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성결교회와 사중복음




  성결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에 근거하여 복음주의적 신학노선을 걷고 있다. 그러나 성결교회는 창립 당시부터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전도의 표제로 삼아 오늘까지 건전하게 성장해왔다.

  중생(혹은 신생)은 주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교리이다. 중생의 교리는 기독교의 입문이며 천국시민의 자격을 갖추는 첫 걸음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느니라(요3:3).” 중생은 영으로 나는 신비에 속한 영적변화이며 모든 사람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어 그 사람의 심령과 인격 전체에 근본적인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것이다.

  중생이 신앙생활의 출발이요 구원의 입문이라면 성결은 중생 이후로부터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지속되는 성결된 생애를 말한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완전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2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內住)를 의미한다.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치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다.

  신유는 인간의 힘으로 의약의 힘으로 고칠 수없는 육체의 병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믿음으로 고치는 것을 말한다.

  재림은 구약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수육탄생(受肉誕生)이라면 신약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살전4:16~18)과, 지상재림(행1:11)을 믿는다. 요한계시록은 전적으로 재림에 관한 글이며 신앙생활의 경성이요 대망이다(살전3:6).

  위의 사중복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고자한다.


Ⅰ. 중생의 복음(重生 혹은 新生)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예수의 선언은 만인에게 해당되는 만고의 변함없는 진리이다. 중생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시민이 되는 첫걸음이다. 동시에 인생의 모든 고민을 푸는 유일의 길이다.


 ⅰ. 중생의 뜻이 무엇인가?


  다시 난다. 두 번째 태어난다. 위로부터 난다.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말이다. 중생이란 단어는 인생의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인격의 변화 즉 생각을 고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쓰는 세뇌도 아니고, 정치가들이 사용하는 혁명도 아니다. 마음을 고치라는 말이다. 즉 마음이 변화되어 호흡을 새롭게 하며, 새로운 말을 하며, 새로운 정신을 소유함으로 과거의 옳지 못한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라는 뜻이다.


  ⅱ. 그러면 거듭나는 원리는 무엇인가?


   ① 중생의 첫 번째 원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즉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16:24)”고 하신 것은 중생의 첫째 원리를 제시한 말씀이다.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하신 말씀은 개인의 과거의 그릇된 생활을 청산하려는 뜻만이 아니라 과거의 기존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인식의 눈을 뜨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부정하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⑴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즉 죄 의식의 눈을 뜨라는 뜻이다.

  ⑵ 죄를 회개하라는 말이다. 회개와 신앙은 기독교 진리의 기본구조다.

  ⑶ 믿는 것이다. 죄로부터 전환이 중생의 첫째 조건이라면 둘째 조건은 하나님에게로 전환하는 것이다.


  ② 중생의 두 번째 원리는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주인으로 영접해 드리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골3:9~10)”고 하였다.

  자기부정과 함께 새 주인을 영접하라는 뜻이다. 옛사람은 죄인인 나요, 새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다. 자신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새 주인에 대한 긍정이다. 예수로 하여금 옛 나를 대신하여 살게 하는 것이다. 고로 중생은 자기 개조(改造)가 아니라 자기를 예수에게 명도(明渡)하는 것이다. 주인의 교체다.


  ③ 중생의 세 번째 원리는 새로운 창조 즉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 말씀은 중생의  핵심(Key Word)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주와 하나가 되며 과거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인생이 새로워지는 종합적인 표시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새 주인 예수를 영접한 결과는 새로운 창조다. 옛 것은 모두 변하여 새로워진다.

  이것은 가치관의 변화다. 우주는 새로운 우주로, 인생은 새로운 인생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절망적인 인간이 소망을 가지게 되며, 어두운데 행하던 사람이 빛 가운데 살게 된다. 귀한 것이 천한 것으로 그 사물의 가치가 전도된다. 이 세상의 부귀와 공명이 모두 매력을 잃는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다(빌3:8).”


  ⅲ. 중생의 표적(결과)은 무엇인가?


 ⑴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모든 것에 앞세우는 생활이다.

  ⑵ 중생한 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로서 낳음이니라(요일 3:9).” 거듭난 사람은 유혹은 받으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

  ⑶ 삶의 새로운 동기를 부여받는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능력을 얻는다.

  ⑷ 그러면 무엇으로 알 수 있나?

  바람이 불면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같이 생활의 열매를 보아 안다.


 

Ⅱ. 성결(聖潔)의 복음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세 단계를 거쳐야한다. 첫째는 중생(重生)이요, 둘째는 성결(聖潔)이요, 셋째는 영화(榮化)다. 중생이 생활의 출발이요 구원의 입문이라면, 성결은 중생 이후로부터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지속되는 성결의 생애를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죄와 전혀 관계가 없는 상태 즉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

  성결한 생활이란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완전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2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內住)하심을 의미한다. 인간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질을 부여받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결한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믿음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성결한 생활이란 무엇인가?


  ⅰ. 성결한 생활은 성별(聖別)된 생활이다.


  성결은 성별한다는 뜻이다. 죄악생활에서 분리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죄짓던 자신과 그 낡은 생활을 버리고 새로 성별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과거를 분토처럼 버렸다는 말은 바로 성결한 생활의 시작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남자는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선민의 표적이다. 이 백성은 음식을 먹되 정결한 음식만 먹어야한다. 성전에 있는 그릇은 희생제를 드릴 때 쓰기 위하여 성별하여 따로 갈라놓았다. 안식일은 다른 날과 구별하여 거룩한 날로 하나님께 바쳤다.

  이와 같이 신도들의 성별된 생활이란 구별된 생활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흙과 소금을 구별하고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세상 사람의 생활과 구별되어야 한다.


 ⅱ. 성결한 생활은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 즉 헌신의 생활이다.


  바울은 구원받은 신도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별된 생활을 강조했다. 또 바울은 “너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너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삼으라(롬6:13)”하셨고 또 헌신을 권한 다음에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였다.


  ⅲ. 성결한 생활이란 성령으로 하여금 나의 생활 전부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결한 생활이란 하나님의 영이 끊임없이 내 생활 속에 개입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바울은 이 사실을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며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까지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한다(살전5:23)”고 묘사했습니다.

  성결한 생활은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성령의 강한 역사로 나의 과거의 악한 성질, 죄 된 생활은 소멸되었고, 적극적으로는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계심을 말한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일한 것은 인간이 죄 많은 이 땅에 사는 한 우리의 성결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타락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유혹조차 안 받는 절대성결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 하는 자 즉 성령의 전적인 지배를 받는 자는 죄짓는 생활을 계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성령이 떠날 때 인간은 누구나 타락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는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으로 우리는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Ⅲ 신유(神癒)의 복음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다. 기독교의 경전인 신구약성서는 기사와 이적으로 가득 차있다. 모세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 민족을 건져낸 일이라든가,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일이라든가, 또는 예수께서 친히 모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 등 성서의 태반 기사가 기적의 역사다.

  지난 여러 세대를 통해서 기사와 이적의 역사성을 부인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기적들은 역대 기독신자들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신념이 되었고 영적 정신적 도덕적 생활에 용기를 제공해 왔다. 신유는 이런 기적에 속하는 복음이다.

  그리고 이 신유의 복음은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성결교회의 전도의 표제 중 하나로서 시대마다 강조되어 왔고 오늘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과 흥미를 모으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면


  ⅰ. 신유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자.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가 가라사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출15:26)”하였고, 시편에는 “저가 네 모든 병을 고치신다(시103:3).” 또 야고보서 5장14~16절에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희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여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신유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ⅱ. 그러면 신유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하면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육체의 병을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고침을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론보다도 예수님 자신의 신유의 사역(Healing Ministry)이 증명해준다. 예수는 자신이 신유의 기적을 행하였을 뿐 아니라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의 역사는 기도와 신앙을 통해서 새로운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


  ⅲ. 그러면 신유의 복음을 신학적으로는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신유의 복음을 설명해 보자.

  인간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영적인 요소요 또 하나는 물질적인 요소다. 그리고 이 두 성품은 꼭 같이 인류의 타락에 의하여 불행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몸은 병들고 영혼은 부패하게 되었다.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 결과로 인간의 몸은 병들게 되었다. 이렇게 깊이 병든 영과 육은 모두 구속의 은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네 병을 고쳤다 하시지 않고 네 죄를 사했다고 먼저 사죄를 선언하셨다(막2:5). 또 시편 103편3절에도 “여호와는 너희의 모든 불의를 사하시고 너희의 모든 병을 치료하신다”고 기록하였다. 이런 말씀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듯이 죄와 병의 깊은 관계를 말해준다. 그렇다고해서 인간이 한 가지 죄를 범하면 반듯이 한 가지 병이 생긴다는 문자적인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만은 성서가 가르치는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육체의 질병이 타락의 결과요 열매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신유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의 죽음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 신학적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이해에서 생각한다면 근본적으로 영혼이 죄에서 구원받은 것과 육체가 질병에서 고침 받는 사실을 전인적(全人的)인 구원론에서 분리시킬 수는 없다.

  사죄와 신유는 시간적으로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죄의 깊은 은총을 체험한 사람은 욥과 같이 신유를 미래의 약속으로 대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함께 육체의 병에도 유효하다는 말이다. 고로 구주 예수를 믿는 신자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듯이 모든 육체적 질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이미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요 영과 육의 두 요소로 창조되었고, 또 타락도 전인적이기 때문에 구원도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IV. 재림(再臨)의 복음


 인간 사고에 있어서 종말 사상은 일반적으로 자연스런 현상이다. 개인적으로 또는 민족적으로 누구나 종국을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미래적인 생활에 들어가는 것일까?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세력에 의하여 종말이 올 것인가 등등의 물음은 일반적인 사고에서나 기독교적인 사고에서나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기독교는 역사의 종국을 철저히 믿는 종교다. 기독교의 종말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구약성서가 주의 날, 즉 메시야가 올 것을 대망했듯이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가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을 대망하는 기사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신약성서의 중심 교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일부 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갖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성서가 증언한데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구름타고 오신다던 그리스도는 이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언제 실현될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의 재림 또는 종말적인 구원에 대한 막연한 대망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일리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현실에서 의와 진리가 온전히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의와 불의의 싸움은 언제나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서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 역사의 피안(彼岸)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져오는 종말적 역사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미는 깊다. 그리스도가 모든 죄인들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심(初臨) 같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속죄주로서 또는 인류의 심판주로서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재림(再臨)하실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만물의 부흥이며 우주의 개조다. 또는 성도의 부활이요 정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최후의 심판이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고로 인류의 모든 희망은 예수의 재림에 걸려 있다. “내가 다시 오리라” 이 말씀은 예수의 최후 설교의 주제였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의 종말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면 언제 그리스도는 재림할 것인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24:36)”고 예수는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명백하게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림의 시일을 계산하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니며 재림의 신앙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재림하시기 전에 일어날 여러 가지 징조를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예수가 재림하시기 전에 이 땅에 일어날 네 가지 큰 징조를 알려준다. 첫째는 전쟁, 둘째는 대 기근. 셋째는 대 지진, 넷째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재림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열 처녀의 비유, 둘째는 달란트의 비유, 셋째는 산양과 면양의 비유이다. 첫 번째 비유는 재림하실 주님을 영접할 신앙의 준비를 하라는 교훈이고, 두 번째 비유는 주어진 책임 수행에 대한 교훈이요, 세 번째 비유는 예수의 재림과 인류의 심판을 예고하는 내용이다.

  예수는 다만 이런 여러 가지 징조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생각지 않을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경고하셨을 뿐이다. 이런 뜻에서 주님의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그것이 의심이나 실망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한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서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자비심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증거될 때 분명히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재림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