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기독교의 인간 이해



 


Ⅰ. 들어가는 말


  “반짝 반짝 작은 별 나는 네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이 말은 서양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어떤 아이가 잘못 불러 “네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를 “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이 어린 아이의 잘못 부른 노래는 과연 인간에게 오래 전달되어온 수수께끼이다.  “내가”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품고 있는 수수께끼이다.

  미국의 저명한 현대 신학자요 사상가인 「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

uhr (1892.6.21~1971.6.1)」 교수는 그의 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1941)’이란 책 첫 구절에서 “인간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인간 자신을 괴롭혀온 것이다. 즉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이냐의 결단을 찾는 첫 걸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존재의 근원과 행방 그리고 목적과 이상에 대해서 궁극적인 질문을 갖고 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나의 생의 좌표를 어떻게 정하고 생의 방향을 어디에 둘 것인가?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신이 존재하는가?’이다. 만일에 신이 존재한다면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으며 또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인간이 무엇인지를 바로 이해하려고 하면 절대자에 대해서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 「칼빈(Jean Calvin 1509.7.10~1564.5.

27)」 선생은 인간이 가져야할 지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신에 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인간에 대한 지식이라고 했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대 희랍에서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즉 생각하는 인간상을 제시했다. 기독교는 신앙하는 인간 즉 종교적인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인간을 기술인, 즉 ‘제작하는 인간’으로 정의했다.

  서양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것은 이성인,  신앙인, 기술인이다. 오늘의 서구문명은 이 세 개의 인간상에서 나왔다. 즉 아테네에서 탄생한 이성인이 희랍문명을 만들었고,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신앙인이 기독교 문명을 낳았고, 이태리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기술인이 근대과학기술문명을 만들었다. 하나는 생각하는 인간을 낳았고 하나는 신앙하는 인간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작하는 인간을 창조했다.


 

Ⅱ. 이 셋 중에서 기독교의 인간상은 어떻게 어떤 요소로 구성되었는가를 창조와 타락과 구원이라는 세 가지 원리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ⅰ. 창조의 원리에서 본 기독교 인간 이해다. 기독교는 인간을 먼저 창조자와 피조자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다.

 

①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데서 시작한다.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요 믿는 것이다. 지(知)의 질서와 신앙의 질서, 이성의 차원과 신앙의 차원은 동일한 영역이 아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요, 알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 신앙이다.

  합리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 신앙은 역설이요 모순이요 부조리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강조하는 신앙은 이성의 질서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성의 질서와 신앙의 질서를 둘 다 인정하고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강조하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6.19~1662.8.19)」은 신앙은 정신의 고차원의 도박이라고 말했다. 도박은 어느 한 편에 걸어야 한다. 무슨 수가 나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박은 불가지(不可知)한 것에 나를 내어던지는 결단적 행위이다. 그러면 「파스칼」은 왜 신앙을 도박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편에 내 인생을 걸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없다는 편에 내 인생을 맡기고 살 것인가? 이 두 가지 인생의 태도 중에서 어느 하나를 나는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신앙은 진지하고도 성실한 도박이다.

  산다는 것은 자유요, 자유는 선택하는 것이며,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에 나를 내어던지는 것이다. 고로 신앙은 인생의 결단이요, 선택이요, 도박이요, 모험이다. 고로 기독교의 인생관은 이런 모험에서 출발한다.


 ② 그러면 기독교 신앙인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문제를 갖고 있다.

  기독교는 창조자와 피조자 사이의 인격적인 대화의 종교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고, 그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것이 그의 지배 밑에 있다고 믿는다.

  고로 이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오 우주의 주관자이시다. 이 사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나 하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느니라(이사야44:6).”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자요 전능자다(요한계시록1:8).” 그는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자요, 인간은 유한한 피조물이다. 고로 하나님과 인간은 언제나 창조자와 피조자의 관계에 서있다. 그러므로 피조자인 인간이 자기를 절대화하거나 주인이 되려고 할 때 그런 행위는 창조자에 대한 반역이요 범죄요 우상숭배다.

  그러므로 창조자 신앙과 피조자 의식은 기독교적 인간상의 첫째 요소다. 창조자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절대적이다. 그러나 피조자는 유한하고 상대적이며 시간적이다.

  고로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적으로 단절된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비연속성(非連續性-discontinuity)의 세계다.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없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그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함으로 창조자와 피조자의 인격적 관계는 성립된다.

  유물론자 「포이에르바하 (Ludwig Andreaes Feuerbach 1804.7.28~1872.

9.13)」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했다”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인간을 절대화하고, 주인화하는 유물론적인 사상을 기독교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③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기독교 인간 이해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깊은 관계를 표시하는 종교적 의미가 들어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존엄성을 인간에게 부여한 이유는 인간이 이성(理性)을 소유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대화하고 서로 응답하는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시요,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말한다.

  피조자인 인간은 창조자인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두 가지 기본적인 자세를 위해야 한다. 하나는 .....에 의하여(by)라는 관계요, 또 하나는 ....을 위하여(for)라는 관계다.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또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며 모든 것은 그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고로 창조의 원리에서 본 기독교의 인간관은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다. 인간들이 창조한 문화, 예술, 인간들이 경영하는 정치나 경제 등 지상에서의 모든 활동은 창조자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내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문화는 종교에 봉사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8.20~196

5.10.22)」 교수는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요 문화는 종교의 형태”라고 말했다. 고로 기독교는 문화의 자율적 윤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ⅱ. 타락의 원리에서 본 인간 이해를 설명하고자 한다(창세기 3:5~21).


  ①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시고 세계와 역사를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무에서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제일 마지막에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것은 유(有 )에서가 아니라 무(無 )에서의 창조였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여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른 피조물과는 엄연히 구별한다. 즉 인간은 인간 이상의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이하의 피조물인 자연과의 중간에 처하는 존재이다. 고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물 중에서 가장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든 피조물의 지배자로 정하고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동산에 있는 과실을 마음대로 따먹데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주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간교한 동물 뱀의 유혹을 받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과실을 보고 세 가지 강한 유혹을 받았다.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하고(味覺의 자극)

     보암직하고(視覺의 자극)

     지혜롭게 할만치 탐스러웠다(知性의 자극).”

  아담과 하와는 이 자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다. 인간은 처음으로 창조주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이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죄와 죽음과 고뇌의 운명을 영원히 걸머지게 되었다. 모든 토지는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 왜 인간은 죽음, 고통, 죄악의 노예가 되었나? 이런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 창세기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한데 대한 벌이라고 대답한다. 모든 고뇌, 죽음, 부패는 죄의 값이다.


  ② 창세기에서 설명한 타락의 원리는 깊은 진리를 상징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유와 거역하는 자유를 아울러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유를 남용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탐욕과 자기를 주인화하고 절대화하고 만물의 중심이 되려는 오만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반역하였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런 교제의 단절을 신학에서는 인간의 타락 때문이라고 말한다.

  창세기는 첫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피조물임을 말하고 둘째는 자유의 남용으로 타락한 죄인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다.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였고 그 의지는 썩어서 나약해졌다. 고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자격과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온 인류의 혈관 속에는 뱀에게 유혹당한 하와의 나약한 의지가 계승되었고, 아담의 오만과 탐욕이 깃들여 있으며, 질투의 노예가 되어 자기 동생 아벨을 살해한 가인의 이기심과 악의의 검은 피가 우리의 혈관을 돌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는 기독교의 인간관은 낙관적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한 죄로 인하여 인류는 그 본성이 타락한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기독교 인간관은 비관적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기독교는 창조의 원리에서 인간을 이해해야하는 동시에 또한 타락한 원리에서 이해해야한다. 기독교는 인간을 모두 죄인이라고 단정한다. 이런 단정에 대해서 현대인은 반문할 것이다. 우리가 간음죄를 지었는가? 도둑질을 하였는가? 살인죄를 지었는가? 기독교가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런 결과적인 죄 때문이 아니다.


  ③ 그러면 인류를 모두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죄 때문이 아니라 한 가지 죄 때문이다. 이 한 가지 죄에서 만 가지 죄가 발생한다. 그러면 그 하나의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짓는 죄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의 죄(The Sin)는 우리가 양심에 의한 또는 사회적인 어떤 기준에 의하여 죄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의 죄는 단순한 사회악, 법률악, 도덕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악의 원인을 의미한다. 이 죄는 사회의 질서 혹은 국가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이전에 벌써 하나님께 범하는 죄다. 고로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이다(시편51:4).”라고 고백했다. 또 누가복음 기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누가복음15:18).”하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범한 종교적인 죄를 고백하였다.

  기독교는 인류를 모두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원리는 여러 가지 결과적인 죄들이 아니라 모든 죄의 원인인 하나의 죄를 말한다. 그러면 그 하나의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구약성경은 이 하나의 죄를 불순종, 반역 또는 불신앙이라고 정의한다. 즉 이 죄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교만’이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일 계명을 범한 우상숭배다. 이런 ‘교만’을 현대 실존철학자 「키르케고르 (Soren Aabye Kierkegaard 1813.5.5~1855.11.11)」은 “절망의 죄” 또는 “죽음에 이르는 죄”라고 말했고 기독교신학은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부른다.


 ④ 그러면 이런 원죄가 온 인류에게 미친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를 단절시켰고, 둘째는 생명을 상실했고, 셋째는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로마서5:12, 시편51:5). 사도 바울은 이런 죄의 힘은 인간을 속박하고 지배하는 힘이 되었고 그 죄의 유전은 누구에게나 미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 사람에 의하여 죄는 세상에 들어왔고 또 죄의 의하여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쳤다(로마서5:12).

  바울은 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단정하고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의를 행하는 자도 없으니 율법 밑에서는 하나님 앞에 한 사람도 의인이 없다(로마서3:9~20)”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타락한 아담의 죄는 인간의 사회성 연대성 정체성 속에 깊이 유전되었다. 고로 기독교 신앙에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평소에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전문 의사나 기계 앞에 설 때는 우리 몸 속 어느 부분엔가 병든 것을 발견할 수 있듯이 아무리 성현 군자라도 하나님의 밝은 눈으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보면 모두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어떤 날 유대나라의 종교가들이 군중을 몰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하나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고발한 일이 있다. “모세의 율법대로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리이까?”하고 물었다. 이때 예수님은 여인을 고발한 사람들에게 “너희 중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있으면 이 여인을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그러나 양심에 가책을 느낀 무리들은 한 사람도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고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이것은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현대인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죄의식의 결여다. 인간이 죄인이면서 자신이 죄인인지를 모르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아침에는 학생들에 교육을 하고 저녁에는 술상 앞에서 술파는 여인의 놀림감이 되는 교육자가 있다면, 만일 국가와 사회를 위한다는 미명 밑에서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진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있다면, 만일 강단에서 외치면서 말과 행동이 위선적인 종교가가 있다면 그들은 모두 죄인이면서 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는 더욱 큰 죄인이다.


  ⑤ 위에서 지적한대로 기독교는 타락의 원리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이점에서 기독교의 인간관은 비관적이다.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려면 먼저 자신이 죄인 됨을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다 하여도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대의 높은 관원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네가 죄에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ⅲ. 구원의 원리에서 본 인간 이해   


  ① 성경은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세 원리에서 인간을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은 창조와 타락의 원리를 기록하였다. 인간은 유일신 여호와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인데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류는 타락하였고 그 결과로 죽음이라는 벌을 받게 되었다. 만일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기독교는 인간의 운명을 암흑  속으로 비극으로 몰고 가는 종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타락한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새 사람이 되는 구원의 진리를 제시한다. 기독교는 죄와 불행의 어둠에서 벗어나 생명과 행복에 이르는 새로운 복음을 가르친다.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다.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빛과 생명과 행복에 이르는 복음을 준다고 선언하셨다. 이기와 거만과 육으로 사는 낡은 인간에 대해서 사랑과 신앙과 영으로 사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


  ② 타락한 인간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은 적어도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은 죄에 대한 자각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인식의 눈을 뜰 때 비로소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죄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죄를 모르고 인생을 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죄를 모르고 역사와 세계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을 제외한 성경 66권은 전부가 죄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다. 창세기 1~2장은 죄 이전의 역사이고 요한계시록 21~22장은 죄 이후의 역사다.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 소극적으로는 “죄는 미혹이 아니다.” “죄는 지식의 부족이나 두뇌의 이상도 아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이냐?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죄는 ‘여럿(Sins)'이 아니라 ‘하나(The Shin)'다. 온갖 죄는 이 하나의 죄에서 파생한다.

  그러면 이 하나의 죄란 어떤 것인가? 구약성경은 이 죄를 ‘반역(反逆)’이라고 정의했다. 이 반역의 죄가 모든 고통과 사망의 원인이다. 시조 아담이 범한 죄가 바로 이것이며 역대 예언자들의 갈망도 하나님을 반역해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이 하나의 죄를 ‘불신(不信)’이라고 정의했다. 이 불신 때문에 인간은 행해서는 안 될 불법(不法 Sin of Commission)을 감행하게 되었고(요한1서 5:17)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선을 행하지 않은 태만의 죄(Sin of Omission)를 범하게 되었다(야고보서 4:17).

  그리고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 11. 13~430. 8. 28)」을 위시해서 「파스칼」,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칼빈」, 「라인홀드 니이버」등 많은 신학자들은 이 하나의 죄를 ‘교만’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신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의 죄로 인하여 타락한 죄인이 되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만 가지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가 바로 이 사실을 잘 설명해준다. 탕자가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먼저 받아가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먼 나라로 갔다. 이것은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된 생활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 얻은 다음 순간부터 다른 지배자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다. 탕자가 찾아간 ‘먼 나라’를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1.11.10~1947.3.12)」은 그의 소설에서 “표준과 이상을 상실한 땅”이라고 해석을 붙였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지배 밑에 있어야할 인간이 그의 품을 떠날 때 생명을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⑵ 구원에 이르는 과정은 의(義)에 대한 자각이다.

  이 말은 의롭다함을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의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요 의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때 죄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죄인이 다시 하나님께로 귀순하여 의롭다 함을 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는 회개요 둘째는 신앙이다. 회개는 소극적인 요소다.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마음껏 방탕생활을 하다가 그는 하늘과 땅에 범죄함을 깨닫고 이에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이것은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의미한다. 즉 인간의 본심에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죄로부터의 전환(Turning from Sin), 죄에 대한 자각과 그 결과로 자기의 그릇된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는 일 이것이 회개이다.

  신앙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탕자는 자기 죄를 깨달은 즉시 일어나 아버지의 집을 향했다. 이것이 신앙이다(Turning to Christ). 신앙은 하나님에게로 귀순하는 것이다. 죄로부터의 전향을 회개라 하고 하나님에게로의 전향을 신앙이라고 한다.

  ‘의’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옛 사람은 죄지은 나요,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다. 범죄한 옛 나를 비어 그리스도에게 명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인을 교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나를 완전히 점령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구원에 이르는 두 번째의 과정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먼저는 자기 본심으로 돌아가는 일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원리는 개인이나 민족에게 모두 적용되는 원리이다.


  ⑶ 구원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의 만남, 이것은 기적이다. 이런 인격적인 만남에서만 인간의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만남은 어떻게 가능할까? 인간 편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성탄) 그리고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사건이다. 이런 기적적인 만남의 가능성을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만 발견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십자가에까지 내려오고 인간의 신앙적인 응답이 십자가에 이를 때 하나님과 죄인의 인격적인 만남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만남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의미하며 새로운 창조를 뜻한다. 고로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만남의 상태, 새로운 창조 즉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은 기독교 인간이해의 세 번째 요소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타락으로 구제 불능의 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의 세 원리로 요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