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영성목회와 예배갱신

(복음주의적 접근)



 


I. 들어가는 말


   엄두섭은 그의 저서 「영성의 새벽」 에서 “오늘날 유럽교회는 죽었고 미국교회는 세속화되어 퇴조하고 있고 한국교회는 무질서하고 건전치 못한 상태에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마치 고무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 내용 없는 팽창주의, 쓰레기 매립지에서 자라난 해바라기 같이 머리만 크고 뿌리는 흔들리고 있다. 전 세계교회는 속화되고 불순한 성직자들의 횡포가 심하다. 이제는 단순한 목회만 하지 말고 영성 회복 즉 영맥(靈脈)을 이을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엄두섭, ‘영성의 새벽’, 은성출판사, 1987. p. 247-8).

 물론 이러한 그의 시각을 사실의 전부인 것으로 인정하기에는 많은 위험성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이러한 작금의 현실을 함께 공감하는 바도 없지는 않다.

  한국교회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다른 나라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성장을 했다. 특히 8·15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와 공산주의의 박해기를 벗어나 60 연대에서 80 년대 사이에는 선교사상 유례를 깨고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오늘은 4만 교회 1,200만 신도 그리고 5,000여명의 선교사를 외국에 파견하게 되였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질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여러 가지 병리 현상을 동시적으로 안고 있다. 우리는 모두 지난날의 경이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이천 년대에 들어서려는 한국교회가 반드시 제2의 부흥기를 맞아 세계적인 교회로 미래 사회를 주도하는 교회로 도약 해 보려는 것이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이 우리 모두의 기대이며 희망이긴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런 꿈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도 허약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21 세기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국교회의 건강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해보는 것이 우선해야 할 과제이다. 몸이 건강하려면 병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신체가 튼튼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병에 걸리면 그 능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병이 들면 성장을 계속할 수 없다. 우리 한국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한 것 같은데 속으로는 심상치 않은 병을 앓고 있다.

 그러면 고귀한 병리현상이 생기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 저는 이런 문제의 원인을 ‘영성의 결여’, 혹은 ‘영성의 퇴조’라고 분석하고 그러한 문제 해결책 중의 하나로서 교회 예배의 영적갱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 발제의 목표는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기독교 영성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한국교회가 이런 영성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창조적인 예배의식을 어떻게 활성화해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방안을 모색해 보려는 데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기독교 영성에 대한 관심이 한국교회 안에서 점점 확산되어 왔다. 보수적인 교회나 진보적인 교회를 막론하고 두루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 모두가 교회를 새롭게 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철저한 영성교육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영성 회복에 대한 관심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영성에 대한 이해는 교파에 따라 지도자들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같은 개인적인 영성으로부터 억압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해방의 영성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문제는 이러한 영성의 다양한 이해가 서로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고 개인적인 경건과 사회적인 해방 둘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양극적인 대립으로 흐르고 있는 점이다. 이로 인해서 교회의 일치가 손상되고 신자들에게 큰 혼란을 가증 시키는데 문제가 있다.

 복음주의는 넓은 의미에서 사도적이며 종교 개혁적인 전통에 서있는 신학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 개인적인 영성과 더불어 이웃에 대한 봉사와 사랑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영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따라서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하는 대신 둘 다 보전하고 있어야 바른 복음주의적 전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인격적 관계에 기초한 영성을 우선적인 것으로 주장하며 그리고 사회적인 영성은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영성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영성 이해가 넓은 의미에서 사도적이며 종교개혁적인 영성 이해에 부합된다고 믿는다.

영성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배다. 타종교에서 말하는 예배가 하나의 의식을 위하고 인간을 욕구 충족을 위한 절차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기독교 예배는 전인적인 구속의 감격 속에 자신이 받은 거대한 은총의 주인 앞에 나와 감사와 보답의 표현을 하는 것이다.

「지글러 (Franklin M. Segler)」는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사람의 인격적 믿음 안에서의 사랑 어린 응답”이라고 말했다. ( 예배학 원론, 정진황 역, 요단출판사, 1984. 9. 26) 그러나 기독교 예배는 개인만이 드리는 의식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종교의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에는 사회성이 포함된다. 또한 예배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만 가능한 사건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건이다. 예배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배는 사회적 영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건전한 발전과 참 교회상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예배의 갱신이 필요하며, 그 갱신을 위하여 참된 영성의 이해와 형성은 필수적인 조건이다.


 

Ⅱ. 영성운동이 긴급히 요청되는 상황변화


오늘은 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위기적 시대라고 말하는 지도자들이 많다. 그것은 사회와 교회 그리고 신학계에 불어 닥치고 있는 변화에 바람이 거셀 뿐 아니라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진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단단했던 기초가 무너지고 아직 새로운 기초가 들어서지 않은 혼란의 현상을 사회학자 「뒤르켕(David Emile Durkheim, 1858.4.15. ~1917.11.15)」은 아노미(anomie) 현상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아노미 현상이 사회와 교회 그리고 신학계 등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언제나 새로운 각성과 기회를 창출하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때 이기도하다. 이러한 전기는 우연히 오지 않는다. 각성을 주도하는 지도자들이 있고, 그 배후에는 그들을 돕는 공동체와 종교적 신념(ethos)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와 교회는 이러한 위기와 더불어 새로운 기회의 시기를 맞고 있다.

 1900년에서 2000년까지의 100년 동안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류는 비영성적 세기 (Non Spiritual Century)를 살아왔다. 1960년대의 히피문화, 1970년대의 마약문화, 1980년대의 탈 근대주의의 급진적 스타일 등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1900년대에 다시 ‘영성적 방향’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21세기에 진입하게 되면 이러한 영성적 추세는 더욱 발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물질과 과학만능으로 살아온 인류는 이런 것에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과 고갈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을 추구하게 된 것은 세속화된 사회나 세속에 물들어 가는 교회 모두의 요청이기도 하다.


ⅰ. 사회의 영성 요청


 7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급격한 경제성장, 산업화, 도시화와 더불어 물질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가 편만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영혼, 도덕, 삶의 가치나 의미 등 인간의 존엄성은 평가 절하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가치의 전도 혹은 아노미 현상의 와중에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차원적인 존재로, 소유 지향적인 존재로, 육감적인 존재로, 행동 지향적인 존재로, 생산 소비 메커니즘에 갇혀버린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세속화된 세계요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의 삶의 철학과 양식에 충만되어있는 세속화된 세계가 됨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영성은 현실세계와의 의미 또는 연관성을 상실하든지 본래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기는 영성이 위기에 직면한 시기이며 동시에 어느 때보다도 영성운동을 필요로 하는 시기이다.

 기독교의 이천년 역사를 크게 되돌아보면 위대한 영성운동이 일어난 때는 대체로 그 당시 세계질서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정신적, 도덕적, 종교적 타락이 크게 위험수위에 와있을 때였다. 여러 가지 위협과 가치의 혼란, 도덕적 타락, 가치 판단의 혼재 현상이 팽배할 때 수도원을 통해 청빈, 순결, 봉사, 사랑 등의 영성 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유럽의 산업사회 속에서 인간의 영혼이 병들고 그 결과 그 사회가 몹시 부패하고 병들었을 때 경건한 모라비안 형제들과 웨슬리(Wesley) 형제들의 영적 갱신운동이 일어났다.


ⅱ. 한국교회의 영성 요청


영성운동의 추구는 세속에 물들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시급한 요청이기도 하다. 물질주의, 세속주의, 물량주의는 삶의 깊이와 초월을 상실한 일차원적인 합리주의, 삶의 성공 실패의 판단 척도를 실용에만 두는 실용주의 등의 잘못된 풍조에 밀려가게 만들었다.

 이러한 혼돈의 와중에서 세속사회를 정화하고 바로 이끌어야 할 교회가 그 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 혼돈의 물결에 휩쓸려 교회 역시 세속화의 흐름에 그 몸을 맡김으로 날로 급증하는 사회의 범죄, 도덕의 극심한 타락을 막을 능력을 상실한 한국교회이기에 영성기능의 회복이 절실한 상태에 와있다.

이런 과학적 물리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교회만이라도 영성적이기를 기대하게 되었고, ‘교회마저’ 물질적이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할 미래사회에서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과학 기술이나 물질을 추구하러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영성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게 될 것임으로 교회는 더욱 영성적이어야 하며 덜 물질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교회 지도자들은 영성적 기능을 강화해야 하며 미래교회는 어느 때보다도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계와 물질과 함께 살아갈 미래인들은 신비적 영적 삶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역행심리가 발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교회와 사라지는 교회의 차이는 영성의 차이가 될 것이다.


 

Ⅲ. 한국교회의 영성 이해


현재 한국교회의 영성에 대한 이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수주의 교단에서는 그 중 한 흐름인 ‘개인적 영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반면에 진보주의 교단은‘사회적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ⅰ. 보수주의 교단의 영성 이해


   전통적으로 서구교회의 경건주의, 개혁주의, 복음주의 운동 그리고 성령(은사)운동 등이 본래 개인적인 영성에만 강조점을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개혁주의는 칼빈을 비롯하여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키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였다.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1703.6.17~1791.3.2)」의 감리회 운동도 그 당시 영국의 사회 변혁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교회도 선교 초기에 보여주었던 대로 교육, 의료, 문화, 정치 등 여러 영역에 있어서 사회와 역사 참여적인 교회였다.

한국개신교에 자유주의가 적극적으로 소개된 것은 해방 후의 일이며, 자유주의의 지나친 낙관주의를 비판한 신정통주의가 1930년 후반기에 소개된 것을 참작하면 민족의 독립과 문화 변혁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주의적 영성을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박해와 계속되는 식민통치 아래서 교회의 생존 자체가 위험시되면서 더욱 ‘개인영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보수주의적 교회는 개인의 성결 (Personal holiness), 내향적영성 (Inward spirituality), 신비주의적 영성 (Mystical spirituality) 또는 은사주의적 영성 (Charismatic spirituality)을 강조했다. 영성의 개인성, 내면성, 신비성을 주로 강조하는 보수주의적 영성은 성경중심, 말씀중심, 신앙중심의 영성이 그 대동을 이루어 온 것이다.

 근래의 보수주의가 특별히 개인적 영성을 강조하고 반면에 사회적 영성 즉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영성에 대해서 경시해온 것은 신학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적극 대처하는 대신 소극적으로 회피하던 과거의 관습적 행동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책임적 존재로서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보다, 내 가족, 내 교회, 내 교단 등 자기중심의 신앙형태의 영성으로 살아가도록 오도된 것도 교회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살아온 관습적인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수주의 개인적 영성을 사회적 영성 보다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 자체는 사회적으로 영성에 대한 관심을 저해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그렇게 될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보수주의의 장점은 절대와 상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공로를 혼동시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수주의는 쉽게 잊곤 한다.


ⅱ. 진보교단의 영성 이해


개인적 내면적 영성, 경건주의적 영성, 신비주의적 영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1960 대 이후 세계교회에 등장한 영성이해가 있는데 소위 ‘사회적 영성’ 또는 ‘해방의 영성’ 이라고 불리우는 영성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영성의 이해다. 이런 영성 이해는 의미를 인간의 내면세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주체적으로 처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인 공공적인 차원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영성 이해에 기본을 둔 영성운동은 세계평화, 정의와 자유, 인간해방, 생태계 보존 등에 깊은 관심을 둔다. 정치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의 영성신학이 바로 이런 사회적 영성의 범주에 속한다.

진보주의적 영성이해는 구체적인 역사에 참여하는 영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삶에 그 기원( 영성의 기원 )을 두고 그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인격적 만남의 경험( 영성의 과정 )을 토대로 하여,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 분의 삶과 그 분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영성의 결과 ) 영성의 전체적 전망 가운데서 영성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위험이 진보주의의 약점이다. 영성의 기원과 영성의 과정 없이 논의 되는 영성은 기독교 정체성 (identity)의 문제를 야기 시킬 뿐 아니라, 영성의 기반이 없이 출발한 영성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그리스도교적 영성운동으로써 유지되기 어렵다.


ⅲ. 복음주의의 역동적 영성이해


복음주의적 영성이해는 영성의 기원과 과정에 충실한 영성이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그리고 새로운 인격으로서의 변화를 복음주의적 영성은 중시한다. 반면에 영성의 사회성을 희생시키는 태도는 참된 복음주의 입장이 아니다. 특히 칼빈적 웨슬리적 복음주의는 문화를 배척하는 이원론이 아니라, 문화를 변혁시키는 일에 적극 동참하는 참여적 전통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복음주의적 영성은 신자의 정체된 영적상태 (static spiritual condition)를 말하는 것이 아닌, 역동적인 영적운동 (dynamic spiritual movement)을 말한다. 정적인 신앙은 성장이 멈춘 상태이며 결국 쇠퇴하고 만다.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신앙이어야 한다. 역동적인 영성운동은 성장할 뿐 아니라 내면 지향적인 운동과 (internalization) 외부 지향적인 운동 (externalization) 을 동시에 수행하는 영성운동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내면적 성숙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세상과 역사에 참여를 통해 진리와 정의를 실천해 가는 외향적 영성이 동시에 추구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는 영성이 이 운동의 첫 출발점을 이룬다. 복음주의적 영성은 첫 단계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영성이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고, 이 새로운 관계가 영성의 출발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단계를 칭의 (justification) 의 단계라고 불렀다.

역동적인 영성운동의 두 번째 단계는 성숙한 변화의 체험을 통해서 나타난다. 성령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을 능력의 사람으로 성화시킨다. (sanctificate). 성령의 은사 즉 하나님의 선물이 필요에 따라 사람들에게 내려온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이미 개인의 영적 완성과 더불어 공동체적인 영성의 특성이 나타난다. 즉 성숙한 변화의 체험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즉 바울의 표현을 빌린다면 ‘서로 연관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은사는 공동체 안에서 여러 가지 봉사를 위한 능력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세 번째 단계는 오늘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봉사하고 참여하는 실천적 영성의 단계다. 이 단계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역사 가운데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깨달아 이 세상의 고난과 억압 가운데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에 동참해 나가는 영성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다.

역동적인 영성운동은 내면적인 영성으로부터 밖으로만 향하는 일방적인 영성운동이 아니라 외면적으로부터 다시 안으로 향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사회정의를 실현해 가는 현장에서 다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위한 시간과 공간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역사와 사회로 나갔다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귀향 (home coming) 이 없이는 사회적 영성은 정치프로그램이 되고 경제활동이 되고 만다.


 

IV. 예배를 통한 구체적 영성 훈련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역동적인 영성운동을 삼분법으로 분리시켜 신자들을 훈련시켜 왔다. 공적인 예배에서는 첫째 단계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영성이 주로 강조되었고, 부흥회나 기도원에서는 성숙한 변화의 체험을 강조하는 사상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YMCA 등 기독교 기관에서는 사회 참여의 영성을 강조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운동들이 서로 협력하는 대신 단편적인 영성 이해에 근거해서 자신의 일방적인 영성 이해를 절대화시키거나, 상대방의 영성운동이 자신의 한계를 서로 보완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전통적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의식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은혜를 내리시고 인간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역동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도원에 갔고, 실천적 영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났다. 결과적으로 영성의 첫째 단계만이 남아있는 예배가 되었다.

역동적 영성의 두 번째 단계는 주로 부흥회와 철야기도회 또는 기도원 운동을 통하여 강조되어 왔다. 한국교회의 영성은 교회의 영성과 기도원의 영성으로 분리 대립되었고, 공예배의 영성과 부흥회의 영성으로 나누어졌는데 이는 잘못된 영성 이해 때문이다. 부흥회의 영성에 빠진 사람들은 기존교회의 예배를 차갑고 은혜가 없는 예배로 비판하고 반면에 기존교회는 그들을 열광주의자 또는 신비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한다. 부흥회에서 신자들은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였으나 그것이 실천적인 영성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 결과, 은사를 위한 은사, 사회로부터 격리된 흥분과 자아도취적인 열광의 분위기에만 만족하는 체험이 된 것이다. 예배의 요소 중에는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여 변화되는 영성이 수용되어야 하고, 또한 교회는 그것만이 영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세 번째로 역동적인 영성의 단계는 사회적 영성이다. 기존의 민주화운동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환경보호운동, 경제정의 실천운동, 여성운동 등과 같은 기독교 계통의 많은 운동들은 사회적 영성운동이다. 문제는 대다수 예배 시간에 신자들이 이러한 영성운동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필요한 정보와 방안에 대한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와 분리된 사회적 영성은 신자들로 하여금 실천을 등한하게 하기도 하였으며, 건전한 사회적 영성과 불건전한 사회적 영성을 분간할 수도 없게 하였다.

차츰 신자들은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지고 기독교 영성에 기초한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지 않고 세속사회가 정해주는 규범을 습관적으로 맹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왔다.  예를 들면 자동차에 십자가나 물고기 형태의 표지를 달고 세속의 잘못된 교통습관을 똑같아 되풀이하는 기독교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 사람들과 똑같이 세금을 탈루하고 심지어 교회가 먼저 법을 지키지 않고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예배의 영성이 일상생활에 대한 지침이 되지 못한 한국교회의 무기력을 웅변해 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 무기력한 교회가 된다면 그 이유는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배 순서의 기본적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대한,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복종과 감사의 응답이 성서적으로 논리적으로 잘 배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배의 제 요소가 분산되지 않고 유기적 통일을 가지고 예배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 이라는 것을 구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찬송과 고백을 가지고 개회하여 성경 낭독, 목회기도, 설교, 감사와 헌금이 있고, 찬송이 그 순서 중간에 적당히 삽입되어 부르고 송영 및 축도로 끝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인간적인 면에서 예배는 그 자체가 훈련의 성격을 갖는다. 보통 중요한 변화는 갑자기 인간의 삶 속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근본적이고 극도로 어려운 것이다.

공동체 훈련은 기독교 영성훈련의 꽃이다. 훈련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와 함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과 함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훈련이다. 예를 들면 공동체훈련 가운데 하나인 예배 훈련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며,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함께 하나님의 사명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역(ministry)을 위해 함께 세상으로 나가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성훈련은 개인주의의 탈을 벗어나서 함께 세상 속으로 참여하는 진정한 기독교 영성이 형성된다.


그러면 예배를 통한 영성훈련의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일까 ?

첫째로는 예배의 집례자인 목회자의 영성훈련과 실천이 필요하다.

오늘날 세속화된 사회,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 못지않게 영성신학을 필요로 하는 것은 목회자 자신이다. 목회자의 영성신학에 대한 이해 부족과 영성훈련의 부재로 인한 풍요로운 영성의 삶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목회의 겉모습은 있으나 차고 넘치는 생명력을 가질 수 없고, 더 나아가 이러한 영성부재의 목회는 필연적으로 세속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대만 신학자 C. S. Song 이 지적한대로 목회자 자신의 '영성형성' (Spiritual formation) 없는 목회는 공허할 수밖에 없고, '지속적인 영성형성의 과정' (the continuous process of spiritual formation)이 없는 목회자는 자기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 세속화된 세상에서 거룩한 세계로 이끌어 낼 수 없다. 깊이 있는 영성신학의 이해와 밀도 있는 영성훈련으로 인한 지속적인 영성의 삶의 개발이 없는 목회자는 필연적으로 그의 목회현장에서 그 자신은 물론 그에게 위임된 성도들이나 그들이 서 있는 사회를 영원한 빛과 생명의 역사로 이끌 수 없으며, 그 목회현장을 하나님 나라 역사(복음의 역사)가 온전히 임재 하는 곳으로 바꿀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영성신학 훈련의 부재를 안고 목회하고 있는 것이 현 한국교회의 상황이다.

박근원 교수는 이러한 영성부재의 목회자들의 문제의 원인을 영성신학, 영성훈련이 거의 전무한 현재 한국신학 교육에 두면서 현재 한국신학교육은, 신학교육의 중요한 내용을 학문 훈련 (Academic formation), 교직 훈련 (Ministerial formation), 영성 훈련 (Spiritual formation) 이라 할 때, 거의 보수적인 신학교에서는 교직 훈련, 그리고 진보적인 학교에서는 학문 훈련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총괄적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학교육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서 한결 같이 지적되고 있는 문제의 하나는 개신교 신학교육 내용에서의 영성훈련의 결핍이라고 했다. 수도원 유산을 배 제해온 교회제도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웬만한 가벼운 영성의 훈련으로서는 오늘의 세계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시대적 상황의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원 “신학 교육과 영성 훈련” 「기독교 사상」 1983. 3, pp. 91-92 ) 현재 한국 교회의 목회자의 영성신학, 영성훈련의 부재가 현 한국적 목회상황에서 풀어야 할 과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가 풀어질 때 이 세계 속에서 교회가 그 역할과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그 동안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로 개발해 온 영성훈련의 두 가지 핵이 있다. 그것은 ‘기도훈련’ ( 통성기도, 중보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새벽기도, 산상기도 등 ) 과 ‘말씀 훈련’이다. 영성 개발을 위한 영성훈련의 이 두 핵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영성훈련을 위하여 가장 시급히 개발해야 할 프로그램 중 하나가 기도에 들어가기 전 침묵과 명상의 훈련이다. 이 훈련은 「모튼 캘시」 (Mortun Kelsey)가 적절히 관찰한대로 “인간이 자라고 되어 가는 적절한 환경과 함께 영혼을 준비하는 시도로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신비와 사랑을 깊이 있게 깨닫게 해 주는 훈련”이다. 그리고 이 훈련은 인간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세계에 이르는 것으로서 자신의 내면의 각성을 통해 혼돈에서 정화로, 공허에서 의미로, 분열에서 모든 것과의 일치로 이끄는 훈련이다. 이 훈련은 명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침묵, 명상의 훈련은 기도의 훈련으로 연결되어져야 한다. 여기서 기도란 본질상 내 뜻을 구하고 찾는 간구보다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알려진 뜻을 구하고 찾는 복종이어야 하며, 형태상 감상, 찬양, 고백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서 생활의 변화를 받으며 또 새 생명, 새 가치, 새 생활을 창조하게 되어야 한다.

이 영성훈련을 위한 또 하나의 핵은 학습훈련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학습의 훈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 신앙의 연륜이 깊어짐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온전한 변화를 받지 못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영성훈련을 위한 기본적인 학습 내용은 오늘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발전시켜 온 신, 구약 성서연구다. 성경은 영적성장을 이루는 핵심적 학습내용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며 온전케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묵, 명상, 기도훈련이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히 마음을 비워 그 앞에 굴복하는 것이라면, 말씀(학습)훈련은 그 비운 마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차게 하여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삶으로 온전하게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성례전을 통한 변화와 영성훈련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전인적인 영성훈련을 위하여 시급히 회복해야 할 예전이 있다면 그것은 성례전이다. 김외식 교수는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시사하고 있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 일고 있는 예배 갱신 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성례전적인 영성(sacramental spirituality)의 회복을 의미한다. 특히 지난 날 개혁교회 들이 초창기에 무시하고 없애버렸던 성례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면서부터 모든 개신교 안에 이 운동은 파급되고 있다. 그래서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회복, 기도와 찬양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영성운동은 활성화될 것이다.”〈김외식 “영성신학의 일반적 이해”,< 목회와 영성 > 기독교서회 l999. p.194).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간과 세상을 보완하는 정점을 기념하는 것으로서, 십자가의 신비가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현되어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의 신비 속으로 끌어들여 구원의 은총을 경험케 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현실에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케 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그의 삶을 헌신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영성훈련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교회에 약화되어 있는 성례전의 회복은 영성훈련을 위한 예배의 갱신과 함께 긴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는 이 공동체 의식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그리스도인과 지체의식을 더욱 더 공고케 하여 그들의 공동체 의식을 확장하고 나아가 이웃을 위한 삶을 새롭게 결단케 함으로, 공동체 영성과 사회적(역사적) 영성개발을 위해서도 교회 예배에 있어서 매우 긴급히 회복되어야 할 예식이다.


 

V. 맺는 말


지금까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하나님과의 참된 교재를 나누는 내면적 경건에서 출발하여, 참된 삶의 변화를 통하여 사회적 영성으로 이어지는 영성 이해에 관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이해는 구체적으로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명상과 기도, 말씀, 성례전 등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영성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제 선교 제 2 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는 이 세상에 끌려 다니는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을 참된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교회의 역할이 미약했던 것은 기독교 영성의 바른 이해와 실천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교리적으로 또는 성경적 해석에 있어서는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습적인 불철저함이 한국교회를 무기력하게 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깊은 반성과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영성 기능을 회복하여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