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예배갱신을 통한 영성개발




 

I. 서론


ⅰ. 문제 제기


   「엄두섭」은 그의 저서「영성의 새벽」에서 말하기를“오늘날 유럽 교회는 죽었고, 미국 교회는 세속화하여 퇴조하고 있고, 일본과 대만의 교회도 침체하여 부진한 가운데 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역시 무질서하고 건전치 못한 상태에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마치 고무풍선 속에 바람을 불어 넣듯 내용이 없는 팽창주의, 쓰레기 매립지에서 자라난 해바라기같이 머리만 크고 뿌리는 흔들리고 있다. 전 교계는 속화(俗化) 되고 불순한 성직자들의 횡포가 심하다. 이제는 단순한 목회만 말고 영성(靈性)회복, 영맥(靈脈)을 이을 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1)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그의 시각을 사실의 전부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에는 많은 위험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이러한 작금의 현실을 함께 공감하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고 있는 중이다. 개신교 선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100 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놀릴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는 내적으로 여러 가지 병폐들을 안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각종 사회병리현상의 결과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타에 의해 떠맡고, 떠맡겨진 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병폐적 현상이 오늘날 크게 부각되어진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본인은 그러한 문체의 원인을 영성의 결여’혹은‘영성의 퇴조’라고 분석하고, 그러한 문제의 해결책중의 하나로써‘개신교 예배의 영적 갱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본고는 연구 범위에 있어서, 예배학적 관점의 틀에 영성신학적 입장의 논지를 부여함으로써 본고가 실천신학의 분야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


ⅱ. 연구방법과 범위


   본인은 이려한 연구목적을 가지고 본 고를 진행함에 있어서, II 장에서는 예배학적인 기초 작업을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여보고, III 장에서는 한국의 개신교 예배가 영성이 결여되어 있는 오늘날의 예배로 정착하게 되기까지의 배경과 원언을 살펴봄으로써 본 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Ⅳ장을 위한 기초 작업을 준비 하려고 한다. 본 고의 핵심이 되는 Ⅳ장은 Ⅱ장과 Ⅲ장의 이론적 기초 작업과 문제의 원인분석을 토대로 하여 개신교 예배를 통한 영성의 개발을 돕고자 의도된다. 특히 Ⅳ장에서는 예배 의식 자체, 공중예배 순서, 설교, 예배음악 그리고 예배의 장애물 등에 대한 내용 등을 다룸으로써 준비된 예배를 통해 영성이 개발되어질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한 가지 밝힐 것은 본 고에서 언급되고 있는 ‘개신교 예배’라는 대상은 한국의 개신교회를 주로 지칭하면서도 내용에  따라서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개신교를 의미하게도 될 것이라는 것이다.


 

II. 예비적 고찰로서의 개신교 예배


ⅰ. 예배의 정의


   타종교에서 말하는 예배가 하나의 의식을 위하고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절차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예배는 전인적인 감격 속에 자신이 받은 거대한 은총의 주인 앞에 나아와, 감사와 보답의 표현을 하는 것이다. 예배라는 말의 우리말 뜻은 “신을 신앙하고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위 및 그 양식”이라고 정의 되어 왔다.2)

  구약성서의 아바드(avad) 라는 단어와  샤하아(shachah)라는 단어의 뜻을 통한 예배의 의미는 곧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이 되어졌다는 사실이다.3)

   신약에서 예배를 가리키는 말로는 프로스퀴네오(proskuneo)라는 단어이다. 이 말은“무릎을 꿇는다. 손에 입을 맞춘다.”라는 뜻으로 웃어른에 대한 예의와 존경과 복종을 함께 의미하고 있는 단어이다.4)

   「제임스 화이트 (James White)」는 예배에 대해 정의하기를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in) 그를 통하여 (through)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이 앎에 따라 응답함으로써 가장 심오한 경지에서 실재(reality)에 접근 하려는 신중한 행동이다.”5) 라고 하였다.

「지글러(Franklin. M. Segler)」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사람의 인격적인 믿음 안에서의 사랑어린 응답”6) 이라고 했다. 참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거룩해지는 만큼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 지향적인 예배의 가치를 떨어뜨려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배란 결국 무엇보다도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것과 지금도 행하고 계신 것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의 형상을 따라 성장하려는 소원이 우리 안에 심겨진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우리를 그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존재의 신비를 경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도록 처음으로 우리를 이끄신 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7)

   이상과 같은 용어의 의미와 학자들의 주장은 예배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기초적 작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배의 의식 뒤에 담겨져 있는 깊은 내면적 의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배는 신비의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예배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으나 그의 성격을 충분히 깨달을 수 없으며, 사람을 다루시는 그의 방법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신비와 의미를 경험한다.

   둘째 예배는 경축이다. 예배는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활동 - 창조, 섭리, 구속의 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수육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 - 에 대한 경축이다.

   셋째로 예배는 대화이다.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 어린 응답이다.

   넷째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예배란 우리의 마음과 뜻, 몸과 시간 등,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즉,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데 있지 않고 바치는 데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와 축복에 대해 믿음으로 하는 감사의 응답과 봉사인 것이다.

   다섯째 예배는 생활이다. 예배는 가장 열정적이고 강렬한 기독교인들의 생활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므로 모든 기독교인의 생활이 예배이다.8)

 

ⅱ. 개신교 예배의 특징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개신교 분리 이전부터 성서와 전통에 근거한 예배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별히 개신교는 가톨릭과의 분열이후 성서에 근거하여 나름대로의 예배의 특징을 확립하게 되었다.


   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중심의 예배


   기독교의 예배는 삼위일체 중심적인 것이다. 먼저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백성은 그에게 응답하는 것이 참된 예배의 양식이다.9) 그러므로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의 계시의 선행 없이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10)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첫 머리에 엄격한 명령을 두심으로써 모든 우상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다.“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출애굽기 20:3) 우상숭배는 보이는 대상 앞에서 절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져(A. W.Tozer)는 말하기를“우상숭배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가치한 것을 즐겨 생각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다.11)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그를 기쁘시게 하며 보강시켜 드릴 수 있는 어떤 외적 찬사를 바치는 듯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무가치한 군주유형(君主類型)이고 예배의 평판을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자유롭고 책임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살도록 하셨으며, 사랑과 공의로 그의 창조를 건설하는 데 우리의 협동을 요청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그것이 역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변화시키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된다.12)

또한 예배의 행위중심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 속에서만 새로운 차원의 눈을 뜰 수 있게 된다.13) 「지글러」는 믿음의 대상으로써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교회 예배의 기초는 그리스도론적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지글러」에 의하면, 교회는 예배의 모든 활동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고계시는 기적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사람이 구속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가능케 된다고 한다. 또한 덧붙여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믿음의 대상이시다. 그리스도교와 세계의 다른 위대한 종교들 사이의 주요한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발견된다.14) 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예배는 성령의 역사에 기초 되어진 예배로서“참된 예배는 성령의 역사로만이 이루어진다."15) 진실한 예배는“신령과 진정으로”예배하는데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인간의 영혼에 접촉할 때 비로소 우리 속에 불붙여진다. 형식과 의식만으로는 예배를 산출하지 못한다. 우리가 모든 좋은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고 또 가장 훌륭한 예배 의식을 가질 수도 있지만, 성령이 우리의 영혼에 접촉하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노래와 기도와 찬양이 모두가 예배와 통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배는 그런 것들 이상의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불에 의하여 불붙여져야한다.16)


   ② 성경중심의 예배


   성서는 예배의 중심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말을 수레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달한다. 성서는 성령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활동을 써 놓은 기록인 이상, 성서는 예배에서 그 객관적 내용의 주된 원천이다. 성서는 예배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제시한다.17)

   개신교 예배는 모든 예배의 형태와 내용과 메시지가 성경을 바탕으로 한다. 성경을 떠난 여하한 신앙의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개혁 교회 가 지켜온 살아 있는 정신이다.18) 말씀이 중심이 됨에 따라 자연히 설교도 개신교 예배에서 클라이맥스가 되어 있다.19) 성서는 교회의 생명의 책으로 예배를 위한 객관적 내용을 제공하고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려준다. 성서는 교회의 구원과 생활의 안내서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지식의 원천이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에서 그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예배를 지도하는 객관적인, 지성적인 내용은 성서 안에서 발견된다.20)


   ③ 가족적이며 공동체적인 예배

   가족적이며 공동체적인 예배는 지극히 성서적인 예배의 특징이 될 수 있다. 구약의 예배는 모세이전의 족장시대까지 개인적 예배가 존재했으나 그 이후에는 공동체적인 예배가 시행되었으며, 신약 - 특별히 사도행전 이후 - 의 예배들은 거기에 가족적인 특징까지 부여되며 가족적이며 공통체적인 예배를 보여주고 있다.

   「한스 큉」의 교회론에서도 볼 수 있듯이“에클레시아”는 실제로 모이는 과정과 모이는 단체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므로 집회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클레시아”는 구체적으로 함께 모이는 일이, 모임이, 특히 예배의 모임이 거듭 되풀이됨으로써 이루어진다.21) 예배자들의 가족적인 개념의 설정이란, 서로가 각각 다른 개체의 존재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연관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 개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공동체는 언제나 단수적인 개념(I) 보다는 복수적인 개념(We)의 모임으로써 예전의 내용과 구성을 생각해야 되며 전체적인 영적 성장과 발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22)

   개신교 예배는 교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없애 버림으로써 먼저 그리스도교 예배에 나타난 단순성과 자발성 그리고 능동성을 회복하였다. 로마교회의 예배는 체계화되고 전문화되어 그 미사는 사제에 의해서만 집행되고 신도들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항하여“모든 크리스천은 다 제사장이다.”라는「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의 외침으로 평신도들도 예배에 직접 참가 할 수 있게 되였다.23) 여기에서 공통체적인 예배로서의 예배인식의 지평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Ⅲ. 영성이 결여된 한국교회의 예배형태


   한국에 들어온 지 100년이 넘고 있는 지금의 한국 개신교는 오랜 수용과 정착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적인 예배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데, 그러한 정착의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예배가 변질되어질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원인들을 간직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예배에 있어 영성이 결여된 많은 문제점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ⅰ. 한국교회 예배에 끼친 부정적 영향들


   그러므로 본 절에서는 19세기 말엽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에 접목된 한국적 배경과 토양을 살펴보고, 또한 한국에 선교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과 신앙형태를 살펴봄으로써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수용, 발전, 변질, 왜곡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① 이교 문화적 배경

   

   한국의 전통문화는 철저하게 이교적 문화인데 그것은 4,300년의 샤머니즘, 2,000년의 불교, 1,500년의 유교라고 하는24) 오랜 역사동안 이교적 토양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불과 백년 밖에 안 되는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이교적 풍토 속에서 자란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자연히 이교적인 요소가 깊숙이 뿌리박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련 이교적인 요소가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는 대표적인 이교적 재래 종교인 샤머니즘, 불교, 유교 풍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그것들이 개신교 예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⑴ 샤머니즘의 영향

   샤머니즘은 자연 현상이나 사람의 운명을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술사 곧 무당을 통해서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지 성취되고 병마, 악령 등의 재앙을 물리치며 선, 악 두 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을 말하는데 샤먼(Shaman)이란 무당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샤머니즘이란 결국 무당종교 또는 무교를 뜻한다.25)

 샤머니즘의 특징으로는 현실주의, 의타성, 공동체 의식의 결여, 주술과 가무, 황홀경 등을 들 수 있다. 현실성의 입장에서 볼 때, 무교의 모든 욕구는 현재에 복된 삶을 즐기는데 집중되어 있어서 내일에는 관심이 없다.26) 이러한 것이 기독교에 흘러 들어와서 현재의 기독교는 미래를 지향하고 사는 것보다 세상적인 부귀영화에 가치를 둔 현세 기복신앙으로 흘러갔다.

  또한 의타성의 입장에서 볼 때에 샤머니즘은 자기의 생활과 운명에 대해 자기 자신이 주체적인 책임을 지고 결단하려 하지 않고 매개자인 무당이 자기의 운명을 위해 영계와 교제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27) 기독교인이 복만을 구하는 일이나 자신의 신앙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타인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것은 무교의 영향이라고 본다.

  한편 무교의 기복신앙은 신령과 자기와의 수직적인 관계만 있을 뿐 횡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심이 적다. 그러므로 사회나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어 개인의 이기에만 집착되어 있다.28) 이러한 특징은 개인주의에 집착하여 올바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샤머니즘은 비합리적인 주술의 위력을 강조함으로써 합리적 사고와 이성의 힘을 무마시킨다. 그리하여 나약한 심성을 심어주어 권위에 맹종하는 권위주의적인 심성을 조장한다.29) 그리고 가무를 통해 신령과 교통할 수 있다는 관념은30) 기독교 예배에서 성령이 열광하고 찬송하고 박수치며 북을 치고 춤을 추는 곳에서 역사한다고 믿는 풍조를 낳았다.

 샤머니즘의 특징은 황홀경(estacy)에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신비주의 속에 나타나 입신, 환상, 방언, 기적의 체험이 있어야 은혜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31)


   ⑵ 불교의 영향

   한국불교는 현세의 제재기복을 본령으로 하는 샤머니즘과의 혼합 속에 유지되었으며 또한 쉽게 상하에 침투되었다.32) 이러한 한국불교의 혼합적 특성은 한국 기독교의 신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불교의 교리는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극기(克己) 등 세계 부정의 태도이기 때문에 무상한 세계로부터 해탈과 둔세를 주장하고 역사에 대한 태도가 빈약하다.33) 이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손을 떼고 물려서는 체념사상이 스며들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불교의 자기 소업에 따라 받아지는 인과응보의 사상이 한국교회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음을 설교의 경향에서 볼 수 있다.34) 그래서 신자들이 죄에 대한 자유와 해방의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죄에 대한 인과응보의 강박관념 속에 사로 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⑶ 유교의 영향

유교는 인관계의 질서를 도모하려는 윤리학이므로 신의 존재, 영원, 사후문제 둥에는 관심이 없다. 따라서 유교에는 절대가치와 관련된 선악, 양심 또는 죄악관 등이 결여되어 있다.35) 이런 영향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신자들은 세속적인 태도가 다분하며 죄의식도 철저하지 못함을 볼 수 있다.

유교의 관심은 언제나 내향적이다. 자기와 자기의 가족과 자기의 당파만을 생각하고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교에는 혈연, 정실 관계에 의한 가족중심 관념만이 있고, 사회와 국가관념 또는 민중의 복리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36) 거기서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기독교적 인간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분쟁을 하고, 교회를 분리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지 못하고 극단의 개인주의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한편 유교의 죄 개념은 선이나 양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전통적 권위에 대한 복종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었다.37) 이러한 성향은 교회의 폐쇄성을 가져오게 되었다.38) 또한 성리학에 기초를 둔 자연주의 사상은 기독교에 무신론적 공리주의를 제공함으로써 인격적인 하나님의 관념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39)


② 한국에 정착한 선교사들의 신앙유형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의 예배형식과 복음이해 그리고 신앙형태는 한국교회 크리스천들의 예배형식과 복음이해 및 신앙형태를 조성해 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40)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신앙은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 입장이었다.41)

 선교초기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의 형태는 미국형 교파중심적 교회로 퓨린턴적이며 부흥회적이고 정교분리와 성속(成俗) 분리의 이원론적이었다.42)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이 한국교회의 신앙의 한 유형을 형성하게 되었는데,43) 퓨린턴의 복음이해는 개인의 회심과 구원의 내적 확산을 위한 경건주의였다. 이들은 성서의 강조와 예배의식을 간소화하였지만 종교적인 다양성과 교파간의 선교정책 방법의 불일치에 따른 교파의 난립을 초래하였다.44) 선교사들의 복음이해는 개인의 회심과 내적 구원의 확신을 위한 경건주의였고, 그 회심과 확산이라는 것도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주관주의에 쏠려있었다. 따라서 주일 예배는 예배라기보다 전도 집회요 부흥회였다.45) 이렇게 볼 때 한국 개신교 선교기에 전래 된 예배는 즉흥적인 전도 집회형태가 절충된 부흥전도 설교 중심의 성격을 가진 예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선교사들의 신앙이 한국민족에게 쉽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앙이 한국인 본래의 정신적 유형에 상통하는 데가 많았다. 즉 신학이 아닌 생활과 체험의 단순한 복음이라는 것이 원래 신비주의적인 정서에 상통하였으며, 세상에 어울릴 수 없었던 정신적 귀족형의 형이상학적인 한국인 기질에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46)

 또한 선교사들은 비정치화를 꾀하였는데 그것은 순수복음과 경건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47) 이러한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현실 참여에 무관심하고 개인구원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에 전해진 예배는 신앙적 관점에서는 통일성이 있었으나 예배의식이나 형태 면에서는 미국식 예배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에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③ 한국교회 예배의 발전 과정 속에 나타난 부정적 영향들


  19세기 말기의 한국사회는 근대사에서 가장 심한 격동기였다. 대표적인 사회사상으로는 위정척사 사상, 동학사상, 개화사상 등이 있었으며, 이에 따른 사건들이 연일 얼어나는 혼란의 때였다. 이때의 민족적인 과제는 자주독립, 자유민권, 자강개척 등이었다. 이러한 현장 속에 기독교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48)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는 약소민족에게 힘을 주고 한의 백성에게 그 한을 풀어 주는 희망의 종교, 묵시종교의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회가 주로 양반 계급보다는 멸시와 천대를 받던 상민 계급과 며느리와 무식한 아녀자들에게 받아드려짐으로써 교회는 그들의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는 장소처럼 여겨지게 되었다.49)

한일합방 이후에 한국교회는 임박한 세상의 종말과 결부시킨 개인구원을 역설하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묵시론적이고 내세적인 설교가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설교자들은 회중들을 개개인이 모여든 하나하나의 영혼들의 집합체로만 보고 공통체로 보지 않았다. 그 결과 예배와 생활이 분리된 신앙형태와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낳게 되었다.50)

그러나 8.15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의 강단은 메시지가 달라졌다. 내세적이고 종말론적인 면에서 현세적인 기복신앙에로 옮겨졌다. 즉 6.25의 참화로 인한 종교의 특징은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상태에 접속하게 되어  축복과 열복의 상징인 내세의 천국이 여기, 이 땅에서 물리적으로 체험 가능하게 이르기를 줄기차게 갈망하게 되었다.51)

70년대에 한국교회는 또 한 차례의 대 부흥회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여 부흥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물량적 가치관이었다. 고도의 산업화는 우리의 의식을 물질적 풍요, 대량생산과 소비의식에 물들게 했다. 이 영향으로 한국교회도 모든 판단 기준을 수(數) 에 두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수적 증가를 통해 역사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었으며, 지나치게 물량적이고 급속한 성공주의에 사로잡혀 개교회 비만 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다.52)


ⅲ. 오늘날의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점

   

   이교적 재래종교의 영향과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그리고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오늘의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게 되었다. 또한 예배신학이 결여됨으로써 빚어지는 문제도 있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한국교회의 예배에 나타난 문제점들이 무엇인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① 설교 편중의 예배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예배에서 이들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조화되어진 예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신비와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53)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축제의 성격도 없고, 성만찬 안에서 각 날을 현재적으로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도 없이 설교 위주로 되어 있다. 교회의 설교와 예배와 교회력에 같은 관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가 설교중심의 부흥회나 전도집회가 되어왔다.54) 이처럼 한국교회의 예배가 설교중심의 예배가 된 것은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서 심어진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의 신앙은 부흥주의적어고 설교중심적인 미국 개척시대의 영향을 입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신앙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전달된 것이다.55) 설교가 예배의 중심부에 군림하게 됨으로써 다른 예배요소들은 설교의 보조역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목회자는 설교가 제일 큰 몫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 실력을 드러내고자 한다.56) 설교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강단의 위치는 점점 높아지고 설교자는 높은 강단에서 축복과 저주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다.57)

성례전 없는 설교중심의 예배를 일년 내내 계속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교 예배인 줄로 착각하고 있으며, 성례전 없는 예배가 불완전한 예배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58) 설교중심의 예배는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을 외면하는 것이며, 예배의 절대 핵심인 성만찬을 상실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성만찬 의식을 예배의 한 요소로서 설교나 찬송을 뺄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 종교개혁자들도 예배에 있어서 설교와 성만찬을 조화함으로써 초대 사도시대의 전통을 회복하려고 하였다.59) 그러므로 한 시간의 예배의 성패가 설교에만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다.60)


② 비예언적인 예배


 초기 선교사들은 고정된 예배순서를 배격하고 과거와 전통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예배를 드리던 예배의식을 아무런 신학적 연구나 검토 없이 모방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옮겨진 예배순서나 의식은 아무 발전 없이 그대로 정착됨으로써 오늘의 한국교회의 예배는 다른 여러 가지 예배의식이 쇠퇴하고 있다.61) 예배의식의 바로 사람들이 따라야 할 봉사의 순서이기에 그 순서 하나하나가 예배의 전체로서의 통일성과 관련성에 기여할 수 있다.

 기도는 교인전체의 공동관심을 간결하게, 힘있게 전달해야 하지만 실제로 예배에서의 기도는 당사자의 판에 박은 넋두리가 되고 있다. 융통성 없이 관례에 묶어 있는 판에 박은 듯한 기도, 너무나 길고긴 기도가 오늘의 기도인 것이다. 주로 개인의 혈육적 복과 개교회의 양적 성장을 강조하는 긴 기도는 일종의 질서 없는 설교와 같다.62) 또한 성가의 본질과 신학적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노래만 잘 부르면 성공적으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에 오늘의 성가대의 위치는 하나의 액세서리요, 예배 구경꾼의 눈을 위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고 있다.63)

 또한 예언, 방언, 치병 등 기사와 이적을 지나치게 희구하는 종교심리에 사로잡힌 교인들과 목회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 종교집회가 일종의 굿이 되고, 묵시와 환상을 억지로 보려고 하다가 종교적 착각과 변태증에 걸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64) 전체적으로 한국교회는 성만찬이 격하되어있을 뿐 아니라 교회력을 상실하고 있다. 16세기 보수주의 개혁자들은 교회력을 보존하였으나 미국의 청교도적 교회들은 교회력을“로마적인 제도”로 보고 무시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교회력이 없다.65)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예배의식의 쇠퇴나 변질을 하루속히 보완, 수정함으로써 올바른 개신교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③ 예배신학의 결여


예배신학이란 예배를 예배되게 하고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배의 근거를 밝혀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적이고 유약하며 맹종에 빠지기 쉽고 예배 없는 신학은 냉냉하고 그 자체 생명력이 없다. 예배와 신학의 결합은 강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유도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힘있게 한다.66)

그런데 한국교회의 예배는 신학이 결여되어 있어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예배에서 벗어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67) 예배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사의 경배보다는 복 받기 위해 드리는 경향이 많다. 목사를 기다리는 교인들의 염원 속에는 자기 집에 복을 빌어주기를 다분히 바라고 있으며, 목사의 손이“복 방망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68) 헌금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복채가 되어 버렸다. 헌금에 대한 축복의 기도를 받기 위하여 수많은 종류의 헌금이 드려지고 있으며, 목회자들은 바치는 것이 곧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예배는 복을 파는 곳이 되었고, 이 기복신앙은 주일마다 전국의 교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69) 우리 자신의 전체, 즉 우리의 지성, 감성, 태도, 소유를 드리는 것인데 한국교회의 예배는 목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굿을 하고 교인들은 구경꾼으로 모여드는 부흥회 형태가 인기를 끈다.70) 예배를“보고”있기 때문에 참석한 사람들은 스스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구경만 한다. 그래서 예배의 출석 행렬은 예배가 끝날 때까지 꼬리를 물고, 설교가 끝날 때까지 꼬리를 물고, 설교가 끝나기 바쁘게 나가버 리는“조퇴 신자”가 있으며, 설교 이외의 순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설교파”교인도 있다.71)

오늘의 부흥회는 마치 교인들에게 헌금을 얻어내기 위한 기회로 삼는 인상을 준다. 부흥회의 성공여부를 헌금의 액수에 두고 있으며, 교회 신축을 위한 강제성을 띤 모금 집회도 열고 있다. 이것은 면죄부를 팔던 중세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72)

이러한 모든 현상은 예배신학의 부재로 인해서 얼어나고 있는 현상이고 올바른 예배신학의 정립은 올바른 예배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④ 예배와 생활의 분리


진정한 예배는 세계 속의 생활 가운데서 계속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배는 우리의 전체 삶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예배는 목사의 축도와 성가대의 끝송으로 끝나고 교인들은 새로운 각오 없이 그냥 흩어져 버린다. 이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회중들이 주일에 드리는 한 시간의 공중 예배만으로 만족하는 올바른 예배에 대한 인식의 무지에서 온 것이라고 하겠다.

신앙과 생활, 예배와 생활은 이질이 아니고 동질이다.73)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결단이 있는 예배만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와 세상 속에서의 생활이 일치될 때“거룩한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74)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 회중들의 실정은 예배당 안에서 예배가 끝나 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 안의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생활 가운데서 계속하여 행동으로 나타내야 한다.75)

오늘날의 교인들의 예배와 생활의 단절이 교회와 세상과의 이원적 개념에서 온 것이라면 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제의적으로 응답되듯 이 세상에서 삶을 통하여 응답되어져야 한다. 교회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과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삶이 없이는 참된 의미의 기독교 예배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에게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고, 바로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행위는 그의 뜻대로 순종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Ⅳ. 예배의 갱신을 통한 영성의 개발


ⅰ. 예배의식  자체를 통한 영성 개발


「낼슨 타이어」는 종교에 대하여 말하기를,“종교는 인간이 그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궁극적인 조건들에 관계를 가지는 상징적인 형상들과 활동들의 설정으로 정의되어져 왔다”고 말하며, 계속해서“종교들은 우려의‘일상적인 의식들을’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실재를 투과하고 단단히 고정하며 그리고 초월하는 의미와 힘을 지배하는 약속과 관계성의 경험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들이다”라고 일반종교에 있어서의 예배의식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76)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도 예배의식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거룩한 의식과 말씀이 만나는 순간이며,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영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77) 그러므로 예배의식 자체로서도 우리는 깊은 영성을 느낄 수 있어야하며, 나아가 잘 준비되고 훈련된 예배는 더욱더 깊은 영성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①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예배


개인과 공동체는 인간 실존의 모든 면에 관계되는 두 개의 기둥이며, 예배와 훈련이란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중요하다. 개인의 유일성과 그의 특별한 욕구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어야 하나, 아무도 혼자서 살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사람이 될 수 없으므로 개인의 삶은 공동체의 삶에 의해 받아 들여져야만 한다. 개인적인 헌신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구조 속에서 완전히 합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공동의 예배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박해의 시기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위험이 크다 할지라도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일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78)

성 바울과 다른 영적 생활의 지도자들은 여러 형태의 훈련과 예배와 헌신의 형식들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떤 규범 율을 모색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방법들은 하나의 공통된 목표 -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한 인간됨”에 집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바울이“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같은 문장에서 그는 역시“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삶 속에는 상호 부양과 공급이 있다.“그리스도의 충만”을 향한 모두의 성장이 있으며, 그 안에서 한 사람의 약점들이 다른 사람의 장점들에 의해 보충되는 성장이 있다.79)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동적인 특색은 그들이 예배에 함께 모이는 데 대한 그들의 의식에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로 하나의 단체로 만난다는 의식을 가지고 모였다. 둘째로는 개인주의를 초월한 일치의 정신을 가지고 모였다. 동양의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의 신앙은 단체적인 예배를 대단히 강조하였다. 큰 위험이 따르는 상황 속에서도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기를 촉구하였다(히브리서 10:25). 서신들을 보면 신자들의 공동체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 라고 말한 곳이 자주 나온다.  「마틴 루터」는 “나 자신의 집에서는 내 속에 뜨거움이나 어떤 활기가 없었는데, 교회에서 무리들이 함께 모였을 때 나의 마음속에 불이 붙었고 그 불빛이 비쳤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80)

이와 같은 사실에서 비추어볼 때 주관적인 나 자신의 신앙을 견고히 해주는 객관적인 공동체의 예배는 우리의 영혼을 튼튼케 하며,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과 위로의 말씀을 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② 훈련으로서의 예배


인간적인 면에서 예배는 그 자체가 훈련의 성격을 갖는다. 보통 중요한 변화는 갑자기 인간의 삶 속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 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근본적이고 극도로 어려운 것이다. 갑작스런 회심에 관하여 우리가 듣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것들은 대개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상당한 시간에 걸쳐 준비되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81)

공동체 훈련은 기독교 영성 훈련의 꽃이다. 이 훈련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와 함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과 함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훈련이다. 예를 들면, 공동체 훈련 가운데 하나인 예배 훈련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사람들 (즉 교회 공동체)이 함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며,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함께 하나님의 사명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역 (ministry)을 위해 함께 세상으로 나가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훈련이다. 여기에서 영성훈련은 개인주의의 탈을 벗어나서 함께 세상 속으로 참여하는 진정한 기독교 영 성이 형성된다.82)

믿음에서 생활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다. 예배는 공동체적 의식과 개개인들에게 유익한 다른 행위들 속에서 신앙을 생활로 이끄는 훈련이다. 그것은 그로 인해 제자 됨이 가능해지고 점차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성숙해 지는 과정이다.83) 이런 훈련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가장 완전하고 분명하게 진술하는 중에 어디에선가84) 바울은 이른바“육체의 일들”과“성령의 열매들”을 비교한다. 바울이 언급하는 육체의 일들은 참으로 인간 실존의 삶의 장애물이 된다. 그러나 이련 것들이 극복되어야만 바울이 말하는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품들에로의 성장이 가능하다. 그는 이런 것들을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부른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예배라고 부르는,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열매에 의해 육체의 일들을 대신하여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며 그것을 변화시키도록 역사하는 하나님 안으로의 몰입에 의해서 배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85)

예배는 예배의 반복을 통해서만 그 가치를 알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신앙과 행위를 함께 묶어주는 그리스도교의 불가피한 요소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시 인간에게 깊이와 위업을 선사하며, 그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85)


③ 우선순위로서의 예배


진정한 예배는 일이다. 소비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배와 기도는 시간의 낭비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게 창조적인 일이다. 그것은 영적인 깊이의 사람을 만들며, 그들을 통해 창조적인 영은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다.86)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예배가 우리의 생활에서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첫째 계명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은 찬양과 감사와 경배가 강조되어야 한다. 봉사는 예배에서 흘러나온다. 봉사를 예배에 대체시키면 그것은 우상 숭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제사장들의 근본적인 기능이 “네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드는 데”있다고 선언하셨다 (에스겔 44:15).87)

예배한다는 것은 진실을 체험하며 생명에 접촉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집합한 공동체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쉐키나(Shekinah)88) 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한복음 4:23).89)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마땅히 응답해야 할 유일한 응답은 예배이다(로마서 12:1).90)


④ 예배를 위한 준비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배의 특징은 사람들이 이를테면“거룩한 기대”속에서 모였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믿었다. 모세가 성막에 들어갈 때,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두렵고 영광되고 자비하신 임재 앞에 들어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아 있는 능력으로 그들에게 접촉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가운데 모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거룩한 기대”를 어떻게 개발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마음의 쉐키나에 들어갈 때 우리 속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내적 예배와 찬양으로 채워질 수 있다. 우리는 일하고 놀고먹고 잠자면서도 우리의 스승으로부터 듣는 일은 계속할 수 있다.91)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삶의 매순간을 내적인 경배와 찬양과 감사의 속삭임으로 보내는 것은 결국 공중예배에서의 영성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거룩한 기대를 가지고 공중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 들이 있을 때, 그 사람들은 그 예배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성령의 감동에 응답하는 세계에 들어가는 데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이 있다. 그 첫째 방법은 인간주도적인 모든 활동을 잠잠케 하는 데 있다. 인간 주도적인 모든 활동을 잠잠케 한다는 것은 교회의 예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언어와 생활행동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행하는 그런 습관을 배양한다면, 그와 갈은 정신은 공중 예배에도 나타나게 된다.92) 성령의 활동이 우리의 생활 방식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육신의 활동을 잠잠케 하는 것은 공중 예배에 영향을 끼치고 공중예배를 활기차게 한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오직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니라”(하바국 2:20).93)

마지막으로 우리는 온 몸으로 예배를 드릴 준비를 하여야 한다. 성경은 예배를 육체적인 용어로 기술하고 있다. “예배”로 번역된 히브리어 어원의 의미는“엎드린다”이다. 그리고“기원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무릎을 끓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감사”는“손을 펼친 상태”를 의미한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예배와 연관된 여러가지 육체적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엎드리다, 서다, 무릎을 꿇다, 손을 들다, 손뼉을 치다, 머리를 들다, 머리를 숙이다, 춤추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다 등등의 자세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것의 요점은 우리가 우리의 몸도 우리의 나머지 모든 존재와 아울러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94)


⑤ 예배의 집행자로서의 목사의 영성


목사직은 그 뿌리를 성서적 기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예배와 관련하여 제사장적 직무만을 잠간 살펴보고자 한다.

모세 이전의 제사장이란 맡은 kohen 이란 말을 썼는데  뜻은“보는 자(seer)”이다. 따라서 이 시대 제사장이란 예언자적 차원이 제사장적 차원보다 더 많았다. 출애굽기 23장25-29절의 레위족속의 선택 중에서 아론 계열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공식적으로 제사장 제도는 제도화되어 계승되었다. 제사장의 직무는 제사행위를 집행하는 자이다. 제단, 성소, 거룩한 성물을 돌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95)

「지글러」는 말하기를, 예배의 인도자는 자신을 낮추고 예배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높여야 하며, 인도자의 정신은 성실성, 경외심, 기쁨, 희망, 기대, 겸손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고 말하였다.96)

예배의 집례자로서의 목사의 영성을 위하여 「니버」는 다음과 네 가지를 제시한다.

⑴그리스도인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하나님 앞에 있는 하나의 죄인이라는 자각과 회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⑵내적인 부르심 : 성령으로 불리움 받은 소명의 재확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감사와 떨림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⑶섭리적 부르심 : 이는 목회를 잘하기위하여 목회적 도구,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다.

⑷교회적 부르심 : 교단과 교회의 초청과 부르심이다.97)


ⅱ. 공중예배순서를 통한 영성개발


예배의 순서의 기본적 원리는“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대한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복종과 감사의 응답이 성서적, 논리적으로 잘 배열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배의 제 요소가 분산되지 않고 유기적 통일을 가지고 예배의 본질인“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이라는 것을 구현시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찬송과 고백을 가지고 개회하여 성서 낭독, 목회기도, 설교, 감사와 헌금이 있고 찬송이 그 순서 중간에 적당히 삽입이 되어 부르고 송영 및 축도로 끝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98)

「화이트」 교수는 예배순서를 수립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아래의 세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첫째로 예배순서 설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성서가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예배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분명한 진행감각”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예배의 각 순서가 지니고 있는“기능의 구명에 대한 필요성”이다. 이 기준은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 순서를 개선하려고 할 때에도 필요한 기준이다.99) 다음은 필자의 주관에 적합하다고 느끼는 예배의 순서와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 오르간 전주


예배는 주보위에 기록된 전주곡을 연주함과 동시에 시작된다. 전주 예배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명상과 기도를 드리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전주는 회중들에게 성력의 임재를 증거해주는 것이므로 전주가 연주되는 동안 예배자들은 주님의 임재와 부르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어야 한다.100)


② 입장


경배 단계에 성가대 입장식이 있다. 이 입장순서에는 성가대가 포함되며 성가대가 선두로 입장하고 그  뒤에 목사가 따른다. 회중은 모두 일어서서 같이 입장노래를 부른다.


③ 예배의 부름


이 순서는 하나님이 예배자를 부르심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로서의 상호운동으로 이루어지는 예배가 되게 하는 것이다. 훌륭한 예배에의 부름은 적절한 음성으로 선포하여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고 그의 백성과 속삭이도록 하는 것이다. 성서에 예배에의 부름에 사용되는 성구를 몇 가지 소개한다.101)

1) 개회에 필요한 성구

합 2:2; 시 19:1-4; 사 55;6-7; 요 4:23-24; 시 24:1-2

2) 찬양에 대한 성구

유 24-25; 웹 3:20-21 : 계 5: 13; 단 2:20; 시 67:3-4

3) 강림절과 성탄절에 대한 성구

눅 2:10-11; 요 1:14; 요 4:5; 고후 4:6; 요일 4:9; 사 9:6

4) 부활절에 대한 성구

요 11:25-26; 벧전 1: 3-4; 고전 15:20-22; 고후 4:18

5) 하나님의 산 말씀에 대한 성구

신 6:6-7; 시 I19:11-12; 히 4:12; 약 1:22; 요 1:1-14

6) 헌신과 청지기에 관한 성구

마 6: 19-20; 고후 9 : 6-7; 시 116: 12-14 ; 행 20:35: 롬 12:6-8

7) 고백과 회개의 말씀에 관한 성구

시 51:1-4; 시 143:1-2; 시 51:7; 시 139:23-24

8) 확증의 말씀과 용서에 대한 성구

시 103:8-12; 시 30:4-5; 엡 4:32; 시 36:7-9; 살후 2:16-17

9) 축도와 폐회에 대한 성구

고후 13:13; 민 6:24-26; 시 67: 1-2; 롬 1:7: 유 2


④ 기원


기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늘 함께 하심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이 예배에 임재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기원은 전통적으로 성직자에 의하여 드려졌으나, 오늘날에는 훈련된 평신도에 의하여서도 수행되고 있다. 이 기원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키려면 우선 예배의 목적과 주제에 일치 하는 내용이 기원의 중심을 이루어야 하고, 간명하고도 적합한 표현이 뒤 따라야 한다.102)


⑤ 개회찬송


개회찬송은 하나님께 공동적으로 드리는“찬양의 찬송 ”이다. 그러므로 이 찬송은 신학적인 깊은 내용을 지닌 것이어야 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찬송이어야 한다. 이련 의미에서 개회찬송은 통일 찬송가에 수록된 ”찬양과 경배“중에서 선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교회력에 따른 절기 중에서 그 절기에 알맞는 ”찬양과 경배“의 찬송이 선택되어야 한다. 개회찬송을 부를 때는 언제나 일어서서 부르는 것이 좋다.103) 한편 김소영은 한국교회의 묵도가 원래 일본의 신도( 神道 ) 주의에서, 혹은 샤머니즘에서 오지 아니했는가 하면서 개회 찬송으로서 예배를 시작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104)

 

⑥ 참회의 기도


이 기도는 주일 아침예배 중 회중이 공동으로 드리는“회개의 기도”이다. 이 기도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훌륭한 공동기도문을 채택하던가, 혹은 교회력에 알맞는 기도문을 창작하는 일이 필요하다.105) 현재 한국교회는 보편적으로 이 참회의 기도순서 시간을 갖지 않고 있으나, 앞으로는 이 순서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⑦ 주기도


예배 중 우리들이 주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기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자비와 용서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답하고, 또한 그 기도를 함께 나누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를 단순히 암송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106)


⑧ 성서 교독


성서교독은 단순히 성서의 말씀을 나누어 읽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행위이다.107)


⑨ 공중 대표기도


공중 대표기도는 식문기도( 式文祈禱 )와 자유기도(自由祈禱)가 있다. 식문기도에 있어서는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에 대한 이로운 점은 개인적인 요소와 성품에 좌우되지 아니하는 객관성이 있으며, 그 기도의 용어의 선택과 정신에 있어서 교회에서의 매일 생활 속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아름답게 조직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점이 있음과 동시에 단점이 있는 데 그것은 여러번 반복으로 인한 형식화이며 성령의 인도에 의한 자유가 억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기도는 식문기도에 비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전적 자유를 가지는 장점이 있으나 기도자의 인간적 연약, 죄성에 좌우되는 것이므로 결점이 된다. 그러므로 석문기도와 자유기도의 장단점을 잘 감안해서 만일 자유기도를 할 경우에는 기도를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많은 준비를 한 다음 자유기도를 함이 좋을 것이다. 성령의 인도로 자유롭게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준비 없이 하라는 뜻이 아닌 줄 안다. 기도자는 성서에 정통하고 기도에 관한 좋은 서적을 가지고 연구도 하고 명상을 통해 또한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는 생활을 통하여 기도의 정신과 은혜를 터득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108)

공중기도는 대부분 큰 교회의 경우에는 장로님들에 의해 순번제로 진행되며, 작은 교회의 경우에는 집사님들에 의해 행해진다. 기도하는 자는 되도록 기도를 간단  명료하고 평이한 말을 사용하며 추상적인 것보다 회중들의 생활과 요구에 응하는 현실적인 문제로 하나님과 교제를 맺는 진실된 기도를 하도록 한다.

공중기도는 큰소리를 내어 공포심을 가지게 하거나 의혹을 품게하는 표현보다 감사와 찬송과 존경의 표현으로 하나님과 직접 만나 담화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요령 없는 긴 말로 긴 시간을 잡는 것보다 짧고 생명적인 것으로 정한 시간에 마치는 것이 효과적이다.109) 대표자는 공중 기도를 위해 기도로 준비해야 하며 기도의 요소에 들어갈 말들을 잘 정돈 하여 나와야 한다. 또한 대표성을 띤 기도이므로 성도들의 마음을 골고루 헤아릴 수 있는 기도도 되어야 한다.


⑩ 성경낭독


성경낭독은 설교를 위한 부수적인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낭독자체는 독자적 중요성을 지닌다. 성경낭독은 잘 훈련되지 않으면 기대할 만한 효과를 낼 수 없다. 성경낭독에는 세 가지 수준이 있다. 그것은 ① 성경을 틀리지 않게 읽는 것, ② 읽을 때 성경만 들여다보지 않고 가끔 회중을 바라보는 것, ③ 침착하면서도 자애스런 얼굴 가짐으로 회중을 많이 바라보면서 성경을 낭독하는 것이다. 우리가 셋째 수준에서 성경을 낭독하려면 그 성경 본문을 여러번 읽어 친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우리도 성경을 누가 낭독 하든지 간에 적합한 훈련을 받아 말씀을 의미롭게 낭독해 나가야 할 것이다.110)


⑪ 찬양 (Anthem)


Anthem 은 보통 성서로부터 온 말로 작곡된 성가이다. 이 성가는 성가대에 의하여 불리어지는데,“찬양의 응답”이나 기독교의 메시지를 노래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찬양은 예배의 목표를 지원하는 내용을 지닐 때 유효하다. 이 찬양을 듣는 회중은 그 성가의 음악에 심취하기 전에 그 성가의 가사가 주는 메시지에 먼저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회중은 성가가 울려 주는 복음과 진리 안에서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가대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 회중은 피동적으로 감상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 찬양에 참여하는 것이 요청된다. 따라서 성가대원에게 있어서 성가를 부르는 일은 자신의 신앙 간증이 되어야 한다.111) 성가대가 없는 작은 교회는 감사와 찬양의 의미가 포함된 찬송을 택하여 교인 전체가 제창하는 것이 좋다.112)


⑫ 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구속하시는 역사를 사람들에게 알려는 가장 활력 있는 방법이 설교이다. 진정한 설교에 있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설교자가 성서를 해석함을 통하여 그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10:17) 라고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주셨다. 그런고로 설교는 예배의 핵심과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한다.113) 만일 설교의 내용이 예배의 특수목표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잘못 계획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만일 예배가 한 시간 동안 드리도록 되어 있다면, 설교하는 시간은 약 25 분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114)


⑬ 신앙고백


사도 신경은 예배 순서에 있어서 성서 낭독 후 또는 설교 후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 대한 교회의 신앙고백을 회중 전체가 암송하는 것은, 심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적합한 일이라고 본다. 회중 전체에 의하여 암송되는 것은 회중에게 신앙의 귀중한 전통을 생각하게 하고 신앙과 성서의 교리 체계를 자각시킴과 동시에 불신자에게 신앙을 증거하는 계기도 됨으로 유익하다. 대개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개회 때, 즉 설교 전에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순서를 가지는데, 김소영은 예배학적인 면에서 성서 낭독과 설교 후에 그 전해진 말씀을 근거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한다.115)

박은규는 신앙고백을 드릴 때에는 모든 회중이 다 일어서는 것이 좋을 것116) 이라고 말하고 있다.


⑭ 헌금


헌금은 감사와 헌신의 표로서 예배에 있어서 교회의 한 요소인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집사가 헌금을 관리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되었다. 예배의 순서로는 설교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의 계시에의 응답으로 행하여짐이 가장 적당한 줄 안다.117) 헌금은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가지며 헌금도중 은은한 반주가 계속된다.118)

현재 한국교회에서 행해지는 헌금방법에는 헌금바구니를 통한 드림과 헌금함을 통한 드림 두 가지가 행해지고 있다. 두 가지 방법은 나름대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개교회의 사정에 따라 선택함이 좋을 듯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진정하게 드리는 의미를 가질 수 있고 헌금액수가 후자 에 비해 많다는 통계를 가지고 있다.119)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예배순서 상에 있어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잘 정착될 시에는 헌금액수도 결코 전자보다 적지 않다는 통계를 볼 수 있다.

만일 헌금바구니를 통한 헌금을 할 시에 헌금위원은 함께 모여 서 있다가 헌금을 받으러 나아갈 때와 들어올 때 보조를 맞추며 경건한 태도를 가진다. 헌금을 받는 법도 사전에 연습하여 혼동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르간이나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헌신의 뜻과 부합되는 것을 택한다. 헌금 순서가 끝난 다음 목사의 기도와 폐회 노래와 축도가 따른다.120)


⑮ 주의 만찬


설교와 같이 예배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은 예전이다. 예전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교회에 많은 문제들을 제기했었다. 예전은 하나님의 말씀 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묘사되었다. 그것은 신자의 마음속에 성령의 내적 행위를 확증시키는 외적인 표징인 것이다. 예전은 하나님의 말씀의 보이는 표정이기 때문에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기 못한다. 이 성례가 가치가 있다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말씀의 설교를 확실하게 할 때 만이다. 만일 이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면 그것들은 마술이나 미신이 되고 말 것이다.121) 예전 중에 하나인 성만찬을 함에 있어서 오늘날 한국교회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성만찬의 횟수와 성만찬의 재료문제가 될 수 있다. 먼저 횟수에 있어서는 교회마다 일률적이지 않으나 적어도 한달에 한번 정도하는 것이 적당할 듯 하며, 또한 빵과 포도주 대신 떡과 막걸리를 사용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인 듯하며, 특히 막걸리는 포도주와는 달러 향락적인 술의 이미지가 강함으로 충분한 검토가 있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세례에 있어서 수세냐. 침례냐 하는 것도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이냐를 요구하는 문제이기보다는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이므로 각 교파의 특성대로 사용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16  축도


복의 선언이라 일컫는 축도는 예배가 끝날 때 행하여지는 예배의 요소로서 이것은 두 가지 기능을 지닌다.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계를 향해 봉사하러 나가고자 하는 회중들을 파송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사가 회중에게 복을 선언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선언하는 말의 어미“...할지어다.”는 젊은이가 선언하는 경우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한국의 젊은 목사가“...늘 함께 할지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나이 드신 분들의 마음에 거리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Benediction은 복을 선언하는 일이지만, 한국적 상황에서는“소원하는” 형식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현재 한국의 개신교회는 대체로 축도”의 형식인 “축원합니다”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하면, 어떤 교단은“복의 선언”의 형식인 “...있을지어다” 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은 Benediction 혹은 Blessing은 축복기도가 아니라 기본적으로는“복의 선언”이라는 점이고, 따라서 이것이“복을 소원하는 형식”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선언의 의미는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서 볼 수 있고, 기원의 의미는 민수기 6장24-26절에서 볼 수 있다.122)


ⅲ. 설교를 통한 영성개발


① 설교의 기본적 이해


사전적 의미로서의 설교 (sermon, preaching)란 일반적으로 성서가 증언하는 복음의 진리를 현대교회에 산 진리로 증언하는 행위를 말한다.123) 신약성서에서 설교라는 말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말은 케루세언(κηρυσσειν) 이라는 말인데 “선포하다”혹은 “전달하다”로 번역된다. 이 말은‘사신 (messenger) 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권위 있는 메시지를 받아 전한다.’는 것을 뜻한다.124) 설교라는 또 다른 용어는 유앙켈리스타이 (ευαγγελισθαι) 니라는 말인데 번역하면“좋은 소식, 복된 소식을 전한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기쁜 뉴스로서의 메시지 즉 장차 다가올 무엇인가에 대한 좋은 성질의 소식을 가르킨다.125) 미국의 대 설교가인 블랙우드는 필립 브룩스의 말을 인용하여“설교는 인간에 의해서 인간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 전달”이라고 정의했다.126)

설교의 목적에 관하여,「블랙우드」는 설교는 신성한 진리를 효과적으로 제시하여 듣는 사람들의 양심과 의지를 그리스도께 향하도록 감동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하였다. 이어 설교의 목표는 가르치는 것, 기쁨을 주는 것, 설득시키는 것이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설득시키는 것으로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 라고 설명하였다.127)

그러므로 설교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강조가 있어야 한다.


② 영성의 원천으로서의 말씀


영성의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서 기독교인을 통전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으며 전인적으로 기독교인의 영성을 성장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가 통전적 영성의 유일한 원천이 되는 근거는 다음의 성경구절을 통해서 그 입지를 견고히 할 수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6~17).


이러한 본문에 근거해서 설교자가 설교와 가르침을 할 때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영성 강화 내용과 방법이 본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⑴ 진리를 가르침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가르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는 상대성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128) 이러한 진리는 바로 요한복음 8장32절에서 제시한 자유케하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 영성의 시작인 것이다.


⑵ 책망함

성경을 설교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성경은 우리가 잘못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말해주며,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날 때에 우리에게 말해준다. 즉 성경은 마치 선로위의 신호등과 같아서, 반짝이는 붉은 빛 또는 선로 앞에 내려지는 막대와 같은 일을 함으로서,129) 우리의 영성의 과정을 이끌어 주게 된다.


⑶ 교정함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우리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교정한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그걸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직접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말해주는 것이 좋은 것과도 같다.130)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교정의 역할을 함으로서 우리의 영성의 과정을 바로 잡아주게 된다.


⑷ 의(義)의 훈련

하나님의 말씀은 의로 훈련을 시킨다. 우리 모든 인간은 인간의 선한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말씀자체를 통해 알아야 한다.131)

그러므로 진리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교훈, 책망, 그리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통전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 할 때, 그러한 설교는 강한 영성 있는 설교가 될 것이다. 실제로 요한「웨슬리( John Wesley, 1703.6.17~1791.3.2)」는 여러 가지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자였으나 오로지 성서에 가장 큰 권위를 부여한 한 책의 사람이 됨으로써 l8세기의 부패한 영국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었던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③ 설교자와 영성


⑴ 성령의 도우심

설교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은 필수불가결하다. 성령의 조명과 역사하심을 벗어난 설교자란 있을 수 없다. 설교와 성령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령은 혼자 역사하시지 않고 설교자라는 방편을 취하신다. 3천명을 회개시킨 베드로의 설교도 성령에게 고용된 설교였기 때문에 위력이 있었다. 성령이 청중의 마음 문을 열고, 성령이 말씀을 듣게 하고, 성령이 말씀에 순종하게 하신다.132)

우리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히 볼 수 있지만, 신약의 대표적 말씀의 선포자였던 세례요한 을 통해서도 그가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133)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음이라”(누가복음 l:15~18).


이러한 세례 요한의 증거는 바리세인마저 회개시켰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역시 예수님을 예비하는 그러한 역할 밖에 아니라는 자신의 겸손을 스스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주님의 복음사역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누가복음 4장 18 절 이하에 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134)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누가복음4:18)”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의 준비부터 그 결과까지 성령께 맡기고 설교해야 한다. 「바클레이 (W. Barclay)」는 “설교자가 학자, 목회자, 행정가, 교회정치가, 위대한 웅변가, 또는 사회 개혁가가 될 수 있으나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면서 성령사역의 중요성을 말하였다.135)


⑵ 말씀중심의 설교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를 살펴보는 것은 다른 어떠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살펴보는 것보다도 현대의 설교자들에게 영성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참된 모델을 제시하리라 생각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사도들은 한 곳에 모여 기도를 했고, 그 기도 모임에서 교회는 탄생했다. 그리고 교회가 탄생한 후에 처음으로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한 설교의 요약을 대할 때 우리는 그가 첫째로 구약 성경을 본문으로 설교한 것을 보게 된다.136) 사도행전 2장 14~21절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는 요엘서를 인용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2장 22~33절은 시편 16편8~11절을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다시 한번 사도행전 2장 34~36절에서 시편 110편을 인용하였다.137) 무엇보다도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마음이 찔렸고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138)

몇 가지 예를 더 살펴볼 때에, 사도행전 4장 8~12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앞에 부름을 받은 장면이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했다. 그 당시 신약성경은 아직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구약성경으로부터 설교를 했다. 그가 사용한 본문은 시편 118편 22절이었다.139) 또한 바울과 바나바 역시 사도행전 13장 46~49절에서 구약성경 이사야 49장 6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능력 있는 설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⑶ 설교자의 삶과 영성

예배를 인도하며 나아가 예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하는 설교자는 그들의 기본자격과 아울러 그들의 삶이 그들 스스로를 영성있는 생활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란 구별된 삶의 요소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설교자가 되는 것이 결코 우발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직업의 선택으로 취급되어서도 안 된다.140) 이러한 구별된 삶을 살기위해서는 설교자는 매일의 삶 속에서 기도생활, 말씀생활, 폭넓은 독서, 찬양의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설교자가 깨닫고 지켜야 할 것은 설교자의 인격에 대한 문제이다. 인격의 신설성은 곧 외쳐야할 말씀의 사실적 증거라고 볼 때 더욱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A의 방법을 외친 설교자가 자신은 B의 방향을 걷고 있다면 그것은 설교의 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장 큰 자극제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141) 더불어 설교자가 영적 생활과 더불어 학문적 생활을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도 또한 설교자의 천체적인 영성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의 말대로 한 손에는 성서를 보며, 또 한 손에 는 신문을 들어야 하는 설교자의 폭넓은 시야는 통전적 영성을 위하여 꼭 필요로 되어지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ⅳ. 예배음악을 통한 영성 개발


교회 음악은‘아름다움’을 表現할 수 있는 음악이며, 교회 음악은‘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을 통해서 두 가지의 일을 할 수가 있다. 하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142) 그러므로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예배음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전형적인 예배의 영성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① 예배음악의 기본적 이해


예배음악의 여러 가지 개념을 정리해 보면 예배음악이란‘예배에 적합한 음악’이며, 한걸음 나아가 ‘예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연주되는 하나님의 노래’이며 또한 ‘하나님과 회중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적이며, 공간적인 울림에 의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동시에, 예배를 창조적으로 완성하는 것이다’143)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으로서의 예배음악이 인간에게 자극 될 때 인간의 정신생활에 조화와 질서를 가져오며 따라서, 예배자들은 마음에 평정을 찾고 심리적으로 만족을 얻게 되고 나아가서 예배의 최고 목표인 하나님과의 대화를 가능케 할 수 있도록 초자아를 승화시켜 준다.144)


그런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음악인 예배 음악은 그것이 어느 수준에서‘아름다움’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회중들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고, 회중들이 감동을 받아서 공감할 수 있도록 하며, 회중들이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할 수가 있다.145) 그러므로 잘 준비되어진 예배음악은 전인적인 인간의 형성이라는 음악의 성과를 포함하면서 예배의 완성을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


② 찬양과 예배의 조화


찬양은 공중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드릴 때, 심지어 구약 시대에도 음악을 많이 사용하였다. 성전의 비교적 빈틈없는 음악에서와 같이 모세의 초기 노래 (출애굽기 15)에서처럼 예배 시에 노래를 불렀고 자주 악기를 반주하였다. 이스라엘의 음악은 찬양, 감사, 교훈, 개인적 경험, 역사적 절기의 노래들이었다. 주전 1050년경에 다윗은 레위 사람들을 임명하여 제사 의식에 쓸 음악을 마련토록 하였다(역대상 16:4~7). 솔로몬 성전의 봉헌식에서 예배와 음악은 장엄하게 섞여 있었다.145)

비록 신약성서는 예배드릴 때의 음악에 관하여 크게 다루지 않고 있으나 유대의 시편 찬송가는 그리스도교회에 상속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짐작케 한다.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천사들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는 이 노래와 또한 찬양의 노래, 마리아의 송가, 사가랴의 송가, 시므온의 찬송을 기록하고 있다.146)

찬양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배하도록 한다. 시편은 예배의 시이지만 거기에서 가장 뛰어난 특징은 찬양이다.“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라는 것은 시편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울려 퍼지는 외침이다. 구약은 소와 양의 제물을 욕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제사장 직분을 받은 우리가“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베드로전서2:5).147) 찬양을 통하여 우리는 예배 행위에 우리의 감정을 전적으로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뇌로만 드리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가 아니다. 감정은 인격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예배에 사용되어야 한다.148)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예배에 있어서 찬양의 생명은 그 예배와의 조화에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있다. 그러나 예배에 있어서 찬양은 그 예배의 핵심과 리듬을 조화시켜서 거기에 생명력을 부여해야 된다. 예배의 핵심은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적인 사건이다. 그것을 생생하게 재현해 내는 주연이 아니라 보조역을 해야 하는 것이 찬양이다.149) 그러므로 그러한 보조역을 행해야하는 행위자로서의 사회자, 성가대, 그리고 회중 등이 예배음악에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 가와 그들을 통해 잘 준비된 찬양이 예배의 영성강화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⑴ 사회자

단위 시간 내의 예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회자는 예배 순서의 현실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모든 면에 관계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회자는 찬송의 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150) 찬양과 예배의 조화를 위해서 예배의 사회자는 적어도 교회음악을 알아야한다. 혼자 독창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전체 찬양을 리드해 갈 수 있는 예전전통의 주창자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가대의 특별찬양이 그 예배의 메시지와 초점이 맞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한다.151) 그렇지 않으면 그 날의 찬양에서 받은 감동은 설교 이후까지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또한, 사회자는 회중의 입장에서 찬송하는 동시에, 성가대와 같이 회중들이 잘 찬송하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152)


⑵ 성가대

예배가 이루어질 때의 예배음악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은 성가대와 유리될 수가 없다. 성가대는 예배 음악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필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153) 성가대의 기능을 예배 때 한번 특별찬양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154) 성가대는 단위시간 내의 예배에 포함 되어 있는 음악 전부에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존재이다. 어느 때는 회중의 입장에서 관계하는 존재이고, 어느 때는 성가대의 입장에서 관계하는 존재이며, 어느 때는 반주자의 입장에서 관계하는 존재이다. 찬송가는 회중으로 관계하면서 부르는 것이고 성가대용 합창곡은 성가대로 관계하면서 부르는 것이며, 송영곡은 성가대나 반주자로 관계하면서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성가대는 예배 음악의 직접적인 담당자라고 할 수 있으며, 예배 음악의 전부에 관계하게 되는 음악적인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155)

예배음악이 험난한 역사적 경로를 걸어왔지만, 성가대만은 예배 가운데서 아무런 변함없이 지속해 오는 독특한 기능을 유지하여 왔었다. 최초로 나타난 성가대는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성전 예배를 가졌을 때, 다윗이 성전에서 노래만을 하도록 사명을 주는 데서부터 그 기원을 잡을 수 있다. 성가대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래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가슴으로부터 우러나는 신앙의 표현으로써 노래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뜨거운 신앙을 소유해야 하며 그것을 위하여 영성생활을 지속해야 한다. 또한 노래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 전달을 위하여 정확한 발음과 함께 마음과 몸이 일체된 찬송을 불러야 한다. 찬양대의 지휘자는 언제나 설교자와 관계를 가지고 설교의 내용과 일치된 찬양을 찾아야 한다.156) 또 한 성가대는 예배하는 회중과 혼연일체가 되어 그 회중과 예배 전체를 이끌고 나가기위하여, 전체 순서에 나오는 회중의 찬양을 미리 연습할 필요가 있다.157)


⑶ 회중

회중은 예배에서 하나님과 만남의 관계를 가지는 예배의 주체이다. 회중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사회자, 성가대, 회중 등이 넓은 의미의 회중이라는 관점에서 예배 음악에 관계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회중 찬송은 회중들 전체가 능동적으로 예배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158) 회중들은 주로 찬양과 경배의 찬송을 부르게 되는데,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부여받은 자신의 특권적 삶에 감사하면서 경건된 자세로 찬송을 불러야 할 것이다. 이때에 부를 수 있는 찬송은 어떤 것이나 좋은 것은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경배와 찬양의 뜻이 담긴 찬송이어야 한다.159)


③오르간 전주와 악기


「쯔빙글리」의 예배 개혁은 현대 악기의 사용을 예배에 전면 금지하는 급진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구약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던 악기들은 예배 속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그 필요성이 「마르틴 루터」의 후기에 와셔 오히려 강조되어 버리고 말았다. 예배가 시작될 무렵의 오르간 전주는 예배의 시작을 기다리면서 그 공간을 메꾸는 정도가 아니라 엄격히 말해 이것은 예배의 가장 첫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장엄하면서도 경건한 음악 속에서 예배자들이 각자 마음을 정리하고 흠 없는 자세로 준비를 갖추는 뜻을 지닌 분위기로서 매우 중요하다.160)

악기와 관련하여 주의할 것은, 오늘날 대립되어 논란이 되고 있는 각 종 전자악기의 예배 시 사용에 대한 것이다. 물론 시편 150편에서는 모든 악기로 찬양하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중 집회적인 예배와 공예배를 구분하여 또 찬송가와 복음송가를 구분하여 예배에 사용하는 것은 많은 주의가 요구된다. 즉 복음송가와 전자악기는 대중집회용으로는 가능하되 공예배에서는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자를 이용한 세속음악이 범람하는 오늘날 이러한 악기들에 의한 교회 예배풍토의 영성 약화를 성도들은 사려 깊게 대처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ⅴ. 예배의 장애물 제거를 통한 영성개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최고의 의무인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외부의 적인 세상 그리고 내부의 적인 육신에게서 훼방을 받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된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모든 적들을 이겨냄으로서 최상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마음가짐고과 노력이 필요로 되어진다.


  ① 자아


   아마도 예배 가운데 자아가 침투해 들어온 대표적인 실례는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일 것이다 (레위기10:1~11). 아마도 자제력의 결핍을 암시하는 과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9절) 이 두 사람은 그 들이 직접 피운 불을 그들이 만든 향과 함께 그들의 향료에 담고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려 여호와 앞 금향단에 그것을 드렸다. 이 자아로 말미암은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즉각적인 심판으로 반응하셨다.“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아 앞에서 죽은 지라”(2절). 아론은 이에 불만을 표할 수 있었으나 곧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침묵했다.“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3절).161) 이러한 심판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관련하여 자기의 의지가 개입되어서는 않된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자기 의지는 예배에 있어서 단호히 거절되어야 한다. 아무리 교묘하게‘낯설은 불’과 향이 혼합되 있더라도 아무리 화려하게 외양이 꾸며졌더라도 자기 의지는“가까이 하는 자 중에 거룩하다 함을 얻으시고 온 백성 앞에 영광을 얻으셔야 할” 하나님에 의해 필경 거부될 운명에 처해 있다. 신자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겠노라고 굳게 결심하고 그대로 실행해 옮길 때 비로소 최선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자기 의지와 자기 표현은 하나님되심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만물의 으뜸이 되셔야 하는 그분께 예배드리는 일에 일절 개입될 수 없다.162)


② 세속성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그것이 사람이든 장소든 아니면 정신적인 추구 대상이든 간에 하나님이 제외되어 있는 세상의 모든 요소의 총합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속성의 형태가 생각이든 아니면 행동이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신자로 하여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일 세속성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생각과 태도 및 행동에 있어서 비세속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세속성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킬 수 있기 전에 먼저 절대자로서의 그분의 최고 위치를 거부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께로‘나아가야만’하는 것이다 (히브리서13:13).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그 모든 측면에 있어서 자신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자신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갈라디아서6:14). 그는 세상에 속한’ 것으로부터 구별되어 그리스도 편에 서서 이러한 성별을 굳게 지켜나가야만 한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는 구별과 고립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수도사는 수도원안에 고립돼 있으면서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께 구별돼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과의 일체의 접촉을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야고보서1:27). 신자의 성별의 정도는 그가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즉, 주 예수님께서 그의 이상을 채우고 그의 생각을 차지하고 그의 언행을 다스리고 그의 심령을 만족시키도록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는 정도만큼 신자는 비세속적이 되며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를 드리기에 적합한 상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163)


③ 판단하는 마음


신자의 마음속에 남의 허물을 찾아내는 태도를 키우는 것은 예배에 치명적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의 마음은 하나님 대신에 그의 동료 신자들로 가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제거하는데 열중한 나머지 그것이 자기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가 비쳐 진 결과임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모임 가운데서 단지 한 신자만 이러한 판단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어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을진데 모임을 이루는 모든 신자들이 그러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문제가 된다. 말할 필요조차 없이 그러한 환경 속에서는 아무런 예배도 드려 질 수 없게된다. 하나님의 말씀은“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라디아서5:15) 고 경고하고 있다.164)


④ 게으름


예배는 한가한 오후의 산보 마냥 안일한 분위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영적인 무감각과 나태함이 지배하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발전되는 것도 아니다. 예배의 열매는 게으른 자의 밭에서 자라나지 않고 부지런한 경작의 손길을 통해서 얻어지며, 이 일은 마음과 뜻을 굳게 다지는 예배 자세를 필요로 한다(잠언 24: 30~34).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부지런히 이삭을 주웠으며 그 결과 그에게는 남에게 줄 이삭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예배의 필수 요소인 성경 연구와 기도로 자신을 준비시키는데는 계획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되어진다. 현대 생활은 날로 분주해만 간다. 사업 및 가정적인 의무들은 신자에게 보다 많은 시간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곧 세속성이 거룩성을 밀어내버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나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로마서 13:11-12).165)


⑤ 조급함


여기서 말하는 조급함이란 신자가 하나님을 기다리는데 실패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는 조급함과 게으름의 두 극단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좋은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너회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시편32:9) 라는 말씀이다.

때때로 예배를 위한 모임 가운데에 입술로 감사를 표하기엔 심령이 너무 충만한 까닭에 침묵이 흐르는 경우가 있다. 거룩하고 감명 깊은 예배와 경모의 침묵이 성도들 위에 내려앉는다. 이러한 때 때로 어떤 조급한 형제가 부적합한 찬송을 택하여 부름으로써 이 값진 침묵을 깨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를 훼방 놓곤 한다. 예배는 높은 수준의 영적인 분별력을 요구하며, 따라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를 방해하지 않도록 주님 앞에서 이점에 있어서 연단을 받아야 한다.166)


⑥ 분파주의


분파주의의 성향은 적은 무리의 선자들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키고 그들을‘주의 부름받는 백성들’로 경건하게 일컬으며, 교리와 생활에 있어서 건전하고 신실한 다른 거듭난 경건한 신자들을 배타한다. 주의 백성들 사이의 이러한 구별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속해 있는 성령의 연합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것이요 예배의 장애물이 된다. 바울은 이러한 당파심을 키우는 잘못을 범한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서신을 쓰면서 이렇게 권면했다.“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여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린도전서10:16~17). 또한 고린도전서 서두에서도 말하기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린도전서1:9).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돼 있는‘교제’라는 용어를 어떤 성경의 교리들을 중시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적은 무리에게만 제한시키는 것은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다. 한편 조심할 것은, 슬프게도 겉으로는 분파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모임이 전혀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 모임보다 훨씬 분파적인 자세로 행동할 수도 있다.167)


⑦ 형식주의


실로 많은 곳에서‘공중 예배’를 위한 대 집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잘 준비되어 있으며 시계처럼 정확하게 묵도에서 축도까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된다. 더욱이 혼란스러운 것은 많은 경우에 이 예배 의식을 주관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적이 없으며 따라서‘허물과 죄로 죽은’상태라는 사실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배를 위한 신자들의 모임은 영성과 단순성과 동동성과 자유 및 자발성으로 특징지워졌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풍성한 예배와 풍성한 축복이였다.

형식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계획이 증진될 수 있다고 상상하며 인위적인 규정을 하나님의 규례를 대신하는 대체물로 도입하는 것은 육신의 파국적인 성향만을 적나라이 드러낼 뿐인 것이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통일성을 획일성으로 대체시키는 경향이 있다. 형식주의는 외적인 조화와 질서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기계적인 것으로, 규정된 예배 양식에 대한 철저하고 지속적인 준수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생명력있는 조화와 질서는 오직 성령께서 모인 성도들의 마음을 인도하도록 그분께 자리를 내어드릴 때 비로소 생겨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 하나님께 올라가는, 그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참 예배가 드려지게 된다.168)


 

Ⅴ.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본고를 통해서 예배를 통한 영성의 개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먼저 Ⅱ장을 통하여 예배 일반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얻을 수 있었고, Ⅲ장에서는 한국에 정착된 개신교 예배의 부정적 영향을 고찰을 통해 접근해 봄으로써 논지를 위한 이론적 기초작업을 준비하여 보았다. 본장의 논지를 담고 있는 Ⅳ장에서 우리는 준비된 예배의식과 예배순서, 설교, 예배음악, 그리고 예배의 장애물 제거가 영성 개발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생각해 보았다.

이상의 작업에서 알 수 있듯이 예배와 영성은 서로 다른 별개의 주제가 될 수 없으며, 서로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둘은 신학적 작업에 있어서 독립적일 뿐이지 실제로는 실천신학의 분야에서 서로가 필요충분조건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영성은 예배를 통하여 개발되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강화된 영성을 가진 개인과 공동체들이 관계하여 드리는 예배는 영성 있는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공중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것은 소수의 괴이한 행동이라고 묵인되고, 어느 경우에는 인류를 위한 봉사에 보다 더 유익하게 쓰여질 수 있는 시간과 자원들을 차지하는 사치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예배가 그리스도교의 전 실재의 맥락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교리에서 행동으로 옮아 갈 첫 과정이 바로 예배이다. 또한 예배란 어떤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와 연속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예배는 기독교의 영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인간적인 뜻만을 관철시키려는 예배를 드릴 때, 혹은 예배 자체가 어떤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는 이교적인 생각을 가지고서 예배를 드릴 때, 그러한 예배는 진정한 예배의 본질을 벗어난 예배가 됨으로서 어떠한 영성도 임재할 수 없는 예배가 되고 말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제언은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들 모두가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란 어떤 예배일까를 주관적인 판단아래 하나님 뜻인 양 해석하여 인간 주도적인 예배를 집례하지 말기를 바라며, 성결된 예배학적 작업의 기초위에 올바른 영성의 통전적 이해를 가지고 잘 준비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통전적 기독교의 영성을 실천하는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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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엄두섭, 「영성의 새벽」(서울 : 은성출판사, 1987), pp. 247-248.

2) 정장복, 「예배학 개론」 ( 서울 : 종로서적, 1985), p. 7.

3) Ibid., p. 8.

4) 정인찬 편, 「 성서 대백과 사전」 vol.5(서울 : 기독지혜사, l980), p. 872.


5) James F. White, New Forms of Worship(Nashille:Abindon Press, 1971 ), p 43 을 김성진, “한국 개신교 예배 갱신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교 신학대학원, l991, p. 6 에서 재인용.

6) 프랭클린 M. 지글러, 「예배학 원론」, 정진황 역 ( 서울 : 요단출판사, 1984), p26

7) 존 매쿼리, 「영성에의 길」 ( 서울 : 전망사, 1986), p. 26.

8) 유돈항, “기독교 예배갱신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 신학대학원, 1986, p. 8 에서 재인용.

9) 안영복, “참된 예배의 성격과 방법”, 월간고신 ( 부산 : 월간고신사, 1982. 8), pp. 60-61.

10) 김득룡 「현대교회 예배학 신강」,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88), p. 169.

11) 리차드 포스터,「영적훈련과 성장」, 권달천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1). p. 244.

12) 존 매쿼리, op. cit., p. 25.

13) 정장복, op. cit., p. 14.

14) F.M.지글러, op. cit., p. 78.

15) 김동수, 「예배학 개론」(서울: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67), p.15.

16) 리차드 포스터, op. cit., p. 242.

17) F.M.지글러, op. cit., p. 144.

18) 정장복, op. cit., p. 118.

19) 정용섭, 「교회 갱신의 신학」(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p. 87.

20) F.M.지글러, op. cit., p. 83.

21) 한스 큉, 「교회란 무엇언가」, 이홍근 역 ( 서울 : 분도출판사, 1992), p. 87.

22) 정장복, op. cit., p. 15.

23) 정용섭, op. cit., p. 6.

24) 정용섭, op. cit., p. 248.

25) 김기현, 「한국교회의 예배와 생활」 ( 서울 : 양서각, 1984), p. 61.

26)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p.57.

27) Ibid., p. 34.

28) 김기현, 「한국교회의 예배와 생활」 ( 서울 : 양서각, 1984), p. 66.

29) 문상희, 「종교란 무엇인가」 ( 왜관 : 분도출판사, 1982), p. 182.

30)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p. 16.

31) 유돈항, “기독교 예배갱신에 관한 연구” p. 57.

32)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p. 45.

33) 윤성범, 「우리주변의 종교」(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5), p. 87.

34) 이장식,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7), p. 45.

35) 김기현, 「한국교회의 예배와 생활」 ( 서울 : 양서각, 1984), p. 72.

36)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p. 92.

37) Ibid.

38) 김기현, 「한국교회의 예배와 생활」 ( 서울 : 양서각, 1984), p. 74.

39)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p. 93.

40) 정용섭, “그리스도교 예배와 신학” 「기독교사상사」, 1978년10월호, p. 129.

41)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 148.

42) 백낙준, 「한국개신교회사」(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 1979), pp. 64-67.

43)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서울:전망사, 1982), p. 37.

44) 정용섭, “그리스도교 예배와 신학” , p. 129.

45) Ibid., p. 130.

46)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 149.

47) Ibid., p. 199.

48) 주재용, “한국 초대교회 형세의 사회역사적 배경”, 「기독교사상」, 1985,  p. 152.

49)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p. 249.

50) 정용섭, “그리스도교 예배와 신학”, p. 130

51)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 470.

52) 주재용, “한국초대교회 형세의 사회역사적 배경”, p. 87.

53) 정용섭, “교회 갱신의 신학”, p. 268.

54) Ibid., p. 50.

55) 정용섭, “그리스도교 예배와 신학”, p. 129

56) 한완상 편,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1982), p. 144.

57) 정용섭, 「 교회갱신의 신학」, p. 227.

58) Ibid., p. 214.

59) 이장식, “예배와 성찬의식”, 「 기독교사상」, I979. 2월호, p. 65.

60) Ibid., p. 67.

61) 김성호, “예배의식의 토착화에로의 접근”, 「 기독교사상」, I979. 9월호, p. 70.

62) 한완상,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p. 20.

63) 김기현, 「한국교회 예배와 생활」 , p. 87.

64) 이장식,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7), p. 101.

65) 정용섭, 「 교회갱신의 신학」, p. 231.

66) 프랭클린 M. 지글러, 「예배학 원론」, 정진황 역 ( 서울 : 요단출판사, 1984), p73

67) 정용섭, 「 교회갱신의 신학」, p. 251.

68) 김원식, 「한국기독교 100년의 허와 실」, ( 서울 : 들소리, 1982), pp. 137-139.

69) 김기현, 「한국교회 예배와 생활」 , p. 86.

70) 장병일, 「신앙의 오식」 ,(서울:계명사, 1984).  p. 42.

71) 김기현, 「한국교회 예배와 생활」 , p. 104.

72) 한완상,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p. 21.

73) 김소영, 「예배와 생활」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4).  p. 53.

74) Ibid., p. 165

75) Ibid., pp. 164-165

76) 낼슨 타이어, 「영성과 현대 목회」 , 이윤복 역 (서울:성광문화사, 1992).  p. 77.

77) 김정우, “구약에 나타난 바른 목회적 영성”, 「목회와 신학」 ,1993년 4월호, (서울:두란노서원, 1993).  p. 67.

78) 존 매쿼리, op. cit., p. 35.

79) Ibid., p. 34.

80) 리차드 포스터. op. cit., p. 249.

81) 존 매쿼리, op. cit., p. 27.

82) 오성춘, 「광야의 식탁」 ,  (서울:홍익사, 1985).  p. 25.

83) 존 매쿼리, op. cit., p. 28.

84) 갈라디아서 5:16~6:10

85) 존 매쿼리, op. cit., p. 29.

85) Ibid., p. 39.

86) Ibid., p. 30.

87) 리차드 포스터. op. cit., p. 245

88)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추상적이거나 혹은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임재해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89) 리차드 포스터. op. cit., p. 241.

90) Ibid., p. 244.

91) Ibid., p. 246.

92) Ibid., p. 253.

93) Ibid., p. 255.

94) Ibid., p. 257.

95) 은준관, “목사론” 제 4 회 연신원 목회자 세미나 강의집 ( 서울 : 연세대출판부, 1985), pp.214-215. 이러한 전통적안 제사장의 직능에 대하여 폰 라드는 제사장의 교육 행위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신명기23:10에 제사장의 교훈이 등장한다. 폰 라드는 제사장의 기본적인 기능을 교육과 제사의 양면에서 찾고 있다.

96) 프랭클린 M. 지글러, op. cit.,  p 229.

97) 은준관 op. cit., p. 218.

98) 김소영, 「예배와 생활」 , pp. 61-62.

99)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0).  p. 302.

100) Ibid., p. 306.

101) 김소영, 「예배와 생활」 , pp. 72-75.

102)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 p. 308.

103) Ibid., p. 309.

104) 김소영, 「예배와 생활」 , p. 72.

105)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 p. 309.

106) Ibid., p. 310.

107) Ibid., p. 311.

108) 김소영, 「예배와 생활」 , p. 79.

109) 김폴린, 「예배법」 , (서울:보이스사, 1987).  pp. 47-48.

110)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 pp. 312-313.

111) Ibid., p. 312.

112) 김폴린, 「예배법」 , p. 41.

113) 김소영, 「예배와 생활」 , p. 81.

114)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 p. 315.

115) 김소영, 「예배와 생활」 , pp. 80-81.

116)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 p. 311.

117) 김소영, 「예배와 생활」 , p. 90.

118) 김폴린, 「예배법」 , p. 55.

119) 이 통계는 필자가 약 10여 교회를 조사한 설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

120) 김폴린, 「예배법」 , p. 55.

121) 김소영, 「예배와 생활」 , p. 95.

122)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 pp. 320-321.

123) 「기독교대사전」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1).  p. 506.

124) H.C.Browen, H.Gordon, and Jesse J. Northcutt, 「설교방법론」, 이정희 역. (서울 : 요단출판사, l984), pp. 18-19. 를 김기환, “설교 갱신을 위한 설교자의 자세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부천 :서울신학대학신학대학원, 1992), p. 5 에서 재인용.

125) Ibid., p. 6.

126) 앤드류. W. 블랙우드,「설교준비법」, 양승달 역 ( 서울 : 성암사, 1981), p. 11.

127) Ibid., p. 33.

128) 폴 시다. 「크리스챤의 영성개발(상권)」, 횃불성경연구소 옮김 ( 서울 : 횃불성경연구소, 1993), p. 251.

129) Ibid., pp. 257-259.

130) Ibid., p. 263.

131) Ibid., p. 267.

132) 곽선희, “성령과 설교”, 「교회성장」 제3집 (서울: 영선출판사, 1983), pp.l9-20.

133) D.M. 로이드 존즈,. 「목사와 설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p. 336.

134) Ibid., p. 337.

135) 김기환 “설교 갱선을 위한 설교자의 자세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 부천 : 서울신학대학 신한대학원 1992). p.5 에서 재인용

136) 폴 시다. op. cit., p. 201.

137) Ibod., pp. 203-205.

138) 사도행전 2:37

139) 폴 시다. op. cit., pp. 207-209.

140) 정장복. op. cit., p. 224.

141) Ibid., pp. 224-225.

142) 이택희,  「에배 음악의 이해」  (서울: 기독교음악사, 1986), p. 134.

143) Ibid., p. 177.

144) 정정숙,  「교회 음악행정의 이론과 실제」  (부천: 서울신학대학 출판부, 1988), p. 40.

146) 이택희. op. cit., p. 170.

145) F.M. 지글러. op. cit., p. 113.

146) Ibid., p. 114.

147) 리차드 포스터. op. cit., p.255.

148) Ibid., p. 256.

149) 박근원, “그리스도교 예배와 찬양”, 기독교사상 1993년10월호.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3). p. 195.

150) 이택희. op. cit., p. 178.

151) 박근원. op. cit., pp. 195-196.

152) 이택희. op. cit., p. 179.

153) Ibid., p. 180.

154) 박근원. op. cit., p. 196.

155) 이택희. op. cit., pp. 180-181.

156) 정장복. op. cit., pp. 135-137.

157) 박근원. op. cit., p. 196.

158) 이택희. op. cit., pp. 181-182.

159) 정장복. op. cit., pp. 124-125.

160) Ibid., p. 120.

161) 알프레드 깊스. 「예배」. 정병은 옮김 (서울:전도출판사, 1991). pp. 207-208.

162) Ibid., p. 208.

163) Ibid., pp. 208-211.

164) Ibid., pp. 211-212.

165) Ibid., pp. 213-215.

166) Ibid., pp. 215-217.

167) Ibid., pp. 218-219.

168) Ibid., pp. 220-221.