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목회자와 설교




Ⅰ 들어가는 말


  ⅰ. 부활하신 주님의 분부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수제자 베드로 사이에의 감명 깊은 대화의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년이나 따르던 스승을 잃고 절망과 좌절 속에 서 디베랴 바다로 옛날 어부의 생활로 되돌아간 제자들, 베드로는 옛날 고기 잡던 솜씨로 밤새껏 그물을 바다에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피로와 실망 속에서 맥없이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신 뒤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베드로의 대답에 주님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명하시여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후 숯불 위에다 잡은 생선과 떡을 구워 사랑의 애찬을 베푼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두 번째 소명(召命)을 주셨다.

  처음 베드로를 부르실 때는 갈릴리 해변에서였고 그때 주신 말씀은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하면 너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분명한 ‘선교의 사명’을 주셨는데

  두 번째 베드로를 부르실 때는 디베랴 해변이었고 부르신 목적은 처음 부르실 때와는 달리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

 “내 양을 치라(16절)”

  “내 양을 먹이라(17절)”는 목회의 사명을 주셨다

  이 말씀은 실천신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첫째로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설교요

  둘째로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은 행정이며

  셋째로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교육이다.


 ⅱ. 목회자의 삼대 직무

 

  목회자의 직분은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양떼를 먹이며, 인도하며, 다스리는 일을 한다.

  목회자에게 이 세 가지 과제는 똑같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순위를 매긴다면 그 중에서도 우선순위에 놓아야할 과제는

  양을 먹이는 일 즉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다. 목회자는 강단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양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한다.

  고로 목회자는 모든 일에 앞서 권위 있는 말씀의 전달자가 돼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목회자들은 가장 중요한 것보다 덜 중요한 일에 정력과 시간을 소비할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교회를 부흥시켜야하고 물량적으로 성공을 측정하는 시대에 목회자의 어떤 성취감의 충족과 교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우선적인 일보다, 부차적인 것에 동분서주하는 경향이 짙다.

  

 ⅲ. 지난 이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보면


  처음 1세기에서 5세기까지 약 500년간은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기독교론이 교회와 신학의 논쟁의 초점이었다.

  그 다음 약 500년간은 예수님은 무엇 하러 세상에 오셨으며, 어떤 일을 하고 가셨는가하는 속죄론이 핵심 문제였다.

  종교개혁을 전후한 수 세기 동안은 성례전이 주요 관심사였다.

  그 후 근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지배적인 토픽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목회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응답자의 70%가 설교라고 대답한다.

  

  ⅳ. 본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데 신약성경의 근본정신은 말씀과 성례전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전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가톨릭에서는 성례전을 절대시하는 미사로서의 예배가 주류를 이루어 심미적(審美的)인 의식에 호소하게 되었고

  개신교에서는 말씀을 절대시하는 설교로서의 예배가 주류를 이루어 지성에 호소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그 결과로 가톨릭은 시각을 중요시하고 개신교는 청각을 중요시하게 됐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양쪽 모두 각기 지금까지 경시해 오던 요소들을 새로 보완하려는 예배 갱신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은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개신교 목회자들은 무엇보다도 말씀의 권위 있는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


 

Ⅱ. 오늘의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극복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ⅰ. 먼저 전통적인 강단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혁신 때문이다.


 그것은 말의 상실이다. 한번 말해서 머리에 남지 않는다. 오늘의 세대는 말을 유희로 생각한다. 말의 능력보다 유희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재미있게 웃기고 울리고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설교가 텔레비전 문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설교도 쇼가 되고 예배도 드라마틱해야 한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그래서 근년에 대중 집회를 인도하는 분들이 텔레비전문화를 그대로 모방함으로 메시지 선포의 내용보다 전달 방법에만 신경을 쓴다.


  ⅱ.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이다.


  오늘날 교회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수도 설교를 듣는 대중의 수도 증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기갈을 느낀다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현대식 음향장치, 화려한 장식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설교가 무기력하여 그 유창한 설교가 민중의 가슴에 스며들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설교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외면을 당하고 있다.

  좀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오늘날 많은 신도들이 오히려 설교 때문에 실망을 안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 ‘설교의 위기’, ‘강단이 비어 있다(empty pulpit)'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강단이 비어 있다’는 말은 설교자가 없는 강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교자가 강단을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좌석에 앉아있는 교인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허전함을 느끼고 전혀 말씀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오늘의 강단을 의미한다.


 ⅲ. 그러면 말씀을 들으면서 기갈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설교 중에는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설교란 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인류구속 사건을 말로 선포하는 행위다. 그리고 설교의 근거는 성경말씀이며 성령의 도우심이 설교자나 듣는 청중 앞에서 먼저 역사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의 설교는 다양한 기교는 갖고 있으나 꼭 필요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부족하다는 것이 설교학자들의 지적이다. 「폴사이스(Peter Taylor Forsyth 1848.5.12~1921.11.11)」는 “청중이 요구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복음이다. 그런데 설교가 복음을 죽였다.”고 경고하였다. 또 신부 「머피 오크너(Murphy Oconnor)」는 “오늘날 사회가 점진적으로 비기독교화 되어가는 것은 설교의 실패”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선포 대신에 “나 개인의 의견입니다.” 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현대 설교자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이다. 참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메시지로 시작해서 회개의 초청으로 끝나는 것이 케리그마(kerygma)적 설교다.’

  모든 설교는 복음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죄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


 ⅳ. 그러면 세 번째로 오늘의 설교가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설교자들이 제멋대로 보편성 없이 성경 본문 풀이를 한다. 본문의 맥락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성구를 인용함으로서 성경말씀을 설교의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자기 이야기에 성구를 마음대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 성경의 어떤 본문만을 절대화함으로 성경 전체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전 차원을 선포의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데 인간의 척도에서 한계를 매기고 부분만을 절대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설교의 목적을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는 미명 밑에 대중을 심리적으로 자극하고 웃기고, 울리고, 카타리시스를 경험하게 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설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연극이 될 수는 있다.

  또는 설교는 은혜로운 복음의 선포인데 율법적으로 변질하여 교인들에게 율법적인 복종을 강요하거나 혹은 이른바 적극적인 사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요행을 조장하고 물질적인 축복만을 앞세워 기복신앙에 빠지게 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며 비신학적인 설교가 아닐 수 없다.

  참 설교는 삶 전체를 위한 설교라야 한다. 본래 설교는 전인(全人)의 실존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인데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개혁의 명제를 잘못 해석하여 기독교 진리를 내면화하고 개인주의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하고 실제적인 삶 전체와 유리된 수직적 신앙관을 강조하는데 치우치게 한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설교는 온 인류의 공동 운명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설교라야 한다. 설교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수단이 되어야 함으로 설교의 모든 내용은 이 목적을 지향해야한다.

  예수님은 권위 있는 말씀의 전달자였다. 그가 군중을 향해 입을 열었을 때는 어떤 재담이나 대중의 인기를 노리는 우스개 소리나 자기 자랑을 일삼는 간증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말씀 속에는 권위가 있어 대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오늘의 설교자들 보다 더 논리적이어서 인가? 아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랑이 가득 찬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청중의 가슴에 깊이 와 닫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나와서 그의 메시지를 들은 군중은 모두 치유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로운 사람은 위로를 받았고,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풍요한 영의 양식이 되었고, 온갖 병자들은 고침을 받고 죄지은 인간들은 사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군중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 그의 메시지는 서기관이나 종교가들의 설교와는 달리 권위가 있더라고 입증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권위 있는 메시지는 대중이 고민하는 모든 문제에 적중했기 때문이다. 전달되는 메시지가 듣는 자의 가슴에 고민하는 모든 문제와 만나 불꽃이 튀었기 때문이다. 양궁선수의 화살이 중심에 꽂히면 10점짜리요 금메달이다. 그러나 변두리에 떨어지면 일점짜리에 머문다.


  ⅴ. 그러면 위에서 지적한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인 메시지를 전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종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뿐더러 성실한 신학도의 자세를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깊은 연구에 자신을 투자하는 대신에 현실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성실한 신학도가 되려는 헌신의 정열을 잃고 말았다. 

  또한 현대 설교자들의 기도의 지성소가 사라져가고 있다. 미국 식민지 시대의 청교도들은 적어도 하루에 4시간 정도의 기도하는 생활을 했지만 오늘의 설교자들은 말하는 것을 빼고는 일상생활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점점 사라져간다.

  그래서 현대 설교자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자신의 설 자리를 바로 파악하지 못함으로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순위가 뒤바뀌고 있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이요 양을 먹이는 목자라기보다는 하나의 상담가로 행정가로 선전원으로 자처할 때가 많다.

  오늘의 목사들이 중산층을 대상으로 목회하기 때문에 목회자는 그들의 가치와 편견을 초월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오늘 같은 풍요로운 사회에서 허상, 허세, 사치 등의 죄악에 대해 강하게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명의 노예가 되고 물질의 종이 되고 자본주의의 시녀로 전락한다. 그래서 신앙을 현대문명인들을 유쾌하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이나 신학의 본질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현대 강단에서 죄에 대한 책망,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죽음, 종말, 내세 등에 대한 설교는 청중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기피하는 경향이 점점 짙어간다. 대신에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을 강조하는 설교가 지배적임으로 기독교를 하나의 기복신앙의 종교로 품위가 절하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ⅵ.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 설교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설교자는 말씀 전달의 도구이다. 설교자와 교인들을 즐겁게만 하기위해서 그들의 감정을 사로잡기위해서가 아니라, 교인들로 하여금 구원의 메시지를 듣게 하기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이다. 고로 모든 설교의 주어는 삼위 하나님(성부, 성자, 성신)으로 구성되고 그의 뜻을 밝히고 해석을 해주는 것이 설교의 본질이다. 이럴 때만 메시지의 주인이 뚜렷해지고 설교자는 단순히 말씀 전달의 도구(instrument)의 역을 감당하는 직분임이 분명해진다.

  설교의 정도(正道)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운반하는 일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변자이지 쇼를 하는 연기자가 아니다. 우리 설교자들은 자신의 등장을 목표로 삼을 때도 없지 않다. 이런 결과로 설교자의 말과 지식과 그가 즐겨 쓰는 예화 등으로 설교를 장식하게 된다.

  말씀의 참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설교는 설교의 위기를 몰고 오는 요소가 된다.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한 소식, 기쁜 소식을 지성적으로 명료하게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그 나머지는 성령의 역사에 의존해야한다.

  때로는 예언자로서 세상의 죄를 책망하고 때로는 제사장의 심정으로 고민하는 인간을 사랑으로 감싸는 위로를 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의 정황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모든 설교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서 시작하여 오늘의 문화적 상황으로 나가야한다. 메시지는 성경말씀에서 인출해야하지만 그 메시지의 방향은 세계로 향해야한다. 그러기에 현대 신학자 「바르트(Karl Barth 1886.5.10~1968.12.9)」는 성경적인 설교에 필요한 두 가지 요소로서 “성경책과 일간신문”이라고 주장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Ⅲ. 현대 설교의 세 가지 원리.


  ⅰ. 설교자는 언제나 이 세 가지 원리에 착안해야 한다. 그것은 불변하는 말씀(Kerygma), 변화가 심한 역사적인 상황(Situation), 그리고 이 두 원리를 만나게 하는 전달(Communication)이다.


① 설교자는 언제나 한 손에는 불변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쥐고 있고 또 한 손에는 우리가 처해있는 항상 변하는 시대적 상황을 쥐고 있다.

  케리그마의 천명도 중요한 과제요 변하는 상황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진단도 중요한 과제다. 그리고 ‘말씀과 상황을 만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과제다.

  오늘의 설교자는 오랫동안 배우고 터득한 진리를 이 시대 사람에게 잘 이해하도록 현실감을 지닌 내용, 사상, 언어, 형식, 방법으로 복음의 설명과 해석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의 전달은 독백에 그칠 우려가 많다.

  그러므로 말씀과 상황을 만나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설교는 의례히 두 개의 초점에 맞추어야한다.

  하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하나는 변하는 상황 즉 현실에 초점을 주어야한다.

  신학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는 설교의 초점이다.

  만일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배제하거나 무시하면 그것은 산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영원불변의 전통적인 진리를 선포한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성경주해는 될지 모르나 오늘의 산 메시지는 아니다.

  또 아무리 변하는 역사적 상황을 바로 진단하고 인간의 현실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하여도 현실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어떤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시사 해설은 될지 모르나 권위 있는 메시지는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권위 있는 산 message를 전하려면 영원한 말씀을 끄집어내어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이 되도록 통역을 해주거나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각양의 문제들을 끌고 올라가 영원한 진리 앞에서 해답을 얻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이신 것 같이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하는 중보적인 역할을 그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8.20~1965.10.22)」교수가 상관신학에서 철학적인 물음에 신학적인 해답을 시도한 것을 설교에 잘 적용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1926.4.8.~ )」교수는 자신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정체성(identity)과 연관성(relevance)을 어떻게 균형 있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현대교회와 신학이 당면한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복음적이며 사도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교회의 사명을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현대인의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문화적 상황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해결해보려는 것이 목회의 실천(praxis)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현대교회가 정체성의 문제에만 일방적으로 집착하면 연관성이 약해지고 반면에 연관성의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정체성이 약해진다.

  

  ② 이런 원리에서 생각할 때 어떤 형태의 설교가 현대에 맞는 이상적인 설교일까?

  설교에는 강해설교, 상황설교, 제목설교, 주제설교, 본문설교 등 그 형태가 다양하다.

  설교자에 따라서 선호하는 설교형태가 각각 다르겠지만 그 중에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설교원리에서 생각할 때 현대교회에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설교형태는 『대화적 형태의 설교』라고 믿는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문제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할 설교형태는 대화적 형태라고 생각한다. 설교자와 듣는 교인 사이에는 대화가 요청된다.

  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우리 인생문제에 적절하게 적용시키는 역할이며 사람들이 요청하는 바를 그 말씀이 풀어주고 해답을 주는 것이다. 고로 대화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다.

  대화형태의 설교를 말할 때 두 가지 상관관계를 갖는다. 하나는 단순하게 하는 “강해설교” 또는 “주해설교”이며 또 하나는 상황설교이다. 즉 Text와 Context의 관계성을 가진 두 형태의 연관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설교는 언제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상황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성경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진리가 적용될 인간상황을 찾아 선포하는 내용의 설교를 “주해설교” 또는 “강해설교”라고 한다.

  반대로 인간상황에 적용될 성경말씀을 찾아다가 선포하는 내용의 설교를 상황설교라고 한다. 설교자의 노력은 이 두 사이에 연관성을 갖도록 “대화의 다리”를 놓는데 전력을 기우려야할 것이다. 저는 모든 설교는 이런 범주 안에서 준비되고 선포되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자신의 문제와 관련된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설교학에서는 설교의 재료와 원천, 방법에 따라서 그 형태가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그 중에서도 나는 성경말씀(Kerygma)과 인간상황을 만나게 하는 대화적 설교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유형인 것 같다고 위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모든 설교의 원형은 강해설교다. 근년에 우리나라 강단에서도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경향이다. 그러나 강해설교는 근년에 발견한 새로운 설교형태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설교의 원형(元型)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비롯해서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많은 선지자들, 예수님의 사도들이 실천한 설교방법이며 많은 정통신학자들의 설교 방법이기도하다.

  강해설교는 본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설교 제목도, 대지(大旨)도 본문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느 형태의 설교보다도 성경적이며 안전하다. 그러나 현실에 적응을 바로하지 못하면 성경 주해에 그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상황에 적응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신학과 도덕의 순서를 혼돈할 우려도 없지 않다.

  대화설교가 이상적인 형태가 되려면 어디까지나 신학을 원인으로 하고 도덕을 그 결과로 생각해야 그 순서가 바로 될 것이다. 도덕이 신학에 앞서거나 행위가 신앙에 앞서면 그것은 성경적이 못된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계명을 선포하실 때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Ⅳ. 설교와 교회 성장(한국교회를 중심으로)


  ⅰ. 설교 유형에 따라서 교회는 그 방향으로 성장한다.


  한국교회의 설교 유형은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첫 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것이다.

  이런 유형의 설교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교회 강단의 주류(主流)를 형성하고 있다. 전통적인 설교는 매우 단순하고 통속적이며 율법적인 데가 많다.


  ② 두 번째 유형은 사회 윤리적인 면에 강조점을 둔 진보적인 스타일의 설교다.


  ③ 세 번째 유형은 근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색다른 형태인데 그것은 이른바 열광적인 신비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설교다.

  이런 형태의 설교는 방언, 신유, 계시, 재림 등의 은사 또는 기복을 강조하는 설교다.

  이런 설교의 특색은 부정적이다. 전통적인 메시지와 사회윤리를 강조하는 설교에 대해서 부정적일 뿐 아니라 변천하는 상황도 외면하고 따라서 교회의 기존 질서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ⅱ. 그러면 이런 세 가지 유형의 설교가 한국교회 성장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가?


  ① 첫 번째 유형의 설교는 사상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교회성장을 초래했다.

  지난날 전통적인 설교가 교회성장에 크게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적으로 보수와 진보 양극화 현상을 가져왔다.

  전통적인 설교는 항상 변화에 대한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사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소홀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의식을 약화시켰다.


  ② 두 번째 유형의 ‘윤리적 설교’는 ‘모이고 흩어지는 선교의 균형을 잃은 교회성장을 하게 했다.

  사회윤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설교는 우선 사회를 구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개인 구원을 경시하고 사회 속에서의 신앙의 행동화만을 강조함으로써 흩어지는 교회 즉 사회참여나 역사의식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모이는 교회의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③ 세 번째 유형의 교회는 질과 양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 교회성장을 가져왔다.

  이런 유형의 설교는 대체로 질을 무시하고 양적성장만을 교회 발전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복신앙, 허영심, 영웅심을 조장하고 물리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측면이 많다. 이렇게 질을 외면한 양적론은 오늘과 같은 신학교의 난립, 선교단체의 난립, 무질서한 집회 등으로 기독교의 품위를 저하시켜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설교를 하느냐에 따라서 균형 있는 교회 성장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Ⅴ. 목회자와 설교


  ⅰ. 설교는 목회자의 여러 가지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직무인 동시에 가장 어려운 과제다.


  목회자에게는 누구나 예외 없이 한 주간 동안에 꼭 한번은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고 가벼워질 때가 있다. 주일 설교를 끝내고 단에서 내려올 때 어깨가 짐을 벗은 듯 가벼워진다. 그러나 하루 밤을 지내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다음 주일에 전할 메시지 준비 때문이다.

  기독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둔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말씀으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의 선포가 이어지고 있다.


  ⅱ. 세계 어느 나라 교회를 가 보아도 한국교회처럼 설교에 의존하는 예배가 빈번한 교회는 찾아보기 드물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설교자가 감당해야 할 설교의 횟수와 그 양은 한계를 넘어선 느낌이다. 한 주간을 두고 보면 주일 낮 설교를 비롯해서 주일 밤, 수요일 밤, 매일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그리고 구역예배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설교자는 설교의 홍수 속에 휘말리고 있다.

  최소한 주일 낮과 밤, 수요일 밤만을 계산한다 해도 일년에 156회의 설교를 해야 한다. 10년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면 1,560편의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 역사에 있어서 아무리 위대한 설교가라할지라도 수 천 편의 설교를 남겼다는 기록은 없다.


  ⅲ. 설교에 대한 사도의 반응

 

  이렇게 수없이 많은 양의 설교를 거듭하다보면 기계적인 습관이 생기고 반복이 거듭되는 동안 강단은 생명력을 잃게 되고 설교는 침체의 벼랑을 향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를 듣는 대중은 설교자의 깊은 영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준비된 신선한 양식을 먹기를 원한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매일 매일 새로운 만나를 먹었듯이 새것을 듣기 원한다. 뿐만 아니라 듣는 대중은 계층이 하도 다양하여 입맛이 각각 다르다.

  고로 목사에게 설교는 확실히 무거운 짐이다. 다른 일은 상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설교만은 깊은 영적 체험과 확실한 신념과 확고한 사상에서 우러나와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뿐만 아니라 듣는 대중이 하도 다양하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ⅳ. 설교자는 마치 요리사와도 같다.


  요리사의 자격은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구미에 맞게 영양가가 충분하여 건강에 유익하고 사람들이 계속 즐겨하는 음식을 만드는 재능이 있어야한다.

  설교자는 성경이라고 하는 단일 텍스트를 소재로 하여 다양한 영의 양식을 만드는 요리사와도 같다.

  어떤 계층의 사람에게나 구미가 나도록 만들어야하고 언제 들어도 지루하지 않는 음식, 항상 듣고 싶어 하는 영의 양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되어야 한다.

  듣는 자의 식성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의지적인 것을, 어떤 사람은 정서적인 것을, 어떤 사람은 지적인 설교를 좋아한다. 오늘의 교회가 병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시설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의식이 장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식성을 가진 교인들에게 영적인 양식이 고루고루 공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ⅴ. 근년에 와서 많은 신도들이 교회 밖에서 이상한 신앙운동에 흥미를 느끼고 전통적인 기성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많아졌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기성교회의 강단이 풍요한 영의 양식을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강단의 메시지가 건전한 교회는 예외 없이 계속 성장한다.

  어느 목사가 배우와 나눈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목사는 「데이비드 개릭(David Garrick 1717.2.19 - 1779.1.20)」이라는 배우에게 물었다.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는 목사인 나는 한주에 겨우 한번 교회당에 사람을 채우는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공적인 소설을 가지고 매일매일 극장을 관객으로 꽉꽉 채울 수 있는 그 비결이 무엇이요?” 이 물음에 대한 배우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당신은 진리를 가지고도 소설처럼 말하고 나는 소설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표현하기 때문이요.”

  설교자는 자기가 만든 음식이 밥인지, 죽인지, 김치찌개인지, 버터나 치즈인지, 빌려온 음식인지, 자기 솜씨로 만든 것인지, 자기만이 좋아하는 편식은 아닌지, 교인들이 소화할 수 없는 음식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여러해 전 어느 주일날 제가 시무하던 모 교회에서 낮 예배를 마치고 교우 한 분을 만나려고 예배당 문을 나섰다.

  그때 두 할머니 집사님들이 내 앞을 걸어가면서 무엇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들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이 좀 젊은 할머니가 말을 꺼냈다. “형님은 우리 목사님의 설교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나는 주일 마다 예배시간 30분전에 교회에 와서 제일 앞자리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우려도 그 내용을 하나도 모르겠으니 헛되이 교회에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 할머니 집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전하는 메시지가 이 노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구나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했다. 나는 초조하게 또 한 노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우, 우리 목사님이 설교를 잘못해서 당신이나 내가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식해서 그런 거요. 우리 목사님의 설교가 인생을 다 산 우리 같은 노인들을 상대로 해서야 되겠소? 다음 세대의 주인이 될 우리의 자손들을 위하는 것이라야 되지 않겠소. 그러니 당신이나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다 못 알아듣는다 해도 진실하게 주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살면 천당에 갈 수 있소.”

  나는 쥐구멍을 찾듯이 노인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이 있은 지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설교나 강연을 준비할 때마다, 또 단에서 그것을 전할 때마다 이 두 노인 집사님들의 대화를 회상하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곤 한다.

  목회자의 설교는 어느 계층 사람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모든 사람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신령한 요리 기술이 아쉽기만 하다.


 

결론

 

  목사는 말씀의 전달자이다. 고로 모든 정력을 설교에 집중시켜야한다. 성령의 은사만 믿고 덤비는 준비 없는 즉흥설교는 남의 심령을 살찌게 할 수가 없다. 오늘까지 사람들에게 감화를 많이 준 설교는 재주나 기량에 의한 것보다 온 정력을 쏟아 바친 준비된 설교이다. 그러므로 「제럴드 케네디(Gerald Kennedy 」는 적어도 하루에 4시간을 설교준비에 사용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도 기초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목사는 설교와 함께 자란다.

  목사 자신을 바르게 비판하는 척도는 설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