가 번역된 언어 수는 426개이고 신약전서가 번역된 언어 수는 1,115개이고 낱권만 번역된 것은 826개 언어이다.

  성경의 불멸의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시인 산 그리스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로 베드로전서 1장24~25절에 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고 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토록 하늘에 굳게 섰나이다(시119:89)" 하고 노래했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낡은 글이면서도 항상 새로운 내용을 가지고 개인의 영혼과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키며 개혁하는 능력의 말씀, 그리고 영원불변의 말씀을 우리가 살고 있는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에 어떻게 효과 있게 널리 선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지워진 하나의 중요한 과제이다.


 

Ⅱ. 불멸의 성경과 종교개혁


  ⅰ.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


  종교개혁은 1517년 독일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약 천년동안을 일반적으로 중세기라고 부른다. 이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성기였다. 구라파의 모든 나라는 교황청의 지배를 받았다.

  교황은 종교계의 최고의 지도자이기는 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정치 문화면에까지 지배력을 가졌다. 왕이 되는 데는 교황의 허락이나 승인을 필요로 할 정도의 절대권위를 가졌다. 이것이 교황으로 하여금 독재 독설 부패에 빠지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교황 신부의 허락이 없이는 시민생활을 자유롭게 못했다. 교회는 고해제도를 통해서 시민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사치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것 때문에 도미니칸, 프랜시스 등의 수도원이 생겨 많은 개혁을 하기는 했으나 그러나 교회는 좀처럼 개혁되지 않았다.

  교회개혁을 말하는 사람에게 교황은 언제나 “교회는 두 가지 칼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는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 쓰고 다른 하나는 지상문제에 관해서 쓴다.”고 무자비한 처단을 선언했다. 이 칼에 희생된 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불란서의 필립 왕, 독일의 헨리4세는 교황청에 의하여 파문되었고, 후스는 화형당하고, 위클립도 죽었다. 100년 후 그의 뼈를 파서 화형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태리의 사보나로라는 교수형을 받고 시체는 화형됐다.

  계란 속이 썩으면 껍질도 썩듯이 내부가 썩은 로마교회는 마침내 내부에서 개혁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혼의 안식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수도사가 된 「루터」는 로마교회의 도덕적인 부패와 신학적 부패성에 더 고민했다.

  그것은 로마교회가 사죄표(赦罪票)를 파는 일 때문이다. 탁발 수도사 「텟첼」은 “여러분의 돈궤에 돈을 넣은 그 순간 여러분의 어머니의 영혼은 연옥에서 뛰어 나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속죄권을 팔 정도였다. 이 말을 들은 「루터」는 돈으로 영혼 구원이 좌우될까? 하는 의문을 갖게되었다. 그의 연구에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때 「루터」는 95개의 조문을 써서 윗덴베르그 성 캐슬예배당 정문에 붙이고 토론을 제의했다. 한 수도사였던 「루터」가 1517년10월31일에 행한 하나의 이 거사가 뜻밖에도 전 독일에 자극을 주어 국민의 호응을 받게 되었다. 종교개혁운동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제네바에서 불란서인 「화렐」이 종교개혁운동을 하다가 1536년부터는 「칼빈」이 그곳에 이주하게 되어 이 두 사람이 주동이 되어 개혁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1541년부터는 「칼빈」 혼자서 “신에게 영광”이라는 표어 밑에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이곳에서 「칼빈」에게 공부한 「죤 낙스」는 「칼빈」의 개혁운동을 본받아 본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1560년 처음으로 장로교회를 조직하는데 성공함으로 개혁운동은 또한 화란, 벨기에, 영국까지 전파되어 독일에서 일어난 이 개혁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 구라파에 퍼지게 되었다.


  ⅱ. 종교개혁의 본질과 그 영향


  그러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운동은 그 후 구라파 역사와 전 인류 역사의 진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루터」의 종교개혁의 주요 목적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본질을 바로 이해함으로서 구원의 도리를 잘 알고 동시에 교회의 부패를 막고 참 하나님의 교회를 형성하는데 있다.” 그래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표어로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부르짖었다.

  종교개혁운동은 기독교의 재발견 운동이며 복음의 재발견 운동이다. 이런 복음의 재발견은 종교개혁의 삼중(三重)의 “만”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첫째 ‘성경만(sola scripture)', 둘째 ‘은총만(sola gratia)', 셋째 ‘신앙만(sola fide)'이다.


  ① 첫째로 종교개혁은 잃어버렸던 성경을 다시 발견하였고, 덮어있던 성경을 다시 열어 놓았다.

   그리하여 특별계급만이 볼 수 있었던 성경이 일반 평민에게까지 개방되었고, 인간의 이성과 추리방법으로 해석되었던 성경이 그 자체에 의해서 해석되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크리스천 신앙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고 교리의 척도로 삼았다. 이 성경만이 그리스도 교회의 권위이며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가르쳐줌으로 성경 외에는 구원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교회의 유전, 교황의 교서, 교회의 규칙 등이 성경을 대신하거나 보충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만’이란 원리는 복음만(gospel alone)이란 원리이며 ‘복음만’이란 말은 그리스도만이란 말과 같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추구는 「루터」 전의 천주교 신학의 대 변혁을 일으킨 것이다.


  ② 두 번째로 종교개혁은 은총의 재발견이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다시 강조한다. 로마 가톨릭과 개혁자의 근본 차이는 ‘은총만’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인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며 결코 사람의 어떤 공로나 업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즉 구원이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충족한 업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우리의 것이 되어 아무 인간적인 공적 없이 믿음만을 통해서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은총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주어진 바탕이나 덕성이나 힘으로 규정하며 또는 ‘만’으로라는 말을 거부하고 사람의 의인(義認)을 일부는 하나님에게 일부는 사람에게 돌린다.

  그러나 개혁자는 그리스도만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시며 그분만이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구세주라고 믿는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을 없이해주실 분은 그리스도뿐이시다. 본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쌓아 두었던 담벼락을 예수는 십자가를 통하여 허물어 버렸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다시 이러한 담을 쌓아놓고는 교황과 신부가 담벼락이 되어 신자와 하나님 사이를 막아버렸다. 이 담을 「루터」를 위시한 개혁자들은 다시 헐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만인 제사장직이라는 용어를 써서 누구든지 신부나 목사라는 계급을 통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길을 연 것이다. 이 은총에 대한 강조와 재인식이야말로 잃었던 그리스도를 우리들 안에서 다시 찾게 한 종교개혁의 큰 공헌이다.


  ③ 세 번째로 종교개혁은 신앙의 재발견이다

  종교개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신앙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내 것으로 받을 수 있는 손이다.

  신앙 외에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공로도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 고로 「루터」는 고백하기를 “이 한 조항, 곧 그리스도 신앙이 나의 마음을 지배한다. 나의 모든 신학사상은 밤이나 낮이나 이 한 조항에서 나오고 이것을 돌며, 또한 늘 여기에 되돌아간다”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만의 원리는 필연적으로 은총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죄인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은총에 의하여 되어진다면 은총은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공적이 될 만한 원인을 배제하며, 다만 믿음으로 될 수 있다. 사람은 아무 업적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믿음으로 값없이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가톨릭은 믿음만이라는 문자는 수락했으나 그 정신은 수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나 그러나 그것은 선행하는 믿음이어야하며 그러므로 공적있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Ⅲ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점


  ⅰ. 가톨릭교회의 현황


  신도의 수는 5억5천만 전 기독교인의 2/3 그리고 전 세계 인구의 약 1/5에 해당할 정도다.

  교황의 지위는 가톨릭의 로마 본부는 스스로 지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대표,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회의 머리로서 천국의 열쇠를 가졌다고 자처하는 교황은 그들의 첫 교황인 베드로의 직계라고 주장한다.

  가톨릭의 분포를 보면 라틴아메리카는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거의 전부가 가톨릭이다. 구라파는 가톨릭의 세력이 프로테스탄트 보다 다소 우세하며, 북미주에서는 프로테스탄트가 절대로 우세하다. 그러나 지난 200년 동안에 제일 작은 교파에서 지금은 큰 교파로 성장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전 인구의 3%에 불과하나 2/3는 가톨릭교인이다. 필리핀, 베트남, 실론,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는 가톨릭이 우세하고 인도, 파키스탄, 일본 등은 거의 비슷하며 한국, 버마, 인도네시아, 대만 등은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 보다 우세하다.

  그러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살펴보면


  ① 교회관의 차이다

  기구적으로는 가톨릭은 전 세계적으로 단일명령 계통의 강력한 바티칸 중앙집권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통일성(unity)의 토대는 교리적 통일에 둔다.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는 단일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 교리 제정의 최후 결정권은 교황에게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많은 교파를 가지고 있다. 통일이 없다. 개개의 교파는 교리적 통일을 가지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제도적 약점이 있는 개신교는 명령이나 행동의 통일을 갖지 못한다. 신앙양심의 자유를 원칙으로 삼는 개신교는 외부적인 제도의 통일의 중요성은 제2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교리를 중요시하지만 교리의 출처는 오직 성경에서만 국한한다.

  위에서 교회의 통일성 문제를 언급했으나 사도계승(Apostolic Succession) 문제에도 차이가 있다.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사도들에게 (신앙의 관리자) 전해진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과 이 교회의 합법적인 머리의 계승은 사도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어 내려온다는 것,  베드로가 처음으로 로마시대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를 계승한 교회가 참 교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 비오 9세는 1864년에 정식으로 이것을 선포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승자이며 대리자이며 따라서 베드로를 이은 로마의 감독 즉 교황이 참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고 그들에게만 그리스도는 교회를 맡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베드로의 로마시 선교의 전설을 의심하며 또 그것이 설혹 사실이라 하여도 그리스도는 베드로라는 인물 위에다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고 그가 고백한 것과 같은 고백을 토대로 하여 교회를 세웠고, 그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이며 그 신앙을 계승하는 성직자는 다 그리스도의 계승자라고 본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는 전통의 형식적인 통일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고백의 통일을 더 중요시하고 이 중요한 고백을 하는 교회는 교파 여하를 막론하고 참된 교회라고 믿는다.


  ② 권위관(Authority)이 다르다

  ⑴ 가톨릭은 먼저 권위를 성경에 둔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인 고정된 해석과 교황의 교권이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우가 많다. 독경의 자유가 근년에 평신도에게도 부여되었고 또 그것을 장려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해석의 자유는 없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전통과 기존의 질서를 해하는 것은 일체 용서치 않는다.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경은 개신교의 것보다 외경 11권이 더 많다. 개신교는 이 외경의 성경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권위의 소재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국한한다. 성경만이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권위이며, 성경의 교훈대로 교회와 교회기강을 정한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를 해석하며 가르치는 목사의 권위나 성경에서 나오는 교리는 제2차적인 권위에 속한다. 개신교는 성경해석을 학자들의 양심의 자유에 맡긴다.


  ⑵ 가톨릭교회는 성경 다음으로 권위를 전통에 둔다.

  가톨릭교회는 성경만이 신의 계시의 방편이 아니고, 전통도 방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전통이란 예수의 사도들이 못다 기록한 그의 교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후대에 전하여준 것이라고 본다. 고로 성경과 전통은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본다.

  개신교는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교훈은 교회가 가르칠 수 없다고 본다. 역사적인 인위적 잡된 전통이 원복음서의 교훈을 왜곡하는 위험을 피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개신교는 성격에 국한된 철저한 문서종교다. 그리고 이 문서종교는 필요하고 충족한 계시는 유일회적으로 완성하여 고정된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특수한 계시의 경험을 분별없이 용납하는 것을 거부하고 질서의 혼란을 피하는 것이다.


  ⑶ 가톨릭교회는 권위를 교권제도에 둔다.

  가톨릭은 교황을 권위의 상징으로 하는 성직자의 교권제도다. 교황은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물론 그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의 공직에 관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선포하는 교리나 법령은 가톨릭 안에서 절대무오라고 인정을 받는데 성경이나 상식이 이것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무오성의 뒷밭 침으로서 그 배후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런 제도가 없을뿐더러 인간의 과도한 권한이 중세 교황들이 만든 제도와 권리의 남용을 싫어하여 그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성경만을 유일의 권위로 인정한다.


  ③ 예전관의 차이다(Sacrament)

  가톨릭은 성예전을 가시적(visible)이며 물리적인 하나의 상징(sign)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이 성예전은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올라가고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 이상으로 바로 은혜의 통로이며 매개가 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 성예전은 단순히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의 “원인으로 일으키며(cause)", ”부여하며(confers)", 또한 무엇을 “담아주는(contains)" 등의 특색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성예전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은혜가 마치 의약과도 같이 마술적으로 신비하게 인간을 성화한다고 본다.

  그 일례로서 성만찬 예전에 있어서 신부의 의식집행으로 떡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즙을 그의 피로 그 본질이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 Transubstantiation)을 믿는다. 그리고 수찬자의 신앙 유무를 불문하고 단순히 성예전이 진행되는 곳과 그 시간에 참관함으로서 은혜를 받게 된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은혜를 유도하는 성예전을 거행하는 신부의 권한을 특별한 것으로 본다. 또한 가톨릭에서는 매주일 아침마다 드리는 미사제에서 그리스도가 문자 그대로 희생을 옛 갈보리산상의 십자가의 수난과 희생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성예전(성찬, 세례)이 중요한 의식이지만 이것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그 의식 자체가 어떤 신비한 작용을 한다기보다는 참여자의 신앙을 통하여 그 의식을 매개로 얻는 경험이라고 본다. 고로 수찬자의 신앙이 없이 참여하는 것은 무효라고 본다.

  그리고 화체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의 속죄의 사랑과 은혜를 상기하고 감사한 생각으로 받으며 그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영적교제를 더 깊이 가지는 경험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단순히 기억의 지성행위만이 아니고 신령한 경험까지 얻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는 그리스도의 수난은 단 일회적이며 동시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그 수육이나 수난의 무한반복은 그가 성취한 성업에 대한 일종의 불경이라고 본다.


  ④ 예배관이 다른 점이다.

  가톨릭은 미사제의 의식중심이며 심회적이며 개인적인 경건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공동적이며 지성적이며 personal하다. 고로 지성적 이해를 위주로 하는 설교중심의 것이다.


 ⑤ 국가관이 다른 점이다.


  가톨릭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명백히 구분한다. 두 가지 권력이 있는데 하나는 영적권력이고 또 하나는 속세의 권력이다. 그런데 이 둘 다 교회의 관리 밑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속세의 권력은 영적권력에 복종해야 한다. 국가는 교회와 어떤 문제에 관하여 합의할 때는 국가가 어느 정도 독립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만일 서로 대립할 경우에는 국가는 교회에 추종하여야 한다. 육신보다 높은 것이 영혼인 것 같이 교회는 국가보다 높다고 본다.

  개신교는 국가는 사회질서와 정의의 보존을 위한 영역이다. 즉 타락한 세계가 무질서와 멸망에 방치되지 않기 위하여 주신 저지의 수단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예전을 통하여 지배하는 영역이며, 사죄와 구원의 질서를 위한 영역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질서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 정치적 영역 또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기독론적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지배질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

  

  「Stauly and Stuber」의 “Price on Roman Catholic for Protestant" (N.Y. 1953. p.262)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점을 요약한 기록을 그대로 옮김으로 우리의 인식을 돕고자 한다.

   

  ⑴ 가톨릭은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가시적 교회의 머리라고 믿는다.

     개신교는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라고 믿는다.

  ⑵ 가톨릭은 믿음과 거기에 선행을 더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믿는다.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⑶ 가톨릭은 전통이 성경의 불가결적인 보충물이라고 하여 첨가한다.

     개신교는 성경은 신앙과 행실을 위하여 충족한 것으로 믿는다.

  ⑷ 가톨릭은 성예전(세례, 견신례, 성찬, 고해, 종유, 성직임명식, 혼례식) 일곱 가지를 포함시킨다.

     개신교는 성예전을 성찬과 세례 두 가지만 말한다.

  ⑸ 가톨릭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별이 엄격히 한다.

     개신교는 모든 신자의 제사직을 믿는다.

  ⑹ 가톨릭은 신부 역시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개신교는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

  ⑺ 가톨릭은 제3의 상태 곧 연옥을 믿는다(천당, 지옥 외).

     개신교는 천당과 지옥을 믿는다.

  ⑻ 가톨릭은 마리아의 무원제, 회태와 승천까지 믿는다(1950년 교리화).

     개신교는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

  ⑼ 가톨릭은 미사제의 희생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사망이 인류에게 인류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드린 희생이라고 믿는다.

  ⑽ 가톨릭은 성자들을 통해서 역시 기도드린다.

     개신교는 직접적으로 홀로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⑾ 가톨릭은 모든 신앙에 대하여 인권의 동등을 허용한다. 그러나 비가톨릭교인은 전혀 종교적인 자유가 없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릇된 것은 아무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는 원리를 주장한다(현재는 개정되었음).

     개신교는 모든 신앙의 자유를 믿는다.

  ⑿ 가톨릭은 교황을 최고의 권위로 오시는 주앙집권제의 교권제도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는 세계적인 넓은 교제(WCC 같은)를 소유하지만 어떤 중앙집권 같은 것을 가지고 다스리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위에서 지적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점은 1953년에 발간한 “Price on Rome Catholic for Protestant"에 실린 비교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