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 유형 분석과 개선 방향 모색




Ⅰ. 들어가는 말.


  설교는 교회가 지향하는 모든 것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므로 거듭 강조할만하다.


  ⅰ. 예배와 설교


  예배의 측면에서 볼 때 예배의 목표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있고, 설교자는 그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에 이르게 하며 말씀을 통해서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제시함으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단순한 연설이 아니라 사건이요, 이 때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선포된다.


  ⅱ. 교회 성장과 설교


  교회 성장의 측면에서도 설교의 비중은 매우 크다. 한국교회는 물론 세계교회의 공통점은 성장하는 교회마다 그 뒤에는 훌륭한 설교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ⅲ. 선교와 설교


  선교의 측면에서도 설교는 절대적이다. 설교의 임무는 말씀의 선포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는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 즉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서 비록 사람이 전하기는 하지만 그 말씀은 단순한 인간의 발언 이상의 것 즉 설교 속에서 성육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이루어진다.


  한국교회는 선교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1960년대에 연평균 10만 명씩 증가하고 70년대에는 연 평균 20만 명씩 증가하다가 1978년부터는 연 평균 100만 명씩 성장하는 폭팔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이런 성장의 주 요인은 설교에 있다. 하나님의 능력있는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서는 교회성장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현장에서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은 설교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그것은 선포되어야 할 말씀에 적중하지 못하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한 것이 큰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돼야 할 설교가 사람의 말로 채워지고 신학에 바탕을 두어야할 설교가 다분히 비신학적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이것은 설교신학 정립이 얼마나 부실했나를 짐작케 한다.


 

Ⅱ. 한국강단 설교의 유형분석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시작한지 1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과거에도 현재도 많은 설교들이 행해지고 있다. 이 많은 설교들은 대체 무엇을,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설교는 다양하다. 한국교회가 지난 120년 동안 강단에서 외친 설교를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시사적인 유형으로서 정치 경제 등 사회적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응답하는 형식을 취했다.

  둘째는 예화적인 유형으로서 본문의 진리를 직접 전하기보다는 많은 예화를 통하여 전함으로 청중의 흥미를 유발하고 이해를 촉진시키는 유형이다.

  세 번째는 명제적(命題的) 유형으로서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고 성경구절과 철학사상을 인용하여 그것을 해설해가는 형식을 취한다.

  네 번째는 은유적인 유형으로서 선택된 본문을 은유적(allegorical)으로 해석하여 드러난 진리보다는 암시된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형식 즉 영해 같은 것이다.

  다섯 번째로 근년에 한국교회 강단에서도 관심을 높이고 있는 것은 강해설교다.


  ⅰ. 먼저 “시사적(時事的)인 유형”의 설교부터 분석해 보기로 한다.


  이 설교의 유형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성경말씀은 무엇을 제시하는가를 해석하는 행위이다. 설교는 이와 같이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시사성을 띠게 된다.

  이와 같은 설교의 특성은 신구약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구역성경의 설교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자들은 결코 무시간적 무공간적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예언자의 본질은 “명쾌하고 신적 권위로 현재를 향하여 외치며 역사적 계기를 동시대의 현실로 변형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당대의 문제를 즉 시사적인 문제들을 그들의 설교의 주요한 주제로 삼았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이 특색은 계속됐다. 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설교자요 모든 설교자의 모범이 되신 예수님도 자신의 설교에 시사적 문제를 도입한 일이 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건이 그것이다.

  최초의 케리그마 선포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설교도 사실은 시사적인 문제 즉 최근에 일어났던 “예수의 처형 문제”가 주제를 이루고 있다(사도행전2:36).

  이와 같은 성서적 전통을 따라 기독교의 설교는 항상 시사적인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설교는 사건을 낳고 사건은 설교에 영향을 주어 설교가 국가의 발전과 생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던 것이다.

  민족의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이 땅에 발을 디뎠던 기독교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강한 시사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목사들은 최선봉에서서 민중을 이끌어 가는 선각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목사들만이 세계정세에 밝았고, 교회만이 가장 광범위한 조직을 갖고 있었다. 강단에서의 설교는 민족의 영적기갈을 채워주었을 뿐 아니라 민족의 구원과 자각을 일깨워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강단을 자극했던 시사적 동기들은 민족문제로부터 개인의 윤리문제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전반에 걸쳐 망라되는 다양한 것들이다.

  특히 3.1운동 이후 많은 시사적 문제들이 설교의 동기가 되었다.

  민족구원의 해방이

  민족의 개혁방안의 제시가

  국제 정세의 분석이

  교육의 중요성 강조가

  새로운 기독교 윤리의 제시가

  일제의 압정이 종말을 고하고, 민족이 해방된 이후에도 좌우익의 투쟁, 6.25전쟁, 자유당 정권의 부패 등의 어두운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는 양극성을 띠게 되었다. 먼저는 시사적 유형의 설교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해방 후 닥쳐온 엄청난 혼란 속에서 교회는 결코 세상에 대해서 초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들려오는 사생논쟁과 그에 따르는 폭력, 테러, 위정자들의 부패, 그로인한 국민의 불만 그리고 물밀 듯이 밀려오는 미국문화와 거기 적응하기위한 급격한 사회변화 등은 설교자들로 하여금 시사문제를 설교의 주제로 삼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8.15가 가져다준 조국의 광복과 해방은 한국교회 강단에 “해방과 자유”라는 시사적 동기를 부여하여 많은 설교가 “모든 새로운 삶의 출발”을 해방과 자유에 맞추기도 하였고 “해방과 자유”를 소재로 하기도 하였고 “해방 이후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으며 어떤 설교는 “해방과 자유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를 외치기도 했다.

  6.25 전쟁이 가져다준 동족상잔의 참극은 한국강단에 “민족과 회개”라는 시사적 동기를 강하게 부여하여 ‘회개’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런 시사성 설교와는 반대로 ‘영적각성운동’을 주장하고 나선 설교도 있었다.

  5.16혁명사건 이후 한국교회 강단 설교의 양극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집중적으로 추진된 ‘경제개발정책’은 고도의 경제성장이라는 양지와 빈부격차의 확대라는 음지를 파생시켰다.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산업화와 인구 도시집중화 현상에 힘입어 급격한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는 그 성장의 과정에서 두 개의 극단적인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하나는 다양한 복음주의 교회들은 산업화의 후유증으로 새로운 정신적인 불안에 빠져있는 개인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 선포에 주력한 반면 또 하나의 소수의 자유주의 교회들은 점점 독재화되어가는 정권에 저항하고 산업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소외계층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하여 구조의 개혁을 촉구하는 이른바 사회구원의 메시지를 외치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보아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시사적 동기가 다소 약화되어 왔으나 일부 소수의 강단에서는 더욱 강화되어왔고 마침내는 설교가 정치강연 내지는 시국강연과 방불한 성격을 띠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지닌 한국강단의 “시사적 유형”의 설교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① 시사적 유형의 설교는 성경의 본문 전달이 미흡하다. 이런 유형의 설교는 성경 본문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본문에서 나오기 보다는 대부분이 시대상황이나 시사적인 문제에서 나옴으로 설교자는 본문의 사상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그 시대의 사상을 말하게 되었다.

  ② 이런 유형의 설교는 성경 본문을 무리하게 해석하게 된다. 시사적 유형의 설교는 주 목적이 시사적인 문제를 취급하는데 있음으로 본문의 뜻에 가까운데서 시사적인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본문을 끌어다 맞추게 된다. 이때 설교자는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미 강한 전제, 나아가서는 편견을 갖게 됨으로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

  ③ 시사적 유형의 설교는 성경을 편벽되이 전하게 된다. 성경은 항상 두 세계를 말하고 있다. 즉 이 세상(this age)과 오는 세상(coming age)이다. 시사적 동기에 의한 설교는 이 둘 중 이 세상에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 정작 중요한 오는 세상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이것은 성경의 전체성을 무너뜨려 성경을 편벽되이 보게 된다.

  위에서 지적한 몇 가지 문제점은 설교가 시사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설교의 동기가 시사적인 문제라는 데서 오는 것이다. 설교는 그 시대의  상황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언어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건, 즉 시사문제를 언급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과정 중의 하나이어야지 그것 자체가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ⅱ. “예화적 유형의 설교”


  「필립 브룩스(Phillip Brooks 1835~1893)」는 설교를 “사람에 의해서 사람에게 향하는 진리의 전달”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설교는 단순히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데 주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진리는 이미 말해져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말씀하신 그 말씀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달되는 일만이 남아있다. 「브룩스」의 말대로 이것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설교가 이와 같이 전달을 목적으로 할 때 그 효과적인 달성을 위해서는 설교자와 청중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져야한다. 일방적인 선언이나 선포만으로는 부족하다. 커뮤니케이션(전달)을 원활하게하기위해서 필요한 것이 예화다. 예화(illustration)는 설명, 해명의 뜻을 가진 말로서 「블랙우드」는 이 말이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로 “창으로 들어오는 광선”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했다.

  예화란 이와 같이 청중의 마음에 빛을 던져주어 희미한 것을 알기 쉽게 하는 것임으로 진리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매우 필요하다. 고로 위대한 설교자인 「스펄 존」은 예화를 높이 평가하면서 “예화 없는 설교는 창 없는 집과 같다.”고 했다.

  설교에 예화를 사용한 예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의 설교에서다. 예수님의 설교의 많은 부분에 예화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설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이다(마태복음13장).

  설교에 있어서 예화의 사용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 바울 그리고 오늘날까지 설교의 귀감으로 불린 스데반의 설교는 구약시대의 역사를 요약하여 사용함으로서 설교의 대부분을 예화로 채우고 있다(사도행전7:2~50).

  한국강단의 설교는 처음부터 예화가 많이 사용되었다. 초기 한국교회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했던 선교사들은 당시의 교회배경을 따라 제목설교를 주로했다. 이런 경향의 설교는 많은 예화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예화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예화 사용을 권장했다.

  특히 평양신학교의 교지인 ‘신학지남’에서는 “강도(講道)에 인용할만한 비유”라는 난을 설정하여 예화 사용을 권장하도록 했다. 한국교회 강단은 미국교회의 영향으로 이와 같이 처음부터 설교에 예화를 많이 사용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강단 설교에 예화를 애용하는 경향은 해방 이후 더욱 증대되었다. 해방 이전에는 모든 사람의 관심이 민족이 당하는 압박과 고난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해방이후에는 이와 같은 통일된 민족적 교회적 이슈가 약화되고 다양한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게 된 탓이었다.

  근자에 와서 더 많은 예화집이 등장하는 것은 청중들과 공감대 형성을 위하여 강단에서 예화 사용의 빈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화의 많은 사용은 필연적으로 설교의 예화 의존도를 높여 예화적 유형의 설교가 많아지게 되었다. 물론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요하고도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예화적 설교 유형에는 문제점도 많이 있다.

  ① 예화적 유형의 설교는 본문이 아닌 교훈적인 이야기의 전달로 그칠 위험이 크다. 예화란 어디까지나 본문의 진리를 설명해주기 위한 삽화(illustration)에 불과하다. 그런 삽화가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삽화가 설교의 주된 내용이 되고 성경 본문은 설명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와 같은 예화적 유형의 설교는 예화의 교훈이 본문의 진리를 가릴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② 예화적 유형의 설교는 영적인 진리를 일상적인 교훈으로 바꾸어버릴 우려도 있다.

  설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임으로 그 내용이 영적이어야 한다. 비록 인간사를 말할지라도 그 안에는 영적 진리가 내포되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예화는 대부분이 지상적이요 인간적인 이야기임으로 여기서 출발한 설교는 자칫 영적이고 신적인 진리로 발전시키지 못한 채 일상적인 교훈으로 끝내버릴 우려도 없지 않다.

  ③ 예화적인 유형의 설교는 본문을 징검다리로 한 이야기의 나열이 될 위험성이 있다.

  설교를 발전시키는 방법 중에 예화에 의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본론의 각 부분에 하나씩 특징 있는 예화를 삽입하여 그것을 발전의 모티브(motive)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주의하지 않으면 오직 흥미 있는 이야기의 연속이 될 우려가 있다.

  ④ 예화는 진리를 설명해 주고 인상 깊게 해주고 말에 윤기와 광채를 주며 마음에 휴식을 준다. 그러므로 예화의 사용은 설교에 있어서 필요하고도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예화를 설교의 동기로 삼는다거나 지나치게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예화는 결코 성경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못하면 성경진리를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ⅲ. “명제적(주제) 유형의 설교”


  설교를 착상하고 구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 명제적(命題的) 유형의 설교로서 이것은 하나의 주제와 명제에서 설교가 착상되고 구성되는 방법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설교를 ‘주제(主題)설교’ 혹은 ‘제목(題目)설교’라고 한다.

  주제설교는 설교의 전반적인 전개를 하나의 주제로 집약시키는 것으로서 이 설교는 어느 특정한 본문과는 분석적 관계가 없는 주제나 관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주제설교는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① 주제설교는 매우 광범위한 것을 다룰 수 있다. 주제설교는 ‘개방성’이라는 원칙 하에 자유롭게 설교자로 하여금 본문의 제약을 적게 받도록 해준다.

  ② 주제설교는 단일성(單一性) 즉 통일성을 갖기 쉽다. 주제설교는 그 동기나 발전을 하나의 주제 혹은 명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③ 주제설교는 설교자의 분석능력과 창작능력을 개발시켜 문학적 창조력을 발휘하게 된다.

  ④ 주제설교는 설교의 목표를 정확하게 제시해줄 수 있으며 그러한 목표에다 초점을 맞추고 전개해 나가야한다.

  ⑤ 주제설교는 그 자료를 매일 신문이나 베스트셀러 잡지 등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주제 선택의 큰 어려움이 없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 주제설교는 이것이 지니는 강한 시사성과 공감대 때문에 청중에게 매우 인기 있는 설교형태이며 설교자에게는 준비하기가 쉽고 자유롭기 때문에 매우 애용되고 있다.

  명제유형의 설교 역시 성경에 많이 나타난다. 특히 예수님은 이 방법을 많이 애용하셨다.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한 설교나 마태복음 23장의 ‘화있을진저’라는 제목의 설교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바울 사도 역시 이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사도행전17장22~31절에 기록된 아덴에서 행한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주제의 설교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사실 바울서신 특히 고린도교회에 보낸 전. 후서에 보면 매 장이 다 고린도교회의 문제 하나하나를 주제로 삼는 주제설교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교회 강단은 그 초기부터 명제적 유형의 설교가 지배적이었다. 초기 한국강단을 장악했던 선교사들은 1900년도 초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주제설교의 방법을 그대로 도입하여 그들의 주된 설교형태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렇게 제목설교에 치중했던 까닭은 아직 성서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조직신학적인 접근만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주제설교는 당시 한국강단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설교의 분석을 보면 초창기(1900~1920) 한국강단의 설교 중 주제설교가 71.7%로 나타났다. 초기 한국교회 강단에 이와 같은 명제적 유형의 설교가 많았던 것은 선교사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컸다.

  설교의 형태는 어쩌면 그 설교가 행해지는 시대적인 요구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엄요섭」은 그의 ‘한국교회 설교의 시대적 형태론’에서 당시 설교의 내용상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를 가르침에 있어서 유교윤리를 기독교적으로 설명한 설교이다. 즉 기독교가 조상숭배의 제사를 반대하면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말씀을 무엇보다 강조했다는 것이다.

  둘째 일제시대에 식민지 정책에 대한 항거 또는 독립사상의 고취 그리고 민족의 개화사상을 강조하는 설교가 많았다.

  당시의 설교집에는 검열관계로 민족사상 설교가 적었으나 실제로 교회에서의 설교는 민족적인 설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출애굽의 이스라엘의 민족해방 사상을 우리 민족의 해방목표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초대 한국교회 설교유형은 순수한 복음전파의 설교라는 것이다. 초대교회인 만큼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설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엄요섭」의 주장을 분석해보면 당시의 설교 내용은 윤리적 명제, 시사적 명제, 교회적 명제들에 의해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청중들은 이러한 명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해답을 듣기 원했으므로 설교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설교 동기를 이러한 명제들에서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영향이 형태적인 것이었다면 시대적인 배경의 영향은 내용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제적 유형의 설교는 해방 후에도 여전히 한국강단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그 지배력이 더욱 증가되었다. 그 이유는 사회적 상황변화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 각 정파간의 암투, 밀려들어오는 서구문명의 침투 등 무엇보다도 6.25전쟁을 말할 수 있다.

  교회 안에도 혼란은 컸다. 신사참배 거부파의 출옥과 함께 새로운 충돌이 생겼고, 「김재준」교수의 ‘새로운 신학 방법론’은 보수주의와의 대립을 초래하여 교회분열의 상처까지 입게 되었다.

  4.19, 5.16 등의 격변을 거치면서 70년대에 들어선 한국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강단의 제목설교의 편중현상은 여전했다. 이때에 한국사회와 교회가 지니는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나타냈다. 하나는 성장우선주의다. 이 시기의 사회는 경제성장, 교회는 교세확장의 기치를 내걸고 성장에 모든 가치를 집중시켰다. 또 하나는 실용주의다. 성장을 위해서는 원리와 원칙에만 매어달릴 수 없기 때문에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이 두 가지 특징이 이 시기에 한국강단의 설교유형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성장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명제였다. 이 명제는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의 중심사역인 설교에 더욱 큰 영향을 끼쳐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는 그 강단에서부터 ‘성장’이라는 명제에 의해서 구성된 설교가 외쳐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고찰해본 바와 같이 명제적 유형의 설교가 각 시기에 민족의 암흑가에 밝은 빛을 던져주었고 민족의 수난기에 불굴의 용기와 소망을 심어주었고, 민족의 발전기에 비전을 제시해 주었고, 방황하고 굶주린 영혼에게 그 때마다 필요한 말씀으로 먹여주고 인도해주는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명제적 유형의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에 부정적 영향을 준 것도 부정 못할 사실이다.

 ⑥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보다 인간의 사상을 전하기 쉬운 약점이 있다.

  설교가 선택된 주제에 의해서 전개됨으로 성경의 본문의 의미보다는 주제에 대한 설교자의 견해를 더 피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본문에서 주제가 선택되었을 때는 그대도 좀 나은 편이지만 주제가 먼저 선택되고 거기에 맞추어 본문이 선택되는 경우에는 아예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사상을 전달해주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사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한다.

 ⑦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  

  설교가 지나치게 주제에 얽매일 때 성경을 사용한다 해도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기 보다는 주제에 꿰어 맞추기 위하여 상호관련성이 없는 말씀을 종합함으로 말씀의 본래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해석을 하게 된다.

  성경의 전체성이 결여되어 균형 잃은 설교가 되기 쉽다.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본문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주어진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성경의 일부분을 확대시키거나 반대로 도외시하여 메시지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 수 없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명제적 유형의 설교가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이 과거에는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으나 앞으로는 세계교회 중에서도 막중한 책임을 수행해야할 한국교회의 발전과 성숙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만 내릴 수는 없다.


  ⅳ. “은유적 유형의 설교


  은유적 설교의 유형은 성경의 은유적 해석에 기초한 것이다. 은유적 해석은 가장 초기의 성서이해 방법 중의 하나로서 성경의 한 구절에서 명백하게 표현되지 않고 은유적으로 암시된 진리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이 ‘은유적 유형의 설교’는 신비주의적 종말론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해방 후 서광이 비치는가 싶던 민족의 현실이 6.25라는 전대미문의 참화로 극도의 암울한 상태에 빠져들자 포로기의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한국교회는 고통스런  이 세상으로부터 안락한 피안(彼岸)에로의 탈출 수단으로 신비주의와 종말론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신비주의와 종말론적 경향이 강하게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영해(靈解 )’라고 부르는 은유적 유형의 설교가 한국강단 특히 부흥회에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은유적 유형의 설교는 여러 가지 위험성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① 강단설교를 묵상적 설교 스타일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

  ② 시적 상상적 요소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설교를 피상적으로 비실천적인 형태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③ 진리를 고양시키기보다는 환상을 설교할 위험이 있다.

  ④ 단순한 호기심이나 고상한 것을 좇는 마음에 호소하는 위험이 있다.

  ⑤ 그 자신의 사고를 하나님의 사고로 착각할 위험이 있다.

  결론적으로 ‘은유적 유형의 설교’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단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제한된 필요성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미 그 의미가 드러난 말씀을 보충하여 설명하고, 분명히 하는데 에만 사용한다면 유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유적 유형의 설교’를 하려는 설교자는 정통적인 성경이해를 통하여 은유적 해석 방법을 극복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ⅴ. “강해 유형의 설교”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 강단의 설교 유형을 여러 가지로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강해설교의 유형’을 분석해 보고자한다. 근년에 와서 우리나라 강단에서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강해설교는 근년에 새로 발견된 새로운 설교형태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설교의 원형(元型)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비롯해서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많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천한 설교방법이며 많은 정통신학자들의 설교방법이기도하다.

  강해설교는 본문으로부터 설교가 시작하여 설교제목도, 대지도 본문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느 유형의 설교보다도 성경적이며 안전하다. 「테니스 레인」은 강해설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강해설교란 성경의 특정한 본문 구절의 뜻을 그 회중의 필요와 환경에 맞추어 설명함으로서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깨닫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강두만」박사는 강해설교의 필수 요소들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는 본문(text)

  둘째는 해석(interpretation)

  셋째는 조직(organization)

  넷째는 적용(application)

  좀더 구체적으로 강해설교의 특성을 살펴본다면


 ① 주어진 본문

  강해설교란 두말할 것 없이 성경본문을 설명하는 것이 첫째 과업이다. 강해설교에 있어서 성경본문은 가장 으뜸이고 중요한 요소이다. 이때에 본문은 주어진 것에 국한되어야한다. 다른 성경구절들은 단지 주어진 본문과 직접적으로 연관성이 있어 그 본문을 설명해주고 지지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정당한 해석

  앞에서 고찰한 정의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강해설교란 설교자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라야 한다.

  본문의 사상이란 곧 저자의 의미를 말한다. 본문에 나타나있는 저자의 뜻을 읽어내는 작업은 해석행위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강해설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에 대한 정당한 해석이 선행되어야한다.


  ③ 통일을 이루는 조직

  본문에서 아무리 많은 의미를 해석해냈다 할지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강해설교가 되지 못한다. 단순히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해석과는 달리 강해는 전달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비논리적인 것보다는 논리적인 것을, 비조직적인 것보다는 조직적인 것을, 무질서한 것보다는 질서정연한 것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전달, 즉 청중의 효과적인 수용을 위해서는 해석된 내용을 통일성 있게 논리적으로 조직해야한다. 나열식 주해가 강해설교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④ 현대적 적용

  강해설교를 정의한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 중의 하나가 본문의 현대적 적용이다. 성경말씀과 청중이 살고 있는 현실사이에는 엄청난 간격(gab)이 있다.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 그러므로 본문 자체의 의미 전달 만으로는 청중의 삶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러한 전달은 자칫하면 청중의 삶과 유리된 고도의 종교적 지식이나 도덕적 교훈으로 끝내버리게 된다.

  성경말씀은 결코 무시간적 진리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개인과 공동체에 주어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오늘날의 청중에게도 구체적인 의미를 주어야한다. 그럴 때에만 그 본문은 오늘날의 청중들에게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러한 의미의 전이(轉移) 즉 적용은 강해자에 의해서 수행되어야한다. 강해자는 이와 같이 상이한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교량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위의 모든 정의와 특성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강해설교란 정당하게 해석된 본문을 청중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강해설교가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강해설교는 청중의 주위를 성경으로 향하게 해주는 것이다. 강해설교는 회중에게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필요에 대한 긍정적인 권위와 방편이라는 사실을 제시해준다.


 

Ⅲ. 설교의 중요성과 개선 방향


 ⅰ. 기독교의 구원운동은 반드시 설교운동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설교 없이 구원 없다”는 표현은 옳은 것이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로마서10:17).”고 하신 말씀과 상통한다.

  설교는 설교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는 인간의 삶 전체에 의미를 주고, 변혁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복음적 설교가 강조되어야할 것이다.

  초대교회가 성립되어가는 과정을 보면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선포운동을 통해서 이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곧 베드로 사도의 설교운동으로 나타난 것처럼 설교운동을 통해서 회개운동이 나타났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초대교회가 구제문제로 어려움을 당할 때 12사도는 신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하니라(사도행전6:2).”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환기시켰고 또 교회성장의 일차적인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 바로 선포되었는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사도행전6:7).


  ⅱ.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 설교는 이대로 좋은가? 라는 문제 제기와 함께 뼈아픈 반성을 통해 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


  설교가 회중을 향한 것일진대 듣는 회중의 필요를 충족시켜야함은 물론이고 영혼의 필요냐 육체의 필요냐에 어느 한편으로 편중된 설교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므로 설교는 영육의 전인구원을 목적으로 개선되어야할 것이다.

  설교야말로 오늘의 한국교회의 걸어가는 모습이며 교역자의 의식구조이며 신학이며 또한 윤리이다. 한국교회 강단 사역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교회운동이요 모습이다. 강단 사역이 쇠퇴하면 교회도 쇠퇴하고 설교가 위기를 격게되면 교회가 위기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위의 두 가지 위기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위기이가.


  ⅲ. 위에서 한국교회의 설교유형을 시사적으로, 명제적으로, 은유적으로, 예화적으로, 강해적으로 여러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그 장단점을 설명했다.


  이런 여러 가지 유형의 설교들은 그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이미 지적했듯이 다만 인간의 의도성과 편벽된 자기주장, 상황에 맞추려는 무리한 해석이 성경을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ⅳ. 그러므로 현대설교의 개선 방향의 초점을 어디에다 두어야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진정한 가늠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성례전에 두었다. 즉 진정한 교회란 정당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이 두 가지 요소 중에 개신교회는 하나님 말씀선포에 더욱 치중해왔다. 그러므로 설교학자 「다간(E.C. Dargan)」은 “설교역사는 교회역사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그 초기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교회 간다”는 말은 곧 “설교 들으러 간다”는 말과 동일시할 정도로 한국교회는 설교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에서 설교의 비중과 영향력을 볼 때 한국교회의 생명력은 설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은 곧 한국교회 강단에서 정당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포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